삽 / 강돈묵

 

 

 

아파트가 아닌 주택에는 어느 집이든 으레 연장을 모아두는 곳이 있다. 잿간 구석이나 헛간의 자투리 공간이나 이곳에서는 한두 개 이상의 연장들이 휴식을 즐긴다. 허름한 문짝을 비집고 보면 제자리를 잡고 온순히 쉬는 놈이 대부분이다. 더러는 제멋대로 서고 눕고 기대어서 잠이 든 난장판도 보인다. 하지만 항상 문설주 옆에 꼿꼿이 기대서서 출전을 기다리고 있는 것은 삽이다. 그중에는 부러진 자루를 다시 박아 키가 작은 것도 있다. 이것들은 문에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가 주인의 요구가 떨어지기가 무섭게 달려온다. 괭이나 호미가 나설까 봐 마음 졸인 듯이 주인 앞으로 다가선다. 삽은 다른 연장들의 노고를 보면 안타까운가 보다. 언제나 다른 것들의 할 일을 도맡으려 한다.

삽들은 화목하고 즐겁다. 언제나 훤한 얼굴을 잃지 않는다. 다른 연장들은 세상살이가 힘겨운지 우거지상인데, 삽들은 너그럽고 환한 웃음까지 간직하고 있다. 어지간한 일은 웃으면서 마무리한다. 다른 연장들의 일을 빼앗는 것은 일 욕심에서도 아니다. 주위의 것들이 힘들까 저허되어 노심초사다. 그만큼 자신의 능력도 안다. 나무를 심기 위해 구덩이를 파겠다며 호미가 나서면 이내 밀쳐 버린다. 커다란 돌덩이를 뽑아내는 일은 괭이가 수월하겠지만 제 사내나 챙기듯 밀어내고 자리를 차지한다. 아무리 괭이가 튼튼해 보이고 힘이 있어도 막무가내다.

삽이 여러 개이고, 자루의 길이가 짧은 것이 있는 이유를 알 것 같다. 언제나 휴식을 취해도 맨 앞에 버티고 섰고, 허리를 다쳤어도 식구들을 챙기려는 마음이 앞서 눕지 않고 털고 일어서는 그의 보호 본능이 아리게 가슴 깊이 와 닿는다.

면에 근무하며 시골 마을에 들어와 보금자리를 꾸리신 아버지의 타향살이는 그리 만만하지 않았다. 더구나 마을 전체가 한 씨족의 집성촌이다 보니 적응하기가 힘들었다. 울타리 가에 과실수 하나 맘대로 심지 못하셨다. 매사에 트집이었다. 마루 끝에 앉아 새 한 마리를 바라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거기다 눈 덮인 고갯길에서 만난 교통사고는 집안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얼먹은 몸은 비록 젊었지만, 심신이 피폐하여 견디기가 힘들었다. 도와줄 사람이 하나 없었다. 위 조상대에서 내려오며 네 번이나 손이 귀하여 대가 끊기고, 양자를 들여 대를 이어온 집안이다 보니, 가까운 친척도 없었다. 직을 내려놓고 병치레를 위해 집으로 들어온 아버지는 경제를 책임질 수 없게 되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가지고 있던 전답이 제법 되어 가정을 꾸릴 수 있었다.

아버지의 집으로의 귀환은 어머니의 끝이 보이지 않는 절망의 시작이었다. 집안의 모든 일을 떠안은 어머니는 그래도 커가는 자식들의 모습에 힘이 솟았다. 두세 살 터울인 자식들이 재주는 있어 학교에서 상장을 들고 왔다. 아무리 몸이 고되어도 어머니는 그 자식들의 크는 모습을 놓치고 싶지 않았다. 한 달에 두 번씩 산막의 절에 가서 치성을 올리셨다. 또 우물과 장독대에 떡시루를 올리며 비손하였다. 그때마다 손이 귀하다고 여긴 할아버지 할머니는 며느리에게 자식의 번성을 위한 치성을 요구하셨다. 그 덕인지 부모님은 자식을 열하나를 두셨다. 세 딸 외에는 모두 아들이었으니, 집안 어른들은 어머니의 가문을 일으킨 공을 으뜸으로 여기셨다.

부엌에서 들리는 소리에 눈을 뜨면서 동생들을 깨워 등교 준비를 한다. 위의 형제들은 공부하러 도회지로 나갔고, 집에는 병치레로 누워 계신 아버지와 일에 치어 고생하시는 어머니, 그리고 밑으로 넷이나 되는 동생이 있었다. 등교 준비가 채 마무리되지 않았는데 어머니는 아침상을 들고 들어오신다. 더러는 나를 깨워서 도움을 청하실 만도 한데 전혀 그런 날이 없었다. 하교하여 집에 와도 어머니가 집에 계신 날은 없었다. 집 뒤 밭으로 가서 어머니를 부르면 보리밭 골에서나 콩밭에서 ‘왔니?’ 하며 일어나셨다. 온종일 풀과 싸우셨을 어머니는 내가 호미를 들고 달려들면 ‘들어가 숙제해라’고 한 마디 던지시곤 바로 앉으셨다. 긴 골의 반도 못 갔는데 어머니는 벌써 되짚어서 오고 계셨다. 나는 허리가 끊어지는 통증으로 여섯 번이나 섰다 앉기를 반복했는데 어머니는 한 번도 보리 위로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셨다.

중학교 입시를 준비하던 봄, 아버지는 우리 곁을 떠나셨다. 집안에는 어머니의 한숨과 눈물이 언제나 축축이 내려앉아 있을 때 나는 가장이 되었다. 하교하여 동네를 한 바퀴 돌며 하루에 서른 명이나 되는 품을 사고, 관리하는 일을 내가 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그때마다 어머니는 당신이 하시겠다며 나를 방으로 밀어 넣으려 하셨다.

그 많은 자식을 키우면서 어머니는 단 한 번도 당신의 건강은 챙기지 않으셨다. 자식들이 손에 연장을 들고 밭으로 나오기 전에 일을 마치려 하셨고, 건강이 좋지 못해 누워 있다가 나오는 아버지에게 연장을 잡도록 두지 않았다. 해가 지도록 밭에서 일한 어머니는 저녁이면 욱신거리는 허리를 어쩌지 못하고 몸을 뒤척였다. 어떤 날은 아픔을 이기지 못하고 몸져눕기도 하였다. 등잔불 아래서 숙제하던 나는 어머니의 신음에 정신을 놓고 멍청히 바라만 본 적도 있다.

부러진 자루를 박은 키 작은 삽을 바라보며 어머니를 추억한다. 정이 가지 않는 연장이 어디 있으랴만 유독 삽을 지켜보면 마음이 애잔하다. 혼자서 병든 남편과 여러 자식을 건사하느라 힘드셨을 어머니. 지금 내 곁에 계신다면 쇠자루 삽처럼 튼튼한 허리로 편히 쉬시도록 하고 싶다. 감염병 팬데믹 핑계만 하며, 지난 구정 이후 유택을 찾지 못한 자신이 밉다. 자루가 자꾸 짧아지는 삽을 이제는 놓아 주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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