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서리의 변명 / 남태희
내질러지지 않는 소리를 삼킨다. 너무 아프면 비명조차 나오지 않는다. 그저 주저앉아 부딪힌 이마를 문지르며 오금을 옴찔옴찔 비틀어 본다. “어우야!” 한참이 지난 뒤에야 소리가 터져 나온다. 거울을 보니 책상 모서리에 찍힌 이마에 벌겋다 못해 검푸른 자국이 선명하게 올라왔다. 푸른 멍이 일주일은 족히 갈 것 같다. 다시 신음이 나온다.
사무실 책상과 책상 사이에 떨어진 볼펜 한 자루를 줍다가 모서리에 이마를 옹골차게 부딪쳤다. 여덟 평이나 될까 한 사무실에 싱크대며 냉장고, 책꽂이에 책상 두 개, 둥근 테이블까지 들어차 있어 조금만 몸을 과하게 움직이면 뭔가 떨어뜨리거나 어딘가에 부딪힌다. 조심성을 잃는 순간 사고가 터지는 법이다. 물건에게나 사람에게나 그 이치는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들은 둥글둥글 둥근 것을 좋아한다. 깎이고 다듬어져 조약돌 같은 마음을 갖도록 하자 한다. 모난 것들이 둥글어지는 데까지 제 살을 저미는 고통이 어떤지를 알기에 경외감을 갖고 찬사를 보낸다. 몽돌을 보며 조약돌을 보며 부대낌 속에 제 것을 떼어내며 사회의 일원으로 자리매김하는 모습이 보여서일까. 둥글어진 그들은 적어도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다. 몽돌마다 갖가지 무늬들이 새겨지듯 안으로 감내의 고통이 자리해도 동그래진 가장자리로 꽉 맞닿지 않아 바람의 길이 새겨진다. 미움의 바람, 시기의 바람, 질투의 바람, 애증의 바람은 마음의 길이 있는 곳에 머문다. 밤새 자그락거리는 몽돌의 얘기가 끊임없이 소소하게 들려온다.
처음 만나면 뭔가 불편한 사람이 있다. 약간의 굳은 표정과 깍듯한 인사, 반듯한 자세에 가까이하기 힘들어 보이고 분명한 말투로 기가 질리게도 한다. 진실을 곧이곧대로 말하여 분위기를 썰렁하게 하고 농담을 진담으로 받아들여 얼굴을 붉히기도 한다. 완벽한 사람이라 지적할 거리는 찾지 못하지만 함께하는 사람은 가끔 상처투성이가 되곤 한다. 정작 본인은 개의치 않거나 상대가 상처받은 이유를 알지 못할 때가 많다. 무심하고도 당당해 보이는 모습은 책상 모서리처럼 견고하다. 철제 책상보다 단단해 사무적으로 다가온다.
모서리는 무언으로 항변할지 모른다. 평생을 교과서처럼 반듯하게 제자리를 묵묵히 지켰을 뿐이다. 마음대로 자리를 이동한 적도 없고 흐트러진 자세로 불량스레 누군가를 대한 적도 없다. 울퉁불퉁한 면으로 짐 하나 얹지 못하는 꼴도 아니요, 가로로 새로로 포개라면 포개고 받침 되라면 받침이 되어 등골이 휘도록 누군가의 바탕이 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사각의 사무실에 맞춤이 되기도 했고 컴퓨터와 프린터, 팩스기와 전화기, 파일이 꽂힌 책꽂이까지 얹었는데 남들은 그럴싸하게 폼만 잡고 있는 줄로 착각한다. 네 개의 모서리를 가진 책상과 테이블, 냉장고, 책꽂이, 장식장, 싱크대, 전자레인지 위에 무언가가 놓여 있지 않은 것은 하나도 없었다. 그런대도 사람들은 자신이 부딪히고서는 모서리를 원망한다. 모서리를 가진 물건들은 나름의 직심과 선심을 갖고 있음을 사람들은 미처 생각하지 못한다.
모서리를 닮은 사람도 마찬가지다. 매사 자신의 일에 최선을 다할 뿐 불평불만을 쉽게 뱉지 않는다. 퇴근시간이 지나도 할 일을 마쳐야 간다. 잡무에 시달려도 자신의 능력을 믿어 맡긴 것이라 여기며 더욱 힘을 낸다. 친밀 혹은 친교라는 명목으로 동돌 구르듯 자그락대며 남의 이야기로 시간을 허투루 쓰는 것도 아니다. 흔들리지 않는 자세로 자신을 지키며 묵묵할 뿐이다.
만날 때마다 듣는 고만고만한 얘기들에 지쳐 헤픈 웃음을 좀 덜 보였다. 동의하지 못하는 말에 맞장구쳐 줄 기분이 아니라 잠깐 웃음 비슷한 것을 흘렸다. 근거 없는 이분법적 논리로 함부로 말하는 사람에게 바빠서 좀 일찍 일어난다는 말을 남기고 자리를 비켰다. 그것마저 모두 나름의 배려라고 생각했다.
그런데도 사람들이 불편하게 여긴 이유는 무엇일까. 자신과 비슷한 생활양식, 같은 생각과 의식을 가졌을 거란 대책 없는 믿음에 배신감을 느낀 탓일까. 별생각 없이 툭툭 던진 언행에 의아한 눈빛과 난감한 몸짓을 읽었을 때 정신이 번쩍 들도록 당혹스럽다. 침묵한 채 조용히 바라보는 눈길만으로 지레 제압당하고 마는 것이다. 뭔가 잘못되었구나, 내 생각과 다르구나, 동의하지 않는구나, 급히 다가갔구나 하는 속말들이 화산처럼 터지면서 마음은 불에 덴 듯 아린다.
소통이란 적당한 거리를 두는 게 진정한 소통이다. 아무리 가깝더라도 내 마음 같을 수는 없는 법이다. 비슷한 성향의 사람은 이미 적당한 숨구멍을 갖고 있다. 부딪치고 깨어지는 과정을 반복하여 다듬어진 사람들은 대하기 쉽다. 보이지 않는 적당한 거리를 두고 예의를 갖추는 사람에게 상처받을 일은 드물지 않은가. 상대의 아킬레스건은 건드리지 않는 배려, 주기적으로 적당한 만남 횟수, 공통 화제와 취미는 인간관계를 풍부하게 한다. 반면 예고도 없이 급작스레 친밀한 언어를 내뱉는다거나 상대의 형편을 잘 모르고 다가서는 순간, 상대는 경고음을 울리며 후진기어를 넣게 된다.
애초 모서리에게는 잘못이 없다. 모서리가 달려와 부딪친 게 아니라 당신이 급히 달려가 부딪쳤다. 모서리를 부딪히지 않으려면 시간을 갖고 천천히 거리를 좀 두면 그만이다. 경계심이 무너지는 순간, 둥근 돌로 돌담을 쌓으려면 틈새를 메우기 위한 흙이나 사잇돌이 필요하지만 모서리들은 다르다. 네모난 돌로 성을 쌓으면 맞춤한 아귀로 틈새를 메우는 양이 적게 든다. 모서리의 진심을 읽는다면 가까워지는 데 걸리는 시간쯤은 아무것도 아니다. 모서리가 있어 빈틈이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이제 모서리에게 ‘모서리다움’을 주자 더 이상 둥글어지기를 바라지 말자. 세상에는 등근 돌의 쓰임새, 네모난 돌의 쓰임새가 분명 존재한다. 어느 쪽이 더 낫다고 말할 수 없다. 네모난 돌로 세월 속에 둥글어지기도 하고 둥근 돌도 깨어져 뾰족한 무기가 될 수 있다. 세상에 존재하는 모서리들의 성벽처럼 굳건한 의지와 인내, 무엇이든 받쳐내는 너른 품, 차곡차곡 쌓이는 인정을 함부로 말하지 말자.
모서리도 부딪히면 아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