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 음성에서 태어남.
청주사범 졸업,
청주대학교 행정대학원 졸업
충북음성군내 초등교사 17년 역임.
과수원 경영.
▶ 주요경력
[한국수필] 수필천료(81)
[현대문학] 수필천료(86)
수필문우회 회원. 가톨릭문우회원
한국수필가협회, 한국문인협회, 국제펜클럽 한국본부 회원
음성문인협회 회장역임, 음성예총 회장역임
▶ 저서 및 대표작품
수필집: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교음사 1986년, <그대 피어나라 하시기에> 외길사 1990년,
<가슴으로 오는 소리> 고려원 1995년
때때로 길은 아름답고, 천년 숲, 사과나무, 이쁘지도 않은 것이
▶ 수상경력
현대수필문학상(91), 한국자유문학상 신인상(92), 충북문학상 수상
음성군민대상 수상, 충북도민대상(문학부문)수상
동포문학상(2004.3.20), 월간문학 제1회 동리상수상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 반숙자
1. 5월이 오면
해마다 봄이 오면 친정 집 뒤뜰에 붓끝 모양의 푸른 잎이 무더기 무더기 돋는다. 아버지는 생전에 이 꽃을 유난히 사랑하고 상사화(想思花)란 세칭을 피하여 당신만은 모사화(母思花)라 이르셨다.
해토(解土)가 되기 무섭게 지표를 뚫고 용감한 기세로 돋아나는 모사화 잎은 오직 잎만 피우기 위한 듯 무성하게 자란다. 그리고 어느 날 무더위가 시작 될 즈음 초록빛 융성한 잎은 모두 죽어 거름이 되고 거기 죽음 같은 꽃 잎을 물고 연보라 빛이 피어난다.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 또한 잎을 보지 못해 모사화라 이름 지으신 친정 아버지의 속 깊은 불망(不望)의 회한을 이제사 짐작하는 내게 역시 꽃은 아픔으로 피어나고 있다. 어쩌면 꽃잎은 못다한 불효의 한을 저렇듯 슬프게 피워내고 있는 것이리라.
지난 3월, 우리는 시부모님들의 칠순을 겸한 결혼 58주년 기념회를 조촐하게 마련 했다. 한사코 마다시는 것을 부족하나마 보은(報恩)의 뜻으로 받으시라는 간청에 못 이겨 마지못해 허락을 주셨다. 낳아주시고 길러 주시고 이렇게 가르쳐 주신 은공을 단 하루의 바침으로 어찌 보은이 될까마는 작은 정성이나마 살아 생전에 기쁨을 드리고 싶어서 였다.
홍안의 새신랑 새 각시가 되어 두 분 얼싸안고 더덩실 흥겨워 하시는 모습을 바라 뵈오며 나는 자꾸 서리오기 전날의 풀잎을 생각하고 눈시울을 적셨다. 나날이 굽어가는 허리며 깊어지는 주름을 대하면 왜 이렇게 안타깝고 초조해지는지 무심한 세월이 야속스럽다.
친정 부모님이 생전에 계셨을 때는 철없이 시부모님께 향한 마음은 법도에 얽매인 의무에 불과 했다. 애틋한 마음의 정은 마음껏 뫼시지 못하는 친정 부모 곁에 서성였다. 그러다가 두분 모두 떠나시고 내 아이들이 웅기중기 커가니 그제서야 그분들을 닮은 소중한 남편과 아이들을 내게 주신 시부모님이 진한 핏줄의 연대감으로 부각 돼 오기 시작했다.
이런 부실한 며느리를 끔찍이 아끼고 사랑해 주시는 것을 뒤늦게 깨닫게 되자 이미 부모님은 칠순의 고개를 힘겹게 넘고 계신 것이다. 이제 내 가슴에도 그 아픈 ‘모사화’가 피어나는 것일까. 아침마다 조심스레 큰 방문을 열고 용안을 바라 뵈오며 지난 밤을 평안히 보내심과 오늘 하루 우리 곁에 계심을 말없는 가운데 감사하며 안도 한다.
나는 요즘 어머님이라는 칭호를 엄마로 바꾸었다.이제까지의 어렵고 조심스러운 며느리의 자리에서 당신의 딸로 머물고 싶어서다. 두분 아니 계시면 이 세상 어디서 어머니, 아버지 부드럽고 다감한 부름을 불러 볼 수 있겠는가.
평생을 통하여 자식들에게 베풀기만 하셨으니 이제 남은 여생, 몸과 마음이 편하시도록 받들어 모실 일만 남았다. 남은 날들을 더욱 많이 축복해 주시기를 기원하며 모사화를 바라본다. (유한 양행 ‘건강의 벗’ 84. 5월 호)
2. 가슴으로 오는 소리
반 숙 자
음향이 모두 떠난 간 후 내 가슴에는 항상 바닷속 같은 적막이 고여 있다.
하늘하늘 풀잎이 흔들리면 바람이 거기 있는 줄 알고,미루나무 꼭대기 까치의 꽁지깃이 나풀거리면 그제 사 환청(幻聽) 같은 ‘깍깍’ 울음소리가 가슴에 와 닿는다.
언제인가 내게도 똑딱거리는 시계의 초침 소리가 있었다. 절묘한 슈만의 트로이메라이, 고운 바이얼린의 섬세한 음절도 있었다. 41도 장티프스의 고열이 나를 온통 삼켜버렸을 때 나의 귀는 40데시벨의 청력을 잃고 있었다. 현대의학의 혜택으로 다행히도 생명은 건졌지만 내게 오는 모든 소리를 되돌려 주어야 했다.
그 후 20여년이 흐르는 동안에 청력은 뭉텅뭉텅 잘려 나갔다. 답답했다. 상대편의 입 모양으로 대충은 알아 듣지만 처음 만나는 사람의 이야기나 전화는 더욱 못 들었다. 또 이상스러운 것은 고음 상실증이었다.
아이들 목소리, 금속성, 여자들의 가늘고 높은 소리는 감감하고 귓전은 늘 찬바람이 지나간 것처럼 허허했다. 그래서 나는 무조건 사람을 피하는 버릇이 생겼다. 소외된 인간의 처절한 고독을 씹으며 본의 아닌 자폐증 환자가 되어갈 즈음이다. 고열로 스트래터마이신을 먹은 게 부작용으로 청신경이 마비되어 재생불능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청력을 되찾으려고 전국의 유명하다는 이비인후과를 찾아 다니던 일요일의 방황도 절망이었다.
겁먹은 아이처럼 눈은 커지고 귀가 못 듣는 대신 눈의 직관력이 상당히 발달해 갔다. 응시하는 눈빛이 지글지글 타올랐다. 방안에 누워 있어도 빗소리가 귀로 들리는 것이 아니라 후둑후둑 가슴으로 묻어 왔다. 그 무렵포장도 되지 않고 인도와 차도의 구별도 되지 않은 시골 신작로에서 곧잘 수모를 당했다. 소심증에 매어 조심스럽게 길을 걷노라면 “썅 저리비켜, 머저리 여편네야” 소리없이 미끄러져와 옆에 선 운전기사의 쇳띠빠진 목소리가 등덜미를 잡는다. 분명 좌측통행을 했으면서도 미안하고 부끄러워 쩔쩔 매었다.
교직에 있을 때 강습장에서의 일이다. 왕왕거리는 질 나쁜 확성기는 뇌신경을 무차별 사격해 왔다. 보청기의 보륨을 높여도 레시버를 아무리 바로 잡아도 강의는 소음 속으로 빠져나갔다. 그때 갑자기 강단 위의 강사가 총을 겨누듯 내게로 손가락질을 했다. “당신 뭐요? 지금 무슨 시간인데 그 따위 장난을 하고 있소? 라디오 이리 갖고 오시오”
수강생 300명, 600개의 시선이 내게로 집중된 순간 나는 소돔과 고모라의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처럼 뻣뻣이 얼어 붙었다. 그러나 잠시 후 나는 웃었다. 멋쩍고 미안하고 부끄러운 그 애매한 귀머거리의 미소를 지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나는 속으로 ”내 탓이 아닙니다. 누구의 탓도 아닙니다. 제발 비오니 질시만은 마십시오” 애원을 했다. 그 분들께 영혼의 귀가 뚫려 있다면 이 처절한 절규가 들렸으리라.
그날 밤 나는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 했다. 나는 지금까지 모든 음향이 차단된 참으로 답답한 상태에서도 생(生)을 부인하지 않았다. 절벽같이 완전히 차단된 세계, 참담한 자아투쟁에서 눈 떴을 때 모두가 나를 외면하고 돌아선 썰물자리에 오도카니 혼자 섰을 때도 생의 이켠에서 나의 원고지 위에 내일을 촘촘히 짜고 있었다. 방문을 안에서 잠가버린 깊은 밤, 나는 흰 종이에 사직서 두 통을 썼다. 하나는 직장에 대한 사직서요, 또 하나는 부끄러운 내 인생에 대한 사직서였다.
내게 오는 수모, 질시, 나 스스로 느끼는 불편은 모두 참아 낼 수 있다고 생각 했는데 한계를 느꼈다. 내게는 아름다운 영혼이 있다는 그 재산만으로 나는 살 충분한 이유가 있다고 자부 해 왔으나 가족에게, 이웃에게, 나아가서는 사회에 짐이 돼 있다는 사실이 더 견딜 수 없게 했다. 어디고 쓸모 없는 잉여인간, 멍청한 귀머거리, 나는 그때 슬픔을 어둠에 타 마시고 밤새도록 피아노를 두드렸다. 축제였다. 내 생명의 마지막 향연이었다. 높은 음부터 차례로 죽어가는 하얀 키를 난타하며 신의 계획이 바로 이것이냐고 항의 했다.
빨간 포도주에 쏟아 부은 수면제 40알 “하느님, 저는 이제 죽습니다. 살고 싶어요. 뜨겁게, 열렬히, 이것이 자살이 아니고 순명입니다. 나는 천천히 유리잔을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눈앞에 반짝 섬광이 비췄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 스쳐간 환한 빛, 나는 보았다. 나는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소나기가 유리창을 두드렸다. 억세게 퍼부었다. 유리창을 열고 커어튼을 젖히며 밖으로 뛰어 나갔다. 억센 빗줄기를 맞으며 나는 서 있었다.
서서히 어둠이 걷히며 비가 그쳤다. 어둠을 몰아버린 동녘하늘에 뻗쳐오르는 새로운 태양, 나는 그 자리에 꿇어 앉았다. 내게 빛이 남아 있다. 아직도 성한 두 눈과 두 손, 두 발, 그리고 병들지 않은 싱싱한 마음, 이것만도 내게는 과분하다는 생각이 자성(自省)의 빗발로 나를 씻어 내렸다. “하나의 문이 닫히면 또 다른 문이 열린다”는 것은 절망이란 없다는 이야기다. 나는 들리지 않는 불행보다 볼 수 있는 희망을 선택키로 한 것이다. 이 세상에는 건강한 불구자가 얼마나 많은가. 비록 육체는 한구석 이그러졌다 해도 그 역경 속에 꽃피운 산 역사, 헬렌켈러나 베에토벤, 그들이 인류에게 끼친 업적이 얼마나 지대한가.
항상 보청기의 레시버를 꼽고 다니다 보면 우리 안의 원숭이를 구경하듯이 오며 가며 꽂히는 시선이 역겨울 때가 많다. 그러는 사이 내게 이상한 변화가 왔다. 누가 빤히 쳐다보면 나도 쳐다본다. 눈이 마주치는 순간, 무작정 웃는다. 쳐다봐 주는 친절에 보답하기 위해, 처음에는 오기가 발동한 상태였지만 반복하다 보니 오기는 어디로 가고 따뜻한 마음이 싹트기 시작했다. 또 이상스러운 것은 가시처럼 와 박혔던 시선이 가시가 아닌 염려의 시선임을 차츰 감지하게 되었다. 이상한 일이다. 세상에는 오해도 많다지만 나는 모두를 오해하고 살아온 것이다. 귀만 막힌 것이 아니고 마음의 창문까지 닫아 버렸던 것이다.
이웃이 나를 필요로 하는 한, 사회가 나를 아끼고 있는 한, 남을 도울 한가닥 사랑이 남아있는 한 나는 기쁘게 살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이 싹튼 것이다. 내 진한 목숨의 색깔로 지워지지 않는 무늬를 새겨 버림받은 이, 가난한 이웃에게 큰 사랑의 빛을 주고 싶다. 배고픈 이는 배고픈 이가 받아 안고, 우는 이는 우는 이가 달래주기 때문이다.
담록의 과수원에 은빛 파도가 일렁이는 아름다운 달밤이다. 이런 밤이면 빛의 속삭임을 듣고 싶다.
음악을 듣고 싶다.
가슴으로 듣고 싶다. (한국수필 81, 가을호)
3. 겨울 진달래
“L엄마, 이 가을에 떠나다니요. 모두가 떠나는 아픈 계절에L” 막내가 보낸 엽서의 한 귀절이다. 입영의 날짜를 받아 놓고 새로운 세계에 대한 불안과 두고 떠나야 하는 모든 것의 아쉬움에서 낙엽에 띄운 글인 모양이다. 나는 엽서를 받아 들고 한동안 멍하니 서 있었다. 거기, 내 망막에는 지난 10년이 뒤바뀐 필름처럼 스치고 지나 갔다. 꽃나무 한그루도 옮겨 심으면 뿌리 내리는 몸살에 이파리가 바삭바삭 타들어 가는데 하물며 인간에게랴. 나는 실눈 속으로 꽤나 오랫동안 남모르는 몸살을 앓아온 지난 세월을 더듬어 본다.
막내는 다섯 아이 중에 유달리 애를 태운 아이였다. 그 애가 국민학교 6학년일 때 생모를 사별하고 새엄마라는 나를 곤혹스럽게 했다. 세상에는 계모라면 이상한 색안경을 쓰고 보기를 좋아한다. 진실한 사랑만 있으면 다 잘 해결 될 것이라고 믿어온 나는 순간순간을 당황하고 실망하고 있었다. 감수성이 예민하고 상냥하면서도 때로는 영악한 아이로 변하기도 했다. 귀청을 후벼 주다가 자칫 잘못하면 아프다고 엉엉 울기가 예사요, 투정이 나오면 당할 재간이 없었다.
막내가 중학교에 입학한 뒤의 일이다. 집안에 어린애가 없어 적적하다고 아주 귀여운 털부숭이 강아지 한 마리를 방에서 기를 때였다. 루비라는 이름의 강아지는 부엌아이 등에 업혀있기도 하고 내 치마폭에서 낮잠을 즐기기도 할 만치 재롱을 떨었다.
학교에서 돌아온 어느날 막내는 부엌에서 연탄집게를 찾아 들고 방으로 들어 왔다. “이놈의 강아지 죽여 버릴 테다” 아이는 살기어린 눈으로 루비를 노려 보다가 와락 달려 들었다. “안돼, 안돼” 강아지를 뒤로 감추고 아이 손을 잡았다. 아이는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 일이 있고부터 나는 모정이 결핍된 아이의 여린 마음이 가여워 강아지를 밖으로 내 놓고 말았다. 그러면서 섬찟한 놀라움과 겹겹이 쌓여가는 후회로 멍청하니 지내고 있었다.
아이는 겉으로는 별 탈없이 성장하였다. 위의 아이들은 서울 조부모님 댁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어서 아이는 더 외로웠을 것이다. 막내가 고등학교에 들어가고부터 외 골수던 성격이 점차 밝아져 갔다. 학과 외에 테니스도 즐겨 치고 어떤 날은 납짝궁이 되어버린 따뜻한 호떡 두개를 책가방에서 꺼내 줄 때 나는 감지덕지 고마워 하며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고교를 졸업하고 멀리 Y시 대학에 입학 했다.
과수원과 논농사를 부족함을 모르고 지내던 가계(家計)가 욕심으로 시작한 양돈으로 궁지에 몰려 갔다. 그 해에 심한 돼지 파동에 뒤이어 과일 시세 하락으로 셋째와 막내, 두 아이의 대학 교육비는 빈혈을 일으킬 정도였다. 주방에 가스조차 떼고 내핍에 내핍을 해도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였다. 겨울 방학에 막내는 한사코 서울 조부모님께 가 있겠다고 우겼다. 나는 어쩐 일인지 막내가 집이 싫어져서 그러나 하고 속으로 무척 섭섭하게 생각 했다. “남의 자식 쓸데 없어, 괜스리 나 혼자만 마음 아파하는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그쳐도 서운한 것은 마찬가지 였다.
그런데 들려오는 소식에 막내가 서울 지하도에서 복권을 파고 있더라는 것이다. 한번 들어 앉으면 옴싹달싹도 할 수 없이 좁은 공간에서 찬바람을 맞으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니 따뜻한 방이 바늘 방석 같고 보채쌓는 아픔이 견딜 수 없게 했다.
“안되겠어요. 당장 서울로 전화하세요. 어린 것이 추위에 떨며 복권을 팔다니 말이나 돼요? 부모가 없어요? 나는 못 봐요. 어서 내려 오라 하세요”
제가 애써서 돈을 벌어 보아야 돈의 가치를 아는 거야. 한번쯤은 괜찮아.”나는 그날 밤 그이와 심한 말다툼을 했다.
막내는 개학을 앞두고 꺼칠해져서 돌아 왔다. 나는 차마 아이 얼굴을 바로 쳐다보기가 민망스러웠다. 큰 죄나 진 것처럼 전전긍긍하는 나에게 아니는 피아노를 쳐주고 기타 치며 노래도 불러 주었다. 부엌아이 없는 부엌일을 도와주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서 나를 즐겁게 하려는 눈치였다.
하루를 지내고 막내는 학교로 떠나 갔다. 고생만 시키고 보내려니 배웅하고 돌아서는 다리가 천근이었다. 서재로 들어가서 망연자실 서 있다가 무심코 시선 던진 책상 위에 흰 봉투 하나, 이상한 예감에 열어보니 일금 만오천원과 몇 줄 막내의 낯익은 글씨 였다.
“엄마, 추위에 고생이 많으세요. 세상은 지하도의 겨울 바람처럼 차다고 하지만 나는 문제 없어요. 열심히 살거예요. 이 돈으로 꼭 가스 사세요. 막내가”
작열하듯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 나는 편지를 와락 끌어 안고 바쁘게 창문을 열었다. 아이는 보일 듯 말 듯 산모롱이를 돌아서고 있었다. 아이가 돌아가는 눈 길 위에 노을에 비낀 진홍의 진달래가 피어 나고 있었다. 그것은 한겨울에 피어나는 인정의 꽃, 사랑하고 염려하는 마음이 피워낸 겨울 진달래였다. (북한 83. 4월호)
4. 겨울 편지
방금 우체부가 다녀 갔다. 요즘 부쩍 늘어난 우편물에 우체부는 영문 모를 의아한 눈길을 보낸다. 오늘로서 편지는 65통을 채웠다. 9월, 10월 두 달 사이에 날아든 독자들의 편지다. 연예인도 아니요 유명인사도 아닌 평범한 촌부요 수필가인 내게 이렇게 많은 편지가 오다니 우체부의 의아스러움도 무리는 아니다.
지난 9월호 S지에 실린 원고지 8매의 짧은 글이 몰고 온 거센 바람은 얼음 속에서 피어나는 갯벌의 수선화를 내 생활에 피워 주고 있다. 내가 살아 온 이 만큼의 여정에서 이처럼 훈훈하기도 처음이요 부끄럽기 또한 처음이다.
과실 치사죄로 4년을 복역하고 나온 젊은이가 세상의 냉대에 좌절하며 요즈음은 아이들 장난돌에 맞아 바르르 떨며 죽어가는 개구리를 보고도 마음 아파 울어 버린다는 안성의 S군, 나는 S군의 편지에서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참회의 눈물로 씻긴 맑은 영혼임을 짚어 낸다.
여행길에서 글을 읽고 책장에 얼굴을 묻고 소리 죽여 흐느끼며 어떻게 살 것인가를 생각했다는 K대학의 김군. 누구에게인지 꼭 한사람에게 편지를 쓰고 싶을 때 쓰리라고 2년 동안을 수첩 속에 넣고 다니던 우표로 여관방에서 편지를 쓴다는 멀리 제주도의 고경화씨, 그는 40원짜리 우표 두 장을 한꺼번에 붙였다. 또한 35년 동안을 방에만 누워 고독과 싸운다는 경주의 김경화양.아름다운 영혼을 사랑하며 아름답게 살고자 한다는 푸른 군복의 이화식 소위님. 당신도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신념에 찬 격려를 보내주신 반도호텔 조형건 대표님, 용기보다 더 큰 재산은 없다고 책을 보내주신 설우사 전호윤 사장님.
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편지들을 사과가 곱게 익는 가을 과수원에서 울며 웃으며 때로는 가슴 치며 읽었다. 들풀처럼 사는 내게 이렇듯 큰 은총이 넘치다니, 너무나 감사해서 울고 지면을 통해 뼈시리게 전달되는 그들의 고통,외로움, 절망을 울었다.
요즘에는 멀리 태평양을 건너 날아오는 해외 동포들의 편지에 다시 한번 콧등 아리는 사랑을 느낀다. 깊어 가는 가을밤 잎 지는 창가에서 이슥토록 한 사람 한 사람의 모습을 상상하며 두 영혼이 마주하는 답장을 쓰노라면 비로소 나의 소명이 무엇인가를 깨닫게 된다.
나는 편지들을 통하여 놀라움이 컸다. 아침마다 신문 삼면을 장식하는 끔찍한 사건도 많지만 세상에는 고통에 짓눌려 신음하면서도 사랑하는 마음을 갖고 사는 이들이 훨씬 많다는 사실이다. 또한 풍요의 물질 속에서 어찌하여 마음을 앓고 사는 이들이 이렇게 많을까 하는 의아심도 들었다. 현대처럼 시계 초침에 매달려 전화 한 통화면 용건이 해결되는 편안한 세상에 살면서 휴지처럼 흩어버릴 보잘 것 없는 글에 감동과 위로와 격려를 보내 주었다는 것은 새로운 발견이요, 신비한 개안 이었다.
사람들은 편지를 좋아 한다. 일년 내내 편지 한 장 쓰기를 힘겨워하는 사람도 자기 앞에 날아온 편지는 반가와 한다. 가장 싼 값으로 가장 값진 마음을 전달하는 편지란 매체는 그래서 우리 서민의 발이요 눈이요 가슴인 것.
나는 더욱 편지를 좋아 한다. 내게로 오는 편지에는 소인이 없는 편지도 많다. 건들마가 서걱서걱 수수 이파리를 흔들고 지나가는 가을이 오는 계절의 편지도 있고, 노오란 해바라기를 보면 불행한 천재 빈센트 반 고호의 ‘슬픔은 살아있는 동안 계속되는 거야. 이제 죽고 싶다’고 한 마지막 말이 귓전으로 스며드는 색채의 편지가 있다.
엄정행씨, 그분의 맑고 깊은 노래속에 직통 전화로 걸려오는 내면의 떨림은 속진이 여과되는 정화수. 어찌 이뿐이랴.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를 열연하는 루돌프 누에예보와 마코트 폰데인, 두 사람의 발레리나가 온몸으로 퍼내는 강렬한 사랑의 밀어는 황홀한 한 편의 생동하는 편지가 아닌가.
가을이 깊어지면 나는 편지를 쓴다. 병상에 누운 친구에게,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그리운 사람들에게 커피 한잔의 시간을 내서 엽서를 띄운다. 그것은 추운 겨울을 나기 위해 연탄을 사들이는 심정과 흡사 한 것. 내 곁에 방풍림을 심어두는 어한의 몸짓.
추위가 심할수록 사람들은 문을 닫아 걸고 들어 앉는다. 냉랭한 처마머리 어디 한군데 발 붙일 곳 없는 현대인의 냉기. 물리적인 추위는 문을 닫아야 보온이 되지만 끝없는 마음의 추위는 마음문을 열어야 녹일 수 있는 것. 우리들의 삶에 있어 끝나지 않는 겨울속에 있을 때 창문 하나만이라도 열어 보면 그대는 알리라. 작은 창문을 통하여 얼마나 따뜻한 인간애의 햇살이 비춰 오는지를, 그것은 한가닥 남은 희망이기도 하고 위안이기도 한 사랑의 메시지.
우리는 이렇게 추위를 녹여야 한다. 내가 어렸을 때 6.25를 치른 겨울, 춥고 배고픈 교실에 다닥다닥 모여 앉아 우리는 선생님이 시키는 대로 손비빔을 했다. 손등끼리, 손바닥 끼리 그렇게 한참을 비비고 나면 몽당연필을 쥘 수 없이 곱았던 손에 온기가 살아 났다. 그것이다.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이 비빔이다. 미움과 사랑끼리, 있음과 없음끼리, 마음과 마음끼리 서로 대고 비벼가다 보면 거기 모처럼의 정(情)이 생기고 애착이 생겨 난다. 그러자면 빗장을 열고 마주 서야 한다.
올 가을 내내 내게 수없이 날아오는 독자들의 편지는 이제 문 여는 소리, 나는 반겨 듣고 달려나가 찬 손이나마 뜨겁게 마주 잡아야 한다. 내 무슨 비범한 재능이 있어 불후의 명작을 남기겠는가. 이렇듯 겨울을 사는 이웃들에게 한줄기 따스한 햇살로 부서져 내려 그들의 추위를 녹일 수 있다면 내 문예에의 보람은 성취되는 것. 그러고 보면 예술이란 인간에게 보내지는 가장 진실되고 영원한 구원의 메시지가 아닐지L
편지는 가슴과 가슴을 잇는 사랑의 징검다리, 그리하여 나는 외로울 때는 음악을, 마음이 추워질 때는 편지를 쓰리라. (한국수필 82, 겨울호)
5. 두 바퀴의 수레
아침마다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 서울 변두리 어디에 산다는 이들 부부는 새벽이면 싱싱한 채소를 한 수레 싣고 골목을 누비며 파는 평범한 상인 들이다. 그런데 내가 유독 이 부부에게 정이 가고 즐거운 마음으로 기다리는 데는 남다른 이유가 있다.
서른을 넘어 보이는 남자는 그저 쑬쑬하게 생겼는데 여인은 그렇지 못하다. 오른쪽 볼은 갸름하고 눈이 맑은 것이 삽상하나 왼쪽은 벌거죽죽하고 번쩍번쩍 하며 아래 입술은 일그러져 있는 것이 꽤 중증인 화상을 입었던 듯 싶다. 그런데 이상한 일은 부부의 금실이 유별나게 좋은 점이다.
오늘 아침에 어떤 할머니가 그 남편에게 넌지시 물었다. “부인이 그렇게도 이쁘우?” 남자는 계면쩍은 듯 씨익 웃더니만 “반쪽은 밉지만 한쪽은 미인 축에 듭니다요. 저래 뵈도 마음은 비단이지요.”
열무랑 오이를 골라 놓고 셈을 치르던 나는 오랜만에 가슴 찡하게 차 오르는 기쁨을 느꼈다. 벌거벗고도 서로 부끄러운 줄 몰랐던 원죄 이전의 아담과 이브를 보듯 그렇게 큰 신선한 감격이었다.
살을 맞대고 사는 부부끼리도 얼마나 많은 애증이 소요하며, 이웃과 사회 도처에서 불신과 원망이 범람하는가. 사실 미움 옆에는 예쁨도 반듯이 있거늘 우리 마음의 눈은 이기(利己)로 멀어 있어 예쁨은 보지 못하고 미움만 보기 때문에 불행은 커지는 것이 아닐까. 아름다운 것은 그대로, 추한 것까지도 사랑으로 덮어주는 행위야 말로 숭고한 부부애가 아닐는지.누구에게나 있는 선의 의지는 망각하고 눈에 보이는 물질의 양으로 행, 불행을 판가름하는 요즘 세태에 그들이 나누는 신뢰는 실로 아름답기까지 했다.
한사코 마다하는 나에게 덤으로 파 몇 뿌리를 떠 한기고 끌고, 밀며 골목길로 사라지는 평범한 부부에게서 가장 평범한 삶의 지혜를 발견한 이 아침이 눈부시게 환하다.
저 튼튼한 두 바퀴의 수레에 탄 아이들과 가정은 아무리 어려운 역경과 시련에도 삶이란 가파른 고갯길을 끄떡없이 오를 것을 나는 믿는다. (밀물 84, 8월호)
6. 말하고 싶은 눈
우리집 파수꾼 미세스 짜루는 해마다 한번씩 출산(出産)을 한다. 정월 대보름쯤이면 휘영청 찬 달빛 아래 연인을 찾아온 미스터 견(犬)공들이 여기저기 웅크리고 앉아서 사랑의 세세나데를 부른다. 이상스러운 것은 이 외딴 터에 있는 암캐가 발정한 것을 동네 개들이 어떻게 아느냐 하는 점이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후각이 고도로 발달되어 냄새를 맡고 찾아온다니 희한한 일이다. 한 두 마리는 으레 침식을 같이 하다시피 와 살기도 하고 어쩐 날에는 대여섯 마리까지 원정을 와서 서로 싸우고 어울리고 야단들이다.
세상에는 못된 사람을 욕을 할 때 개 같은 *이라고 하지만 자세히 관찰해 보면 그 말이 별로 맞는 말이 아닌 성 싶다. 개를 욕에 쓰는 이유는 개방된 섹스 때문인 듯 싶은데 장소와 때를 구별 못한다는 데서 오는 듯 하다. 상대를 고르는 방법은 동물 중에서 가장 고등(高等)하고 의젓하다.
사실 우리 미세스 짜루는 하얀 털이 차분하고 군데군데 누런 점이 박혀서 언뜻 보면 똥개도 아니요, 그렇다고 명견은 더욱더 아닌 얼굴이 오종종한 그저 그런 시골 개다. 이왕이면 못난 자식보다 잘 생긴 며느리를 보아서 손주 놈은 일품으로 빼어 보리라는 욕심처럼 우리도 그랬다. 후보 개들 중 가장 몸집이 미끈하고 잘 생긴 세파트견을 골라 우리집 짜루하고 한 광 안에 가두고 문을 걸었다. 어찌 된 일인가. 이놈 들은 타협을 모른다. 우당탕 싸우고 으르렁거리고 박살 나게 뒤집어 놓는 듯 하더니 문짝 하나가 나자빠지면서 짜루가 튀어 나왔다.
실패였다. 제가 싫다는데 어쩌랴, 인간들도 자유결혼으로 치닫는데 너라고 봉건주의로 매어 둘 소냐, 이런 심정으로 수수방관할 수 밖에 없었다. 며칠이 지난 이른 아침, 눈 쌓인 사과나무 밑에 짜루란 놈과 못난 검둥이가 밀월을 즐기고 있지 않는가. 그러고 보면 우리 미세스 짜루는 지조가 있는 놈에는 틀림이 없다.
눈이 녹고 시냇물이 쪼록쪼록 흐르고 그러더니 양지마다 파아란 새싹이 뾰즈름이 돋아 났다. 짜루는 어느덧 배가 망구쟁이를 해 가지고는 노산(老産)이라 그런지 양지쪽에 누우면 일어날 줄을 몰랐다. 그러던 어느 아침 살얼음이 언 쌀쌀한 날씨인데 짜루는 새끼를 자그마치 여덟 마리나 낳았놓고 추워 떠는 새끼들을 보듬고 있었다.
그동안 무관심했던 탓에 짚자리도 깔아주지 못한 채 맨바닥 이었으니 아무리 짐승이라 하나 어미인 짜루의 심정이 오죽하랴. 부랴부랴 볏짚을 깔아주고 미역국을 끓여 넣어주고 백 촉짜리 전구를 켜 주고 한참 바빴다. 그제서야 조금은 자괴의 마음이 누그러지는 듯 했다.
개집 앞에 쪼그리고 앉아 짜루를 바라보노라면 나는 눈으로 말 하는 개의 이야기를 담박 알아 듣는다. 또 그이가 출타중일 때 빈집을 혼자 지키면 짜루는 누가 시킨 일처럼 개집에서 나와 현관 앞에 버티고 누워 밤을 지내기가 일쑤다. 얼마나 충직한 파수꾼인가. 개와 나와의 교감은 이렇게 이루어지는 것이다.
코를 약간 위로 치켜들고 슬픈 듯 깜박이지 않는 조용한 눈에는 반드시 탄원이 들어 있다. 개집은 좁은데 여덟 마리의 강아지를 한 마리도 다치지 않게 누우려니 그 조심스러움이 어떠하랴, 짜루의 애소하는 눈빛 때문에 궁둥이짝을 쳐들어 보니 거기 양수도 채 마르지 않은 강아지 한 마리가 깔려 있었다. 눈도 못 뜬 강아지를 어미 품 속에 넣어주니 짜루는 혀로 핥아서 양수를 말리고 있었다.
날씨는 한결 누그러졌다. 꽃샘 추위로 멈칫했던 춘신(春信)이 속속 날아 들고 있을 때 움트는 사과나무 밑에 나와 앉은 짜루의 모습이 유별났다. 비스듬히 누워 고개를 길게 빼고 눈을 감은 채 무엇을 참는 듯, 그린 듯 앉아 있다. 내가 가까이 가도 쳐다보지도 않는다. 이상스러워 머리를 쓰다듬으며 “짜루야, 어디 아프니? 왜 그러고 있어?”
개는 기운 없이 눈을 떴다. 눈꼽이 말라 붙은 게슴츠레한 눈에서 눈물이 주르르 흘러 내렸다. 한참동안 턱을 내 무릎에 받친 채 있더니 코를 사타구니로 박는다. 짜루가 가리킨 곳에는 막내 젖이 젖몸살이 나서 사발만큼 부어 있었다. 손을 대어 보니 성이 난 젖이 펄펄 끓는 듯 뜨거웠다. 아리아리 하도록 퉁퉁 부어 오른 젖 몸살의 아픔을 짜루는 저렇게 참고 있는 것이다.
서둘러서 스트랩토마이신 주사를 놓았다. 하루 한번씩 맞는 주사를 짜루는 아주 신통하게 맞는다. 주인 아저씨가 주사기에 약을 넣어 가지고 가까이 가면 옹동구리고 누워 젖을 먹이다가 어제 맞은 넓적다리를 슬그머니 쳐든다. 주사를 놓을 때마다 우리 내외는 놀랜다. 누가 이런 개를 욕에다 쓰는가.
그날은 장날이었다. 모처럼 장을 보고 돌아와 보니 개가 없어졌다. 어미는 고사하고 새끼조차 한 마리 없다. 가슴이 철렁했다. 뒷 산에서 살쾡이라도 내려와 물어갔나 싶어 애가 탔다. 여기저기 찾다 보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개집에서 3미터쯤 떨어진 사랑채 부엌에 넓다랗게 짚을 펴고 새끼리ㅡㄹ 젖물리고 있지 않은가. 자식을 위한 모성의 행위야말로 창조의 시원(始原)이요, 최고의 예술임을 짜루에게서 느끼며 부끄러워진다.
한달이 넘어 일곱 마리는 이웃에서 나누어가고 씨 강아지로 암놈 한 마리만 남겨 놓았다. 짜루는 날마다 한 차례씩 제 새끼가 사는 집들을 찾아 다니며 젖을 물려 준다는 이야기가 동네에 좌악 퍼졌다. 정말 이렇게 지혜로울 수가 있는가. 미물인 미세스 짜루를 보고 있노라면 사람 같은 개와, 개 같은 사람을 생각하게 된다.
너무 영물이라 오래 주면 못쓰니 보신탕 집에 넘겨주라는 이웃의 귀띔을 나는 묵살해 버렸다. 그리고 곰곰히 생각하는 것이다. 짜루와 내가 수없이 누비며 사랑을 심은 과수원 양지쪽 어디쯤이 무덤자리로 좋을까 하고.그리고 비목(碑木)이라도 한 그루 세워주리라고. 짜루는 댑싸리 그늘에 누워 고마운 듯 갸웃이 바라보고 있다. 조용한 대낮, 강아지풀 한 자락이 바람을 탄다. (북한 82. 9월 호)
7. 山 사 람
산(山)사람은 노상 사람 그리는 병을 앓는다. 또박또박 잊지 않고 찾아오는 계절의 변화 속에 유독 겨울을 타는 것은 이 병이 더 기승을 부리기 때문이다.
마을에서도 행길에서도 동떨어진 산기슭에 그림처럼 오두마니 한 채 서 있는 집이다. 봄부터 가을 까지는 철 따라 피고 지는 꽃이 있고 흙을 파고 씨를 넣어 살뜰히 기르는 재미도 있다. 고추밭 이랑에서 만나는 이웃과 소풍 삼아 찾아오는 친구도 있다. 그러나 11월이 깊어지고 사과나무가 옷을 다 벗을 때쯤이면 모두 서둘러서 자기네 집으로 돌아 간다.
눈을 두는 곳 마다 빈곳이다. 산꼭대기서부터 쓸어 내리는 찬 겨울 바람은 냉랭한 빈 손이고 이따금씩 비쳐 오는 햇빛도 잠깐이다. 오는 이도 가는 이도 없는 산속은 밤이 빨리 찾아 온다. 해가 서산으로 넘어가기가 무섭게 서둘러 창문을 닫아걸고 불을 밝히면 무한의 시공 속에 나는 단 한점으로 부웅 떠 있는 진공 상태가 된다. 누가 말했던가. 사람은 사회적 동물이라고...
고즈넉한 밤, 산사람은 편지를 쓴다. 어떤 편지는 바람에 날려 보내기도 하고 어떤 봉투는 소인도 없이 책상머리에 뒹굴기도 한다. 그러나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어서 날마다 편지를 쓴다. 어떤 날은 게걸스레 책 속에 파묻히기도 하고 눈이 침침해 지면 방바닥에 엎드려 모짜르트와 지내기도 한다. 겨울은 춥고 길다. 한길이나 쌓인 눈 속을 푹푹 빠져가며 과수원을 돌아보며, 그 속에 겨울나무가 되어 묵묵히 서 있기도 한다. 사람이 그리운 것이다.
어제 낮, 앞머리가 희끗희끗한 갱엿장수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수상하게 여겼던지 개가 치마꼬리를 물어대며 그악스레 짖었다. 돌아가신 친정어머니가 살아 오신 듯 반갑게 맞아 들이고 따끈한 차를 드렸다. 남도에서 왔다는 아주머니는 시장기가 든 푸르죽죽한 얼굴로 차 한잔을 맛있게 드셨다. 나는 담북장을 끓이고 진지상을 보아 늦은 점심을 대접하면서 연신 신바람이 났다. 숭늉을 떠다 드리니까 아주머니는 “고맙소 잉, 참으로 고맙소 잉!” 하며 내 손을 잡았다.
눈길로 그분을 배웅하고 돌아서면서 나는 내 병이 깊어 있음에 새삼 놀랐다. 인적 없는 대낮 눈 위 바람이 차다. 집안에서만 뱅뱅 돌다 그도 무료해 지면 나는 쌀 한 웅큼을 퍼들고 밭으로 나선다. 잠깐 비쳤다 넘어가는 대낮 햇살이 뒤뜰에 찾아 올 때쯤 산에서 산토끼나 꿩들이 모이를 찾아 과수원으로 내려 오기 때문이다.
모이를 눈 위에 뿌려 놓고 사과나무 뒤에 슬쩍 숨어서 보면 푸득하고 내려 앉는 장끼네는 꼭 한 쌍이다. 꼬리가 길고 몸매가 날렵하고 알록달록 색깔이 고운 것이 장끼다. 이놈 들은 눈밭에서 한바탕 멋지게 왈츠를 춘다. 백설 위에서 벌이는 맨발의 즉흥 발레는 요한 스트라우스의 ‘다뉴브강의 물결’을 연상케 한다. 투 스텝으로 원을 그리다 모이를 쪼고 둘이 스텝을 맞춰 저만치 갔다가 다시 돌아와서 모이를 쪼고... 아름답다. 움직인다는 것은 살아 있다는 것, 생명이 있는 것은 아름다운 것. 산사람은 넋을 잃고 바라보다 홰를 쳐 본다. 나도 살아있는 목숨임을 확인하기 위하여.
산토끼는 겁이 많다. 우리집에 내려오는 토끼는 거무스레한 갈색 털을 보송보송 휘감고 눈은 언제나 불면증에 걸린 사람처럼 발그레하다. 이놈은 생명을 걸고 전쟁터로 뛰어드는 그런 모습이 아니고 훔쳐 먹으러 광에 드나드는 쥐 같은 모습이다. 쌀알 몇 알 먹고 오물오물 사방을 살피고 깡총깡총 뛰어다니다 또 한번 먹고...귀엽다. 냉큼 보듬고 입맞추고 싶다. 그러나 기척이 났다 하면 뒷 산으로 줄행랑을 치기 때문에 몸살을 끙끙 앓으면서도 지켜 보고 만 있어야 한다.
이렇게 달콤한 밀월의 시간을 훼방 놓는 놈은 다름아닌 우리집 개 바우다. 하루에도 몇 번씩 동네에 마실가서 싸다니다 오는 이놈은 예민한 청각과 취각을 동원해서 풍비박산을 만든다. 그러고는 꼬리를 저으며 내 품으로 파고든다. 히앙히앙 웃는 소리를 내면서 제가 나를 사랑하는 마음은 변함 없노라는 듯 혀로 내 볼을 핥고 오줌까지 찔끔찔끔 지리면서 아양을 떤다.
하루 한번씩 눈길을 헤치고 찾아오는 우체부의 발길을 위해 나는 설레이는 가슴으로 차를 끓인다. 잠시나마 차 한잔으로 맞이하는 기쁨과 녹이는 추위는 차 한 모금에 정(情) 한 모금이 스며들어 축복의 시간이 된다. 편지가 오는 날이면 나는 감격한다. 그래서 겨울에 오는 편지는 더욱 반갑다. 이 반가움을 위해서 산사람은 차 끓이기를 좋아 한다.
‘동무생각’ 한 곡을 피아노로 두드리다 창문을 활짝 열어 젖혔다. 침묵했던 과수원에 연옥색 물기가 도는 듯 하다. 겨우내 깊어 간 내 지병을 치료 받기 위해 흙 냄새가 구수한 시골에 사과 꽃 구경 오시라는 초대장을 이 봄엘랑은 수십 장 쓰리라
봄아가씨, 어서 오십시오. (새마을 82. 3월호)
8. 손
심부름 꾼이다. 좋은 일, 궂은 일 가리지 않고 충직하게 소임을 다하는 심복이다. 어떤 주인을 만나는가에 따라 그 손의 사명이 달라지듯이 병고를 치유하는 인술(仁術)의 손이 있는가 하면 파괴와 살생을 일삼는 저주 받은 손도 있다. 기왕이면 좋은 손을 갖고 싶었다. 아름답고 우아하고 겸손한 그런 손을.
어느 가정이거나, 주부는 그 집의 손이어서 모든 것을 알아서 관리한다. 겨울채비를 하느라고 이불에서 커튼까지 있는 대로 빨아 널고, 화초 분 갈이 하고, 김장을 담그고 나면 내 손은 엉망이 되고 만다. 조심성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일이 서투른 탓인지 손이 성할 날이 없으니 민망하기 짝이 없는 노릇이다.
손등은 생채기 투성이고 손가락은 군데군데 칼자국이 스쳐 가관이다. 낮에는 바빠서 별로 모르다가 밤에 잠자리에 들면 그제야 얼얼하고 화끈거린다. 한때는 길쭉하니 메마르고 거기다가 머큐로크롬을 훈장처럼 바르고 지내는 내 손이 남 부끄러웠다. 어쩌다가 동창모임에 간다든가 외출했을 때 손마디가 굵어져서 반지 조차 들어가지 않는 손이 초라해 보여 적잖이 신경이 쓰였다. 그러던 것이 차츰 생각이 달라져 갔다. 아마 가끔씩 받는 누시아의 편지 때문이 아닌가 싶다.
누시아, 그 이름은 빛이라 했는데, 그녀는 그 반대편에서 살고 있다. 중학교 다닐 때 관절염을 앓기 시작하여 사십 고개를 넘어선 여태까지 투병생활을 하고 있다. 이십 년 넘게 누워만 살고 있어 무릎 아래쪽부터 발가락까지 성장이 멈춘 아이 같고, 양팔은 어깨 밑에서 굽어져 내려 가느랗게 야위어 다섯 손가락이 거의 다 오므러 붙었다.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파리가 얼굴에 새까맣게 앉아도 그것들을 쫓아버릴 아무 방도가 없다. 얼굴과 머리에 비듬이 덕지덕지 앉은 그녀를 씻기고 오는 날에는 목숨이 꼭 축제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알 수 없는 일은, 열 일곱 소녀의 얼굴로 살고 있는 그녀는 오히려 평화롭다. 배설물이 두려워 몇 수저의 곡기로 연명만 하고 사는 터에 천진무구한 동안의 평화는 어디서 오는 것일까. 모로 누워서 막대기 같은 손가락 사이에 수저를 꼽고 엎지르며 한 두술 밥을 넣던 손에 어느 날 볼펜을 쥐어 주었다. 무엇이라도 써보면 큰 위안이 될거라고.
그녀는 천신만고 끝에 겨우 글씨를 쓰게 되었다. 글 몇자 쓰는데 몇 시간이 걸리는 고행을 거쳐서다. 그리고는 자신과 같은 이웃을 위하여 그 손으로 사랑의 체온을 나누고 있다. 교도소에 수감되어 있는 수인에게, 마음을 앓고 사는 어느 주부에게 , 양로원에 있는 불구노인에게 오그라든 손의 봉헌은 끝없이 펼쳐지고 있다.
나는 누시아의 편지를 받을 때마다 나의 고통은 하찮은 것이라는 내송(內訟)의 아픔을 겪는다. 그러던 어느 날, 부자유한 육신으로부터 자유로와질 귀한 선물을 받았다. 가나 화랑으로부터 발송된 화집이 그것이다. 조심스레 봉함을 열어보니, 거기 낯익은 조각가 C교수님의 친필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C교수님의 작품을 좋아 한다. 까막눈인 내 눈에 무슨 안목이 있을까마는, 반듯하게 참으로 인간답게 살아온 그분 삶의 열정을 익히 알고 존경한 까닭에 그분의 작품에 더 크게 공감하는 모양이다. 어느 분야의 예술이건 작가와 작품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를 많이 보아왔기에, 나는 예술가라면 우선 그 사람됨을 꼽고 작품을 뒤에 두는 편견이 있다. 가장 불완전한 것이 인간이므로 완성을 향한 이상의 작품으로 형상화되어 작품과 작가 사이에 괴리가 생길 수도 있지만L.
그런데 삶과 예술이 일치하는 예술가가 그리 흔치는 않은 모양이다. 유독C교수님의 작품이 그렇게 형형한 빛으로 영혼의 문맹을 비추는 것은 삶 자체가 작품이라는 그분만의 진실한 철학이 있어서다.
화집을 오래오래 바라보았다. 무표정한 소녀상의 눈길에서 안개 같은 슬픔이 배어나오고 도끼 같은 얼굴에서 범종소리가 울릴 것 같다. 서 있는 사람, 소녀상, 어디서나 불쑥불쑥 살아있는 손의 질감을 느낀다. 결코 크달 수 없는 두 손 안에 광대무변한 우주가 담겨 있고 끝이 없다는 영원까지 수용돼 있다.
참 이상한 일이다. 다소곳이 모아 쥔 자그마한 손인데 시공을 뛰어 넘어 생동하고 있다. 그 손은 어느 사이 현대의 성녀 테레사 수녀의 깡마르고 큰 손이 되어 썩어가는 나병환자의 환부를 어루만지고 고통 속에서도 아픔을 나누는 누시아의 목각 같은 손으로 변신하기도 한다. 세계적인 작가가 된 C교수님은 육체를 넘어서는 그곳에 비로소 열리는 창조의 영안을 얻음일까.
이제야 조금씩 누시아의 평화를 알 것 같다. 두 손을 가지런히 책상 위에 얹어본다. 이제야말로 좋은 손을 가져야 한다는 다짐을 하며, 사랑과 정성으로 저녁식탁 차려놓고 거기 둘러앉아 즐겁게 식사하는 식구들 틈에서 행복을 느끼는 어머니의 따뜻한 손이다.
정말로 아름다운 손은 누군가를 위하여 끝없이 봉사하는 그런 손이다. 비밀한 기쁨을 간직하고 고뇌의 정으로 창조의 촛불을 켜는 그런 손이다. (현대문학 86. 6월호)
9. 숲을 바라보며 사는 멋
나무는 혼자 섰을 때 아름답다. 나무는 둘이 섰을 때는 더욱 아름답다. 둘과 둘이 어우러져서 피어났을 때 비로서 숲을 이룬다. 숲이 아름다운 것은 서로를 포용하는 특성 때문이다. 공동체를 이루는 한 덩어리의 밀집성, 그 따뜻함이다. 건축예술이 잘 발달하여 거대한 도시를 건설했다 쳐도 거기 도시와 숲의 조화 없이는 생명이 없는 도시다.
기차나 버스로 여행을 하다 보면 유독 마음을 끄는 도시를 만난다. 초록빛 분지를 깔고 앉은 조그마한 도시의 평화로움은 그 도시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숨결을 느끼게 한다. 금가루를 뿌린 듯한 오월의 햇빛이 뒷산 관목 숲에 내려와 일렁일 때면 아카시아는 수천 수만의 희디 흰 연등을 밝히고 서서 향기로운 기원을 햇살에 꿰인다. 나는 새벽이 오는 길목에서 숲을 바라보며 마음의 연등을 밝혀 사랑하는 사람들의 안위를 빈다.
나무는 가만히 서서도 우주를 포옹한다. 이슬이 내려 잎을 적시면 가슴 열어 목 축이고 먹구름 천둥 속에서도 미동하지 않는다. 하늬바람이라 얕잡지 않고 폭풍우라 두려워하지 않는다. 뿌리 내린 겸허로 대지를 파고 들며 허세를 부리거나 시기하지 않는다. 이 숲에서 맞는 나의 사계(四季)는 우리들 인생의 모습을 묵묵히 보여 준다.
메마른 바람이 쓸고 간 봄의 숲에는 유년의 꿈이 있다. 끝내 침묵하고 말 것 같던 적막의 대지에 술렁이는 빛의 말씀으로 생명은 충만해 진다. 옥색물기가 감돌며 감추어도 솟아나는 어린 싹, 거기에는 소망스러운 설레임과 기대가 있다.
내일이 캄캄해 괴로운 이는 봄이 다가서는 숲에 서 보라. “겨울의 추위가 심할수록 오는 봄의 나뭇잎은 한층 푸르르니 사람도 역경에 단련되지 않고서는 큰 인물이 될 수 없다.(푸랭크린)” 분명코 삶의 의미가 무엇인 줄 조금씩 감지하게 될 것이다.
게으르고 미련한 이는 여름 숲으로 가라. 생의 찬가가 우렁찬 짙푸른 수해(樹海)에 몸을 담그면 풋풋한 삶의 열기에 감전 되어 뛰지 않고는 견딜 수 없는 심장의 동계를 느낄 것이다. 그것은 선의 의 투쟁이며 근면이며 성실의 모습이다.
나는 때때로 욕망의 늪에 빠져 초라해질 때 가을 숲을 산책한다. 사철 푸른 나무 곁에서는 교언영색(巧言令色) 하지 않는 그 청청한 기개에 용기를 얻고 빨갛게 타며 아낌없이 떨어지는 낙엽에 흥망성쇠의 인간사 부질없음을 생각한다.
그러나 겨울 숲을 보라. 야윌대로 야윈 겨울 숲은 진실 아닌 것이 없다. 꽃도 아니요, 잎도 아니요, 오로지 빈 가지인 그대로의 참모습을 바라볼 수 있음이요, 부귀영화를 나누어 주고 입성 한 벌 걸치지 않았으면서도 간결한 생략의 아름다움을 입고 섰는 겨울 숲, 거기 빈자(貧者)의 머리 위로 내려지는 백설의 은총. 눈가루를 덮어쓰고 선 설원의 숲은 예지의 칼날이요 은자의 안식처다.
나무나 숲은 자고로 위대한 인물을 배출한다. 이천 년 전 예수 그리스도는 지존의 몸임에도 베들레헴 가난한 말구유에서 첫 고고성을 지르고 인류의 죄를 대신하여 마지막에 나무 십자가 위에서 희생의 변제물로 자신을 바쳤다. 어디 그 뿐인가. 석가모니의 어머니는 무우수(無憂樹) 나무 밑에서 석가를 낳았고 고행 끝에 그가 해탈한 곳도 나무 밑이었으며 열반한 곳도 보리수나무 밑이었다고 한다.
나는 숲이 내리는 오솔길에서 인류를 구원한 성자들이 왜 아무나 숲을 사랑했는지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숲은 인간을 사색하게 하고 침묵하게 하고 안으로 안으로 충일케 하기 때문이다.
밀림의 성자 슈바이처 박사는 과거 3백 6십년 동안 을 백인들에게 학대와 착취를 당한 아프리카 사람들을 위하여 백인을 대표해서 그들의 노예가 되어 속죄하고 봉사한 사랑의 일생을 살았다. 흑인과 밀림밖에 없는 그곳에서 그는 과연 숲의 자비로 인술을 베풀었을 것이다. 노예 해방을 이룩한 아브라함 링컨의 순수한 평등애 역시, 그가 자란 가난한 통나무 오두막집에서 싹텄다는 사실을 간과 할 수 없다. 숲에 안겨 있으면 사람은 신의 품에 안기기 전에는 참 평안이 없다고 한 어거스킨의 말씀이 살아 온다.
나는 나무를 바라보며 바람 맞는 모습에도 곧잘 감동한다. 은사시나무 잎에 햇살이 부서지는 황홀한 슬픔을 사랑한다. 달빛 켜 들고 술렁이는 밤이면 사무치게 맑은 숲의 노래가 내 영혼을 적신다. 나는 사람 틈에서 더욱 외로와 질 때 숲을 찾아 나선다. 나무들도 혼자 섰기는 너무 외로와 이마를 맞대고 서로 껴안고 살지 않는가.
숲에 싱그러운 젊음의 향기가 있듯이 지성의 숲에는 그윽한 향기가 있다. 물질만능의 현대 사회 속에 지성인이야말로 살아있는 정신이며 사회의 호흡창구라 생각한다. 숲이 탄소동화작용을 통해 맑고 신선한 공기를 내어주듯이 지성인은 사회를 정화하고 선도하는 양심의 창이어야 한다. 숲이 없는 도시가 삭막하듯이 지성이 도태된 사회는 죽은 사회이다.
내가 유달리 청주를 사랑함에는 숲이 아름다운 도시이기 때문이다. 무더기 무더기 술에 쌓인 젊음이 충천하고, 시성의 대화가 있고, 절제된 욕망이 꿈틀 대는 곳. 과연 교육의 도시이며 맑고 밝은 숲이다.
낭만과 진리의 탐구가 공존하고 갖가지 예술활동이 활발한 도시이다. 나는 이곳에서 울울창창한 조국의 내일을 바라보며 소중한 우리의 삶을 사랑한다.
숲을 바라보면 그 처럼 건강하고 노상 젊어지고 싶다. 그렇게 한 빛으로 영원하고 싶다. 하늘을 찌를 듯한 이상으로 살고 싶다. (청주상고 교지 83. 창간호)
10. 詩人과 만난 어느 여름 밤
밤안개가 자욱한 밤이었습니다. 세상과 동떨어진 속리(俗離)의 밤은 안개비가 내리는 오리나무 숲에 낭만을 뿌리며 깊어 갔습니다. 문인과 화가 오십여명의 일행은 C도 새마을 사업 성과 평가단으로 남부지역을 돌아보고 속리에서 하룻밤을 쉬게 되었습니다. 저녁을 마친 H양과 나는 숙소를 나와 산책을 나섰습니다. 우연히 몇 분 안면 있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첫째집에서는 도에서 인솔한 두 분과 J시의 두 시인과 생맥주 두컵씩을 마셨습니다. H양과 나는 한 컵을 가지고 씨름을 했으나 조금 취해 보리라는 기대는 이룰 수 없었습니다. 둘째집에서는 젓가락을 두드리며 유행가를 불렀지요. 몇 병의 맥주를 마시고는 셋째집에 갔습니다. 조촐한 밴드에 맞춰 되지도 않는 노래를 부르고 스텝도 밟는 눈치였지요. 그때까지 우리는 그저 동행인으로 여독을 푸는 시간일 뿐이었지요.
이미 밤은 이슥하니 깊었습니다. 열 두시, 우리는 헤어지자고, 에이, 취한다고, 각기 숙소로 찾아가지고, 그러나 누구 발길이 먼저 인지 모두는 산책로를 따라 걷기 시작했습니다. 누군가 ‘산들바람’을 노래 했습니다. 이어서 ‘동심초’가 ‘바우고개’ 가 이어지면서 나중에는 혼성합창이 되었습니다.
밤이 깊어 갈수록 안개도 짙어 갔습니다. 뿌우연 가로등 아래 서서 올려다 보니 달무리 같은 후광이 촉촉히 젖어 내리고 노래 소리가 숲속으로 그냥 흡수되는 듯 했습니다. “고만 하자, 노래를 부르니까 어째 자꾸 슬퍼진다야.” 거무틔틔하고 막걸리 냄새가 물씬 풍길 듯한 시를 쓰신다는 J씨 였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대꾸하지 않았습니다. 등어리가 새하얀 오리나무는 잎새하나 까딱하지 않은 채 달빛을 물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아름다운 밤이다. 이건 영원이다.” 누군가 말했습니다. 그 말의 여운이 사라지기도 전에 ‘등불을 끄고 자려하니’ 다시 노래가 이어졌습니다.
반 팔 블라우스 어깨 위로 축축한 한기가 느껴졌습니다. 조그만 냇가를 끼고 조붓한 길입니다. 쪼록쪼록 흘러가는 냇물에 조그마한 달이 빠져 있는 모습이 눈물 그렁한 소녀의 눈빛입니다.
웬지 자꾸 슬퍼 졌습니다. 아까 J시인의 슬픔에 이제는 나의 슬픔이 포개어지고 저마다 그 비슷한 애수가 잦아들었습니다. 우리는 서로서로 손을 잡고 걸어가며 노래를 불렀습니다. 그러고 보니 사람들은 모두 외로와 하며 산다는 걸 알았습니다. 알몸이 부끄러워 옷을 입듯이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해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리고 가족과 친구를 갖는다는 사실을.
그러나 어쩌겠습니까. 그래도 사람은 외로울 수 밖에 없는 존재인 것을. 외로움의 깊이를 체험하면 할수록 사람들은 더 지혜로와 지고 침묵하게 되는 것을. 우리는 어는 의자에 앉았습니다. 곤히 잠자던 밤새가 푸드득 건너편 숲속으로 날아 갔습니다. 멀리 관광 호텔 방마다 밝힌 불도 하나 둘 모두 꺼지고 밤은 농밀한 안식을 퍼 주며 깊어 갔습니다.
“저 창문에 불빛이 한꺼번에 꺼지지 않고 하나 둘 꺼지는 이유를 알고 있나요?” “저마다 밤이 다르기 때문이지요” 돌아오는 시각도 돌아가는 시각도 우리는 모두 다릅니다. J시인은 아직 ‘詩人’이라는 면허증을 못 땄노라고 수줍게 고백했습니다. “내 나이 오십오세, 이제 무슨 면허증입니까. 한 평생 무명시인으로 살 겁니다.” 그것이 뭐 그리 대단하다고 한 평생을 시를 사랑하며 충직하게 살아온 그분을 부끄럽게 하나 생각하니 모두가 부질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세상은 간판을 너무 좋아 합니다. 화려한 간판이 내용과 일치하면 오죽 좋으랴만 그렇지 못한 데서 우리의 허무는 생겨나는 것 아닐까요. 누군가 사랑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아무도 대꾸하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아무래도 그것은 말이어서는 안되고 그저 느낌, 울림, 그리고 영원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얼굴은 멀어져 가고 목소리만 다사롭게 들리는 밤이었습니다. 나는 숲을 향해 돌아선 채 손등으로 눈물을 닦는 J씨의 굽은 등을 바라보며 그의 외로움의 파장이 내게로 전이됨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이듬해 가을입니다.설거지를 하다가 우체부에게서 안내장을 받아 들었습니다. 고향인 C시에서의 문학인 대회 초청장이었습니다. 마치 고향분을 만난 듯 반가와서 물 묻은 손으로 봉투를 열었습니다.
어느 만큼인가 故 鄭承旼 詩人 묘소 참배.
나는 의아 했습니다. 정말 믿어 지지가 않더군요. 왠고하니 지난 봄 어느 문예지에 어렵게 추천을 마친 그 분께 나는 격려와 축하의 편지를 띄웠는데 곧바로 답신이 왔습니다.
그것이 지난 여름의 일입니다. 일행은 수몰 지구를 기억 속에 새겨 둘 듯이 차근차근 바라보았습니다. 마을과 사람묘소조차 모두 떠났다지만 그 곳에 마음의 고향을 둔 사람들의 아픔이 지나는 길손에게도 찡하니 울려 왔습니다.
다음날 계향산 양지쪽에 이불도 없이 누워 잠든 J시인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여름에 세워진 무덤이라 아직 풀 한 포기 얹혀 있지 않은 묘소가 어쩌면 J시인의 삶을 보듯 비애스러웠습니다. 그분은 후사가 없다 합니다. 또한 오십평생 넘도록 시를 썼지만 그때까지 작품집 한 권 남기지 못했습니다.
여러 문인들이 둘러 서서 소주를 따르고 분향하고 절하고, 그러나 어디에도 인간미 넘치는 J시인의 미소는 모이지 않고 걸걸하나 고운 목소리도 들리지 않았습니다.
내일을 모르고 앳되게 피어난 가을 꽃들이 바람에 흔들이기만 합니다. 나는 울지 않으려고 어금니를 꽉 물었는데도 콧등이 아리더니 눈물은 줄줄이 쏟아졌습니다. “LB선생, 늦게나마 추천을 받은 심정 부끄럽기 그지없소. 평생무명시인으로 살려고 했지만L 쑥스럽기만 하오L”
정말 그 분은 시인이 되기 위해 살아온 분 인지도 모릅니다. 혼자 좋아 혼자 쓰며 초연히 살다가 뒤늦게 추천을 마치고 몇 개월 사이에 떠났으니 나는 작년 여름 속리산 오리나무 숲에서 그토록 애달파 하던 그 분 생명의 예감을 지금 울고 있습니다. 그때 그분은 그것을 감지하고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나는 건방지게도 나이가 들면 비애가 소름 끼치듯 순간순간 스치나 보다고 무심히 지나쳤지요. 그 후 일년이 채 못 가 그 분은 땅에 눕고 우리는 그 앞에 섰습니다. 그분은 고인(故人)이요 우리는 산 자 입니다.
남은 것은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안타깝고 아름다운 기억뿐입니다. 아무래도 우리는 서로의 가슴에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 위하여 열심히 사랑하고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나는 무명시인을 만나기 위해 그 여름 속리에 있었고, 시인이 된 그 분을 만나기 위해 제천땅 계향산 양지에 서 있습니다. 우리는 나그네, 여름과 가을 사이, 죽음과 생존사이에 술 한잔을 따릅니다.
그곳에도 생맥주집이 있거들랑 J시인님, 나중에 다시 한 잔 하십시다.
시인이여,
부디 영면하소서.
(내륙문학 85. 여름 호)
11.어느 가을밤
반 숙 자
가을은 별리(別離)의 전령(傳令).
징검다리 건너듯 외로운 영혼을 골라 짚고 조용히. 내 창문 그 앞에 섰네. 나무 잎새들이 떨어져 누운 자리로 가을비가 치덕치덕 내리는 밤이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그녀의 목소리가 그날 따라 유난히 울멍울멍 했다. “선생님, 저예요. 너무 힘들어요” 빗속으로 잦아드는 그녀의 목소리를 놓칠세라 목청을 돋우어 ”P선생, 이리 와요. 기다릴께요” 그녀는 왔다. 어둡고 을시년스런 먼 밤길을 지나 내 앞에 섰다. 진한 커피 한 잔 마주하고 앉으면 아스라한 커피 향기가 몽환적인 연기 기둥을 세우며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우리는 이렇게 가끔 만난다. 가만히 마주보고 앉아 있노라면 어느새 꼭꼭 여며놓은 그녀의 외로움과 나의 연민이 하나로 합류되어 배음(背音)처럼 잔잔히 흐른다. 아홉 살, 여섯 살의 남매를 둔 청상(靑孀)이다.
저녁 식탁에서 유치원 다니는 아들녀석이 느닷없이 “엄마, 교장선생님 우리 아빠 하자” 졸라 대니까 “너무 늙어서 싫어” 1학년 짜리 딸애가 냉큼 반대 하고 나섰다. 시무룩해진 녀석은 눈만 깜박이더니 “그럼 교감선생님 아빠하자, 응?” 이제는 애원조로 엄마 품에 파고 들었다. 여기까지 띄엄띄엄 말하던 그녀는 안경알 속으로 흘러 내리는 눈물을 닦느라 손수건을 꺼내었다. “다 쓸데 없단 말야, 모두 가짜 아빠야.” 어린 가슴에 맺혀진 뜨거운 바람과 체념이 집약된 딸애의 한마디가 귓가에 맴돈다고L.
나는 그리그의 쏠베지 노래를 턴 테이블에 올려 놓았다. 겨울이 가고 봄이 오고 그 자연의 순환 속에 험집 난 상처가 소리없이 아물기를 바라며 애절한 선율 속에 서로를 맡기는 것이다. 언제부터 인지 내 주변으로는 이렇듯 아픔을 치르는 이들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20여년을 병상에 누워 희생의 제물로 봉헌하며 사는 누시아, 만성 간경화로 죽음을 준비하는 친구 희야, 그리고 멀리 배신의 아픔 속에 구원의 길을 글 속에서 찾는 인천의 K여사, 그들이 오갈 데 없는 네거리에 찬바람 맞으며 서 있다가 잠시나마 손 녹일 곳을 찾아 내게로 오는 이유를 나는 안다.
내가 위로를 베풀어서가 아니다. 허물릴 대로 허물어진 고목 같은 내게 무슨 사랑의 진액이 남아 있을까마는 이상스러운 것은, 상처는 상처끼리 비벼야 새살이 속히 돋는 이치이다. 역경 속에서 맺어지는 우정이야말로 평생을 잡아 매 주는 사랑의 끄나풀이 아닐는지. 그녀는 슬픔이 용해된 진한 커피를 한 모금씩 마시며 영영 돌아올 길 없는 페리퀸트를 기다리는 쏠베지가 되어 비 내리는 가을밤을 적시고 있다.
“P선생, 아가 아빠가 멀리, 아주 먼 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고 생각해요. 10년, 20년 더 후에 만날 거라고” 그러나 그것은 공허의 벽을 스치고 지나가는 한마디의 위안임을 내 어찌 모르랴.
나는 어머님이 떠나신 후로 저승이라는 곳이 그렇게 멀고 무서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을 종종 한다. 젖먹이가 목이 탈 때마다 엄마를 찾듯 그렇게 내 추위와 허기가 진할수록 더 간절히 생각나는 어머니. 그 사랑하는 어머니가 계신 곳이 비록 이승의 끝도 아닌 생판 다른 저승이라 할지라도 어머니가 그곳에 계시다는 생각 하나로 나는 그곳을 그리워 한다. 이것이 질기디 질긴 사랑의 연계(連繫) 아닌가.
“선생님, 정말 어떻게 살아가야 해요. 산다는 일이 두렵기만 해요.” 우리는 실어증 환자처럼 빗소리와 아련한 간주곡을 들으며 그냥 앉아 있었다. 금방 꺼질 것 같은 그녀의 생명이 모성의 불씨만 아니었다면 추운 겨울에 동사(凍死)하지 않고 견딜 수 있을까.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최대의 형벌 속에 사는 이브의 후예. 지금도 해거름만 되면 성급하게 문 열고 들설 것 같은 예감에 저녁마다 설레 인다는 변할 수 없는 사랑 때문에 그녀의 비애는 끝나지 않고 있는 것이리라.
누가 말 했던가, 여자는 약하지만 어머니는 강하다는 말을. 그녀는 일어섰다. 남매가 곤히 잠들고 있을 썰렁한 보금자리로 돌아가야 한다. 어두운 밤길로 우산을 받쳐 그녀를 보내면서 나는 그녀의 귓가에 들려줄 위안의 말을 생각 했다. “슬퍼하는 자여, 마음을 가라 앉히고 탄식을 거둬라. 구름 뒤에 태양은 언제나 빛나고 있을지니L”
롱펠로우의 시 한 구절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들려주며 하늘을 보니 찬비가 주룩주룩 내리고 있었다.
비가 그치고 나면 겨울이 오겠지.
(내륙문학 82. 겨울 호)
12. 立席人生
여행은 즐거운 일이다. 일상의 잡다한 현장에서 훌쩍 떠나 낯선 땅 생소한 사람 틈에 내려 멀찌감치 서서 나를 바라보는 멋, 그것이 매력이다. 쫒기듯 살아가는 시계추에서 한번쯤 외도(外道)하는 느긋하고 짜릿하고 감칠맛 나는 식욕이다. 우리에게 배당된 인생은 즐거운 여행, 그러나 미리 예약된 좌석에 알맞은 속도로 편안하게 하는 여행이 아니라면 그 인생은 입석처럼 서럽고 피곤하고 지루한 일생이리라.
지난 초여름 모내기를 끝내고 모처럼 서울 나들이를 했다. 이왕에 어려운 걸음 했으니 그간에 격조했던 혈육들을 만나보고자 언니 댁이 있는 신길동에서 아우가 사는 암사동까지 가는 길이었다. 신길동에서 시발하는 버스여서 우리 자매는 앞 뒤 자리에 나란히 앉았다.
서울이라는 곳은 나 같은 촌사람에게는 노상 초행길 같다.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모를 곳에 차는 잠깐씩 멎었다가 떠난다. 이 차는 어찌된 셈인지 내리는 사람은 없고 타는 사람들만 늘어 차 속은 이내 초만원을 이루었다. 코를 벌름거려 보아도 어디라 할 것 없이 피부에 묻어오는 눅눅한 열기, 서울만 오면 오장육부가 뒤집히듯 니글거린다. 나는 생리적으로 촌사람으로 안배 받은 모양이다.
골짜기를 치닫는 바람, 몸살을 끝낸 논에는 벼 포기가 연록색 파도로 출렁일테지. 나는 향수병에 걸린 아이마냥 기운이 빠져서 차 속을 이리저리 살펴 보았다. 어찌 된 일인가, 수 많은 군중 속에서 소름 돋는 고독은 밀려오기 시작했다. 미국도 아니요 일본도 아닌 내 나라 내 땅 수도 서울에서 이방인처럼 외로와 하는 까닭은 무엇인가.
옆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을 바라 보았다. 마치 구원이라도 청하듯, 그러나 그 사람은 아무 표정 없이 창 밖을 내다보고만 있었다. 그때 제 가슴짝보다 더 크고 무거운 책가방에 짓눌려 손잡이에 대롱대롱 매달리다시피한 중학생을 찾아내고 얼른 가방을 받아 안았다. 그제서야 안심이 되고 편안 해 졌다.
스피커에서는 소음 같은 음악이 넘쳐 흘렀다. 차가 멎더니 콧잔등에 송글송글 땀이 돋은 여고생이 올라 왔다. 커다란 수틀과 책가방을 각각 쥐고 서 있자니 차가 움직일 때마다 중심을 잡을 수 없는 모양이다. 아는 아무말없이 짐을 받아 안았다. 소녀는 상기된 볼에 복숭아 같은 솜털을 보이며 살풋 웃었다. 숫되고 귀여운 소녀이다,
몇 번의 정차 끝에 소녀는 떠밀리다시피 내렸다. 붐비는 사람 틈에서 나풀 나풀 손을 흔들었다. 나는 눈으로 웃었다. 누가 앞으로 나오더니 꾸뻑 하고 책가방을 들고 황급히 내렸다. 꼬마 중학생이다. 나는 느긋한 마음으로 눈을 감았다. 반시간 전에 느꼈던 추위는 녹고 차멀미도 조금 진정되는 듯 편안해졌다.
내 시야에는 잘 포장된 고향, M읍의 시골길이 떠 올랐다. 쭉 곧은 행길로 단발머리를 팔랑거리며 자전차를 타고 통학하는 소년, 소녀들, 어디 가나 청소년은 싱싱하고 깨끗하다. 대견스럽다.
모처럼 단잠이 들까 말까 할 때 묵직한 것이 무릎을 스쳐 갔다. 눈을 떠보니 젊은이가 책 꾸러미인 듯 싶은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쩔쩔매고 있었다. 입추의 여지없이 들어찬 버스 바닥은 크고 딱딱한 그 물건을 수용할 공간이 전혀 없었다. 비좁은 가운데 서로서로 조금씩 비켜는 서 주고 있으나 내려놓는 날에는 여러 사람의 구두 위에 실례를 거듭할 처지 여서 젊은이는 전전긍긍하고 있었다. 나는 용기를 내어 그 물건을 무릎 위에 받아 안았다. 학생은 말 했다. “감사합니다. 아주머니. 주문 받은 책이어서L.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어요” 머리를 긁적이는 학생의 남방 주머니 위에 K대 뺏지가 의연하다. 나는 빙그레 웃어 주었다. 자기 직업을 떳떳하게 말하는 젊은이가 믿음직스럽고 대견해서 였다.
얼마를 가자니까 다리가 저려 왔다. 젊은이는 시계를 보다가 미안한 눈길로 나를 쳐다보며 조바심치고 있다. 나는 지긋이 눈을 감고 짐짓 잠든 체 있으면서 조그만 버스안이 마치 우리네 인생의 축소판 같다는 생각에 잠겼다.
좌석인생과 입석인생은 신의 안배인가. 생명은 공평하게 받았으나 일자리 없는 사람들, 가정은 꾸렸으나 내 집 한 칸 없이 서성이는 사람들, 그들의 불안과 아픔은 저 젊은이처럼 초조하고 무기력하게 우리 사회도처에 깔려 있는 것이다. 이것이 입석인생의 설움이 아닐까.
차가 급정거를 하는지 앞으로 쏠렸다. 깜짝 놀라 뒷자리를 보니 언니는 단잠에 빠져 있다. 젊은이는 몇 번이나 머리를 조아리고 내려서 무거운 보따리를 들고 인파 속으로 사라져 갔다. 나는 젊은이의 뒷모습에 시선을 보내며 모성어린 기원(祈願)을 보내고 있었다.
(젠장 암사동은 얼마를 더 가야 나온 담) 나는 어항 속의 물고기가 숨을 트느라 수면위로 오르듯 차창 밖으로 목을 꼬았다. 우리는 다음 정류장에서 내렸다. 멈도 약한 동생이 애쓰는 모습이 안스러웠는지 언니는 날보고 어리석다고 했다. “언니 그건 그래. 난 태어날 때부터 나사 하나가 덜 조여졌나 봐” 나는 은근 슬쩍 웃었다.
우리네 한 평생 길고 먼 여행 길에 고만한 공유면적도 없다면 세상은 참말 살맛이 없을 거야.
어리석은 백치라도 좋다. 어디에 있으나 사랑하는 백치로 살고 싶다.
(내륙문학 82. 여름호)
13.진이의 재롱
꽃냄새 같은 남풍(南風)이 살랑살랑 불어 온다. 보드라운 바람손이 한나절 어루만지고간 과수원에 아가의 엄지 손톱만한 꽃눈이 잎을 피운다. 진이는 앙징스러운 발로 현관을 내려서더니 사과나무 오솔길로 기웃둥 기웃둥 달려간다.
앞뜰에서 새끼 강아지와 장난치던 어미개가 제 키 보다도 작은 아가를 귀여운듯 혀로 핥으며 따라 나선다. 새끼 강아지들도 장 구경 가는 사람들처럼 쫄랑쫄랑 따라 나선다. 아가는 “으응”, “으응” 하며 좋아서 어쩔 줄을 모른다. 이 광경을 보고있던 며느리가 기저귀를 개키던 손을 멈추고 기겁을 하며 달려간다.
나는 산골 하늘자락이 다 들어오는 마루에서 한 폭의 그림을 감상하듯 정겨운 모습으로 내다보고 있다. 이제 스물 셋에 접어든 며느리는 제자여서는 물론, 반듯한 마음씨가 사랑스럽다. 어린것이 아가를 낳았으니 대견하기도 했고 손자 놈에게 유달은 애정이 가는 것도 어떤 섭리가 아닌가 한다.
진이는 태어날 때부터 규격 미달이었다. 키도 그렇고 체중도 그렇고, 그러나 총명한 눈빛이며 시원한 이마며 다부지게 생긴 입매가 아가라기보다는 조그만 보석처럼 반짝였다. 몸이 약해서 이빨 하나만 내 놓고도 몸살감기를 앓았고 재롱 한가지 배우고 또 앓았다. 병원의 의사가 사람노릇 할까 걱정된다는 말을 하고부터 병약한 어린것에 더욱 더 측은한 정이 깊어 가는 듯하다. 이런 아가에게 질린 며느리는 “아이구 엄마, 애기도 귀찮아요. 밤에 잠을 자게 하나, 밥을 먹게 하나, 저만 안고 있으라니 말이나 돼요? 애기 진저리 나요.” 젊은 에미는 머리를 훼훼 내 돌렸다. “그러게 뭐라던, 제가 자식을 길러 보아야 부모 마음을 안다고, 다 그렇게 기르는 게야.”
나는 문득 마을 촌로들이 이웃집 아가 백일 잔치에 실 한 타래 사 줄 삼백원이 없어서 어정쩡 뒤란만 맴돈다는 사정을 알고 있다. 낳아서 고생하며 기를 때는 그것이 아니었건만 허망의 노후를 보내고 있는 수많은 부모들.
진이는 이제 생후 15개월 짜리다. 신장 71cm, 체중 11kg, 이렇게 왜소하지만 작은 거인이다. 저의 엄마도 아빠는 물론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그놈 앞에서는 맥을 쓸 수가 없으니 그러하다. 11cm도 채 못되는 발로 아장아장 안가는 데 없고 7cm짜리 손바닥으로 못하는 재롱이 없다. 양손을 번쩍 들고 아장아장 걷다가 짝짜궁도 하고 “여보세요”하면 쪼그만 귓바퀴에 손을 대고 듣는 시늉을 한다.
이놈이 하루는 찍어 붙인듯 작은 입으로 느닷없이 “음마” 하는 게 아닌가 깜짝 놀란 며느리는 아가를 업고 달려 왔다. “엄마, 얘는 송아지가 될려나 엄마소리는 못하고 음마라고 해요.” 나는 한동안 깔깔 웃었다. “엄마 소리를 못 할 바에야 음마 소리라도 하는 게 낫지. 잘했다 아가야.” 엄마 등에서 풀려난 진이는 내 목을 가느다란 팔로 얼싸안고 볼을 비빈다. 젖내가 비릿하다. 세게 비비면 터질 것 같은 작은 볼, 나는 담싹 끌어 안고 눈을 감는다. 이 아가를 안을 때마다 나는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 그 순간만은 나는 죄인이 아니기를 바라면서 최대의 선과 아름다운 마음으로 사랑의 젖줄을 물리는 것이다. 한참 그러고 있던 진이는 충전된 전지모양 발그레한 입술로 “음마!” 했다. 노란 병아리가 삐약하는 소리보다 더 곱다.
나는 곰곰 생각했다. 진이가 음마라고 하는 데는 분명 사연이 있음을 알기 위해서 였다. 콩콩콩 대청을 반 달음으로 달리던 진이가 멈칫 멎는가 하더니 진저리를 친다. 며느리가 달려가서 바지를 까 내리니 기저귀 속에 들었던 고추가 힘차게 오줌을 내 깔렸다. 그때 이놈은 “음마” 하고 나와 저의 어미를 번갈아 보았다. 맑고 깨끗한 눈망울이 낯익다는 생각이 났다. 그 눈망울은 깜박깜박 했다. 어디서드라, 착하디 착한 저 흡사한 눈빛을 본 것이L
옳지, 나는 무릎을 쳤다. 바로 진이네 외양간이다. 진이 돌 때 증조 할아버지께서 기념 선물로 자 주신 목매기 송아지가 양지쪽에 누워 늘 그랬다. 커다란 눈을 껌벅거리며 “음매, 음매, 음매-“ 금방 젖 떨어져 나온 이 목매기는 밤낮없이 목이 칼칼해도 음메를 찾고 캄캄한 밤 어두움이 무서워도 음메를 찾았다. 추위가 기승을 부릴 때마다 목젖이 떨어 지도록 음메를 불렀다. 그리고 보니 우리 진이 귀에도 그 소리는 노상 들렸으리라. 송아지가 외양간에서 “음메” 하며 진이는 안방에서 “음마” 하고 받고, 그러다 보니 은연중에 습관처럼 하나의 언어로 붙 박혔을 게다. 진이는 칭얼칭얼 엄마 품으로 파고 들더니 몇 모금 젖을 빨고는 스스로 잠이 든다. 잠든 모습은 더욱 귀엽다.
백일쯤 되었을 때 배내 짓 하는 얼굴은 아가가 커서 성인이 되기까지 세상 어머니가 치뤄야 하는 모든 고통을 보상해 주는 커다란 선물임에 틀림이 없다. 진이는 작은 입술을 오물거린다. 젖 빠는 시늉이다. 강아지와 노느라 얼굴에는 땟물 화상이 요란하게 그려 졌건만 배시시 웃는 저 얼굴은 필시 대자대비 부처님의 얼굴이 아니랴. 아니 구보다 더 아름다운 가브리엘 천사가 아니랴.
선인(先人)들이 이르기를 꽃 중의 꽃은 난이요, 매화라 하였건만 나는 감히 꽃 중에 꽃은 사람과 사람이 피워 낸 꽃- 사랑스러운 아가라고 서슴없이 이르고 싶다.
(법륜 82. 8월 호)
14.體 溫
나의 가을은 감기로부터 시작 한다. 밤낮의 기온차가 심해지고 선들선들 선들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달리기 출발 신호인 듯 재채기가 시작 된다. 골머리가 따끈따끈 해지고 등어리에 오한이 오르락 내리락 하면 기다렸다는 듯 재채기가 줄나팔을 불어 댄다. 식구들은 이런 나를 보고 벗을 줄 모르던 반소매 옷을 벗어 놓고 한철 내내 여름이고 싶은 맨발에 양말을 신는다. 요는 우리집 기상대에 정녕 가을이 왔다는 농담과 함께.
고뿔 정도 뭐 그리 엄살이 심하냐고 비아냥 거림도 아랑곳 없이 간단한 침구를 깔고 무작정 눕는다. 어느 한시 편해 볼 날 없는 내무장관직에서 잠시 물러나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은 것이다. 아무리 핑계를 대 보아야 신척 안하던 식구들도 머리에 손을 얹어 보고는 그저 눈 딱 감고 쉬라고, 푹 쉬어야 낫는다고 최대의 친절을 표해준다.
속으로 깨소금 같은 쾌재를 부르며 짐짓 아파서 죽겠다는 시늉을 한다. 또 코맹맹이 소리로 다리 주물러라 허리 주물러라 잔소리를 늘어 놓으면 남편과 아이들은 쉬쉬 모두 각기의 방으로 피해 도망친다. 이때다 하고 얼음주머니를 머리에 얹어 놓고 모처럼 호젓한 마음이 되어 모짜르트를 듣는다.
눈을 감는다. 헤드폰을 통해 들려오는 감미로움은 적당히 열에 뜬 영혼과 육신을 해면체처럼 흐늘흐늘 휘어저 놓는다. 싹둑싹둑 가위질한 종이처럼 잊어 먹고만 편지 답장도 이런 때 쓰게 되고 멀리 가까이 기록해 두고 싶은 일도 이런 때 정리된다. 허둥지둥 살아 왔다는 뒤늦은 자책과 실수연발 하던 지난 날이 큰 부채가 되는 것도 이런 시간이다. 이제는 조금씩 가사일에서도 여유가 생긴다. 아이들은 모두 자랐고 부모 곁에서 떨어져 나가고 싶어 안달이다. 말끝마다 제일은 제가 알아서 하겠으니 이제 걱정 마세요. 막내 입에서 이 말이 튀어 나왔을 때 나는 속으로 얼마나 섭섭해 했던가. 속 좁은 어미였지.그만큼 몸도 마음도 생각까지도 훨씬 커버린 아이를 캥거루가 뱃가죽 속에 넣고 다니듯 잡아 두고 싶어 했으니L
아이와 같이 이제서야 나도 철이 드는 모양이다. 발소리 까지 죽여가며 혼자 앓고 싶어하는 내 허영에 동참해주는 식구들이 오늘따라 든든해지는 것은 나도 울타리의 든든함을 조금씩 터득하는 나이가 되어서 일까.
모처럼 이다. 내 집 문안 말고 밖을 내다 보기는, 앞집 이층 담벼락에 기어 올라가는 담쟁이 넝쿨 그 이파리 속속들이 가을이 불질러 놓고 간 진실의 얼굴을 바라 보는 것도, 여기저기 가로 막혀 그저 깊은 우물 속처럼 보이는 하늘을 바라 보기도. 눈을 거두면 뜰 가득 국화가 담뿍 피었음도, 꽃이 꽃으로 다가서고 하늘이 옹달샘처럼 맑아 보이기도 모처럼이다. 죽지 않을 만큼만 아파서 한 닷새 조용히 누워 내화(內化)의 물결을 헤아리고 싶어 했다.
그때 였다. S대 병원에 입원하여 큰 수술을 받았다는 친구의 소식을 듣기는. 부랴부랴 자리를 털고 입원실로 들어 섰다. 사색이 된 친구는 그저 목숨이 붙어 있어 사람이지 하나의 고통덩어리일 뿐이었다. 수술 4일째가 되도록 가스가 나오지 않는데다가 같은 곳을 두번씩이나 재수술을 했으니 그 상처의 아픔이 오죽하랴. 좌불안석을 못하는 친구를 바라보고 있으려니 터럭 끝 만치도 도움 되지 못하는 철저한 자기 몫의 생명임을 절감 할 수밖에 없었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혼자의 생애를 혼자서 살고 자기 혼자의 죽음을 혼자 죽는다는 덴마크의 작가 야곱센의 말이 진리였다. 그것을 알기 때문에 사람들은 더 외로워 하고 사랑을 나누려 하는지 모른다.
병원에서는 하루 두번의 면회시간을 주고 있다. 이때 쯤이면 병원 뜰은 인정의 성시를 이룬다. 서로서로 고통을 나누려, 병상의 외로움을 달래 주러 부산하게 모여든다. 사실 나눌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는데도 그렇게 함으로써 고통과 외로움을 조금씩 망각할 수 있는 것은 다행한 일이다. 이것은 건강한 쪽의 사람 생각이다. 어떤 친구는 면회시간이 지나고 나면 더 비참해져서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한다.
하늘을 덮은 상수리 나무가 조용한 변신을 위해 조금씩 이파리를 거두워 들일 때 친구는 퇴원을 했다. 부축하고 있는 친구의 팔에서 따뜻한 체온이 전해 왔다. 나는 하늘을 우러러 이렇게 외치고 싶었다. “네가 이 세상에 살아 있다는 한가지 생각만으로도 내가 삶을 단념하지 않게 하기에 충분해” 토스또예프스키가 ‘까라마죠프의 형제들’에서 이반의 입을 통해 한 말이다.
자꾸 눈앞이 흐려졌다. 감사의 눈물이었다. 병원 뜰에서 오만불손 했던 자신을 질책하며 무시로 터지는 방귀 한대도 내가 살아 있다는 확실한 실존임을 알게 되었다. 또한 하루하루 연명해 가는 일상도 대단히 위대한 생의 축복임도 아울러 알게 되었다.
따뜻한 손길이 그리워 지는 계절이다. 체온은 살아 있음의 증명서, 서로에게 감응되어 차디찬 심장까지를 데워주는 생명의 징후.
사자(死者)에게는 체온이 없다. 아무것도 나눌 것이 없다.
(충북수필 85.창간호)
15. 가난한 부자
지난 여름. 마치 홍역을 치르고 난 아이처럼 휘청거리는 다리로 과수원을 한 바퀴 돌았다. 아침 이슬이 파랗게 내린 풀섶은 영롱한 구슬이 구을고 엊그제 씨를 넣은 열무 밭엔 씨를 물린 열무 잎이 속속 솟아나고 있다. 내가 아팠던 며칠, 상치는 냉큼 커서 꽃망울을 줄줄이 달고 섰고 땅을 기던 호박 넝쿨은 어느새 기어 올라 아카시아 나무 기둥을 칭칭 감았다.
가슴을 활짝 편다. 기지개를 켠다. 푸성귀 냄새 같은 바람이다. 달그므레한 젖내 같은 바람이다. 피부 깊숙이 와 닿는 새벽의 맑은 공기에 몸살기가 가시는 듯하다. 미루나무 상수리에 까치 한 마리가 둥지를 트는지 바쁘다. 깍깍 짖는다.
반가운 소식이 오려나. 우리집의 여름 아침은 이렇게 열린다. 쌀을 안쳐 스위치를 넣고 큼 밭을 한바퀴 돌아오면 바지 가랭이는 이슬에 젖어 후줄그레 하지만 시장바구니에 든 아침 찬거리는 싱싱하다. 연하디 연한 봄 배추 한 다발, 야들야들한 아욱 한 모숨, 파 서너 뿌리, 당근 한 개, 파는 이도 나요 사는 이도 나 혼자이니까 내 맘대로인 채소 전. 봄이면 냉이가 지천이고 달래는 양지쪽에 남 먼저 돋는다. 철철이 도라지, 우엉, 가지, 오이 업는 것 없이 성시인 우리집 텃밭.
그래서 나는 가난한 부자임을 자처한다. 누구라도 찾아오면 그저 반가와 손잡는 마음, 푸성귀라도 나눠 주어야 마음 놓이는 촌부, 내가 남에게 줄 것이 하나라도 있을 때는 나는 가난뱅이가 아니다. 가난뱅이가 웬 말씀, 아흔 아홉 섬 가진 자가 한섬 가진 자 넘보는 그게 아니고 한섬 있어도 이웃과 나누고 싶어하는 마음 조각 있으면 그게 부자다. 나는 부자다. 모두 하느님께 공짜로 받았으니 나도 공짜로 나눠 갖고 기쁨을 나누면 은혜는 몇 곱절로 커져서 우리는 따뜻해 진다. 다만 위선 없는 가난한 부자이기를 바라고 노력하며 산다.
조석으로 매달려 가꿔온 내가 있어 무럭무럭 자라는 줄 알았지만 내가 몸살로 누워 있는 그 동안 이네들은 더 푸르고 싱싱하게 크지 않았는가. 내 손길이 아니라도 더 신실한 손길이 이들을 기르고 있다는 보이지 않는 창조주의 존재를 실감시켜 준다.
어느새 오이 싹은 덩굴 속에 손 길이만한 오이 한 개를 뉘어 놓고 싱글벙글 웃으며 덕으로 올라간다. 나는 소중한 보물을 따듯 두 손으로 받쳐 들고 기도 한다. 첫 열매에 대한 애착과 보람은 유다르다. 그래서 나는 내 밭에 열리는 첫 열매를 딸 때마다 엄숙해지고 가슴 두근거리는 환희에 기도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자연과 함께 그 일부가 되어 생활하다 보면 참으로 오묘한 섭리에 놀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온 밭에 제멋대로 피었다가 지는 작은 풀꽃 한 송이도 하는님의 축복을 찬미하는 천사인 것을 알게 된다.
나처럼 부족한 인간도 드물 것이다. 언젠가 언니에게 드리는 편지에 이런 말을 했다. “작은 것에 부어지는 하느님의 사랑을 수시로 느끼며 묵상에 잠기면 현세의 나는 귀머거리요, 부끄러운 에미요, 칠칠치 못한 여인이지만 거기 천상의 나라에서는 가장 가까이서 사랑하는 주님을 바라보고 살 수 있는 착한 영혼이기를 열망해요”
정말로 나는 보청기를 가슴에 매달고 살아가는 결함 투성이 인간이다. 80Db의 청력을 잃고서 정상인들 틈에 뿌리를 내리고 살아간다는 일은 참으로 힘겹고 고달프다. 보청기의 볼륨은 나날이 높아 가고 음계는 한 옥타브씩 하강한다. 고음 상실 증의 청력마비, 그래서 왕왕거리는 보청기를 사랑의 인장처럼 가슴에 달고 풍진 세상을 건너가는 나. 세상살이가 힘에 겨울 때 나는 묵묵히 십자가 앞에 꿇어 앉는다. 내가 드릴 말씀도 잊은 채, 그렇게 한없이 수난 당하시는 그분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내 가슴은 참회의 아픔으로 갈갈이 찢긴다. 나의 십자가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그래서 나의 위로는 십자가 뿐이요 나의 희망도 십자가의 부활 뿐이다.
볼륨을 최대한으로 높인 음악에 나를 첨벙 담그고 누우면 소리없이 오시는 그분의 발소리가 가슴에 새겨지고 그분이 다녀가신 자리엔 언제나 넘치는 평화가 고여 있음을 발견한다. 그래서 나는 불행에도 실망하지 않고 기쁘게 살 수 있는 것이리라.
나는 농사를 지으면서 노동함으로써 얻어지는 행복 이상가는 기쁨이란 세상에 다시 없다는 어느 분의 말에 공감한다. 오늘도 나는 고달픈 일과를 마치고 자리에 누우며. “누운즉 마음 편하고 단잠에 잠기오니 야훼여, 내가 이렇듯 안심하는 것은 다만 당신 덕이옵니다”.(시편 4;8)
감사의 기도로 하루의 막을 내린다.
(기독교 여류 문인 수상집 82. 9)
16. 겨울이 오는 길목에서
시월도 중순에 접어 들면서 뒤란 장독대에 쏟아지는 햇살이 한결 엷어졌다. 들판은 서서히 황금 물결에서 허허로운 벌판으로 변해 갔다.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라고 떠들썩하다. 나는 책 좀 읽자고 평소의 버릇대로 주방에는 신문을, 화장실에는 수필집 한 권을, 안방에는 논어를, 서재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을 비치해 놓고 진지하게 읽자고 다짐하나 허사다.
책 한 페이지를 읽는 동안 창 밖에서 부르는 소리 뜨거운 손짓 때묻은 내 영혼까지를 씻어 내릴듯한 청정한 햇볕과 바람과 앉아 있어도 밖으로만 치닫는 늦가을의 여심. 나는 바구니를 챙겨 들고 밖으로 나갔다.
과수원 가득 우리집의 가을은 익어가고 있었다. 호박덩굴을 헤치고 애호박을 따다가 양지를 골라 호박고지를 썰어 널고 깻잎 부각도 가지런히 널고 댓돌에 앉으니 세상 아무것도 부러운 것 없이 평화롭다. 노랗게 물든 깻잎을 딴다. 송이마다 까뭇까뭇 열매를 보듬고 풍성했던 가을을 전송한다. 어떤 잎은 소슬바람에 조차 사그락 떨어져 내린다. 한잎 또 한잎 채곡채곡 따 모으는 내 손끝에서 가을은 점차 사라지는 것이다.
애고추 지고추를 따 들이고 고구마 줄기도 넉넉하게 따서 삶아 말린다. 가지는 끝물이라 못생겼지만 열 십자로 칼집을 내어 빨래 줄에 넌다. 누가 푸짐하게 먹는다고 손가락 한 개 성한 것이 없도록 극성스럽게 따 들이느냐고 그이의 핀잔을 받으면서도 연일 들로 밭으로 내 닫는 속셈은 비밀스러운 음모다.
나는 그 일 속에서 내가 따뜻한 여성임을 부지런 하고 알뜰한 아낙임을 확인하고 싶은 것이다. 정갈하게 말려서 몫몫이 비닐 봉지에 갈무리 할 때 나는 참 행복해진다. 눈 쌓인 겨울에 가을 보따리를 풀고 다시 한번 즐거웠던 회상에 잠기는 멋, 얼마나 즐거운가. 멀리 있는 부모님께 며느리의 정성을, 아이들에게는 엄마의 사랑을, 친구에게는 변치 않는 옛정을, 다독다독 꾸려 보낼 양이면 추운 겨울도 녹아 내리겠지.
탐스런 사과를 딴다. 손바닥 가득 행복을 딴다. 땀 흘린 만큼의 수확을 공평하게 받아 들고 감사하는 농부의 주름진 두 손안에 진실이 고인다. 나도 힘겨웠던 지난 계절은 깡그리 잊고 공짜로 얻은 오늘인 양 마냥 기쁘다. 이렇듯 계절을 내 손으로 따면서 내가 남자 아닌 여자로 태어남을 얼마나 다행스럽게 생각하는지, 세상을 휘두르는 남정네의 업적도 위대 하지만 더 많은 곳에서 흔적 없는 일에 여인만의 아픔을 묵묵히 견뎌내며 사랑과 정성을 쏟고 사는 여인들이 있어 세상은 아직껏 따습고 살만한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단명한 여인처럼 서둘러 가을해가 지고 나면 노을이 토해 놓고 간 각혈 한 사발, 들녘은 취해서 불그레하다. 나는 잠시 발걸음을 멈추고 우주의 생멸을, 고요한 눈으로 바라보며 인간의 종말을 묵상한다. 언젠가는 돌아가는 나그네의 여로. 착하게 살아야지.
치마폭 가득 계절을 따 담고 논둑 길을 걸어오며 아름다운 내 조국에 순하디 순한 충청도 여인으로 태어나 사랑하며 살아가는 나는 분명 축복 받은 생명임을 무한히 감사하는 것이다.
(충청일보 81.11.19)
17.農路散策
한낮의 무더위도 저녁 해거름이면 누그러진다. 오래간만에 냇 바람이나 쏘이고 싶어 가벼운 산책 길에 나 섰다. 모를 심은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논에는 쭈빗쭈빗 벼 이삭이 올라 온다.
초록바다 같은 들판에는 바람이 쓸고 지날 적마다 싱그러운 파도가 일렁인다. 날씨도 순조롭고 병충해 방제도 철저히 해서 올 벼농사는 대풍일거라고 흐뭇해 한다. 눈을 주는 고추 밭 이랑마다 모닥불이 타 들 듯 붉은 고추가 주렁주렁 열렸다. 어느 사이 수숫대도 긴 목을 뽑아 들고 술렁이고 있다.
꼬불꼬불한 농로(農路)에는 소꼴을 잔뜩 짊어지고 소꼴뱅이를 쥔 농부들이 서둘러 지나간다. 어미소를 따라 겅중겅중 뛰어가는 송아지이 모습이 천진스럽다. 저 소는 옥이네 누렁인데 엊그제 아침나절 냇가에 매어 놓고 저녁에 데리러 갔더니 새끼를 낳아 핥아주고 있더란다. 보드레한 풀 밭에서 혼자서 해산을 하고 어미소는 냇물을 마시면서 세상을 다 얻은 듯 푸근했을 게다.
지나가던 마을 아저씨가 지게를 내려 놓는다. 고추마대가 잔뜩 지어져 있다. “고추농사 잘 지으셨어요?” “풍년이다 마다. 풍이니께 값이 말이 아니여. 지난 장날 한 근에 칠백원씩 넘기는 걸 보니 매가리가 다 빠진다 이거여.참 큰일이제. 선생은 글을 써서 신문에도 낸다니께 허는 얘긴데 그 얘기 좀 써 줄수 없을까. 적선하는 셈 치고 말여.” 언제 왔는지 용이 아버지가 거들었다. “저번에 다 죽어가는 황새도 신문에 한번 나고 살아났다며? 거 보라고 . 아, 우리가 황새만도 못하단 말인가. 이런 형편을 다 쓰면 무슨 방도가 생기겠지.” 나는 이럴 때 난감해 진다. 흙에 묻혀 조용히 슬면서 유명한 사람이 아닌 것에 만족해 왔는데 오늘은 무명한 내가 한스럽다. 내 무슨 능력 있어 저들의 힘이 되겠는가.
교직을 떠나 시골에 묻히면서 내가 얼마나 배겨 낼 것인가, 사실은 의문이었다. 그러나 한해 두해 어언 10년을 살다 보니 탯줄 같은 끈끈한 인정이 나를 잡아 맨다. 시속이 변해 시골 사람도 약아빠졌다고 개탄하는 사람도 더러는 있지만 아직은 그래도 사람 냄새 나는 이는 시골에 더 많다. 꾸밀 줄 모르는 사람들, 부동산 투기로 떼돈 버는 재주는 없지만 개미처럼 일하며 정직하게 사는 사람들, 땀 흘린 만큼만 바라고 사는 못나디 못난 착한 사람들. 나는 언제부터인지 이들의 못남까지 사랑하게 되었나 보다.
경운기가 탈탈거리며 내 닫는다. 거기에도 바리바리 고추가 실려 있다. 온 마을 온 고장이 고추가 주농산물인데 어쩔거나.
여름 저녁 서늘한 들바람이 왜 이리도 허허한가. 마을쪽에서 쑥내음 모기향이 은은히 코끝을 스쳐간다.
(충북 문협 회보 83.8.30)
18. 등나무 집 형님
방아 찧으러 시골 다녀온 그이 손에 올망졸망 보따리가 많았습니다. 마루에 꺼내 놓고 보니 영락없는 시골 채소전 입니다.
형님. 형님께서 바쁘신 추수 일손 짬을 내어 봉지마다 정을 채워 넣으신 것을 알고는 왜 이렇게 마음이 훈훈해 오는지요. 까만 비닐 빽에는 싱싱한 홍고추가 들어 있구요, 감자도 한 봉지, 호박순도 형님의 체온이 채 가시지 않은 듯 꼬옥 접혀 나왔습니다. 비료부대에 길다랗게 싸 넣으신 게 무언가 했더니 텃밭에다 기르시는 대파다발 이었습니다. 파뿌리에 고물처럼 묻어 있는 흙내음을 맡으며 어쩐지 그 구수한 내음이 코에 익은 형님의 내음임을 기억합니다.
당신곁에 있을 때나 떠나 있을 때나 저는 참말이지 당신 앞에 철부지 사촌동서 그뿐인데 형님은 한결같이 이렇게 묵묵히 우애를 나누어 주시니 감읍하옵니다.
형님, 올해도 형님 댁 문전에는 등꽃이 아름답데 피었었나요? 슬하에 팔 남매를 모두 출가 시키고 이제 시숙님과 내외분만 큰 집을 지키며 농사짓는 알뜰하시고 부지런하신 형님.
언젠가 5월 이었습니다. 과수원 적과할 일꾼을 얻으러 나섰습니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마을로부터 불어오는 상큼한 바람에 전신이 나긋나긋 녹아 나는 듯 했습니다. 그 향내는 차츰차츰 짙어지더니 어느덧 발걸음이 형님댁 바깥마당에 멈춰 있었어요.
그 넓은 기와지붕이 온통 초록빛 우산을 받쳐들고 연연한 보라 빛 등꽃은 송이마다 환하게 연등(燃燈)을 밝히고 있었습니다. 마침 형님 내외분은 대문만 지쳐둔 채 들로 나가시고 중풍을 앓던 강아지가 뒷다리를 덜덜 떨며 기어 나오고 있었습니다.개 이야기가 생각나니 형님, 웃음이 절로 납니다.
식구도 없고 적적하다시며 잡곡 한 말 내다 주고 사오신 강아지 였지요. 제 또래의 고양이 한 마리와 한그릇 밥을 먹으며 토실토실하게 크다가 어느날 갑자기 중풍이 일어 반신불수가 되었다구요. 동네 사람들은 모두 내다 버리라고 성화였지만 형님은 괘념치 않으시고 정성껏 돌보시더니 거의 일년 만에 건강을 회복했지요. 그때 내다 버리라고 한 사람중에 저도 한 몫 끼어 있었는데 미물의 생명까지 소중해 하시는 그 어지심이 보배로운 추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형님, 저는 뜰로 들어 섰습니다. 하두 우스꽝스럽게 기어 나오는 강아리를 보고 혼자 웃다가 꼬리를 치는 바람에 그만 못할 짓을 한 듯 심히 부끄러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숲을 이룬 등나무를 올려다 보았지요. 사랑 방 문 앞까지 치렁치렁 늘어진 등꽃은 정말 장관이었습니다. 대문기둥을 의지해 서로 부둥켜 안고 새끼 꼬듯 올라간 줄기가 퍽 인상적 이었습니다. 그날 집으로 돌아와 국 사전에서 등나무에 대해 알아 보았습니다.
등(藤)나무 : 콩과에 딸린 전요성나무, 동양 특산이며 흔히 관상용으로 심음. 이렇게 나와 있더군요. 그러데 또 한가지 의문은 전요성이란 뜻이었습니다. 다시 사전을 폈지요. 전요성: 스스로 바르게 서지 못하고 다른 물건에 감겨서 벋어 올라가는 덩굴진 줄기. 그제서야 알았습니다.
형님, 부부는 모두 전요성처럼 서로 희로애락을 함께 나눈 애정으로 감겨 세월 속에 많은 꽃송이를 피우는 것을. 더구나 형님께서는 종가집 종부로서 봉세사 받들며 손아래 시동생들을 사촌까지 합하여 다섯분을 거두셨고 온 집안 대소사에 여름철 등나무 그늘 같은 후덕함으로 한 평생을 살아오셨습니다. 신식살림 한답시고 가마솥을 없애버린 저를 위해 해마다 손수 큰 가마솥에 메주까지 쑤어 주시는 친정 어머님 같은 당신이셨습니다.
형님, 이제는 서울 이야기를 해야겠습니다. 시골서 사십 평생을 살아 온 제가 뒤 늦게 서울살이를 하고 흠칫흠칫 놀라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닙니다. 이곳 사람들은 저울을 좋아하는 모양입니다. 시장에도 상점에도 또한 가정에도 저울이 있습니다.
홍고추 몇 개도 저울에 올라가고 콩나물, 마늘 몇 톨까지 모두 저울에 올라 갑니다. 그리고 진짜냐 가짜냐 신경을 곤두세웁니다. 형님, 더욱 놀라운 것은 사람도 저울에 단다는 사실입니다. 그 사람이 갖고 있는 재물과 권력, 능력까지 철두철미 유용성에 의해 저울질 된다고 합니다. 어떤 사람은 아파트의 평수가 곧 행복의 평수인 양 착각하고 있는 이도 많다고 합니다.
정작 제 무게로 달려야 할 사람의 목숨은 중량을 잃어가고 잡동사니가 판을 치는 현실이 근대화된 삶이라면 그냥 밭 갈고 씨 뿌리며 사는 일이 훨씬 사람답다는 생각입니다.
사실은 저도 저울을 좋아 합니다. 항상 감정의 기복으로 평형을 잃고 사는 제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스스로를 다스리는 준엄함을 좋아하는 것은 하나의 바람입니다. 저울처럼 제자리에, 영의 상태로 비울 수 있다면, 그렇게 반듯하게 살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푸성귀 한 다발, 쑥버무리 대접도 푸짐스럽던 형님의 그 넉넉함이 사무치게 그리워 오는 요즘입니다. 두엄 냄새까지 덤으로 따라온 형님의 선물을 받고 제가 이렇게 소생하는 것은 실은 저울에 달지 않은 그 마음 때문이란 걸 알아 주세요.
형님, 오늘 저녁 식탁에는 손수 넣어 주신 담북장을 올렸습니다.예쁘게 빚어 파는 이곳 담북장보다 냄새며 담백함이 일품이군요. 조미료를 많이 넣어 입맛을 돋구는 식단보다는 자연의 맛을 그대로 살리는 형님의 솜씨가 진국입니다. 우리들의 사는 일도 그런 것 아닐까요?
형님, 도시의 밤이 깊어 갑니다. 지금쯤 뒷동산 산제당 골짜기에 밤새가 울다 잠들겠지요. 고마우신 형님, 수확의 계절 아주버님과 함께 좋은 가을 맞이하소서.
(수필공원 84. 겨울호)
19.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
처서가 지나면 건들마는 간단없이 한 차례씩 지나간다. 이맘때 쯤이면 나무들은 물 걷기를 시작하면서 조금 씩 잎을 태워 동면을 준비 한다.
아마 그때쯤 이었나 보다. 그이는 밤마다 사과 밭으로 나갔다. 할일 없이 나무사이를 오가기도 하고 몽유병자처럼 암흑 가운데 우뚝 서서 삼경(三更)을 보내기도 했다. 전국 어느 곳엘 가 봐도 울타리 없는 과수원은 이곳 음성(陰城) 밖에 없다던 과수원 마을에, 올 가을부터 수령 십년, 이십년이 넘는 사과나무를 캐는 작업이 한창이다. 비싼 소독약 뿌리고 비싼 비료주어 일년 농사 지어봐야 생산비 건지기도 힘드니 공들여 키워 온 나무를 베어버리는 그들의 심중은 알고도 남는다.
서리가 하얗게 내리던 밤이었다. 잠이 안 온다고 담배만 피우던 그이가 “임자 자나?” 잠결에 들려온 그의 목소리가 푹 가라앉아 있었다. “임자, 과수원 하기도 힘들지? 몸도 약하고 소독약 중독돼 얼굴 붓고LL” 혼자 중얼거리는 그이의 저의를 직감할 수 있었다. “그냥 둬요. 이십년이나 길렀어요. 자식 기르듯이.” 그이는 망연히 담배 연기만 날리고 있더니, “이렇게 가다가는 자식 놈 둘 대학 공부도 못 마쳐.” 한마디 내 뱉고는 휑하니 밖으로 나갔다. 다른 공산품은 원자재 값이다, 가공료다 하고 가격 현실화를 했건만, 농산품은 마치 맹물 먹고 자라는 콩나물로 아는지 제자리 걸음이다.
농민은 고독하다. 혈기 있고 교육 받은 젊은이는 도시로 빠져나가고 남은 것은 텅 빈 집과 노인과 부녀자 뿐이다. 어디 살기 힘든 곳이 농촌 뿐이랴. 하지만 국민 전체의 식생활을 담당하고 있는 농촌이기 때문에 그 심각성은 농촌에 한한 것만이 아닌 국민 전체의 것이 아닐까.
스무하루 그믐 달빛이 창으로 비쳐 들고 있다. 서울에서 공직에 있던 그이가 과수원이 좋다고 고향으로 내려온지도 사반세기가 흘렀다. 삼십대 초반의 장년이 이제 지명의 황혼 길에 서서 어느덧 자신도 한 그루의 사과나무로 변신 되어 있는 것을 발견한 순간, 한 치도 숨돌릴 수 없는 급박한 현실에 밤마다 몸으로 우는 그의 아픔을 나는 안다.
그이가 좋아 한 이상으로 나도 사과나무를 좋아 했다. 가지마다 화사한 요정을 달고 섰는 봄 나무가 좋고 짙푸른 생명력으로 주어진 생(生)을 열성껏 살고 있는 여름 나무도 좋지만 인고(忍苦)의 결실로 탐스러운 열매를 주렁주렁 달고 섰는 가을 나무는 충만한 은혜로움으로 우리의 영혼을 살찌게 해 더욱 좋다.
그러나 더더욱 좋은 것은 모두를 돌려 보내고 살을 가르는 동천(冬天)에 빈손으로 서서 묵묵히 사색하는 겨울나무는 나의 스승이요 벗이요 연인이었다. 검지 손가락 같은 묘목을 심은 게 엊그제 같은데 두 팔 안에 뿌듯이 안겨오는 나무의 몸매, 그 안에 우리의 생활이 연륜으로 무늬 져 있다.
방문을 열고 뜰에 내려서니 달빛이 시리도록 천지가 적요하다. 그이는 온데 간데 없고 어디선지 부엉이 울음소리만 간헐적으로 들린다. 한기(寒氣)에 팔장을 끼고 큰 밭으로 주춤주춤 가보니 사과나무 둥치를 껴안고 울고 섰는 그이. “으흐흐 으흐흐” 나무를 껴안다 두드리다 얼굴을 비비며 흐느끼는 그이, 나무 뒤에 숨어 서서 하늘을 바라보니 잎 지는 가을밤 그 스산함이여.
천지가 백설로 뒤덮인 겨울에도 신의 음성을 들으며 찰그락 찰그락 순을 치다 보면 어느새 가슴으론 시냇물이 도올돌 흐르고 꽃망울 트는 소기가 귓가에 와 맴돈다고 했다. 깊게 잠든 삼라만상을 바람이 두드려 깨우는 3월이 오면 우리는 사과나무 등피를 긁어주는 작업에 바빴다. 월동한 병충알, 때묻은 표피를 벅벅 긁어 주다 보면 짐스러운 체면, 탐욕의 인간사도 가끔은 사과나무처럼 말끔히 긁어내 태워버리고 싶어진다.
보숭보숭한 솜털을 두르고 겨울을 나는 꽃눈의 지혜 또한 놀라웁고 다투어 꽃피고 잎 피는 그 순리(順理), 얼마나 기묘한가? 흰 듯 발그레한 연연한 꽃 이파리. 봉오리마다 은은히 피어 오르는 순백의 향연, 눈물인 듯 감격인 듯 달밤을 휘두르며 퍼내는 향내, 그 향기에 질식사해도 후회 없겠다던 봄 밤, 우리는 이 과원을 가꾸며 창조주의 크신 사랑을 터득했으며 흙손 속에 짚이는 솔직한 땀의 응답을 겸허하게 받아들이게 되었다.
정다산 선생께서는 일찍이 농사가 다른 일보다 못한 이유를 대우가 선비들만 못하고 이익이 상업만 못하고 편안하기가 공업만 못하다고 실토하셨다. 그러나 우직한 믿음과 속임수 모르는 순수한 삶이 그 어느 인생보다 값지고 보람 있다고 자부 해 왔다. 어떤 나무에는 부란병의 고질이 있어 해마다 수술하고 응애가 붙어 가려워 하는 나뭇잎, 배가 고파 허기진 가지, 갈증에 허덕이며 타는 입술, 탄저가 도려내는 사과의 신음소리까지도 알아내어 치료해 주는 열렬한 사이로 살아 왔다.
“모두가 고향을 버리고 떠나더라도 우리는 여기서 살다가 여기에 묻힙시다” 나무 밑 잡초를 뽑아주다가 무심히 던진 그 한마디가 내 깊은 심령의 골짜기까지 울려 온다. “감기 들어요, 들어가요.” 그이는 흠칫 놀라며 소매 깃으로 눈물을 닦았다. “내일부터 사과나무를 캐야 겠어. 그런 줄 알어.” 퉁명스럽게 내 뱉고는 방으로 들어 갔다.
달빛이 비껴 내린 알몸의 사과나무도 하얀 눈물을 뜨겁게 뜨겁게 쏟고 있었다.
(충청문예 82. 1월호)
20. 서울 사람 시골 생각
고향은 생각만 해도 포근하다. 지난겨울 갑자기 서울살이를 하고부터 꿈만 꾸면 사과나무 유목(幼木)이 총총 늘어선 고향집 과수원에 가 있고 차량과 인파와 소음의 홍수 속에 노상 목줄기가 뻐근한 ‘서울 병’을 앓으면서 젖먹이가 참참이 엄마의 젖을 찾듯 흙내 나는 맑은 고향바람을 생각했다.
언제던가 봄 배추 다발에 끼여온 명아주 한 포기가 반가워 목멘 나는 속절없는 서울 나그네다. 거리마다 늘어선 바나나 손수레 앞에서, 바캉스 용품 구입에 붐비는 백화점 인파 속에서 두고 온 이웃을 생각하며 나는 공연히 죄송스럽다. 나만 편하자고 어려운 농촌을 외면하고 왁자하게 어울려 산다는 일이 큰 죄나 짓는 듯 편편치 않다.
사실 서울살이의 씀씀이와 생활을 살펴보면 하루종일 뙤약볕에 10시간 이상 중노동을 해야 얻을 수 있는 대가 가 여기서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금전의 가치에 어리둥절 할 때가 많다. 그렇게 물질적으로 여유롭게 살면서 왜 인심은 가난한 농촌보다 더 각박하고 타산적이며 비 인간화 되어 가고 있는 걸까. 경주라도 하듯 피서지로 떠나는 바캉스 대열에 무작정 편승하지 말고 서울 나그네는 한번쯤 고향을 생각해 보았으면 좋겠다.
일상의 축적된 피로를 풀고 새로운 활력소를 얻기 위해 휴가가 필요하다면 피곤 밖에는 소득이 없는 내용 없는 바캉스는 생각해 볼 문제가 아닐까. 아이들을 앞세우고 고향 길을 더듬어 보라. 자식들을 바라보는 그것만도 시골 부모님께는 기쁨이요, 위안이니 얼마나 큰 효도인가. 또한 시멘트 숲에 갇혀 전자 오락실을 뱅뱅 돌던 어린이들이 뒷동산 앞 냇가에서 마음껏 뛰놀며 물장구치다 바라보는 파란 하늘 뭉게구름, 그럴 때 동심에 아로 새겨지는 마음의 고향은 아이가 일생을 통해 소중하게 간직하게 될 정신적인 자양분이 될 것이다.
우리의 아이들에게 영양가 높은 음식과 특기교육으로 비만증 어린이, 유능한 인간이 되기만 열망하지 말고 땀의 현장에서 스스로 노동할 줄 알고, 어려움을 참을 줄 알고, 나만 아니고 이웃까지도 포용할 수 있는 풍부한 삶의 체험을 통해 좀 우직해도 착한 인성을 싹 틔울 좋은 기회가 되리라 본다.
반딧불 깜박이는 할머니댁 마당에 멍석을 펴고 초롱한 별 떨기를 바라보면 별하나 나 하나 거기 괴어오는 오붓한 평화. 방금 쪄온 옥수수 감자 그 구수한 고향 냄새에 서리서리 서려 있는 부모님의 넓고 푸근한 마음이 농사를 지으며 터득해 온 보배스러운 인정인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숫된 가슴 열어놓고 고향이 부른다. 편이 쉬어가라고 부르고 있다. 지금쯤 내 고향 음성에는 고추밭골에서 땀에 전 이웃 사촌들이 올 가을 고추 값을 걱정하고 있겠지.
(서울신문 84. 7. 22)
21. 우렁이의 고독
어린아이가 고무신 한 짝을 벗어 들고 오솔길로 올라오고 있다. 빨래 널던 손을 멈추고 자세히 바라보니 얼굴이 홍당무우가 된 순이다. 연전에 부모를 참혹하게 여의고 조모님과 사 남매가 살고 있는 국민학교 2학년 짜리다. 마을에서도 한참 떨어져 있는 외딴 터에 어린 것이 타박타박 걸어 온 것이 측은하여 말동무가 되어준 사이 이제는 친구가 되고 말았다. “아줌마, 이거.” 순이가 내어 민 검정고무신에는 미지근한 논물에 잠긴 밤톨만한 우렁이가 들어 있었다. “웬 거니, 이거?” “저기 배대미 논에서 잡았어요.”
반갑고 신기했다. 과학 영농이다 다수확 영농이다 해서 보름이 멀다 하고 농약을 쳐 대는 통에 메뚜기는 고사하고 개구리 조차 살기 힘든 논에 우렁이가 있었다니, 나는 반가운 마음에 순이가 좋아하는 동아책을 주었다.
내가 순이만 했을 때 이른 봄이면 꽃샘 바람이 기승을 부렸다. 우리는 또래들과 어울려 평촌 뚝방을 내달아 능무렁이 뒷산으로 우우 몰려 갔다. 마른 검불 사이사이 불덩이처럼 피어 있는 창꽃을 따 먹기 위해서 였다. 입술이 파랗게 물들 때 까지 온 산을 누비다가 그것도 시들해지면 또 우우 산을 내려와 들판으로 달렸다.
갈아 엎은 논에서 우렁이를 잡고 봇도랑에서 얼금채로 새뱅이(새우)도 잡았다. 그 알 수 없는 힘은 봄바람 같은 설레임이었고 숫된 충동이었다. 지칠 줄 모르고 달리고만 싶은 욕망은 자연의 정기였다. 슬금슬금 논바닥을 기는 것, 어둑신한 구멍 속에 손을 넣으면 두 세 마리가 한꺼번에 잡히기도 했다.
고무신 두 짝에 우렁이가 가득차면 우리는 개선 장군처럼 씩씩하게 맨발로 행진을 했다. 이렇게 잡아온 우렁이를 사기 물 대접에 담아 흙을 우려낼 양이면 장독대 위에서 우렁이는 해산을 했다. 어느 새벽 엄마 우렁이는 빈 껍데기가 되어 물 위에 둥실 떠 있고 하얀 사기대접에는 수십 마리의 새끼 우렁이가 새까맣게 붙어 있다.
나는 조반 짓는 부엌에 대고 소리소리 질렀다. “엄마, 엄마, 우렁이가 죽었어.” 어머니는 행주치마에 물손을 씻으면서 한참을 들여다 보시고는, “쯧쯧 엄마는 모두 저렇게 되는 거란다.” 하셨다. 말 뜻도 잘 알지 못하면서 나는 그 말을 오랫동안 무서워 했다.
요즘 시골마을에는 전에 없이 생신 차리기가 성황이다. 객지에 나가 사는 자식들이 부모님의 생신을 축하하기 위해 음식을 정성껏 차려 이웃들과 나누는 것은 우리의 미풍양속이다. 함께 뫼시지 못하는 죄송함을 그렇게라도 보답하려는 마음일진대 어찌 그것을 탓 할까마는 나는 잔치에 초대 받을 때마다 돌아오는 발걸음이 무거워진다. 위로는 층층시하, 아래로는 자식들에게 공경하고 바치는 것으로 평생을 살아오신 그 분들, 생신 날 단 하루 북적북적 흥겹다가 모두 돌아가고 나면 큰집에 두 노인만 댕그마니 남는다. 전답 팔아서 자녀들 공부 시키고 출가 시키고 전셋방 얻어 주고 그리고 남은 것은 집 한 칸, 지고 갈 목숨이 전 재산이다.
“임자, 아들헌테 가서 편하게 살어.” 할머니는 도리도리 도리질이다’ “예가 좋구먼유, 영감이나 가서 호강 하슈.” “나두 싫구먼, 조상님 발치에 묻힐 날이 가까운데 가긴 어딜 가.”
그러나 마루 끝에 걸터 앉은 노부부의 눈동자에는 서산마루 노을 빛 보다 더 진한 외로움이 활활 타 오른다.
(한국수필 84. 겨울 호)
22. 우리는 남아서
새벽이었다. 새소리조차 얼어 붙은 이 도요지에 난데 없는 굉음이 새벽을 뒤 흔들었다. 아슴프레한 잠결에 창문을 열었다. 멀리 내려다 보이는 마을에는 조반 짓는 연기가 굴뚝마다 솟아 올랐다. 서리를 하얗게 쓰고 서 있는 사과나무 가지사이로 자세히 살펴보니 뽕나무골 고요한 새벽을 난도질하는 것은 거대한 포크레인 이었다. 육중한 몸체를 꿈틀대며 으르렁거리는 그놈은 고사포를 쏘아대는 모습으로 육박해 왔다.
45도 경사진 20년생 사과 밭에 모닥불이 화알 활 타고 있다. 우리 과수원과는 실개천 하나 사이에 둔 사촌 형님 댁 과수원에 이변이 일어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나는 급하게 밭으로 나갔다.
사과나무는 언제 보아도 멋있다. 주황색 띠를 두른 육중한 포크레인이 코끼리 코처럼 생긴 바가지로 사과나무를 두어번 지근 거리고 나더니 옹달샘 물 퍼내듯 언 땅을 푹 파 올렸다. 커다란 사과나무가 뿌리 채 뽑혀 솟아 올랐다. 그리고는 퍽하고 나가 자빠졌다. “이럴 수가, 이럴 수가.” 밭둑에서 발을 동동 구르던 나는 다리에 힘이 쏘옥 빠져 버려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이럴 수가 있는가.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과나무는 추위도 아랑곳 없이 의연한 기개를 자랑하며 떡 버티고 서서 천하를 굽어보았다. 건강한 숨소리가 들리는 듯 했는데L.
허망했다. 형님 내외분은 이 자갈밭을 일구어 구덩이를 파고 새끼 손가락 같은 묘목을 심고 자그마치 반평생의 시간과 정성을 바쳐 기르고 가꿔 온 것이다. 그런데 반평생의 보람이 단 2분 동안에 작살나다니, 사람으로 치면 한창 왕성한 의욕으로 일에 몰두할 장년인데 사과나무는 무참히 대학살을 당하는 것이다.
경제적인 악순환의 현실을 외면할 수는 없지만 생명이 끊긴다는 것은 인간이나 식물이거나 간에 너무나 처절한 아픔이다. 모닥불을 뒤로 하고 꽁꽁 얼어 붙은 잿빛 겨울 하늘을 바라보고 섰는 아주버님의 구부정한 어깨가 오늘 따라 더욱더 초라해 보였다.
지난 봄에는 앞집 과수원까지 온 식구들이 동원 되어 긴 긴 봄날을 사과나무 캐는 일로 보냈다. 젊은 일손이 없어 노인이나 부녀자 꼬막 소뿐이라 일은 더디고 힘은 몇 배로 들었다. 우리 마을은 42호 중 19 호가 과수원 집이었는데 모두 캐어 버리고 지금은 대여섯 집 남은 셈이다.
다른 농사도 그렇지만 과수원은 자식 기르듯 돌보지 않고는 힘이 드는 농사다. 첫째는 끝없는 애정이 있어야 한다. 자식의 얼굴만 보아도 무엇이 필요한 줄 금방 알아내는 본능적인 부성애나 모성애처럼 영농자도 마찬가지다. 함께 있는 시간에 서로 나누는 무언의 대화가 이루어질 때 거기 보은의 탐스러운 열매가 주렁주렁 열리는 것이다. 알맞게 전정을 해서 수세를 유지해 주어야 하고 갖가지 영양분을 공급해서 건강을 지켜 주어야 한다.
때맞춰 소곡을 해서 병충해에서 보호해야 한다.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다. 열매가 맺혔다고 다 키우는 게 아니다. 대여섯 개의 열매 중에서 가장 실한 한 개만 남기고 나머지는 모두 가위로 잘라 내야 가을에 실한 과일을 따 수 있는 것이다. 어디 이뿐인가. 불볕 더위 속에 소독을 하고 잡초를 뽑아 주고 과일이 크는 대로 고임대를 받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서둘러 동상을 입지 않도록 수확해야 한다.
지난 늦가을 갑자기 들이닥친 한파는 우리 식구들을 얼마나 놀라게 했는지 모른다. 과수원 밭 가득 사과를 따 놓고 열기를 식히고 있었다. 그래야만 저장력이 오래가기 때문이었다. 그때 라디오와 TV에서 영하 16도까지의 한파를 예고 했다. 그날이 마침 벼 타작 날이어서 더욱 바쁜데 삼천여 평 사과 밭에 무더기로 모아 놓은 사과를 비닐이나 천막으로 덮기에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인력도 인력이려니와 비닐이나 천막도 부조이었다. 나중에는 이ㅜㄹ장에 있는 담요, 밍크이불, 누비이불, 솜이불 알 것 없이 모조리 내다 다 덮고 나니까 자정이 지난 뒤였다. 코에서는 단내가 났다. 그렇게 갈무리를 했는데도 그이와 나는 온밤을 선잠으로 지새웠다. 이렇듯 고달프고 힘겨운 농사지만 나는 지금까지 사과나무가 좋아서 반은 미쳐 살아 왔다.
세상 어디에서도 만나기 힘든 순수한 삶, 정을 주면 주는 만큼 더 크게 되돌려 주는 자연의 섭리를 나는 여기서 전신으로 체험 했다. 아무리 작은 들꽃이라도 무한한 신뢰로 다소곳이 폈다 지우는 온유의 덕, 내가 어찌 반하지 않으랴.
우리 사과 밭에서 학자금이 나와 아이들 공부를 시켰고 자연 속에 그림 같은 문화주택도 지었다. 좋아 하는 음악, 사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가난하지만 마음만은 늘 부자로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요 근해에 불어 닥친 불경기는 여기가지 불어와 생산비 건지기도 힘든 실정이라 모두 가슴을 치며 사과나무를 캐고 있는 것이다.
온 밭에 벌러덩 나자빠진 사과나무는 처연하다. 어떤 것은 비스듬히 넘어져 엄살하는 시늉이고 어떤 것은 뿌리를 깡그리 내놓고 칵 죽어 버린 모습이다. 그들은 시린 얼굴로 나를 천착하는 것 같아 차마 바로 쳐 다 보기가 면구스럽다.
아침 식사시간 정도 왕왕거리던 기계소리가 멎고 나니까 산속은 더 깊은 정적이 엄습했다. 마치 전쟁이 지나간 자리와 같다. 아침 햇살이 환하게 퍼지는 이맘때면 떼를 지어 날아와 우짖던 멧새들도 한 마리 보이지 않는다. 기계소리에 놀라 아주 산속으로 들간 모양일까. 아니면 한 두 마리 날아와 보니 어디 한군데도 깃들일 가지 조차 없으니 다른 수픙ㄹ 찾아간 모양인가, 모닥불도 꺼진 채 재티만 날린다.
아래쪽 밭에서 올려다보니 과수원으로 둘러싸여 있던 아담한 우리집은 어디로 가고, 한쪽 팔이 잘려나간 상이용사처럼 살벌한 언덕받이에 달랑 서 있는 우리집이 퍽 추워 보인다. 주머니에 두 손을 지르고 집으로 올라오는 나는 다정한 친구를 이별하고 돌아서는 심사다. 믿고 사랑한 사람에게 버림받는 심사다. 말할 수 없는 쓰라림이 울멍울멍 목구멍으로 넘어왔다. 집으로 올라와 보니 그이는 엊그제 심은 사과나무 묘목에 짚을 덮어 주고 있었다. 그이의 믿음직스럽고 지성스런 손끝에 내 마음도 조금씩 풀리어 갔다.
나는 문득 스피노자가 한 말이 생각났다.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 해도 나는 오늘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
(월간조선 82.6월 호)
23. 이 풍요로운 가을에
동동 구월, 바쁘기도 하다. 유례없는 대풍을 이룩한 농촌 구석구석, 남정네는 벼 베기에 바쁘고 아낙네는 끼니 바라지에 치마 끝에 불이 난다. 지난 여름 물 대느라 잠 못잔 어려움도 눈 녹듯 녹고 은혜로운 들녘에서 한마음 한 덩어리 되어 희희낙락이다. 풍년가가 흥겨운 들에서 매옴한 무우 생채에 담북장 푹 떠넣고 썩썩 비며 먹는 점심한때, 온 마을이 한 식구인 스스럼없는 표정은 곧 사랑의 여울이다.
진이네 점심밥을 들에 내다 주고 집으로 올라오니 부신 해는 과수원 복판에 맑고 향기로운 햇살을 풀어놓고 열심히 물감칠을 하고 있었다. 고추를 널어 놓은 멍석에는 진홍빛 햇살이 아른거리고 호박 가지 오가리를 말리는 발에는 고추잠자리 날개 같은 햇살이 숨바꼭질 한다.
알차게 영그는 오곡백과, 실하고 탐스러운 사과를 보면 가을은 그 풍만한 젖꼭지를 물리고 내려다보는 자애로운 어머니의 모습이다. 그래 그런지 대지는 유순한 얼굴로 만상을 푸근히 감싸고 있다. 여기 저기서 사과가 뚝뚝 떨어진다. 떨어진다. 또한 떨어진 것이 시지 않고 떫지 않고 달다. 그것은 왜 일까?
바구니를 끼고 밭으로 나간다. 바람과 햇살이 손짓해서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동부를 따고 고추를 따고 이렇게 부산하게 돌아다니다 목이 컬컬해 지면 사과 몇 알 주워다가 깨끗이 씻어 강판에 갈아 베 보자기에 짜면 노란 과즙이 괸다. 단숨에 들이키면 시원하고 달콤한 가을 맛, 그걸 어디 과립 쥬스에 비기랴, 나는 이런 재미로 산다. 하루에도 대 여섯 잔씩 삶의 의무인 듯 마셔야 하는 커피 문화의 홍수 속에 이렇듯 해방된 촌사람의 자유, 몸과 마음이 싱싱한 흙의 딸이 무한이 감사롭다.
엊그제는 참깨를 떨었다. 바싹 마른 참깨 단을 거꾸로 들고 매초롬한 부지깽이로 토닥토닥 두드리면 와르르 쏟아지는 가멸찬 희열, 고 조그마한 생명들이 어쩌면 꺼부정한 송이에서 보석처럼 자랐을까, 경이롭다. 진실은 저런 거야, 치장하지 않고 속으로 익는 순수한 알맹이, 나는 그 신비한 놀라움 속에 나만이 아는 생활의 기쁨을 발견한다.
가을은 이렇게 맺혔던 마음을 풀게 하고 화해하고 끝없이 나누이고 용서하게 한다. 사람 사는 재미가 별것인가. 자질구레한 생활 속에 충만하게 느끼는 마음이 있다면 그것이 곧 행복이라는 이름의 평화요 낙원일 것이다.
동동거리던 발을 멈추고 들판을 서성이는 바람의 목소리를 듣는다. 낮고 부드러운 저 목소리, 설명하지 않고 드러내는 맨 살의 빛깔, 뿌린 대로 거두리라는 절절한 절규, 나는 옷깃을 여민다.
주렁주렁 보듬고 와 곡간마다 채워주고 빈몸으로 떠나는 가을 길손, 이렇게 제 차례를 찾을 줄 아는 자연이기에 사람들은 그 품속에 안주한다. 이 깊은 신뢰의 비밀을 누가 아는가. 그것은 무에서 창조되어 무로 돌아가는 우리 인생의 한 삶이로되 우리는 너무 많은 소유욕으로 괴로워 하지는 않는지. 발끝에 차이는 한 알, 제 몫의 가을을 맞아 통통 영근 씨를 떨어뜨리며 내게 묻는다. 여인이여 그대는 무엇으로 나누일 것인가.
(서울신문 83.10.9)
24. 村婦의 日記
1월 3일
새해 들어 눈이 많이 내렸다. 눈에 갇힌 우리집 사과 밭은 사방이 눈 속에 파묻혀서 절간 같다. 하루종일 따뜻한 방에서 봄에 쓸 사과 봉지를 만든다. 사과나무는 눈 이불을 덮고 깊은 잠을 잔다. 나도 쉬어야지. 사과나무처럼. 겨울은 하느님께서 우리 농부들에게 내리신 특별 보너스. 봄, 여름, 가을, 무던히도 애썼으니 푹 쉬라고.
1월 26일
사과를 냈다. 국광 한 상자에 3천원을 받으면서 나는 참 서운 했다. 아이들 등록금만 아니면 저장실에 쌓아놓고 그냥 바라보고만 있는 게 더 흐뭇할 것 같다. 이 사과를 어떻게 가꾼 건데...
어서 모든 이의 살림살이가 풍성해져서 맛좋고 영양많은 사과를 많이들 사갔으면 좋겠다.
텅 비인 저장실을 나오며 가슴이 허전했다.
2월 16일
모처럼 서울에 가다.
붐비는 인파. 차량... 정신이 없다. 노상 메스꺼운 차멀미, 조금만 움직여도 내밀어야 하는 돈, 바쁜 사람들, 대 낮에도 문 걸고 사는 고약한 인심. 이틀 만에 서둘러 내려 오다. 내가 흙 속에 사는 촌부인 게 얼마나 다행인지. 논을 둘러보고 사과 밭을 한 바퀴 돌고 나니까 정신이 맑아 진다. 나는 역시 흙의 여인.
2월 20일
그이는 사과나무 전지 작업, 나는 전지 된 나뭇가지를 줍다. 해마다 우리 과수원이 근동에서는 제일 다수확이라 한다. 그이는 그 까닭을 자신이 전지한 때문이라고, 그래서 학사 농군이 낫다는 걸까.
막내가 따끈한 커피를 내오다. 커피의 향기 속에 추위도 녹고 피곤도 녹는다.
3월이다
3월은 두당당 거리는 바람과 함께 온다. 세찬 바람 속에서도 뭔가 따스한 온기가 스며 있는 듯 봄을 남 먼저 느낀다. 사과나무 등피를 긁어주는 작업이 시작이다. 겨우내 월동한 해충 알을 긁어내어 태우는데 우리들 생활의 더덕이 까지 타버리는 것 같이 시원했다. 인간이 생활에도 가끔은 이렇듯 자신을 성찰하고 감정의 찌꺼기를 정리하는 일이 중요하다.
4월 7일
새봄이다. 땅을 파고 골을 타서 상치, 쑥갓, 봄 배추, 아욱 씨를 넣다. 한 옆으로 오이, 호박, 가지모도 붓다. 도닥도닥 정성 들이는 손끝에 봄볕이 따사로 왔다. 뒷 산에 진달래가 곱게 피어난다. 세상은 참 곱기도 하지. 평화롭다. 흙을 만지고 내가 씨 뿌린 채마 밭에 앉아서 무거운 흙덩이를 헤집고 싹터오는 씨앗의 축복을 숫된 마음으로 본다. 신비롭다. 아무것도 부러운 것이 없다. 신선한 노동의 대가가 그렇게 만들겠지.
사과꽃이 흐드러지게 핀다. 남이사 아무렇지 않게 보는 이 꽃을 나만 유독 해마다 다른 감동으로 바라보는 것은 내가 별나서가 아니다. 여기 내 땀과 내 삶의 의미가 밑거름 되고 꽃으로 피어나서 열매로 맺기 그러하다.
나는 소중한 내 과원 속에서 결코 속되지 않은. 조금은 바보스러운 자연인으로 남아 있으리. 흙은 정직한 자의 편에 있으니까.
친구 K가 왔다. 내 생활이 부럽다고 한다. 친구야, 돈 말고는 다 있단다. 여기는, 그래서 나는 부자야.
5월 8일
어버이 날이다 멀리 계신 부모님께 축전을 띄우고 과원 소독을 했다. 얼굴이 붓고 가렵다. 온 식구가 다 동원돼도 손이 부족하다. 한번에 9만원 내지 10만원 드는 소독약이다. 9월까지 한 달에 두 번씩 뿌려야 한다. 계산에 둔한 내 머리에도 영농비 지출에 휘청거리지 않을 수 없음을 절감한다. 제발 가을에 시세가 좋기를 바랄 뿐이지 별 도리가 있나 뭐.
5월 20일
적과가 시작되었다. 온 마을이 거의 가 다 과수원 집이라서 외래 일꾼을 모셔 왔다.
아침 일찍 경운기로 2km가 넘는 읍내에 가서 일꾼들을 태워다 작업하고 오후 6시 반이면 다시 태워다 퇴근 시킨다. 아직도 10여 일을 계속해야 한다.
아침 새참은 국수 삶아주고, 점심 밥 짓고, 저녁 새참은 내가 가꾼 상치를 한 소쿠리 씻어 찬밥과 내 놓으면 입이 찢어지도록 싸 넣는 상치 맛, 꿀맛이다.
틈틈이 적과하고 동동거리다 보면 허리가 끊어질 것 같다. 그래도 우리는 화수분이다. 입식 부엌에서 가스와 석유풍로를 쓰니까. 불 때어 밥짓고 들로 내 가는 아웃을 생각하고 저절로 새어 나오는 신음 소리를 삼키다. 부엌개량. 주택개량은 농촌부터 해야 한다. 일손과 시간이 훨씬 절감된다. 거울을 보니 새까만 중년 여인이 생소하다. 저게 나다.
6월 26일
참깨가 야들하니 예쁘다. 비닐을 씌우고 씨를 뿌렸더니 훨씬 실하고 빨리 큰다. 콩잎도 나풀나풀 바람에 팔랑거리는 걸 보면 파란 나비가 앉은 것 같다. 새벽바람 나가서 참깨 밭 손보다. 아침공기가 신선하다.
밀린 빨래를 하고 신문을 절이 ‘스크랩’ 하다. 우엉 몇 뿌리 캐 내어 졸였더니 별미다. 반가운 이들이 편지 보내다.
7월 18일
시장 바구니를 들고 밭을 한 바퀴 돌아 오면 오이 5개, 애호박1개, 가지3개, 상치, 파, 아욱L. 바구니가 가득하다.
싱싱한 푸성귀로 차려진 식탁은 언제나 푸짐하다. 그래서 나는 열심히 씨뿌리고 가꾼다. 행복은 이런 거겠지. 저절로 굴러온 일확천금이 아니고 내 손끝에서 한 개씩 따 모은 땀과 노력의 열매. 채마 밭은 나를 착하게 한다. 장에 가는 인편에 상치랑 애호박 한 보따리 친지에게 보내다.
8월 13일
신문에서, 텔레비전에서 쇠고기 값 자유화에 대해 연일 떠들썩 하다. 그러나 우리 농촌에서야 언제 쇠고기 먹고 살았나. 일년가야 한 두 근 먹어 볼까 말까다. 강 건너 불구경 보기가 요새 같은 심정이다.
9월 2일
태풍 ‘애그니스가’ 우리나라 쪽으로 온다는 뉴스에 가슴이 철렁했다. 벼농사도 사과농사도 풍년인데 태풍이 웬 말. 사과가 주렁주렁한 과수원을 돌아보며 저절로 기도가 새어 나왔다.
하느님, 지켜 주십시오. 도와 주세요, 하느님.
10월 1일
새마을 청소의 날, 비 들고 모여서 마을길 쓸고 정다운 얼굴 맞대고 눈 인사한다. 마을길만 쓰는 것이 아니다. 서로간에 움튼 불화도 쓸어버리는 것이다.
10월 16일
반가운 소식이다. 수필 2회 추천. 여기 저기서 축전과 축하의 편지가 날아든다. 흙과 살면서 쓰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흙의 이야기, 나는 때묻지 않은 고독한 농촌에서, 촌부로 살면서 글을 쓰련다. 사과 밭을 가꾸는 마음으로.
(농민신문 81.11.9)
25. 콩심은데 콩나고
미명(未明)이다. 가만히 뜨락을 내려 밭으로 나선다. 우리집 과수원은 뽀얀 안개 숲을 헤엄쳐 나오느라 수런수런하고 있다. 가슴을 펴고 폐부 깊숙이 싱그러운 공기를 마신다. 달콤하고 풋풋하다. 생기가 온몸으로 퍼진다.
줄지어 서있는 파수병들, 20년생 사과나무들이 밤톨만한 열매를 달고 늠름하다. 자세히 살펴 보면 어느 한 나무 성한 것이 없이 상처 투성이다. 요 근래에 부쩍 심해진 부란병으로 팔뚝을 잘리고 허리가 끊어지고 어깨 살이 허옇게 드러났으면서도 상처 속에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건너편 고추 밭에 벌써부터 풀 뽑는 사람들이 나와 있다. 이제는 농촌 여자들은 농촌의 주역이 되고 있는 실정이다. 논일 밭일 가사에 겹쳐 산후(産後)에도 곧바로 일을 나서야 하기 때문에 각종 질병에 시달리면서도 병원문을 두드릴 경제적, 시간적 여유가 없다. 이런 이웃들과 함께 살면서 여권(女權)이니 평등이니 하는 말 한마디 들어보지 못함은 그네들이 못나서 일까.
벌써 한 달이 넘도록 계속되는 가뭄 탓에 지금쯤이면 넌출넌출해야 할 옥수수 이파리가 노랗게 말라가더니 이제는 잎을 돌돌말아 올리며 목이 탄다. 토마토는 처음에는 생육이 좋아서 엄마 젖꼭지 만큼씩 맺힌 게 보름이 넘는데 크지를 못하고 노상 고시늉이다.
안타깝다. 요새은 밥을 먹어도 목에 넘어 가지가 않는다. 다만 이 가뭄 속에 시들시들한 덩굴사이 오이 몇 개씩 자란 것을 보니 가슴이 뭉클하다. 얼마나 힘겨운 투쟁이었을까. 오이 덩굴을 보고 있으면 자식들 뒷 바라지에 주름만 깊어진 촌로(村老)들이 생각난다.
배실배실 말라가며 그래도 생명 하나는 부둥켜 안고 놓지 않는 삶이 근질긴 의욕을 가뭄 타는 작물을 통해 바라보며 인간들의 나약한 의지가 부끄러워진다. 내가 유난스레 정이 헤픈 것은 이런 연유에서이다. 내 손끝에 만져지는 모든 것이 생명이 있어 애정이 교류 되기 때문이다. 농사를 지어보면 콩 심은 데 콩 나는 원리원칙이 가장 많이 통하는 곳이 아직은 농촌인성 싶다.
그러나 농민이 열심히 농사 지어 먹고 입고 자녀교육을 시키는 최소 한도의 생활보장은 있어야 하지 않을까. 공무원이나 기업에서는 근무하는 횟수가 늘수록 봉급과 퇴직금이 늘어가는데 농민은 평생을 일해도 남는 것은 병들고 찌든 노후 뿐이다. 일년 내내 고달프게 농사지어야 가을이면 농협 채무 갚기에 바쁘고 그러니 정든 농촌을 버리고 떠나는 사람들이 늘 수 밖에.
그들의 심정을 나는 안다. 그러나 다시 한번 참아보자고 애소하고 싶다. 가파른 언덕이 있으면 골짜기가 있는 법, 하루 속히 농산물의 적정가가 이루어지고 복지 농촌이 이룩되어 노력한 만큼의 보람을 얻는 그런 날이 오기를 간절히 고대 한다.
텃밭에 채소를 파랗게 가꾸며 일년 내내 채소만 먹는 시골사람은 식물성이라는 생각을 자주 한다. 하루 한 끼라도 육식을 못하면 금방 영양실조에 걸릴 것처럼 법석을 떠는 사람들에 비하면 안 죽고 살아남은 것만도 기적이다. 허지만 시골은 해를 먹고 산다. 빌딩 숲속에 잠깐 내려 앉는 창백한 햇빛이 아니라 거칠 것 없이 중천에 떠서 온종일 빛나는 빛의 축복 바로 그것이다.
무량으로 대어주는 신선한 공기, 눈 두는 곳마다 푸른 초원, 작은 풀꽃을 보고 겸허의 덕을 배우며 감사하며 사는 나는 분명 행복한 촌부(村婦)다. 비록 가진 것은 없어도 마음만은 항상 주고 싶은 빈자(貧者)의 포만감, 얼마나 소중한 은혜인가. 또한 온종일 들에서 시달려 눈뜰 기력조차 없어도 아름다운 농촌의 밤이 있기에 다시 소생하는 것이다. 전등을 끄고 유리창을 열어 젖히고 삼베 홑이불을 덮고 누우면 머리맡으로 쏟아져 내리는 맑은 별빛, 아름답다.
먼데서 은밀한 계시가 있을 법한 밤이다. 방충망에 걸리지도 않고 속살까지 흔들어 씻는 상쾌한 바람, 무던히 착해지고 싶고 수없이 용서하고 싶고 여기 뿌리내린 어느 것 하나도 열렬히 사랑하고 싶은 이 밤은 내 영혼이 하늘나무 되어 이슬을 맞는 평화와 안식의 밤이다.
풍요의 결실을 가득 안고 성큼성큼 다가서는 가을의 발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이것이 감사 뿐인 촌부의 나날이다.
(서울 신문 82. 7. 16)
26. 타작마당에서
노적가리가 산더미처럼 쌓인 들판에 간밤에 서리가 내렸나 보다. 이제 마악 동산을 기어 오른 햇살이 퍼져 풀잎에 엉긴 서릿발이 반짝인다. 뜨끈뜨끈한 국수동이를 이고 미역바우 언덕에 올라서니 왕왕거리는 경운기 소리가 흥겹게 들려온다.
오늘은 우리 집 타작하는 날이다. 지실떠는 아기의 재롱이 더 귀엽듯이 지난 여름 유난스러웠던 가뭄을 치르고 태풍을 견디고 얻은 결실이라 그런지 바라보는 감회가 더욱 깊다. 10여명의 일꾼들은 8마력 경운기를 둘러싸고 맡은 일에 여념이 없다.
볏단을 끌어 내리는 사람, 끌러주는 사람, 기계에 볏단을 물리는 사람, 포대를 들고 알곡을 받아내는 사람, 검불더미를 갈퀴질로 걷어내는 사람, 털린 볏짚을 묶는 사람, 빵빵하게 채워진 마대를 묶는 사람, 한편에서는 고래실 논에서 경운기 한대로 미처 쌓지 못한 볏단을 실어 나르는 너댓명의 사람들, 하나같이 한 몸뚱이의 지체처럼 맡은 일을 척척 해나가는 것을 보며 협동하는 마음이 모든 건설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을 실감한다. 또한 벼를 벤 현당에서 탈곡을 하니 탈립의 손실도 한결 줄어지고 볏짚이나 됫목 처리도 손쉬워 좋다.
새벽밥을 먹고 나온 터라 썰렁한 냉기에 입술이 포르스름하다. “얼릉 덜 새참 목 햐 -.” “가만 좀 있으란 게 그러네, 요놈마저 채고 먹잔 말여.” 볏짚을 묶던 용이 아버지 말을 좔좔좔 쏟아지는 벼를 마대에 받아내던 기벽이 아버지가 받았다. 성질 급한 순동이 아버지는 한 손에 볏단을 든 채 막걸리를 들이킨다. “꿀꺽꿀꺽 크이-, 앗다 술맛 좋다 목이 셔언하구먼.” 입술에 묻은 술 방울을 손바닥으로 쓰윽 문지르고 나서 멸치조림 한 저범을 털어 넣는다.
저만치 벼 푸대가 열 다섯개 보기 좋게 쌓여 있다. “ 기형엄마, 올해 농사 자알 지었으니 씨암탉 잡아 오슈.” “암만유, 잡아오고 말구유.” 나는 노랗게 쏟아지는 황금알을 손바닥에 받아 퉁퉁 영근 벼알을 깨물어본다. 딱 소리가 난다. 이만하면 추곡수매에 1등은 받아놓은 당상이다. 그러나 한편으로 쓸쓸해 진다. 해마다 추곡 수매가에 온 기대를 걸어보지만 흡족할 만한 인상은 없었다. 올해는 고추 값도 과일 값도 제자리 걸음 아닌가.
구수하고 부드레한 손국수를 한 대접씩 훌훌 마시고 난 일꾼들은 담배를 피워 물기도 하고 술을 마시기도 하면서 세수 못한 얼굴에 말라 붙은 눈곱을 비빈다. 나는 일손을 놓고 오래 이들을 살펴 본다. 아무리 뜯어 보아야 순해 빠진 흙의 자손들, 씨 뿌린 만큼만 바라고 사는 욕심 없어 모질지 못한 목숨들, 고향을 떠나며 죽는 줄만 아는 순박하고 요령없는 군살 박힌 손들, 내 인생은 여기서 시작해서 여기서 끝나 가니 몸은 부서져 흙이 되더라도 자손은 대처에 보내 출세 시켜보련다고 앙 다무는 한(恨)의 부정(父情)들. 나는 이들을 보고 있으면 괜스레 가슴이 뭉클해진다. 이름 없이 살다가는 우리들의 땀방울이 모여 농촌 근대화는 착실하게 이뤄지는 것이라고.
순덕아버지가 개울 건너편에 대고 고래고래 고함을 친다. “권서방, 권서방, 얼렁 와서 한잔 비워” 그 쪽으로 모두들 눈길을 돌린다. 건너편에 한군데 뻘겋게 타죽어 말라버린 벼 포기가 그래도 있다. 한참 있다가 건너온 권씨는 여럿이 권하는 막걸리 대접을 받아 들고 한숨을 푸욱 내쉰다. “소독을 워터키 했길래 벼가 그 모양샌가, 쯧쯧.” 모두들 혀끝을 끌끌차며 권씨를 바라보자 권씨는 푸념처럼 말을 이었다.
지난 여름 벼가 꼿꼿이 패어 날 즈음 소독약을 타서 병충해 방제를 했다. 8백평 중 삼분의 이쯤 소독약을 치다가 뒤를 돌아다 보니 약물 받은 벼가 시들시들 늘어져 갔다. 이상하다 싶어 경운기 발동을 끄고 약병을 보니 전착제가 아니고 제초제 였다. 눈이 뒤집히는 것 같더라고. “ 앗다. 우리가 언제부터 소독약 뿌리고 농사졌댜? 풀약이면 풀약이지 제초제는 무슨 제초제여?” 권씨는 깍두기를 으적으적 씹어댄다. “그건 그려, 소독약 이름이 하두 많고 말짱 꼬부랑 말이어서 우리 같은 맹무식쟁이는 여간 힘든게 아녀” 이름 석자 간신히 쓰는 과수원집 인욱이 할아버지 말이다.
꾸밈 없는 이들의 애환을 들으며 새참 그릇을 챙기다 건너편 논을 바라 보았다. 참 신기한 것은 군데군데 약물이 그냥 지나간 곳에 성기게 익은 벼 이삭이다. 흉터에 새살이 돋듯이 그렇게 돋아 난 노오란 이삭, 귄씨도 저 이삭처럼 상처를 아물리고 내년 다시 시작하기를 빌어본다.
들판은 싸늘하게 비어가고 있다. 이렇게 가을 들판에 서면 나는 겸손의 향기에 매료된다. 누군가를 위하여 자기를 바치는 상실의 순절(殉節). 인자로운 대지에 입 맞추고 싶다. 여기저기 세워 놓은 허수아비만, 할일 끝난 머슴처럼 한가롭게 서 있을 뿐 갈대가 손을 흔든다. 허연 수염을 날리며 떠나가는 가을을 전송하듯.
저 만치서 경운기가 탈탈거린다. 보리 씨를 파종하는 집인가 보다. 든든하다. 가을에 타작 끝낸 논에 보리를 뿌려 전 국민의 5분의 1씩만 혼식을 해도 쌀을 수입하는 외화는 절약이 될 터인데, 애국하는 길은 결코 먼데 있지 않는 것, 우리도 어서 서둘러 보리 씨를 넣어야지.
점심을 꼬작히 지어 들판으로 나서자 행렬이 한 소대는 될법하다. 동네 꼬마들도 이웃집 검둥개까지 줄레줄레 따라 나서는 흥겨운 논둑길. 얼큼하게 볶아온 닭고기를 뜯으며 일꾼들은 물론이요 이웃 밭에서 일하는 사람들, 우체부, 나그네도 스스럼 없이 마주 앉는 축제의 자리다. 서먹서먹한 사람들도 식사를 나누고 나면 한결 이므럽다. 그리고 보면 음식을 나눈다는 것은 허기를 채우기 보다 정(情)을 나누어 먹는 것이다. 그래서 농촌의 온기는 식을 줄 모르는 모양이다.
타작마당은 농가의 크라이막스, 이런 날이 있어 농촌을 사랑하고 밀착되어 사는 우리들이다. 벼 포대를 가득 실은 경운기 뒤를 따라 걸어오며 푸근한 나는 생각에 잠긴다. 내 인생의 가을에 나는 무엇을 수확할 것인가를.
결코 게으른 자의 가을처럼 허망하지 않기를 비록 풍요의 결실은 못 된다 해도 빈 손의 가을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라며 앞산을 바라보니 산은 빨간 단풍으로 치장을 하고 화득화득 승천하고 있었다.
(새농민 82. 11월 호)
27. 巨 木
새벽마다 새들은 산에서 날아온다. 날이 부윰하니 새기가 무섭게 사과나무 가지로 날아와서 조그만 눈으로 아침을 노래한다. 보청기의 볼륨을 높이면 짹짹이는 것은 참새, 깍깍 짖는 것은 반가운 까치, 그 밖에도 욜랑욜랑 춤추듯 날아 다니는 잿빛 새며 물빛 새며 이름도 모르는 새들이 수없이 깃든다.
나는 채마 밭에서 아침 찬거리로 열무를 솎다가 유심히 살펴 본다. 새들이란 새들은 어느 것이고 큰 나무를 좋아 한다는 사실이다. 잎이 무성하고 가지가 유여(有餘)로운 곳에 둥지를 틀고 알을 낳아 새끼를 기르기가 좋은 모양이다. 나는 일손을 놓고 사과나무를 올려다 본다. 우거진 잎으로 하여 새들은 보이지 않으나 맑고 고운 소리가 낭랑하다.
근년에 와서 인근 과수원은 과목을 다 캐어 버렸으나 우리집만 고집스레 그냥 둔 것을 다행이라 생각하며, 내가 깃들어 이만큼 의지해온 큰 나무 숲 김태제(金台濟) 교장 선생님을 회억(回憶) 한다.
20년 전의 일이다. 갓 결혼한 애송이 교사 였던 나는 조그마한 시골 국민학교에 발령을 받았다. 그 때가 5. 16혁명 직후 여서 어디 가나 계엄 선포의 분위기가 썰렁했고 학교는 수시로 닥치는 높은 분들의 시찰로 긴장 상태의 연속이었다. 수업 중이라 하더라도 확성기에서 “손님이 오셨습니다.” 한마디 나오면 하던 수업을 중단하고 청소를 서둘고 정리 정돈에 열을 올렸다.
하두 여러 번 그 일을 치루고 나니까 교사와 아동은 ‘손님’ 소리만 나면 손발이 척척 맞아 들어 단5분이면 간단한 청소에서 시청각 자료까지 구비는 연극 배우 아닌 배우가 되어갔다.
그때 이 학교에 부임하신 김교장 선생님은 내심 크게 놀라시는 눈치였다. 하루는 직원회를 마치고 조용히 물으셨다. “ 누가 시키더냐”고, “수업하다 말고 청소하는 일 무슨 교육 방법이냐”고. 우리는 아무 말도 못했다. 교장 선생님께서는 엄명하셨다. 앞으로는 아무리 높은 분이 오신다 해도 수업을 중단해서는 안 된다고 못 박으셨다. “여러분은 교단에 서 있는 한 아무도 이래라 저래라 할 수 없는 교사입니다. 교사는 수업이 생명입니다” 그래도 불안해 하는 우리 교사들에게 “어떤 불행이 닥친다 해도 책임은 내가 지겠으니 여러분은 아무 걱정 마시고 소신껏 수업에 충실하시오.”
우리는 이런 교장 선생님을 우러르며 얼마나 큰 안도와 존경을 보냈는지 모른다. 외유내강 하시던 그 성품, 의에 어긋남이 없으셨던 투철하신 교육관. 그 분은 나무로 치면 품이 넓고 꼿꼿한 그런 나무가 아니었을까.
한번은 첫아기를 낳고 친가에서 몸조리를 하고 있을 때다. 3월이어서 날씨는 아직도 찬 기운이 돌 때인데 난데없이 봄 코트 위에 대장각 미역을 목에 거시고 대문으로 들어 서시는 것이 아닌가. 예고도 없이 여교사의 산실을 그런 모습으로 찾아주신 교장선생님이 또 계신지 나는 아직껏 의문이다. 강보에 싸인 아가의 얼굴을 한참 뜯어 보시더니 “꼭 애비를 닮았군” 하시는 그 음성 속에서 인자하신 부성애의 다함 없는 마음을 감지 할 수 있었다.
어떤 이는 직장을 잠깐 스쳤다 지나가는 인생의 간이역쯤으로 안다. 그러나 내가 몸담았던 교단은 교장 선생님과 따스한 이웃들로 하여 잊을 수 없는 열락(悅樂)의 숲으로 채색되어 있다.
한번은 내 운명을 바꿔 놓은 시절이 있었다. 의사도 없는 시골에서 때아닌 장티푸스 고열로 생사를 방황하고 있었다. 아무도 내방에 선뜻 문병 오려는 사람조차 없을 때 교장 선생님은 출퇴근 하실 때마다 들르셔서 수건으로 땀을 닦아 주시며 밖에 나와서는 안 된다고 누누히 당부 하셨다. 나는 그때 생사를 초월하신 부하에 대한 애정과 책임에 얼마나 감복했는지 모른다. 지금 생각하면 그 위대하심을 세상 어느 자(尺)로도 잴 길이 없다.
교장 선생님은 이런 분이셨다. 하루종일 교장실에 계시기보다는 어린이들이 뛰어 노는 운동장에 유리 조각이나 돌을 줍는 일을 손수 맡으신 즐거운 일과, 자신의 명예에 급급한 나머지 부하직원을 혹사하는 일이 없었다. 항상 아동 본위요, 교사 편에 서 계셨다. 가시는 학교 마다 인화를 소중히 여기시고 많은 직원들의 아픈고 가려운 곳을 어루만지고 치료해 주시던 교장 선생님, 그런 연유로 해서 선생님 주변에는 많은 이들이 서성였고 서로 다른 학교에 근무할 때도 향일성(向日性) 식물처럼 그 쪽을 향하게 되는지도 몰랐다. 나는 퇴직후에도 심신이 곤비해 지면 선생님을 찾아가서 용기를 얻어오곤 했다. 나는 잊지 못하리. 작은 시골 국민학교의 풍요로왔던 가을을.
운동장 가에 서 있는 밤나무에 가을이 영글면 아람 벌린 밤들이 툭툭 불거져 떨어졌다. 그때 우리 학교 어린이들은 군데군데 매달아 놓은 용수에 알밤을 주워 담았다. 아무도 시키는 이 없어도 해마다 용수에는 알밤이 그득했다. 그렇게 모아놓은 밤과 실습지에서 캐어온 고구마를 가마솥에 삶아서 아동과 교사, 단촐한 가족이 나무 그늘에 모여 앉아 실컷 먹는 날은 그야말로 축제였다. 그런 생활을 통하여 정직을 배우고 질서를 배우며 착한 심성이 싹트도록 교장 선생님은 40년의 교직 생활을 통하여 지도 하신 것이다.
지난 77년도에 퇴직하신 후 줄곧 정원수를 가꾸시며 조용한 여생을 보내고 계시며 발표된 내 수필을 보시고 그렇게 기뻐해 주시더니 지난 2월1일 10시 55분에 67세의 일생을 접으셨다는 비보를 접하고 나는 나목(裸木)으로 선 겨울 사과 밭에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울창한 숲을 이루었던 큰 나무를 졸지에 베이고 깃들 곳 없어 동천(冬天)을 헤매는 한 마리 새였음을 아프도록 인식하며 갚을 길 없는 사랑의 빛에 목이 메었다. 봄이 오고 여름이 와서 나무는 다시 푸르러졌건만 그 분은 영영 떠나시고 은혜의 그늘만 짙어간다. 이 시대의 교육자 고(故) 김태제(金台濟) 교장선생님 부디 고단한 나래 접으시고 영면(永眠) 하시옵소서. 삼가 명복을 비옵니다.
새들은 포롱포롱 날아다니며 싱그러운 아침을 찬미한다.
새여.
물빛 고운 작은 새여
네 눈에는 천국이 보이는가?
(새교육 82. 9월 호)
28. 同 行
우리집 앞 조븟한 오솔길에는 양 옆으로 미루나무 두 그루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논둑쪽의 나무는 앙바도톰하니 가지가 많고 건너편 실개천쪽 나무는 훤칠하니 키가 크다. 이 두 나무는 서로 마주 서서 동산에 떠오늘는 아침 해를 반기고 서산마루에 걸리는 햇살에 은발을 날리며 하루를 접는다. 나는 모를 심는 날, 시원한 나무 그늘에서 새참이나 점심을 먹고 쉴 때마다 미루나무를 바라보며 서울에 사시는 시부모님을 생각한다.
작년 구월 시부모님은 김포 국제 공항에서 동남아로 여행을 떠나셨다. 올해 69세이신 아버님과 73세의 어머님은 여행을 좋아하신 나머지 우리나라 명승고적은 모두 답사하고 이제는 외국 나들이로 가까운 동남아를 택하신 것이다.
아마빛 투피스로 곱게 단장하신 어머님의 주름 진 손을 꼬옥 쥐고 아버님은 마치 소풍을 떠나는 아이들처럼 즐거워 하셨다. 4년이나 연상인 어머님과 16세에 조혼하여 그 후 53년 동안을 살아오신 잉꼬 부부이다. 그래 그런지 두 분은 오누이 같기도 하고 친구 같기도 한 것이 일행의 눈길을 끌고도 남았다.
부모님을 배웅하고 돌아오면서 우리들은 말 할 수 없는 행복감에 젖었다. 두 분의 연세가 높아도 외국 나들이를 하실 만큼 건강하시다는 사실이고, 두 분이 동고동락 해로하시는 것이 그렇고 두 분 계심으로 해서 우리들 기쁘고 만족한 것이 그렇다. 그것은 편안하고 따뜻한 마음이고 한편으로 고맙고 자랑스럽기 까지 한 마음이었다
행복한 모습의 부모님을 바라 뵈옵는 자식들의 마음이 이렇듯 흐뭇한데 하물며 부모님은 어떠하실까. 보다 근본적인 효란 자녀들인 우리가 합심하여 화평한 가정을 이룩하는데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두 분은 가난한 시골에서 논 두 마지기를 유산으로 받아 분가를 하였다. 혈기 왕성한 아버님은 먹어도 먹어도 배고픈 보리죽이 죽기보다 싫어서 모를 심어 놓고 도망치고 몇 개월 지난 뒤 돌아와 타작을 마치고 또 도망쳤다. 이러한 철부지 남편을 무던하게 참고 기다리며 힘든 일도 마다 않고 살림을 일구신 어머님은 6년만에 서울로 이사를 하셨다.
나는 어머님의 회고담을 들을 때마다 나이어린 남편을 하늘 같이 믿고 섬긴 부덕에 수없이 감탄한다. 또한 홀로 둔 아내를 생각하고 적수공권으로 자수성가하신 아버님의 굳센 의지에 저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아버님은 일찍 고향을 떠난 탓에 고향에 대한 향수를 지니고 사신다.
선영을 가꾸시는 거며, 족보를 발간하시는 일이며, 늘 앞장서서 남은 여생을 거기에 바치시려는 계획을 가지고 계신다. 이러한 부모님을 때때로 매보다 더 무서운 사랑으로 외며느리인 나를 채찍하신다. 고령이심에도 불구하시고 며느리의 생일을 잊지 않고 생일 케이크 상자 속에 명심보감을 싸 넣어 보내시고 부족한 자식들의 못난 짓까지 열두폭 치마자락으로 다 감싸 품으신다.
삼년 전에 아버님은 고향선산에 당신 형님의 선영 옆에 두 분의 유택으로 신위지(神位地)를 마련 하셨다.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는 어머님의 만류를 무릅쓰고 그것을 해야 장수하신다고 부득불 마련 하셨다. 아버님의 속마음은 자식들에게 어려움을 주지 않으려는 배려이고 또한 두 분이 나란히 누워 쉬실 유택을 마음에 맞게 가꾸고자 하심 일 것이다.
그때 나는 어머님께 예행 연습이라는 말씀을 드렸다. 어머님은 그런 연습 그만두고 아버님 떠나시는 날에 같이 갔으면 좋겠다고 하셨다. 그것은 반 백년을 함께 살아오신 두 분이 서로를 배신하지 않는 영원한 계약일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두 분이 어쩔 수 없는 하느님의 소관이지만 나는 어쩐지 숙연해 졌다. 위대한 예술품 앞에 섰을 때처럼 뭉클하고 퍼져오는 감동 같은 것이었다.
두 분은 두 분이 맞들고 계신 인생이란 화폭에 사랑과 믿음, 이해와 협조로 정말 멋지고 훌륭한 작품을 완성시킨 것이다. 나는 어머님의 소원을 알고 부터는 진정한 부부애란 저토록 함께 있자고 하는 죽음까지도 초월하는 지극한 열망임을 알고 두렵게 생각되었다.
두 분이 다정히 손잡고 떠나신 공항에서 아침에는 뒤쪽 작은 나무가 큰나무의 그림자를 온 몸으로 받아 안고 저녁에는 큰 나무가 작은 나무의 그림자를 조용히 보듬고 서 있는 미루나무의 모습을 생각했다. 부부란 그렇게 서로의 부족함을 메워 주며 오래 참고 기다리며 같이 커가는 두 그루이며 하나인 나무가 아닐까
(수필공원 83. 여름호)
29. 바람소리
첫 눈이 내린 어느 날이었다. M읍에서 2킬로미터쯤 떨어진 작은 마을이 발칵 뒤집혔다. 산제당 골짜기에 옹기종기 모여 앉은 40여호 남짓한 마을 사람들이 이렇게 한 마음 한 뜻으로 뒤집히기도 처음인성 싶다.
땅거미가 내려 앉은 마을 길에 웬 낯선 손님이 아를 찾는다는 전갈을 받고 부랴부랴 마을로 내려 갔다. 한적하고 씨족 중심인 마을에 손님이라는 낯선 존재가 그들의 호기심을 끌고도 남았다.
곳집을 지나 마을길에 들어서니 커다란 여행 가방을 든 중년의 두 남녀가 의아한 눈으로 물었다. “혹시 B선생 아니신가요?” 우리는 통성명을 하고 집으로 안내 했다. 차(茶)를 준비하러 서재에서 막 나오니 현관에 빽빽하니 마을 사람들이 들어차 있었다. 다과를 가지고 방에 들어섰을 때 그들은 두 손을 모으고 각기 기도하고 있었다.
지난 가을 S지에 발표된 글을 보고서 감명이 깊어 이렇게 실례를 무릅쓰고 찾아 왔노라는 그들 부부는 독실한 크리스찬이고 전도사라는 것을 밝혔다. 그들은 줄곧 신약성서의 갈라디아서를 가지고 열띤 설교를 했다. 설교가 끝났을 때 어느 사이엔가 그들과 나 사이에는 조그마한 녹음기가 돌아가고 있었다. 마지막에 기념촬영을 하고 저녁식사 대접도 마다한 채 그들은 어두움이 짙게 깔린 겨울 길을 총총히 사라져 갔다.
일의 발단은 여기서부터 시작되었다. 마을로 돌아간 줄만 안 사람들이 안방으로 모여 들었다. 그들은 잔뜩 의심어린 눈으로 술렁였다. “암만 생각 해두 이상하구만, 그 사람들 수상햐.” “그려유, 요새같이 바쁜 세상에 뭣(글)을 보고 이 먼데꺼정 찾아 왔다는 것도 수상쩍구, 찾아 왔으면 찾아 왔지 녹음은 뭣하러 하는가베유.” “그려, 그려, 그냥 두면 안되겠어. 무슨 조치를 해야겠다, 이거여.” “조용히들 하세요. 여러분의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은 충분히 알겠어요. 그러나 제 글을 보고 먼 시골길을 찾아왔다는 것은 감사한 일이예요. 또 그분들은 종교적인 이야기만 했을 뿐이에요. 좀더 생각해 봅시다. 주소도 적어 놓고 갔으니까.”
방안은 벌집 쑤셔 놓듯 웅성거렸다. 6.25의 전쟁을 그들 자신이 체험한 50세 이상의 사람들과 철두철미한 반공교육에 훈련된 젊은 이들의 의지는 거센 파도와 같이 밀려 왔다.
밤이 폭풍을 몰아오며 깊어 갔다. 나무들의 빈 가지가 이상한 소리로 울부짖는다. 바람은 알고 있을까. 지금 내방 뒷곁에 와서 몸부림치는 저 바람의 국적은 어디인가. 시베리아인가, 산동반도 부근인가, 아니면 우리의 아버지의 아버지 때 봉창 밑에서 뒹굴었던 그 바람인가. 시공(時空)을 초월해서 예까지 불어온 저 바람은 나와 무슨 인연인가. 맵고 찬 바람등에 업혀서 밤기로 떠난 그들은 진정 누구인가.
잠은 멀리 달아나 버렸다. 이런 밤이면 나는 한 줄기 바람이기를 차라리 염원한다. 한겨레 한 핏줄이 한 땅덩이에 살면서 서로 총을 겨루고 호시탐탐 전쟁을 노리는 엄청난 비극의 땅에 목적없이 던져진 돌멩이가 아닌 바에야 그냥 무심한 바람이기가 얼마나 가변한가. 그들의 의심은 단순히 녹음기 때문인 것을, 아니 더 깊은 곳에 파고 든 평화에의 열망과 조국 수호에의 의지가 응집되었음을, 분단 민족의 애화(哀話)는 도처에 이렇게 깔려 있는 것이다.
다시 바람이 인다. 세차게 몰아쳤다가 누그러지는 눈보라인 성 싶다. 필경 저 바람은 북한 땅 한 끝을 맴돌고 왔을 게다. 빵보다 더 절실한 자유의 가치가 얼마나 대단한 것인가를 바람은 먼저 보았을 게다. 인간으로서 인간 답게 살기 위해 목숨을 걸고 넘어오는 귀순용사의 피맺힌 발자국을 바람은 친근한 손길로 어루만졌을 게다.
이데올로기에 희생되는 선량한 백성들의 신음소리가 두려워 바람은 허겁지겁 휴전선을 넘었을 게다. 꽁꽁 언 임진강 강물 위를 알몸으로 구르면서 그 강물 속에 떠도는 이산가족의 숱한 사연을 구가 아리도록 들었을 게다. 끈끈하고 진한 핏줄의 부름에 바람은 함께 뒹굴며 울며 왔을 게다. 나도 이 밤 바람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불면으로 지새는 것은 평화를 사랑하며 이웃을 사랑하는 인가의 아픔에서다. 분단 국가의 비애가 너무나 각박하게 흔들어서다.
그날은 언제 올 것인가. 다시 바람이 인다. 잔잔한 바람이다. 속 깊은 곳으로부터 뇌성벽력을 치며 불어 왔던 바람이 어느 사이엔가 잠잠하다. 나뭇가지 끝 눈이 내려 앉는 소리까지 손끝에 짚일 만큼 고요한 밤에 나는 평화를 기원하는 여인이 되어 따뜻한 방에서 찻물을 따르며 이 소중한 행복을 안는다. 그리고 가만히 두 손 모은다.
통일이여. 어서 오라.
(북한 84. 4월 호)
30. 봄봄 도레미탕
우수, 경칩이 지나고 봄이 성큼 다가선 느낌이다. 새 봄을 맞으러 뒷동산을 갔으나 아직 기척이 없어 설레는 마음으로 채소 전으로 나갔다. 옛날의 봄은 양지바른 논둑으로 아장아장 걸어오더니 요즘에는 봄도 시류(時流)를 타고 고속도로를 이용하여 트럭을 타고 시장으로 곧장온다.
채소 전에는 봄을 사러 온 주부들로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미나리 오이 상치 호박 냉이를 수북하게 쌓아 놓고 파는 좌판 앞으로 갔다. 앳된 새댁이 소담스런 냉이 한 다발을 집어 들고 물었다. “요놈 한단에 얼만가요?” 사람 좋게 생긴 채소장수 아저씨는 헤벌쩍 웃고는, “고년 한단에 이백원 올시다.” 하는게 아닌가. 좌판둘레는 웃음소리로 폭싹 엎어지듯 했다. 얼굴이 홍당무가 된 여인은 허둥지둥 떠나고 있었다. 봄은 역시 반가운 여인.
일년 내내 푸성귀가 싱싱한 시장 안을 한바퀴 돌아 나오면 뭔가를 잃고 난 듯 허전해진다. 이제는 계절도 없어진 기분이다. 맞은편 꽃집에는 가을의 여왕이라는 국화와 사철피는 꽃들이 만개하여 유리문을 내다 본다.거기에도 흙냄새 물씬한 계절 감각은 없다.
이런 날이면 나는 영락없이 구락다리 여인이 되어 일년내내 군불 한번 안때는 명색이 양옥집에 살면서 옛날이 그리워 콩나물 시루에 콩나물 콩을 안치는 것이다. 그때는 둥글넓적하고 주둥이가 쩍 벌어진 자배기에 쳇다리를 올려 놓고 그 위에 질시루를 앉혔다. 가을 걷이가 끝나고, 동지 팥죽을 쑬 때부터 시골집 안방 한구석에 초대 받은 손님으로 의젓하게 자리한 콩나물시루. 젊어 한 시절 남치마와 옥색저고리를 즐겨 입으셨던 어머니는 아버지를 기다리는 기나긴 겨울밤을 바느질로 보냈다. 문풍지가 부웅 울리면 하던 일손을 놓고 치마폭을 살며시 여미고 앉아 콩나물 물을 주었다.
곤한 잠결에 시루물 내리는 소리를 들으면 소피가 보고싶어 뜨락에 내려 앉으면 참새가 깃든 추녀 밑으로 파랗게 쏟아져 내리는 별빛. 나는 어린 마음에도 별빛이 고와서 별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곧잘 했다. 그런 때 어머니는 성한 날 보다 앓은 날이 더 많았던 나를 위해 장독대에 정화수를 떠올리고 새벽마다 절하시던 그 모습과 흡사했다. 묵은 김장이 시큰해졌을 때쯤 마침맞게 살이 오른 콩나물을 무쳐 놓으면 우리는 사근사근 씹혀지는 소리와 고소한 맛에 맛있는 식사를 했었다.
지금도 눈에 선한 어머니의 뒷모습. 저고리 소매 끝에 살짝 접어 올리고 물을 줄 때면 쪽진 뒷머리와 자주색 댕기, 옥색비녀가 그렇게 곱고 예쁘더니.나는 지금 퍼머한 머리에 홈드레스를 입고 콩나물에 물을 주는 모습이 과연 그때 만큼 정취가 있을지. 딸 아이가 내 뒷모습을 보고 기억의 한 귀퉁이에 그것을 인각하고 저도 어른이 되어 구성진 판소리가 좋아질 때쯤 불현듯 콩나물을 기르고 싶어질까.
생활 패턴이 달라지고 있는 때 옛 정취를 고집할 리도 만무하고 실리적인 것에 빠른 머릿속에 그런 마음의 여유가 생기기도 힘들 테니 지금의 내 모습이 좀 엉성한들 어떠리. 생각해 보면 옛 여인들의 그 조신한 몸가짐이 내면을 차갑게 다스려 규방문학을 싹트게 했고 훌륭한 전통문화를 창조케 한 원동력이 되었을 게다.
나는 지금 질시루가 아닌 빤닥빤닥 윤이 나는 다리위에 양은시루를 앉히고 콩나물을 기른다. 옛 여인들이 질그릇처럼 은근하고 수수하고 정이 싶었다며 현대의 여인들은 요란하고 똑똑하고 날이 선 것은 아닐까. 그래서 자녀들은 외로와 지고 남편들은 허전해 하고L. 콩나물을 기르며 자문해 보는 것이다.
콩나물은 철학적인 식물이다. 콩을 물에 담가서 싹을 틔우는 과정이 정갈하고 지성스러워야 한다. 담뱃재나 기름기 같은 불순물이 닿으면 콩나물은 가차없이 모조리 썩어 버리고 만다. 그것은 진실과도 일맥 상통하는 것. 불의나 부정에는 온 생명을 걸고 타협하지 않는 용맹성이 어쩌면 우리 민족성의 한 단면이 아닐까 싶다. 나는 문득 삼천궁녀의 넋이 잠든 백마강의 달빛을 생각한다. 꽃잎처럼 져버렸다는 낙화암의 궁녀들, 그 어여쁜 정절의 마음을.
싹이 튼 콩나물이 처음 며칠간은 가관이다. 머리를 처박고 거꾸로 선 놈, 번듯이 누운 놈, 삐딱하니 박힌 놈L. 무법지대만 어느 날엔가는 누가 시키기라도 한 듯 일제히 하늘로 머리를 두고 제자리를 찾아 선다. 경이로운 변화다. 자율의 서곡은 이렇게 그 음계를 잡는 것이다. 그리고는 놀라운 속도로 자란다. 어느날 껍질을 벗고 노랗고 반들반들한 머리를 빼 들고 세상을 둘러본다.
나는 이들과의 무언의 대화를 통해 인생살이의 이치를 배우기도 한다. 요즘처럼 인스턴트 식품, 인스턴트 사랑이 판치는 세상에 이 무슨 시시콜콜한 짓이냐고 하면 나는 할 말이 없다. 모두가 속성으로 변화하는데 나만 못 변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건강 식품이니 자연 식품이니 하도 시끄러워 이건 좀 너무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무공해 식품이란 별 것인가. 사랑과 정성을 다해서 순리대로 기르고 만든 식품이 바로 그것이고 보면 우리네의 식탁에 조석으로 오르며 사랑받은 도레미탕이야말로 순 식물성 식품으로 장수탕이라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서민들의 식탁에서 훈훈한 인정을 노래하는 도레미탕. 콩나물을 먹고 키운 문화가 단무지나 소시지 문화에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산다.
세계를 돌아보고 온후 곧장 경주로 내려간 조각가 C씨는 진선미를 고루 갖춘 불상은 한국 것 밖에 없었다고 고백했다. 이것이 자연과 더불어 살아온 지혜, 콩나물 문화의 유산이 아니고 무엇인가. 한 밤중에 잠이 깨이면 콩나물 물을 준다. 좌르르 좌르르, 톡톡톡톡, 톡 톡L. 그 물소리는 물레잣는 소리로 들리기도 하고 추녀끝 낙 물 소리로도 들린다. 어머니가 그렇게 세월을 자았듯이 나도 어머니의 그 나이가 되어 시루 속 콩나물 물로 내 세월을 내림인가. 나는 밤빛이 뿌우옇게 새어드는 창밑에서 판소리 열두마당을 펴놓고 멀리 조선의 여인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열두폭 치마자락 화사한 춘향이가 되고 숙영낭자가 된다. 지금 봄 햇살이 내려앉는 양지에 앉아서LL.
(충청일보 83. 3. 12)
31. 봄비 오는 밤에
밖에는 소곤소곤 봄비가 온다. 눈이 침침하여 스텐드를 밝히고 씨감자를 쪼개다가 창문을 열었다. 희미한 전광으로 세류 같은 빗줄기가 뿌우연 하다. 봄 비는 처녀 비다. 수줍은 듯 조그많고 고운 목소리로, 보드라운 손길로 가만가만 대지를 적시고 나무를 어루만지며 구석구석을 찾아 다니고 있다. 가장 작은 풀 씨까지 빼놓지 않고 먼 강남의 밀 향기 같은 봄소식을 전해 준다.
오늘 낮에 텃밭에 춘채(春菜) 씨를 넣었다. 삽질을 하다 보니 주먹만한 돌멩이가 발 밑으로 날아와서 손으로 집으려다 깜짝 놀랐다. 그것은 돌멩이가 아니라 몰캉하게 잡히는 개구리였다. 우수 경칩이 지난지도 꽤 여러 날 되었건마는 겁 많은 개구리는 아직도 흙을 뒤집어 쓰고 늦잠을 자고 있었던 모양이다. 발기진 개구리는 꾸무럭 꾸무럭 선잠을 터는지 뒷다리를 자맥질하듯 흔들어 댄다. 자세히 들여다 보니 툭 불거진 눈과 꾹 다물인 입이 왕개구리 만치 크고 의젓하다. 이제 동면에서 깨어난 개구리는 생존을 위하여 도약의 자세를 취할 것이다.
후덥지근한 목장갑을 벗어 놓고 포슬포슬한 흙덩이를 부수었다. 맨 살에 와 닿는 흙의 촉감은 신선하고 만만하다. 흙이 안고 있는 생명 탓인가. 이상한 활력이 용틀임을 한다. 골을 타고 상치랑, 시금치, 아욱, 쑥갓씨를 뿌리고 다독이는 손끝에 아지랑이처럼 묻어나는 3월의 양광, 눈 두는 곳마다 찬란한 봄 빛깔이다.
누가 뭐래도 계절은 어김없이 순환을 계속한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핵무기 하나로 온 세계가 파멸한다고 으름장을 놓아도 들은 체 만 체 겨울은 봄을 잉태하고 분만한다. 이것은 진실이며 하늘의 뜻이다. 사과나무 그루터기에 걸터 앉아 봄처녀를 허밍으로 불러본다. 편안하고 행복하다. 가진 것 없어도 가득한 마음의 평화는 긍정의 빛깔고운 생활을 피어나게 한다. 누가 씨뿌리는 자의 소망을 알며 그들의 인종을 알며 고독한 일상을 아는가.
지난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웬만한 추위는 마주잡은 손길로 녹여온 농촌이지만 근래의 추위는 속수 무책이었다. 사람들은 따뜻한 햇살이 그리워 양지를 찾으며 목마르게 봄이 오기를 기다려 왔다. 정월 대보름 싸한 바람 속에 옷깃을 여미면서도 그 속에 간간히 들려 오는 훈훈한 봄의 음성을 듣기 위해 성급히 들로 나갔다. 가만히 앉아서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었다. 이렇게 간절히 기다려온 봄이기에 이 봄이 더욱 찬란한 것이리라.
농부들의 손길이 바빠지고 있다. 우리도 사과나무를 전정하고 구덩이를 파서 두엄을 주어야 한다. 이제 어둑신한 토광에서 겨울을 난 씨오쟁이를 꺼내다가 실한 곡식을 종자로 골라 놓고 못자리 논으로 나가야 한다. 비닐 보온 못자리 안에서 신품종 볍씨는 다수확의 새싹을 틔우고 있다. 밤낮이 기온의 차가 심할수록 물대기에 신경을 써야 동해를 입지 않는 건강한 모를 기를 수 있는 것이다. 봄이 오는 과수원에 서면 나는 이상스레 코 끝이 찡해오는 감동에 젖는다. 그것은 죽음을 이겨낸 부활의 의미여서일까.
앉은 자리에서 눈을 돌리면 축사 뒤의 응달에서도, 돌틈에서도 하모니카를 불어대며 새싹이 돋고 있다. 가만히 마음의 귀를 열어 놓으면 옹달샘에 새 물이 솟듯 퐁퐁 솟아나는 생명의 찬가. 지난겨울 물러설 줄 모르는 혹한 속에서 혹시라도 어린 뿌리가 동사하지 않을까 조바심 치며 짚으로 싸매주고 덮어준 지성이 나무에 닿았는지 유목은 모두 살아나서 꽃망울을 부풀리고 있다. 아직은 한 그루에 스무 나무 송이쯤 달려 있는 꽃이지만 대견하기가 그지 없다.
발그레한 꽃망울은 어쩌면 시렁 위에 켜 놓은 등불 같이 사방을 환하게 밝혀 주고 있다. 여기 피어나는 사과꽃은 꽃이라기보다 우리들 삶의 의지요, 소망이며, 기원이다.
봄은 위대한 창조자. 끝내 운명해 버리고 말 것 같은 침묵의 대지위에 그 오묘한 생병의 신비를 유감없이 드러내는 소생의 원리, 언 것은 녹이고 갇힌 것은 풀어주며 화해의 악수를 나눈다. 그 멀고 먼 겨울의 터널을 지나 예까지 와 준 새봄을 새봄으로 맞이하기 위해 수리는 쓰잘 데 없는 탐욕의 외투를 벗어 던지고 가변한 사랑의 옷으로 바꿔 입어야 한다. 그리고 봄볕처럼 따스한 시선으로 주변을 어루만지고 내가 누군가에게 돌아갈 햇볕을 도시의 거대한 빌딩처럼 차단하고 있지는 않는지도 생각해 볼 일이다.
오후에는 밭 둘레에 호박씨와 옥수수씨도 심었다. 여름 방학이 오면 천둥 벌거숭이가 되고 싶어 도시의 먼지를 흠빡 쓰고 달려오는 아이들을 위해 나는 가마솥에 감자랑 옥수수를 쪄내고 멍석가에 벌어지는 여름밤의 축제를 위하여 오선지 가득 모정의 소야곡을 그릴 것이다.
아직도 비는 속삭이듯 내리고 있다. 낮에 뿌린 씨앗들이 달착지근하고 녹록한 봄비를 마시고 큰 기지개를 칠 게다. 내일은 새벽 일찍 창문을 열어놓고 봄의 왈츠를 볼륨 높여 놓고 밭에 나가서 감자씨를 넣어야 겠다. 그리고 싱그러운 아침 햇살이 온 집안을 채우거든 우리들의 근사한 출발을 위하여 햇쑥 애탕국에 달래 무침을 차려 달콤한 사과주로 건배를 들리라.
(아산 84. 봄호)
32. 山마을의 저녁 연기
저녁 연기는 그리움이다. 깊은 겨울 한번씩 서울 손님이 온다. 까마득히 잊었다가도 예고 없이 방문 앞에 환하게 섰으면 온 겨울 추위가 다 녹는 듯 따뜻한 사람들이다. 작년 겨울에도 그렇게 왔다. 도착시간은 오전 열시 쯤, 산채(山菜) 점심을 맛있게 들고 해거름이면 총총히 떠난다.
내가 그들을 만나 것은 ㅇ병원 입원실에서 였다. 나는 한달 째 입원해 있었고 그들은 중학교 1 년생인 딸 아이의 교통사고로 인해서 였다. 그때 중1 소녀가 이제 어엿한 대학생이 되었다. 숱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입원실의 인연으로 이렇게 길게 마음이 오가는 일도 그리 흔치는 않는 일이어서 나는 내심 가을이 깊고 첫눈이 나리고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이 오면 이따금 오솔길로 나가 읍내로 뻗은 행길에 눈을 주며 막연히 누구랄 것도 없이 기다리곤 했다.
올 겨울에도 그들은 소식 없이 와서 나를 반갑고 놀라게 했다. 순진하고 정이 많은 소녀는 세상에서 아주머니를 가장 사랑한다고 해서 나이든 나를 수줍게 하고 그녀의 어머니는 후덕하고 조신한 이조의 여인을 연상케 하는 귀부인으로 그 우아한 품위가 나를 사로 잡는다. 또 한 사람 소녀의 이모다. 르노와르의 소녀를 닮은 그녀는 촉촉히 젖은 눈길이 깊고 맑아 신비란 영감을 품어낸다.
식사 후 후식으로 싱싱한 과일을 들면서 이모는 말했다. “우리는 춥고 먼 이 시골행을 해마다 한 번씩 하는 이유를 아시는지요?” 커튼을 젖히고 겨울 과수원을 오랫동안 바라보고 섰다가 “ 연기 때문이예요. 올 때는 굴뚝마다 솟아 오르는 조반 짓는 연기가 좋고 돌아 갈 때는 저녁 짓는 연기에 온 마을이 잠기는 평화로움이 좋아서 예요. 얼마나 편안해지고 따뜻해지는지 아세요? 그 가운데 우리들 이모님 같은 당신이 계시구요.”
하마터면 주책없이 눈물이 날 것 같아서 나는 난로 위에 퐁퐁 끓는 찻물을 따뤘다. 따로따로 굴러다니는 도시인의 외로움이 하얀 김에 서려 내게로 전이(轉移)되고 있었다. 나는 어느 사이엔가 진정 이모 같은 손길로 봉지봉지 선물을 챙기고 있었다. 짧은 겨울 해가 한뼘쯤 남았을 때 서둘러 떠나는 그들을 배웅하고 돌아서니 조그마한 토끼울 마을이 저녁연기로 갈아 앉아가고 있다. 코 끝에 싸아하니 청솔가지 타는 내음이 닿을 듯 하고 마음은 연기속을 헤치며 유년으로 줄달음 쳤다.
그때 어머니는 그으름이 새까만 부엌에서 저녁을 지으셨다. 옹솥에는 밥을 짓고 가마솥에는 군불을 지폈다. 바싹 마른 가랑잎은 밥솥에 때고 청솔가지는 군불솥에 썼다. 나무는 칠월에 해 둔 칠월비가 제일 좋지만 손포가 없는 집은 미리 장만을 못하고 눈오기 전에 갈퀴를 들고 산에 올라 가랑잎을 긁어 모아다가 때었다. 그것도 아쉬운 날은 청솔가지를 툭툭 쳐다가 아궁이 가득 쑤셔 넣고 불을 당기면 시퍼런 청솔가지는 생피를 태우듯 불똥을 튀기며 파닥파닥 타 들어 갔다. 그러자니 연기가 매캐하니 온 마을을 덮을 수 밖에 없었다.
어머니는 이럴 때 수수비로 부뚜막을 쓸어 내리며 나를 밖으로 내 몰았다. 나는 매운 연기로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도 아궁이 앞을 뱅뱅 돌았다. 이유인즉 거기 잿속에 묻어둔 알밤 두 알이 다 타버릴까 봐서 애가 탓다. 잔꾀한번 피우지 못하는 어린 것은 생밤이 잿불 속에서 다 타 들어 새까만 숯덩이가 될 때까지 부엌 바닥을 쓰는 어머니의 성화를 받으면서도 그렇게 지키고 있다가 부지깽이로 찾아낸 숯이 된 밤을 보고서야 비질비질 울며 부엌을 나섰다.
뒷곁 장독대에 쪼그리고 앉으면 눈물을 질펀히 흐르고 그 눈 속에 하늘로 구름기둥을 세우며 하얀 연기가 자꾸 서럽게 했다. 목이 아프도록 제끼고 올려다본 연기는 얼마쯤 올라가다 모두 흩어지고 마는 것이 이상하고 서운 했다. 그것이 우리 인생의 여로인 것을. 눈이라도 내릴 듯이 조용한 저녁이면 연기는 더욱 더 높게 꾸역꾸역 솟아 올랐다.
이런 나를 어머니는 늘 불안해 하셨다. 어린 것이 너무 안차고 조용하다는 꾸중이었다. 그리고는 저녁 상머리, 노랗고 반들반들하게 익은 군밤 서너알을 상귀퉁이에 얹어 주시던 어머니. 언니와 삼촌이 눈치 챌까봐 냉큼 움켜서 치마폭에 감추면 배꼽깨로 스며들던 그 따뜻한 알밤의 체온, 그것이 임종의 순간에까지 나를 걱정해 주시던 어머니의 체온임을 불혹에 서서 느끼다니. 나는 요즘도 어머니가 문득문득 그리워지면 저녁 오솔길로 나선다.
이제는 농촌에까지 연탄과 가스가 보급되어 점차 저녁연기는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도시의 공장 굴뚝에서 솟아오르는 시커먼 연기가 도시의 맥박이라면 시골의 저녁연기는 향수의 시그널이 아닐까. 반가운 서울 손님들도 빽빽한 생활의 톱니에 물려 정신없이 돌다가 유년의 시절이 그리워서 장장 왕복 여섯 시간의 먼 길을 다녀가는 것일 게다.
어찌 그들만의 저녁여기가 그리울까. 마음의 고향까지를 잃어버린 현대인들 가슴 구석에는 언제이고 돌아가 스스럼없이 무릎 베고 누워 쉴 어머니의 품안 같은 고향이 자리하고 있지만 밀리고 밀리는 생활에 서로 마음만 앓고 사는 것이다.
시골에 살다 보면 또 그대로 도시의 시멘트 가루를 묻히고 오는 사람들이 못내 그리울 때가 많다. 무위의 타성에 젖어 있는 나에게 그들이 남겨 놓고 가는 것은 템포 빠른 삶의 선율이다. 신선한 자극이다. 그래서 도시와 시골의 만남은 필연의 조화다.
고즈넉히 언덕 위에 서서 내려다 보면 야트막한 산골짜기, 오므린 손바닥에 들설 듯 싶은 작은 마을이 평화롭다. 아무리 양옥집이 많이 들어 섰어도 조석으로 향을 피우듯 솟아나는 연기로 하여 우리 모두는 푸근하고 여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저녁 연기는 어머니의 행주치마 자락, 달 뜨기 전 산마루가 나뭇가지 위에 걸리고 거기 모락모락 피어 오르는 어머니의 기도는 착하게 살라시는 당부의 말씀이다.
(한국수필 84. 봄호)
33. 세탁 三味
“또 빨래야? 세탁기는 두었다가 삶아 먹을래? 안 쓰려거든 엿장수 불러 다 엿이나 사 먹지.” 그이의 성화가 귓전을 때린다. 세탁기가 시판되자 마자 서울에 사시는 시어머님 특명으로 백조 세탁기를 곧바로 들여 놓았다. 언제나 약골인 며느리가 농촌 일에 시달리는 것을 안쓰러워 하시던 시어머님과 애처가라면 첫째라고 뽑 내는 그이의 열성에 힘입어 내 의견은 눈꼽 만치도 개여됨이 없이 목욕탕에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세탁기다.
맑은 물을 칠부쯤 붓고 가루비누를 훼훼 저어 놓은 후 단추하나만 누르면 왜앵왜앵 모터가 돌아가 세탁 되는데 한 두번 돌려보니 영 탐탁치가 않았다. 고운 때가 묻은 남방셔츠나 세수수건, 양말짝 할 것 없이 집어 넣기만 하면 휘휘 말려 들어가 동동 뭉쳐지는 것도 언짢은데 겉때 속때가 한데 어우러져 그야말로 구정물이 되고 보면 거기서 건져내는 세탁물이 처음보다 더 더럽고 구줄그레 해 지는 것이 꺼림칙 했다.
또 한가지는 세탁하면 싹싹 문지르고, 지려 잡아 비비고 홀랑 뒤집어 흔들어 씻어내고 맑은 물에 헹구는 그 맛 아닌가. 그래서 나는 세탁기는 장식품처럼 놔 두고 빨래 함지를 이고 앞 개울로 나가는 것이다. 뒤통수에 와 박히는 그이의 따가운 시선을 짐짓 콧노래로 뭉기고 오솔길로 나오면 여기저기 풀숲에서 튀어 나오는 개구리가 찬등을 맨발에 비비기도 하고 꼬리 저으며 아슬랑 아슬랑 따라오는 강아지가 좋아라 장난을 친다.
하천 둑에는 달맞이 꽃이 노랗게 피다만 채 있고 군데군데 피어 있는 패랭이꽃 보랏빛이 수줍다. 냇물은 언제 보아도 시원스럽다. 어떤 날은 파란 빛깔이 물감처럼 번져 있기도 하고 어떤 날은 바알간 노을이 조약돌에 걸려 한 폭의 수채화가 되기도 한다. 하천 둑에 서 있는 미루나무가 물속에 거꾸로 춤추고 냇가에 나와 놀던 송사리 몇 마리가 발소리에 놀라 냇물을 거슬러 올라가며 방귀를 꾸는지 뽕울뽕울 물방울이 올라온다.
저만큼에는 풀을 뜯다 쇠똥에 주저 앉은 황소가 되새김질로 낮잠을 달래고 있는 모습이 한가롭다. 이듬 매 논 논에서 한바탕 술래잡기 하던 바람이 지나가면서 벼내음을 털고 간다. 물속으로 비치는 삼라만상은 훨씬 신비롭고 아늑하다. 우두커니 서 있는 내 모습도 처음 본 연인처럼 생소하지만 그 너머로 펼쳐진 옥빛 하늘로 인해 정겹고 아련한 상념마저 일으키게 한다. 한번도 가보지 못한 천국(天國)의 길 한 모퉁이도 이처럼 평화롭고 아늑할까.
나는 빨래 함지를 판판한 돌 위에 내려 놓고 팔 소매를 걷어 올린다. 굽이치며 흐르는 시냇물에 두 손 두 발을 담그면 전신으로 퍼져오는 시원한 물줄기, 마치 생명수를 마시고 소생하는 환자처럼 생가가 난다. 푸푸 맑은 물로 세수를 하고 수건을 빨아서 머리에 걸쳐 놓으면 준비 작업이 끝나는 것이다.
빨래 감을 꺼내 무색을 따로 구분하고 속옷 겉옷 작업복을 각각 나누어 물에 적셔 디딤돌 위에 얹어 놓는다. 차례로 한가지씩 물을 흠뻑 묻혀 서너번 비비고 곰살궂게 골고루 비누칠을 한다. 땀에 찌든 소매부리, 솔기마다 끼어있는 때를 싹싹 비벼 도올돌 흐르는 물 위로 좌악 펴 놓으면 땟국은 밑으로 뿌우옇게 떠내려가고 거무죽죽했던 옷은 하얗게 물위에서 춤춘다. 이 맛이다. 이렇게 깨끗하게 빨아지는 맛이다.
그러나 모든 옷이 그렇게 쉽게 세탁되는 것은 아니다. 가장 쉬운 것이 화학섬유, 섬유질이 곱고 물을 먹으면 가녈가녈 해져서 마치 처녀 속살을 만지듯 보드랍다. 면 내의나 베갯잇 이런 것은 솔기에 비누칠을 잔뜩하고 싹싹 문대고 비벼대기를 몇 번 해야 하는데 대개의 것은 비누칠을 해서 삶아야 하니까 따로 놓는다. 제일 힘든 것은 청바지류이다. 물을 먹기가 무섭게 뻣뻣해져서 잘 비벼지지도 않고 와삭와삭 비벼대도 때도 잘 빠지지 않는다. 솔에다 비누를 묻혀 문지르고 헹구고 또 문지르고 헹구고 땀을 뻘뻘 흘리다 보면 나도 이런 모질고 우악스러운 인간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하기사 사람도 여러 종류다. 삽삽하고 정겨우면서도 쉽게 넘어가지 않는 사람, 질긴 사람, 이런 사람은 화학 섬유계 일까. 무덤덤하고 약삭빠르지 못해도 착한 천성으로 제 할 몫은 다 하는 면류 같은 사람, 역경을 만나도 끄떡 않고 힘은 힘으로 욕은 욕대로 갚으며 버젓이 살아가는 사람 청바지류.
청바지를 헹구다 물속을 본다. 소리 내며 흘러가는 시냇물 속엔 물살에 씻긴 조약돌이 한결 청아하다. 억만년을 씻기며 떠내려온 조약돌, 나는 얼마나 씻겨져야 저토록 무욕무심(無慾無心)의 경지에 이를 것인가. 사실 식구들의 눈총을 무릅쓰고 냇가로 내 닫는 내 속셈은 이것이다.
곰보 빨래돌에 옷가지를 올려 놓고 칠하고 문지르고 비비다 보면 나는 어느덧 세탁 삼매에 빠지고 마는 것이다. 단순하게 반복되는 그 작업속에 더러운 옷가지만 빨리는 것이 아니고 찝찝한 내 마음의 때까지 하얗게 정제(精製)되는 것이다. 주책없이 미워지는 자잘한 일상, 허무맹랑하게 부풀어 오는 탐욕의 불길, 엉뚱하게 구름이 되고 싶다는 보헤미안의 분노, 이런 것들이 얼키고 설켜 모진 때가 되어 나를 바수어 대면 나는 빨래함지를 이고 개울가로 내 닫는 것이다.
물살에 비친 남루한 내면을 방망이로 두드려 부수기도 하고 얻어 맞고 아파하는 또 하나의 나에게 연민의 눈길을 붓기도 한다. 그러고 보면 세탁은 나만의 카타르시스가 아닌지, 부득불 편리한 문명의 이기를 마다하고 개울가에 퍼질러 앉아 나를 빨아내는 이 작업이 심산 암자에서 참선의 빗질로 가기를 찾아내는 수행승의 고행과 닮은 것은 아닐지. 오늘따라 가엽산은 더욱 높고 아득하며 냇물은 무심히 흐르기만 한다.
(충북문학 82. 9. 7집)
34. 안양으로 가는 길
별을 보러 안양엘 간다. 거기가 거기 도시라는 점은 매한가지지만 내가 아양을 찾는 마음은 그게 아니다. 서울에서도 용산구 갈월동 가설 육교가 지척에 붙어 있고 지하철 공사로 도심의 뱃구레를 홀랑 뒤집어 놓은 곳, 심장이식 수술만큼 복잡하고 어마어마한 공사장에 최신 기계는 다 등장한다.
오밤중 아니고는 단 일분도 조용할 수 없는 곳에서 나는 거대한 문명 앞에 뇌살 당하는 사람벌레에 불과하다. 문만 열면 사방으로 탁 트인 시골집 그 넓은 초원에 그냥 방목해온 야생마 같은 내게 서울은 자지러 들도록 탁하고 시끄럽고 복잡한 곳이다.
운명이려니 몇날 며칠을 주리를 틀다시피 견디다가 숨이 꼴깍 넘어갈 지경이 되면 도망치듯 99번 버스에 오른다. 달리고 싶어서다. 바람이고 싶어서다. 아무리 복작대는 시내 버스라 해도 달리는 쾌감이 있고 무임승차로 드나드는 휘발유 냄새 밴 바람도 있다. 또 시내버스를 타 보면 느릿느릿 제 볼일 다 보고 가는 버스노선도 같은 행선지를 둔 사람들이 같은 시간대에 탔다는 우연이면서도 묘한 공동체 감을 느끼게 한다. 사실은 비슷비슷한 능력의 사람들이 모여 있고 서로 풍기는 땀 냄새도 열심히 살고 있는 삶의 체취려니 그것이 정겨운 것이다.
경로석이 아니라도 노약자를 위해 성큼 자리를 내어주는 젊은이의 모습도 우연히 마주친 시선끼리 미소 짓는 친근감도 다른 차량에서 보기 드문 아름다운 풍경이다. 한강다리 시원한 바람을 마시며 노량진, 시흥을 지나면 한량없이 푸근해 진다. 우선 차가 쑥쑥 빠지는 기분도 그럴 싸 하고 도로 양편에 펼쳐지는 산야에서 멀어져 간 인간의 고향, 숨결을 느끼는 것이다.
문명에게 손상 당하지 않는 자연 그대로의 모습을 본다는 것은 서울에 사는 사람치고 즐겁지 않은 이 있을까. 언뜻언뜻 차창으로 스치는 산의 푸르름이며 철 따라 피고지는 산유화 잎에서도 생명의 윤기를 호흡하게 된다. 땀 구명 마다 켜켜로 배인 기름먼지를 비누수건으로 말끔히 닦아 낸 듯 상쾌한 기분이다.
안양가는 길은 이래서 좋다. 내가 바라보는 자연도 어떤 핏줄 같은 친근감을 주지만 그 속에는 언니가 있으므로 내게 의미 있고 그립고 가고싶은 곳이다. 동기간이란 부모님의 모습을 골고루 분배 받은 분신이어서 아기자기한 덩이 오고 가는 모양이다. 더구나 부모님이 모두 타계하고 안계신 지금에는.
언니의 반백머리, 보좃이 나온 입매에서 문득문득 어머니를 뵈옵고 둥싯하니 굽은 등에서 호기로운 아버지를 뵈옵는다. 어디 그뿐인가. 식성에서부터 자잘한 습성까지 어쩌면 그렇게 골고루 나누어 주셨는지 생각해 보면 생명의 신비만큼 오묘한 것이 없다.
또 이상한 것은 생판 남(他人)이었던 형부와 언니의 변모다. 누가 누구를 닮았는지 분명치 않은데도 생각하는 것 해동하는 것 심지어는 식성, 외모까지 엇비슷해진 두 분의 세월이 이렇게 큰 순화작용을 했음에 이윽히 바라보는 아우의 마음을 경견케 한다.
형부는 선비다. 대대손손 가르치는 일로 살아오신 가계를 이어 50평생을 교단에 계신다. 마치 즐겨 가꾸시는 선비 풀, 난처럼. 삼 남매에 자기를 몽땅 내어준 언니가 조촐한 정원을 가꾸며 이제서야 자기를 찾는 전형적인 한국여성, 그렇게 두 분이서 거기 살고 있다.
목련과 장미 넝쿨이 터널을 이룬 골목으로 한참 들어가면 거기 아담한 이층 양옥 한 채. 쫓겨온 짐승처럼 헐레벌떡 들어서면 작은 숲에선지 아니면 방마다 책으로 가득찬 분위기에선지 가슴을 가라앉게 하는 정적이 마중해 온다.
둘러 보면 이상한 정원이다. 잘 가꾸어진 정원수 사이사이 일년초가 새롭고 사이사이 잡초도 알뜰하게 가꾸어져 있다. 망초며 달개비, 강아지풀, 바랭이, 그것들은 버려진 잡초가 아니고 따뜻이 보살핌을 받는 풀이었다. 이것이 교단에 서는 형부의 남다른 의지고 차원 높은 인간애다. 그런 남편의 뜻을 받들어 정원 가꾸듯 가정과 이웃을 보살피는 언니의 부덕이고.
작년에는 막내 내외가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장학생으로 떠났는데 올해 TA를 땄다는 기쁜 소식이고 엊그제는 큰 아들이 또 떠났다. 딸 하나는 부산에서 교편을 잡고 이제는 정말 두 늙은이만 남았다고 기쁨인지 외로움인지 고개를 돌리는 언니를 바라보며 여자의 일생을 생각했다.
아름답기로는 그 모성에 비할 것이 또 있겠는가. 큰 아들이 떠나던 날 물기어린 눈으로 술잔을 기울이던 형부의 모습, “사자가 어린 새끼를 낭떠러지로 밀어내는 심정을 이제야 알 것 같다.” 하시던 그 잠잠한 난의 모습. 나는 그날도 어머니의 음성을 들었다. 뭐니뭐니 해도 자식농사를 잘 지어야 한다는.
돌아오는 길목에서 나는 별을 보았다. 서울 복판에 공해로 가리워진 희미한 별이 아니고 태초부터 빛났던 초롱하고 맑은 별이었다. 그냥 주고만 싶은 그리하여 아무 것도 바라지 않는 절대적인 사랑이 별빛처럼 아름다웠다.
부모가 가장 행복해 보일 때는 자손을 훌륭히 기르고 가르친 그 모습인 것을 별빛을 우러르듯 바라 보았다. 아들 형제가 금의 환향할 날을 고대하며 언니 내외는 잎이 모두 지고 난 목련처럼 살겠지. 다시 봄이 오리라는 확신을 가지고.
(충북수필 85. 창간호)
35. 幼年의 숲에는
셋째가 서울에서 왔다. 키가 엄마보다 훨씬 더 크고 미끈하고 의젓한 대학생이 되었건만 이 녀석은 본때 없이 여덟 팔자 걸음을 걷고 있다.
“응아, 넌 학교 문턱도 못 가본 사람 같애.” “엄마, 그게 무슨 말씀인가요. 이래뵈도 최고의 지성을 자랑하는 대학생입니다.” “말은 좋다마는 그 걸음걸이가 물적 증거인걸.” 아이는 가던 길을 멈추더니 배를 움켜쥐고 웃어댔다. 의아해 하는 나에게, “엄마, 이것이 공기총의 유산 아닌가요. 그때 아버지는 아버지의 발자국에 꼭 맞추어 걸어야 한다기에 그렇게 했더니 한겨울을 지내고 나니까 이렇게 되고 말았어요.” 나는 그제서야 아뿔하 하고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버지 발걸음이 참으로 흉할 정도로 여덟 팔자 걸음임을 생각해냈다.
아이는 휘파람으로 ‘바우고개’를 불렀다. 양쪽 주머니에 손을 찌르고 먼 턱골 뒷산을 실눈 속에 바라보고 섰다. 안경알 속으로 겨울 바람처럼 한 가닥 스쳐간 그 아이만의 그리움이 내 감성의 스크린으로 비쳐오고 있다. 거기 양지쪽에 잠들고 있는 생모(生母)의 생각과 죽은 듯이 검불 속에 숨어 싹트는 봄풀처럼 15년 전 애잔한 어린 시절을 보고 있음을.
겨울은 눈(雪) 속에 있어야 제맛이 나고 정취가 있다. 산도 들도 나무도 온통 백설로 뒤덮히면 그이는 본명도진 아이처럼 깊숙이 간수했던 공기총을 꺼낸다. 분해하여 기름걸레로 닦고 기름치고 꼼꼼하게 다시 맞추고 그러기를 하루종일 하고 나면 아랫도리부터 맥주 한 컵의 주기(酒氣) 같은 설레임이 서서히 올라온다. 그것은 신선한 기다림.
그리고 나서 어느 날 아침 방한화, 방한복, 방한모로 장비를 갖추고 총 한 자루만 들고 무작정 떠나는 것이다. 이른 아침이지만 어느새 낌새를 알아 챘는지 셋째 응이가 따라 붙었다. “아버지, 나두 가유.” “안돼, 임마 눈이 무릎까지 쌓였어.” “그래두 가유, 얼마든지 따라 갈수 있어유.”조곤조곤 주고 받는 부자(父子)의 말 소리를 들었음인지 첫째, 둘째, 막내까지도 부시시 눈부비며 봉당에 내려섰다. “그것봐, 임마 들켰잖어. 빨리 뛰어.” 부자는 실랭이를 단념하고 구보로 앞 동산을 넘는다.
아버지는 지난 초가을, 송아지 두마리를 산다고 전대에 돈을 넣어 허리춤에 차고 시오리길 장터엘 갔다. 소 사러간 사람은 한나절이 기울도록 감감소식이더니 해거름에 울바자 옆으로 슬그머니 들어섰다. “아니 송아지는 어쩌고 그냥 왔대요?” 어머니가 조바심 치며 다그쳐도 아버지는 꾸중 듣는 아이처럼 뒤통수만 긁고 서 있었다. “얼른 말해봐요. 송아지는 어쨌어요?” 그제서야 아버지는 싸리문 밖 볏짚더미 속에 숨겨놓은 공기총하고 거름더미 뒤에 잡아 매어 놓은 목매기 송아지 한 마리를 끌고 들어 왔다.
그것을 본 어머니는 어처구니가 없는지 입을 쩍 벌이고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마리만 사고 한 마리 값으로 공기총 샀구먼.” “에이구 저냥반이 언제나 철들련가, 아, 공기총이 밥 먹여 준답디까?” 어머니는 열통이 터지는지 애매한 여물박만 들었다 놨다 역정이더니 부엌으로 들어갔다. 이렇게 해서 공기총을 산 아버지는 눈이 오기를 학수고대 했다. 눈이 와야 먹을 것을 찾아 내려오는 새들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한달음으로 오리골 벌판으로 갔다. 눈이 많이 쌓여서 올해 국민학교 3학년인 응이는 뒤따르기가 힘들었다. 아버지는 고개 마루에서 우뚝 선 채 끝없는 설야(雪野)를 내려다 보았다. 하늘은 야트막하니 내려 앉고 먼데 마을에서 개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아버지, 새는 안잡고 왜 그냥 섰어?” “새보다 들판이 더 좋은걸, 저기를 바라보면 가슴이 시원해 진단다. 응아, 사나이 가슴은 저렇게 넓어야 하는 거다. 알겠니?”
고향을 떠나 대학에 다닐 때 아버지는 이 들판이 가장 그리웠다고 하였다. 아버지는 집에서처럼 무섭고 엄한 아버지가 아니었다. “임마, 아버지가 딛고 가는 발자국대로 밟고 와야 한다. 그래야 발이 안시렵지.” 그러고 보니 아버지가 딛고 간 발자국은 큼지막해서 응이 발을 맞추고도 넉넉했다.
이렇게 부자는 길인지 웅덩이인지 모를 눈속을 빠지며 총을 쏘았다. 어떤 날은 설맹에 걸려 마을에서 사오십리 밖 낯선 마을 까지 가기도 했고 어떤 날은 뱅뱅 돌다보니 바로 마을 뒷산이었다. 아버지는 어린 응이의 인내심을 이렇게 길러 갔다. 달려가다가 눈구덩이에 빠져 허둥거려도 못 본 체 했다. 간신히 헤집고 나오면 그제서야 어깨를 두드리며 잘 했다고 칭찬을 했다.
그때는 아버지가 야속하고 변덕스럽다고 느꼈지만 두고두고 잊을 수 없는 것은 아버지의 속마음이라고, 언젠가는 아버지도 어머니도 우리들 겉을 떠나게 되고 이 세상은 혼자 걸어가야 하는 혼자의 길임을 아버지는 그렇게 은밀히 일러준 것이다. 하루종일 눈밭을 헤매고 나면 부자의 얼굴은 눈바람에 그을려 새까맣게 탄다. 돌아 오는 길은 즐거운 시간, 참새, 콩새, 서너 마리 꿰어차고 다시 언덕을 넘으면 아버지는 으레 휘파람으로 ‘바우고개’를 불렀다.
10년 또 10년이 지나도 언제나처럼 가을 걷이가 끝나고 나면 부자의 가슴 속에는 백설의 벌판이 열리고 끝없이 떠나는 유랑의 손짓에 마음은 고향들녘 유년의 숲에 서성이는 것이다.
(북한 83. 2월 호)
36. 有限한 生命이기에
아카시아 나무가 둘러선 발끝이 바로 뒷산이 시작되는 지점이다. 여름에는 지척의 산봉우리가 녹음으로 가리워져 하얀 비석만 보일 듯 말 듯 하다. 그 비석을 상봉으로 하여 여기 저기 고만고만한 무덤들이 모여 이른바 뽕나무골 공동묘지, 객지에서 떠돌다 떠나간 사람들, 메 한 그릇 떠 올릴 자식 없는 이나 구구절절 사연 깊은 이들이 도란도란 모여 산다.
내가 이곳 과수원에 집을 짓고 본동에서 이사 온 지가 4, 5년이 되는 동안 뒷산으로 이사와 사는 이도 여럿이다. 대문이 있는 것도 아니니 문패가 있을 리 없고 드나드는 이나 조석으로 조반 짓는 연기가 없으니 사람 사는 곳이랄 수는 없다. 그러나 발길을 옮겨가다 보면 모두가 낯설지 않은 이웃들이다. 아무리 두리번거려야 망부석은 고사하고 상석하나 눈에 띄이지 않는다. 그만큼 이생의 삶이 가난하였으나 자연은 철 따라 꽃을 피워주고 새들도 깃 들어 풍성하다.
우리가 처음 이사 왔을 때 밤이며 문밖을 나가지 못했다. 달빛이 괴괴한 밤 달빛이 부서져 내린 참나무 이파리, 반짝이는 윤기에도 등줄기가 오싹한 한기를 느꼈다. 공동묘지에는 원귀가 있다는 풍설이 아니라도 비오는 밤이면 비에 젖어 꺼이꺼이 더욱 가까이 들리는 짐승소리가 아주 언짢았다. 그러나 한해 두해 해가 바뀌니 어제 만나본 할머니가 며칠 후에는 흙 속에서 돌아오고 사랑하는 부모님이 차례로 떠나신 뒤로 죽음은 무서움도 아니요, 우리와 무관한 것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이 공동묘지에 유일한 비석 하나 댓놈하니 솟아오른 곳엔 6.25때 행방불명 된 외아들을 삼십년간 기다리며 사시다가 돌아가신 만주댁 할머니의 산소이다. 할머니는 지금까지 전기불을 마다하고 호롱불을 밝히고 사셨다. 어는 한밤에도 그 초가 지붕 아래 희미하게 번져 나온 호롱불이 꺼진 날이 없었다.
내가 가을 떡을 해 들고 그곳을 찾았을 때 높은 봉당을 오르는 발소리에 문을 여시고 하냔 체머리를 덜레덜레 흔들며, “덕구냐? 게 섰거라, 어둠이 짙어.” 구르듯 문지방을 넘으셨다. “떡 잡수세요. 덕구가 누군데 그렇게 기다리세요?” “내 아들, 내 새끼, 환갑이지, 온다 와 꼭 오고말고.” 짓 무른 눈꼬리에 매달리는 눈물이 체머리를 흔들 때마다 호롱불빛에 번질번질 흘러 내렸다. 그 눈물 속에는 지칠 줄 모르고 기다린 오랜 세월이 녹아 흐르고 할머니의 피맺힌 그리움도 어른거렸다.
그 할머니께서 돌아가셨다. 그리고 내 이웃으로 오신 것이다. 나는 가금 봉분둘레로 반딧불이 일렁이면 저승에 가서도 호롱불 밝히고 아들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할머니를 생각 한다. 지금쯤이면 모자가 상봉하여 다정히 살고 계실까. 정말 저승, 내세는 존재하는가. 그러고 보면 나는 전생에 어는 조촐한 객주 집 주모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고향이든 타향이든 이 강산 어느 곳엘 가도 거기서 만나는 얼굴들이 전연 낯설지 않고 어디서 많이 본 듯 정이 가는 소치이다.
발길을 돌리니 잔디가 파란 봉분 둘레로 청솔나무가 다문다문하다. 아마도 부지런한 후손이 정성껏 가꾼 모양이다. 그 아래로 떼도 엉성하고 황토 흙이 벌겋게 내 보이는 새 무덤이 엊그제 이사오신 새집 할머니의 산소이다. 당신 혈육이라고는 하나도 없으면서 늘 걱실걱실 외로움 타지 않고 사신 할머니, 그 할머니의 굵은 주름 투성이의 얼굴이 웃고 계신 것 같다. 그러나 무심한 바람만 무덤을 맴돌뿐, 걸걸한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이승에서처럼 두 할머니는 다정한 이웃으로 사시는지, 양지바른 고사터에 나란히 앉아 쪼그레한 입으로 담배 한 대를 한 모금씩 돌려가며 오물오물 나눠 피우시는지 궁금하다.
인간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죽음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런데도 우리는 죽음을 외면하고 피하려 애쓴다. 피한다고 해서 술래잡기하듯 용케 피할 수 있는가, 아니다. 인종이나 인물의 차이 없이 젊고 늙음의 시효도 무시한 채 돌연 노크하는 검은 그림자, 그것은 무엇인가. 남아 있는 쪽에서는 상실이요, 떠나는 쪽에서는 영원에로의 출발이다. 우리는 죽음 앞에서 엄숙해진다. 연습이 아닌 단 한번 살고 가는 유한의 생명이기에 그러하다. 그러므로 하루하루가 내 생애의 마지막이듯 보람 있고 기쁜 시간을 살아야 하리라.
잎이 모두 져버린 스산한 가을 뒷창을 열면 옷 벗은 나목(裸木)들 사이로 버섯처럼 돋아난 무덤을 본다. 이 세상 영화도 아랑곳 없이 고요히 누워있는 무덤들 위로 뒹구는 낙엽의 의미, 한번쯤 죽음을 생각지 않으랴. 조석으로 채마 밭에 매달려 지내다 보면 이 세상 모든 것이 더욱 내 것이 아닌 것을 알 것 같다.
엊그제 한 바구니 가득 상치를 솎아서 이웃에게 보냈는데 오늘 아침 상치 밭에는 더 풍성하게 채워지지 않았는가, 내가 물을 준 일도 없다. 그런데도 상치는 누군가의 손에 의해 시시각각 자라고 있다. 실 같은 뿌리를 허옇게 내 놓고도 잎을 키우는 실파나 꽃이 지기가 무섭게 덕속에 주렁주렁 매달려 크는 오이나 잠간 내 것일 뿐.
그렇다면 내 육신, 목숨 또한 빌려온 옷에 틀림없는 일, 상치를 솎다 말고 “어서 오너라.” 당신께서 부르시면 “예 지금 갑니다.” 곧바로 대답하고 떠날 수 있는 상태, 잠시의 유예도 바라지 말고 곧장 따라 나설 수 있는 여혼의 상태를 만들기 위해 나는 밤마다 떠나는 연습을 한다.
이웃집 놀러 가듯 가볍게, 즐거운 여행지로 떠나듯 기꺼이, 이 세상을 하직할 마음의 준비는 되어 있는가. 나는 공동묘지를 바라보며 삶과 죽음이 내 뜻이 아닐 바엔 더 크고 위대한 힘에 나를 조용히 신탁하는 것이다.
37. 長城山人
땀이 흥건이 밴 우체부의 얼굴이 집 앞에서 멎었다. 편지 가방에서가 아닌 짐달이에서 큼직한 물건을 떼어 주며, “ 도장, 주슈’” 오늘 따라 그 목소리가 퉁명스럽다. 무더운 날씨 탓이겠지 싶어 현관에 세워 둔 채 주스 한 잔을 권했다. “이런 거 주실 생각 말고 이런 우편물이나 안 오게 단속 좀 해 주슈.” 볼이 부어 그가 내어미는 소포 꾸러미는 아뿔사, 양팔로 안아야 할 정도로 무거웠다. 마루에 내려 놓고 발신인을 보았다.
‘長城山人’ 생면부지의 사람이다. 우체부의 뒤통수에다 대고 미안하다고 꾸벅꾸벅 몇 번씩 절을 하고 마루에 걸터 앉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감이 잡히지 않았다. 누구일까? 또 이것은 무엇일까? 혹시 주인이 바뀐 것이 아닐까 싶어 다시 수신인을 확인 했다. 의아한 채 촘촘하게 잡아 맨 비닐 끈을 풀어가기 시작 했다. 처음에는 비료 부대 종이가 나왔다. 그리고는 나락 냄새가 물씬 풍기더니 짚으로 물건을 돌돌 말았다. 짚을 걷어 내자 커다란 숫돌이 나왔다.
“어머머?” 어른 손바닥을 두 사람이 쫘악 펴든 만치의 크기다. 뽀야스름한 돌빛이다. 이끼가 끼었거나 흙으에 묻혔던 돌이 아니고 어느 산방에서 오랫동안 어루만져진 체온을 간직한 듯 싶다. 한가운데는 동그라미가 두 겹으로 둘러쳐 있고 가운데는 옛날 기와장에 새긴 꽃무늬가 정교하게 조각 되어 있다.
왼쪽에는 ‘自我革新)’ 오른 쪽에는 ‘民族改造 島山 安昌浩’ 세 글귀가 내림 글씨로 뚜렷이 새겨 있었다. 돌의 뒷면을 살펴 보았다. 그곳에는 가운데에 ‘長城山人 1984. 4. 19.’ 아마도 작년에 완성시킨 작품인 모양이었다. 무릎 위에 앉혀 놓고 들여다 보고 또 들여다 보고 손으로 가만, 가만 쓰다듬어 보았다.
산인(山人)의 숨결이 손 끝으로 스멀스멀 살아나는 것 같아서 얼른 손길을 거두었다. 내 의아심을 풀어 준 것은 잠시 후 돌 밑에 떨어진 메모지였다. P씨 였다. 그분이라면 이런 일을 충분히 할 수 있는 사람이다.
삼 사 년쯤 되었을까, 지방 신문에 컬럼을 3개월 쓴 일이 있었다. 그것이 끝난 얼마 후에 나는 유별난 소포를 받았다. 청무우 그림이 선명한 무우씨앗 봉투에 광목실로 숭숭 꿰 메어 아구리를 봉한 봉투였다. 봄 씨앗을 뿌리느라고 밭골에 섰다가 우체부를 만난 통에 흙손으로 그 봉지를 뜯어 보고 참으로 행복 했었다. ‘여기 열매가 아름다운 유자씨를 보냅니다. 좋은 칼럼이 인상 깊어 스크랩 해 놓고 자주 봅니다.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싶어서L.’ 글 쓰는 사람치고 가장 행복한 순간은 자기 글을 보고 공감해 주는 사람을 만날 때가 아닌가 싶다.
그때 우리 밭둑에는 자잘한 꽃다지 꽃이 노랗게 피어 바람을 타고 물결처럼 흔들렸다. 나는 밭둑에 주저 앉아 한 공기나 됨직한 유자씨를 신기하게 만져 보았다. 내 온 지체에 유자씨가 심어져 싹이 트는 느낌이었다. 짧막한 글월에서, 투박한 솜씨에서, 어쩐지 장인의 손길을 느꼈다. 그 여름 내내 내 서재 창에는 온통 유자덩굴로 푸른 커튼을 늘이었고 가을에는 노오랗게 익은 유자가 수십 송이 등불을 밝혀 주었다.
P씨는 이렇게 해마다 유자씨를 보내어 남녘의 봄을 알렸고 꽃만 아름다운 게 아니라 열매까지 아름다운 생활이 되도록 채찍질해 주고 있다. 개개인이 날마다 스스로를 올바르게 혁신해 나가면 결국 그 나라의 민족성이 개조 된다는 안창호 선생님의 말씀은 현대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뜨거운 민족애를 일깨워 주고 있다. 아마도 P씨는 생각만 무성하고 행동이 따르지 못하는 나에게 그 말씀이 꼭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내실(內實) 있는 삶을 가꾸라는LL. 그런데 그분과 나는 아직 서로의 얼굴을 모르고 있다. 아마도 영원히 모르는 쪽이 될 것도 같다. 그간 대여섯 번의 글월에서 충북 영동 심천 강가 산세가 험한 골짜기에서 움막 같은 초가집을 잣고 혼자 살고 있다는 것 외엔L.
나는 돌을 머리맡에 앉혀 놓았다. 좌대를 할까 해서 수석집에 보였더니 밑둥을 갈아내야 한다기에 그냥 들고 왔다. 어디 한군데도 문명의 때를 묻히고 싶지 않아서다. 그분의 고고한 마음이 훼손 되는 것 같기도 해서다.
나는 요즘 벽면좌선이 아닌 석면좌선을 자주 한다. 간단없이 불어와서 홀량 뒤집어 놓은 집착의 바람을 재우기 위해 묵묵히 앉아 있으면 멀리 장성산 깊은 골에 촛불 밝히고 홀로 산의 침묵을 쪼아대는 석공의 영혼을 만난다. 어디엔가 그의 외로움이 획으로 파이고 그의 말 못할 아픔도 꽃무늬로 녹았으리.
사노라면 이렇게 오래오래 가슴 적실 만남도 있는 것을. 오늘 밤에 촛불을 밝혀야 겠다. 그리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돌의 숨소리를 들어야겠다. 누가 아랴. 돌이 천년의 입을 열고 화엄경의 구슬로 욕심으로 꽉 메인 이 중생의 내이(內耳)를 열어 줄지.
(한국수필 신작선집7 85. 9)
38. 징검다리
오늘도 육교 위에서 고향 냇가의 징검다리를 생각한다. 마을 모퉁이로 허리띠를 두른 듯 시냇물이 흘러간다. 어른 양팔로 쫘악 버려 둘이 될까말까한 폭의 냇물에 장마 때 말고는 늘 고만한 양의 물이 졸졸 흘러갔다. 검정 고무신을 벗어 들고 철벙철벙 들어서면 여남은 살 내 또래의 정갱이에 찰랑거리는 물살이었다.
그곳에는 사철 돌다리가 놓여 있었다. 댓돔한 돌 위에 쪼그리고 앉아 물 속을 들여다 보면 눈만 보이는 새끼 송사리가 까맣게 모여 들었고 베틀 올챙이도 더러 눈에 띄었다.
장날이면 온 마을 사람들이 나들이 옷으로 치장하고 돌다리를 건너 장터로 갔다. 읍내 공마당에 들어온 서커스 이야기도 이 냇가에서 꽃피었고 동네 처녀 선 본 소식도 이 빨래터에서 퍼졌다. 말하자면 이 냇가는 동네의 뉴스센타에 손색이 없었다.
층층시하에서 안으로만 삭히던 울혈을 빨래 함지에 담아 냇가로 나온 아낙들이 찝질한 설움을 맑은 물로 헹구며 친정을 그리는 눈망울에 징검다리는 위안이 되기도 했다.
빨래하는 어머니 곁에서 비누거품을 내다가 읍내로 뻗은 꼬불꼬불한 신작로를 바라보면 이상한 설레임으로 부풀었다. 끝없는 동경이었다. 얼른 커서 과자도 많고 인형도 많다는 읍내에 가겠다는 미지에 대한 벅찬 꿈이었다.
해방되던 그 무렵 생존일 수 밖에 없는 여건 속에서 우리 어린것들은 벌거숭이로 냇가를 누비며 즐겁기만 했다. 읍내에 있는 국민학교에 입학하고부터 우리들은 책보를 허리춤에 질끈 동이고 개궂지게 장난을 치다가도 징검다리 앞에 오면 모두 점잖아 졌다. 장난을 치거나 한눈을 팔다가는 헛딛기 쉽고 욕심껏 한 칸을 건너 뛰면 못 미쳐 빠지고 서두르거나 새치기 하다가는 둘이 다 물속으로 나동그라지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래선지 돌다리 근처에는 언제나 고즈녁 했다. 객지에 가 계신 아버지를 기다리던 밤, 달빛이 물살에 비껴 출렁이는 때도 나는 달이 울고 있다고 생각했다. 언제인가 말짱하던 날씨가 갑자기 흐려지더니 장대 같은 소나기가 쏟아 졌다. 그날 하교길레 냇가에 당도하니 돌다리는 온데 간데 없고 흙탕물만 콸콸콸 흘러 가고 있었다. 그렇게 아득하고 막막하기는 처음이었다. 빈 도시락은 달그락 거리고 뱃구리는 푹 꺼지고L.
때때로 불청객이듯 찾아오는 생활의 난관 앞에서 나는 그때의 절망을 생각하고 좀 여유로와 지려고 애를 쓴다. 간단없이 밀려오는 흙탕물의 급류는 그 후로도 수없이 지나 갔다. 다음날 걱정하며 나선 등교실은 놀라움과 고마움의 아침이었다. 징검다리를 건너 다니면서 잔뼈가 굵고 세월도 덧없이 기운 이제 보이지 않은 고마운 마음과 손을 생각하게 됨은 어인 일인지.
그 사람은 누군가 자기 다음에 건널 사람들을 위하여 물에 빠져 가며 그 일을 했으리라는 생각, 아무 설명 없이 돌다리를 건너며, 돌다리를 건너듯 험한 인생 고해를 차근차근 정확하게 , 순리대로 살라는 삶의 태도까지도 넌지시 일러준 지혜가 뒤늦게 가슴에 닿아온다.
우리는 숱하게 많은 자기의 징검다리를 건너 가고 오며 살고 있다. 여지껏 살아오는 동안 알게 모르게 징검다리가 되어 풍랑이 심한 삶의 바다에 빠지지 않도록 해 주신 큰 섭리의 손으로부터 부모, 형제, 스승, 친구, 이웃들께 새삼스레 감사로움이 움트는 것은 마저 건너야 할 냇가의 건너편에 언덕이 희미하게 보이는 때문일까, 다 건너 왔다는 안도감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 더 붙들고 도전할 고통이라는 짐이 가벼워져 간다는 허전함 일까. 고통까지도 사랑함은 진주를 보듬는 조가비의 아픔일진대 내 어찌 고통에게도 감사하지 않으리.
촌티나는 도시인이 되고부터 나는 육교를 좋아한다. 돌다리를 건너던 아기자기한 추억과 함께 육교에 올라서면 좀 느긋해진다. 차량의 질주 속에서 보호돼 있다는 안도감과 시골 장날을 연상케하는 갖가지 좌판이 있어서이다. 사주 관상장이가 있고 방물장수가 있고 눈먼 소녀의 깡통에 징검다리를 놓아 주는 인정의 가화가 꽃피기도 한다.
어제 저녁에는 비가 내렸다. 거대한 과학문명 앞에 끝없이 뇌살 당하는 도시인들, 소음과 매연도 비오는 저녁에는 조금은 차분해진다. 행인들인 뜸해진 육교 위에는 외등 불빛이 아련했다. 빗방울마다 정감의 세포를 열어 주는 이러 저녁이면 나는 일손이 잡히지 않아 애를 먹는다. 돌아올 사람 없는 밤길에 우산을 펴 들고 막연히 서 있었다. 육교 아래는 같은 방향의 무리들이 번호표를 단 버스에 동승해서 빗속을 달려가고 있다.
나는 문득 나의 행선지를 생각했다. 누구나 마지막 행선지는 피안의 곳 죽음뿐. 타닥타닥 빗방울의 파열음을 가슴에 새기며 층층계를 내려서면 나는 모처럼 끝없는 자유에 도달한 가변한 마음이 되었다. 지금까지 누군가가 놓아준 징검다리를 딛고 편안하게 살아 왔으니 이제는 나도 누군가를 위하려 아주 작은 징검다리 한 짝이 되어야 하리라는 마지막 남은, 실로 엄숙하기 이를 데 없는 자각이었다.
(중원 문학 84.)
39. 5월과 그 사람
떠나버린 사람이다. 5월이 올 때마다 망각으로 미채(迷彩)된 내 기억의 수면(水面)에 어렴풋이 비치다가 흩어지는 그 사람. 우리는 그때 철길을 따라 걸었다. 철길 가에는 아카시아꽃이 흐드러지게 피어나서 슬프도록 아리한 향내를 펴내고 있었다. 할말은 많은데 말을 잊은 채 가슴 터지게 날아드는 향기로 서로의 눈빛을 채우고 있을 뿐 그가 말했다. “잘있어. 그림이 되거든 돌아올게.” “........” “어쩌자고 우리는 레일처럼 평행선인지 몰라. 죽음이라는 종착역 밖에 가지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는 떠나갔다.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조차 모르게 지내다가 5월이 오면 송화 가루 같은 술 냄새를 풍기며 내 방문을 노크했던 그, 국전 출품을 위해 한 여름 내내 아뜨리에 속에 잠적하던 그가 몇 번의 5월을 찾아 들더니 끝내는 떠나갔다.
불에 타 죽는 줄 모르고 날아드는 불나비처럼 턱없이 그립고 아쉽던 그가 내게 남긴 것은 한 가지. 매미가 되기 위해 어둡고 습한 땅속에서 숱한 세월을 뒹굴며 자기를 추스리는 굼벵이의 시도, 그것이다. 단 2주일의 비상을 위해 기꺼이 바치는 각고의 십 수년. 밤 이슥하도록 하얀 원고지 앞에 앉으면 영혼의 소진을 위하여 나를 추스리는 작업 속에 그의 날개 짓이 들리는 듯 하다.
이제 그때 못한 인사를 나눠야지. “안녕히 가세요. 매미가 되기 위해....” 메기의 머리가 백발이 된 것처럼 그 사람 머리도 하얗게 세었다는 소식이 바람으로 지나 갔다. 그 사이 스무번의 5월이 지나갔나 보다.
(충북 문협회보 82.6.20)
40. 고독한 날개 짓
삐르릉 삐르릉 새벽의 전령이다. 먼동이 트기가 무섭게 뒷산 숲에서 잠을 잔 멧새들이 무리 지어 날아와 노래를 한다. 숨어서 몰래 바라보니 어쩌면 저리도 가벼운 몸짓인가. 조막만한 잿빛 새는 편편한 가지는 제쳐 두고 동곳한 가지 끝에 떨어질 듯 앉아서 꽁지를 까불러 대며 무언가 궁리하는 눈치다.
먹이를 찾는 걸까, 아니면 친구를 부르는 걸까, 설마하니 저렇게 높은 가지에 둥지를 틀려고 그러는 것은 아니겠지. 들깨알 보다 더 작은 눈에 무엇이 보이는지 가지 껍데기를 쪼아 대고 부리를 비벼 씻기도 한다. 새들이 저토록 평화로운 것은 자기 것을 고집하지 않기 때문일 게다. 인간들처럼 창고에 쌓아 두려는 욕심이 없어설 게다.
돼지 밥을 주러 가다가 깜짝 놀랐다. 언제 날아와 있었는지 발치에서 새 한 마리가 푸드득 날아 갔다. 나를 보고 놀랜 모양이다. 내가 총을 든 것도 아니고 청산가리를 놓으러 가는 것도 아닌데 새는 놀라서 돼지우리 지붕위로 날아 올랐다. 그 바람에 우리 밭에 날아와 나부대던 새떼들이 풍구질한 등겨처럼 날아 솟았다.
어떤 새는 내쳐 뒷산까지 또는 하늘 꼭대기로 날아 올랐다. 양동이를 든 채로 바라보니 그것은 신비의 율동이다. 얼마쯤 새 들이 날아 올라 간 하늘 끝을 바라보고 있으니 무한한 창공에 한 점 새의 의식은 텔레팔시로 내게로 온다.
영원과 통하고 말 것 같은 자유. 소멸과도 일직선일 것 같은 찰나. 항상 날고 싶어 하는 내 의식은 그래서 유달리 새들을 관심하고 그 자유로움에 매료되는 모양이다. 역마살 탓인가, 늘 휑하니 떠나고 싶어하는 나의 몸살은. 설거지를 하다가도 밭을 매다가도 내향(內向)하는 삶의 안개 숲. 그때마다 햇살로 떠오르는 한 귀절이 있다. “생명은 양(量)이 아니라 질(質)이며 보호가 아닌 자유이고 의지를 향해 나아가는 것.”
그 무렵 인천에 사는 수필가 K여사가 십자매 몇 쌍을 선물로 가져 왔다. 외딴터에서 갇힌 짐승처럼 무양무양하게 지내는 내가 안타까와 보였던지 그는 먼 길에 새장까지 마련하여 주었다. 두 식구에서 단번에 열 식구로 불어난 것이다. 굵은 철사를 촘촘하게 엮어 맨 정사각형 새장 안에 둥지가 하나 도롱벌레집처럼 매달려 있고 가늠대 옆 창살에는 물통과 모이통이 각각 얹혀 있다.
새들이 이사를 오고부터 새소리를 들어 달라고 조르는 통에 그이가 번거로와진 것을 빼고는 나의 일과는 훨씬 생기로와졌다. 베란다 위에 새장을 걸어 놓았다. 새벽 먼동과 함께 깨어나 둥지에서 나와서 빼이빼이 울기도 하고 어떤 것은 쮸루룩 쭈르르릉 마치첼로의 현이 울리는 것 같이 운다고 한다. 날짐승들도 밤의 어두움이 싫은 모양이다. 산마을이어서 해는 더디게 동산에 오른다.
잠을 털고 텃밭에서 배추잎을 뜯어 넣어 주고 모이통 물통을 가셔내고 새것을 담아주는 일, 그때마다 조그만 창살문을 들어 올려야 하는데 새들은 틈만 있으면 날아가려 기를 쓰는 통에 여가 조심스러운게 아니다.
십자매들이 이사 온 후로 뜰 앞 사과나무에는 더 많은 멧새들이 깃들었다. 이제 볼긋볼긋 사과는 익어가기 시작했다. 아침을 짓다 슬며시 내다보니 새장의 십자매나 나뭇가지에 앉은 멧새들이 서로 어울려 저희들 언어로 화답(和答)하는 모습이 재미있어 보인다. 아마 십자매는 바다를 모르는 충청도 멧새에게 인천항 화물선의 고동소리를 들려 주려는지 파도 같은 날개 짓으로 고동소리를 불어 댄다. 그러다가 멧새들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꺼번에 가지를 박차고 비상할라 치면 십자매들은 더 요란한 날개 짓으로 푸드득 거렸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비가 내리는 날은 사방이 차분히 가라앉고 먼데 기적소리까지 마음 속으로 젖어 든다. 나는 또 우두커니 뜰에 섰다. 나무 잎새들도 조용히 귀를 열고 빗소리를 듣고 섰는 시각, 기차는 다음 정거장을 향해 뚜우우웅 떠나고 있다. 훨훨 날아가 차에 오르고 싶은 목마름.
무심코 내려다 본 새장 안에 새들이 조용했다. 새의 깃털이 민감해서 비가 올 것을 미리 안다던가, 새들은 나래를 접고 싶은 사념에 젖었는지 가늠대에 나란히 앉아 있었다. 나는 새장 문을 열었다. 새 한 마리가 갸우뚱 내다 보더니 얼씨구 좋다는 듯 포르릉 날아 갔다. 또 한 마리, 다시 두 마리, 이렇게 여덟 마리 새 중 여섯 마리가 날아 갔다. 날아라 힘껏, 더 높이 더 멀리 가고 싶은 곳으로 가라. 나는 개운했다.
어머니는 늘 새가 되고 싶다고 했다. 딸 형제로 단산하고 칠거지악의 부덕으로 하여 인종(忍從)의 인두로 스스로를 지지며 60평생을 그늘 속에 잦히셨다. 나도 죽으면 어머니처럼 쌀쟁반에 미미한 발자국 남겨 놓고 영원으로 날아가버린 새가 될까, 그리하여 처형보다 더 아픈 이승의 속박에서 풀려나 날갯죽지 아프도록 날아 볼거나. 죽음보다 더 무서운 절망의 벽을 향하여 부서지며 찢기며 도전해 볼거나.
비상하는 새의 자유, 자유. 저녁나절이 되었다. 비는 그쳤다. 빗물에 씻긴 산과 들이 한결 산뜻해졌다. 저녁 찬거리를 마련하러 채마 밭에 나가다가 빨래 줄에 앉은 새들을 만났다. 멧새려니 했다. 가까이 가도 도망가지 않고 앉아 있는 새들은 비를 맞고 말개 쳐져 돌아 온 십자매들이었다.
쯧쯧, 새들은 넓디 넓은 하늘이 무서웠을 거야. 무한정한 자유 앞에 그만 겁이 난 거야, 길들이지 않은 날개짓도 힘겨웠을 테고, 그토록 갈망한 자유가 얼마나 두렵고 고독한 것인가를 알았을 거야. 한 마리씩 움켜 담는 나의 가슴으로 고장난 역마살을 보듯 처절한 비애가 넘실거렸다. 나의 아픔은 한 마리의 가시나무새가 되기 위한 몸부림이다. 가장 깊고 날카로운 가시를 찾아 스스로 자기 몸을 찔려 죽어가며 그 고통을 초월하여 가장 신비하고 아름다운 최상의 노래와 목숨은 맞바꾼다는L. 그리하여 나의 영원이 시작되는 날 혼불을 지펴 낸 내 노래가 외로운 영혼의 위안이 되고 목숨의 참 의미가 되기 위해 더 높이 더 멀리 날아가는 고독한 날개 짓은 멈추지 않을 것이다.
(한국문학 86, 8)
41. 달빛과 木神이야기
꿈결이 하도 어수선해선 눈을 떴다. 야광시계는 새로 한 시를 가리키고 있는데 머리맡 창이 대낮처럼 환하다. 누운 채로 생각하니 꿈은 아득하고 바람 스치는 소리에 창문을 열어본다. 찬바람이 확 끼치듯 불어 온다. 보름이 가까워 오는지 덩그렇게 중천에 뜬 달이 찍어 놓은 듯 동그랗다.
벌써 며칠째, 아니 이 가을 내내 나는 달빛으로 불면에 시달리고 있다. 감상적인 소녀도 아닌 터에 달빛 때문에 잠을 못 잔다는 것은 우스운 일이지만 엄연한 사실이다. 방에서 환하게 불을 밝히고 텔레비전을 보거나 뜨개질을 할 때는 잠잠하다가 불을 끄고 잠자리에 들면 폭포처럼 쏟아져 들어오는 달빛.
어쩌자고 이리도 보채는가, 나는 오늘 밤도 잠들기는 글렀다며 가운을 걸치고 밖으로 나섰다. 어젯밤에는 어디선지 월과 소나타가 환청처럼 들려와 서재로 나갔더니 거기 피아노는 침묵한 채이고 뚜껑 위에 달빛만이 소복히 스며 있었다.
뜰에 내려 섰다. 만상은 차디찬 달빛 속에 조용하지만 분명히 살아나고 있다. 집 앞에도 옆에도 온 밭에 사과나무는 양팔을 치켜들고 벌 서는 아이처럼 서 있다. 보기에도 섬찟하다. 그때 달빛이 올올이 명주실처럼 풀어지더니 구름 한 점 없이 까아만 하늘을 건너 질러 사과나무 위로 칭칭 감겨 왔다. 이상한 일이다. 나는 나무 가까이 다가 갔다. 무엇인가 소곤소곤 주고 받는 소리가 들려왔다. 더 가까이 귀를 가져 갔다.
“네 이름은?” “스타킹이라 하옵니다. 별 중에서도 가장 큰 왕별이라는 이름입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그 큰 지체를 다 잘리우고 선혈을 흘리고 섰는고?” “예, 그것이 원통하옵니다. 주인나리께서 제 열매들이 시세가 없다해서 이렇게 세워놓고 잘라대기 수삭(數朔)이나 됩니다.”
나무는 징징 우는 소리로 미주알 고주알 다 일러 바치고 있었다. 나는 겸연쩍어서 얼른 그 자리를 피하여 건너밭으로 갔다. 그곳에는 수년째 부란병으로 거멓게 타들다만 홍옥나무가 간당간당 목을 흔들며 자탄하고 있었다. 언제는 보석 같은 홍옥이라고 그리도 감싸주고 위해 주더니만 이제는 싹둑싹둑 잘라내어 이 지경을 만드니 너무 하십니다. 너무 하십니다.
그랬다. 황금알처럼 예쁘고 귀했다. 구시월 부신 햇살로 목욕하고 난 반들반들한 그 볼에 눈을 마주치면 감미롭고 설레이는 입맞춤이여. 비단 옷을 온 몸에 두른 목신(木神)은 나무 사이를 오락가랄하며 만신창이가 된 나무들을 위로하고 있었다. 나는 어느 사이에 한 마리 속죄양이 되어 상처뿐인 나무 결을 어루만지며 마지막 들려 줄 이별의 모래를 가만가만 부르기 시작하였다.
산들 바람이 산들 분다. 달 밝은 가을 밤에
달 밝은 가을밤에 산들바람 분다.
정이 들대로 든 나무 들이다. 그들이 아를 알 듯이 나 또한 그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다. 그러나 신품종이 아니고는 적자 농사를 면할 수 없어 이렇게 사과 나무를 베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농한기를 이용하여 식구끼리 하는 작업이어서 선 채로 잔가지부터 잘라내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 작업을 시작하면서 이상스레 미안한 생각이어서, 또 어떤 때는 나무들의 통증이 번져와서 심란 하였다.
사형선고를 기다리는 형장의 죄수처럼 사과나무들은 비장한 수심에 잠겨 있다. “그러는 게 아녀, 없애려거든 뿌리 채 뽑아 버려야지 산채로 토막토막 죽이는 게 아녀.” 할아버지의 목소리 같이 점잖은 목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정말 세상 돌아가는 게 이러는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겨울이 가고 머지않아 봄이 오면 잘라낸 그루터기에는 새움이 돋아날 것이다. 꽃을 피우거나 열매를 맺지 못할 줄 알면서도 생존의 필연성으로 자랄 것이다. 쓰잘데 없는 삶의 허실로 바라보는 깊디 깊은 뿌리의 비애는 어찌 하는가. 어깨를 움츠리고 하늘을 바라본다. 내 의식의 밑바닥에 서성이던 목신은 어디론지 사라지고 우주 만상은 본연 그대로이다.
어찌하여 사람들만 점점 기계를 닮아가는지. 그래서 어린이들은 징그러운 외계인 ET의 착함을 사랑하고 못나디 못난 양배추 인형을 열광하는 것은 아닌지. 그래도 이런 어린이들에게는 내일을 여는 가능서의 하늘이 보이니 얼마나 다행한가.
필시 가을 벌레가 우는 밤일 텐데도 사위는 고요롭기만 하다. 문명의 이기에 몸과 마음, 영혼까지를 빼앗겨 버린 현대인에게 가냘프고 아련한 가을 벌레 소리가 들릴 리 없다. 그것은 태초를, 그리고 원죄를 생각케 하는 계절의 노래임에 분명한데 물질만능에 살이 올라 비만증에 걸렸어도 마음과 영혼은 심한 영양실조에 걸려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는 것이다.
무감동의 지독한 문명병은 치유가 어렵다는데 자각증상조차 없으니 아랑곳하는 이가 없다. 이런 밤엔 차라리 등불마저 끄고 누워 끝없이 바람 일고 소용돌이치는 내면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며 목신의 타이름에 마음을 열어 놓을 것이다.
별빛이 초롱초롱 물을 먹는다. 까만 융단자락 위로 유성(流星)이 지익 긋도 사라진다. 저기 별똥이 떨어지는 곳에 들국화는 이울고 지금쯤 찬서리가 내리겠지. 못다 부른 노래를 불러 주어야지.
아, 아아, 너도 가면 이 마음 어이 해.
(수필공원 84.봄호)
42. 代理母情
이제 꽃눈 트는 넓은 사과 밭에 따스한 봄볕이 화창하다. 대지(大地)는 대지 대로 지금 막 새 생명이 약동하는 탓일까. 나는 아까부터 나무 밑에 앉아 행복감에 젖어 있다.
저만치 작년 가을 사과를 따 모으느라 깔아 놓은 짚 위에 새끼 강아지 여섯 마리와 어울려 한참 신나는 어미 개 짜루를 보고 있으려니 느긋한 평화가 온다. 어미는 흰둥이인데 새끼가 모두 누렁이니 필경 아비가 검둥이나 누렁이일테지.
새끼를 건사하는라 갈비뼈가 앙상하고 척 늘어진 유방이 벌거죽죽 볼품 없지만 여섯 마리의 새기를 가지런히 젖 물리고 반듯이 누워 두 눈을 껌벅이는 그 어진 눈동자는 비록 미물이라지만 숭고하다.
요즘처럼 곡식 값이 비싼 세태에 저 많은 개를 다 기르는 나를 보고 모두 멍청하다고 한다. 농촌에서야 가을부터 이듬해 봄까지는 늙은 호박에 쌀겨를 섞어 영양죽도 쑤어주고 여름철이면 일 바라지에 남는 보리 누렁지면 넉넉하다. 그러나 그 일에 매달리는 시간이나 공력을 보면 안 기르는 것 보다야 힘든 것도 사실이다. 허지만 덧셈 뺄셈이 잘 안 되느냐는 비양도 마다하고 고집스레 기르는 뜻은 나는 나대로 물질적인 손익 이전에 나 스스로 행복하고 싶어서다. 엄마 품에서 배불리 젖 먹고 가로 세로 제 멋대로 누워 잠든 어린 강아지의 모습이 내 눈에는 십여 년 전 떠나가 두 아이의 모습으로 보인다.
그가 새댁 얻은 집으로 딸 둘을 데리고 떠났다. 아홉 살, 여섯 살 강아지 같던 내 아이들. 그 후 우여곡절의 세월이 흘렀건만 지금도 나는 꿈만 꾸면 늘 그 때의 아이들이 보인다. 가끔 서울에 가면 거리에서, 버스에서 무의식속에 찾아지는 내 혈육,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컸을 텐데도 큰 아이들은 안보이고 아홉 살, 여섯 살 또래의 아이들만 눈에 띄인다. 내 눈은 십년전의 상태에서 머물렀나 보다. 세시간만 달려가면 만날 수 있는 거리에 살면서 나와 그들과는 지구의 끝과 끝이다.
이산 가족이다. 어떻게라도 만날 수야 있겠지만 내가 자식 앞에 나타나서 생활에 혼란을 주고 싶지 않아서다. 나는 어떻게 되어도 좋다. 그들만 상처없이 반듯하게 자라준다면 나 자신의 어떤 희생도 기쁘게 치르리라. 이것이 내게 있는 최선의 모성이다. 순리대로 자식과 어미가 만나게 되는 날을 기다리며 사노라니 이렇게 강아지에게 대리모정을 느낌이 주책없는 짓은 아니리라.
한 강아지가 기지개를 켜고 하품을 한다. 한 마리가 시작하면 전염병이듯 이놈 저놈 덩달아 하품을 한다. 먼저 눈 뜬 놈이 엄마 목께로 가서 엄마 목을 끌어안고 혀를 핥으며 장난을 친다. 한 놈은 엄마 사타구니로 기어들어 꼴찌 못난이 젖을 빨아댄다.
네 눈박이와 유일한 암놈이 둘이 어울려 앙앙거리며 레슬링을 시작한다. 그 북새통에도 늦도록 잠자던 두 놈이 쓰윽 눈을 뜨더니 아기작 아기작 사과나무 으슥한 곳으로 걸어가 쪼그리고 앉는다. 보나마나 오줌을 누는 것이다. 이렇게 볼일 보고 돌아온 새끼들을 어미는 꼭 점검한다. 냄새를 맡고 잠지에 묻은 물기를 혀로 닦아준다. 어쩌다가 시궁창에 빠졌다 나온 새끼를 한나절이나 혀로 핥아 젖은 털을 말려 주던 광경은 오래도록 잊혀지지 않는다.
강아지들이 우루루 내게로 몰려 온다. 참으로 귀엽다. 먼데 소리까지 물어오는 다봇한 귀와 항상 물기 젖은 노르레한 눈동자, 발가스름한 발바닥까지 사랑스럽다.
외딴 터 과수원엔 온종일 가도 인적이 없다. 강아지들도 어미도 심심해지면 건너편 기차역 플랫홈으로 들어오는 기차를 보고 한바탕 짖어댄다.
컹 컹 컹 컹
어미가 짖으면 여섯마리 강아지도 덩달아 가앙 가앙 짖는다.
컹 컹 가앙 가앙
컹 컹 가앙 가앙
아이 둘을 키우며 심한 불면증으로 시달리던 때. 불을 낮추고 아가들의 잠자리를 도닥여 주고 신문을 뒤적이다 그래도 잠은 달아나 버리고 으레 한 시나 두 시, 겨울 밤은 너무 길다. 이때 배시시 눈 뜬 우리 현이.
“엄마, 날 샛어?”
“아니 , 더 자야지.”
“엄만 왜 안자?”
“잠이 달아나 버린걸.”
“엄마 내가 재워 주께.” 조그만 팔로 엄마 목을 잔뜩 끌어 안고는 토닥토닥 두드린다. 내가 고개를 쳐들면, “저기 호랭이 왔어, 어서 자.” 하며 제법 어른스럽게 눈을 홀긴다. 자장자장 엄마를 재워주는 아기, 그 비릿한 젖내나는 아가 가슴이 엄마의 천구이었음을 지금 느낀다.
짜루는 두 눈을 지그시 감는다. 한참 있다 가만히 뜬 회색빛 눈동자 속에 서리는 따스한 모성. 거기 천심의 파란 하늘이 곱게 빛나고 있다.
43. 母 死 花
말할 수 없이 슬픈 빛깔이다. 파랗게 밝혔던 임종의 눈빛과 파르래한 죽음을 꽃잎은 물고 있었다.
친정집 뒤뜰에 한 무더기 피어난 잎이 없는 꽃 난초! 누가 이름 지어 모사화(母死花)라 했는가. 풍요로운 모체(母體)가 한 줌 밑거름으로 승화 했을 때 비로소 거기 피어나는 사랑의 꽃. 부시도록 슬픈 소복을 하고 어머님을 산속에 혼자 두고 오던 날 나는 이미 산속을 방황하는 한 마리 새 였어라.
어머님의 손길이 스쳤던 장독대의 장내음, 텃밭에 일렁이는 백발의 노안(老眼), 나는 힘겨운 시름을 안고 장독대에 걸터 앉았다. 엄마의 음성이 귓가에 맴돌았다.
“얘야, 감기 들라 방으로 들렴.”
아하, 타는 울음을 가슴으로 밀어 넣으며 밀어 넣으며 하늘을 보다 스픔을 나눠 주시려고 찾아주신 분들 연민으로 가득한 가족의 눈길이 아파서 뒤 곁에서 울다 앉기만 하면 생존에 못다한 정성이 몹시 쓰린 아픔으로 돌아와 뒤늦게 무형의 ‘母死花’는 내 가슴에 피었다. 그래서 저토록 아린 빛깔이리.
두 눈을 살폿 감고 고운 잠을 주무시던 그 하이얀 얼굴이 장독대 뒤 꽃 속에 피어난다. 아버지가 지나시다 놀라워 바라 보신다. “아가야 너무 상심말어, 돌아가신 후에 애달퍼 한들 무슨 소용이람, 천륜(天倫)이야.”
아버지의 눈길도 연보라빛 난에게 쏠렸다. “허허, 잎은 꽃을 보지 못하고 꽃 또한 잎을 못 보느니 애처러워라 모사화!”
어느새 아버지의 가느다란 눈꼬리도 일그러 지신다. 사랑하던 이승을 밀어 놓으시고 연기처럼 가벼히 하직하실 것을 유난한 애착으로 숨죽인 인종으로 꼬박 꼬박 지켜오신 60평생.
어머니.
향로에 타 오르는 향이 서러워서 저는 또 한번 죽었습니다. 어머님 평생을 아프게 했던 모든 것을 다 용서하고 가셨지요? 더 끔찍한 사랑으로 은혜조차 어리게 하셨지요?
모사화 만큼 아리운 후회로 꿇어 앉았을 때 어머니!
당신은 이미 한줌 고로운 육신을 벗어 놓으신 채 영원한 곳으로 떠나신 뒤였습니다.
“아가야 너 때메 에미는 죽기도 힘들어”
그러나 어머니!
첫 번째 출근 했을 때 어머니의 기원이 살아있음을 전신으로 느꼈습니다. 때묻지 않은 인정으로 지순한 사랑으로 곳곳에서 아픈 날개를 어루 만져 주시는 따뜻한 이웃으로 하여 저는 또 한번 긴 목을 외로 꼬고 나는 외롭지 않다고 다짐을 했습니다.
어머니.
편히 가십시오.
천상에서 나마 걱정근심 잊으시고 편히 쉬세요. 삼우제를 지내던 날 곡 대신 산하 가득 울려 퍼진 노래를 들어 셨어요?
병환 중에 그리도 좋아하신 ‘어머님 은혜’ 우리는 처음으로 구 노래에 담겨진 어머님의 속 마음을 뒤 늦게사 깨달았습니다.
어머니.
흰 댕기를 드렸습니다.
흰 빛깔이 곧 울음인 것을 아픔인 것을 순간 순간 의식하며 거리에서 골목에서 이지러지다 돌아오면 60평도 안 되는 이 집이 왜 이렇게 넓습니까?
밤 낮 매달려 가꾸셨던 채마밭에 바람이 설렁대도 “엄마 고만 하고 들어 오셔요.” 버릇처럼 튀어나오는 어리광, 그러나 안계신 걸요 거기 아무리 찾아도 엄마는 안 계신걸요.
어떻게 하나요?
가을이 와서 코스모스도 장미도 모두 지고 나면 어머니 유난히 찬 손을 녹이러 어디로 가야 하나요?
이래서 저때메 죽지도 못하신다 하셨는데.
어머니.
손끝부터 아릿아릿 저려와요.
또 정신을 잃을까 두렵네요.
어머니.조금 진정되면 다음에 또 편지 드릴게요.
엄마 깊은 잠 고이 쉬세요.
1973. 8월
44. 밀주 한 잔
바람 부는 날이면 거리에 선다. 오라 오라 부르는 손짓이 있어 황황히 문 열고 거리에 서면 삼삼히 밟히는 그림자 하나. 늦더위가 한 풀 꺾인 팔월 어느날 나는 덕수궁 뜰에 있었다. 은행나무는 도시의 소요를 꿀떡 삼킨 채 무상(無常)으로 섰고 세계 성화전이 열리고 있는 전람회 장은 숨소리까지 멈춘 듯 고요했다.
깔리긴드의 ‘부활 그리스도’의 담담한 얼굴에서 지고(至高)의 아름다움은 고통의 모습이나 유열의 모습이 아닌 무념(無念)의 바로 저 얼굴이라는 생각을 했다. 쎈스토이의 성프란치스꼬 청동상 앞에 섰을 때 “가엾은 어머니, 무엇보다도 신뢰를 잃어서는 결코 안 됩니다. 신회 이외에는 모두 잃어 버려도 괜찮습니다” 라는 목소리가 들려 오는 듯 싶어 귀를 모았다.
빈자의 아버지, 그가 가난한 한 여인에게 건네준 말이 뚜껑을 열고 나왔다. ”때때로는 눈먼 이가 보는 이를 위로 했다.” 그 표제가 얼마나 많은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지 나는 우두망찰 서 있다가 부모의 집으로 돌아온 탕자의 심정이 되어 모처럼 안식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들어선 곳이 국내 화가의 작품 전시실이었다. 나는 어느 그림 앞에 멈춰서고 말았다. 수술자리가 도지듯 잿속에 사그러져 버린 줄만 안 기억의 불씨가 바알갛게 피어 오르기 시작했다.
먼 먼 어느 봄날이었다. 개나리가 노랗게 학교 울타리에 피어 아이들 목소리와 어울려 더욱 생기찬 토요일, 나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꿀벌들이 윙윙거리는 개나리 울타리에 숨어 발신이 없는 봉투 끝을 가위로 자르면서 저고리 섶을 들먹이는 심한 동계를 느꼈다
봉투 안에는 종이 한 장 없었다. 이상하다 싶어 봉투를 거꾸로 들고 치마폭에 쏟았다. 나비 되어 날으는 꽃잎, 꽃잎, 진홍의 천도화 꽃잎이었다. 연연한 꽃잎에 쓰여진 글씨, 한 잎 한 잎 맞추어 가는 손 끝이 가늘게 떨려 왔다.
‘봄빛, 그리움, 잔인한 4월.’
그런 편지는 날마다 날아 들었다. 지극히 절제된 언어로 수많은 마음을 전달해 왔다. 어떤 날은 한마디 말도 삼켜버린 채 은단을 쏟아 부어 보내기도 했다.
그림을 그리는 그에게 언어란 얼마나 거추장스러운 것인가를 안 것은 그 후의 일이었다. 그런데 무심하자 하면 할수록 궁금증은 더해 가고 알 수 없는 갈증은 바람이 되어 폭풍으로 변해 갔다.
슬픈 듯 달콤한 비애가 서리서리 감아 왔다. 그 무서운 바람은 무방비하 나를 눈멀게 하고 귀멀게 하고 차츰차츰 심장 복판까지 쳐 들어와서 그만 뜨거운 불길이 되어 단근질하기 시작했다. 야속한 그리움이었다. 야속한 그리움이었다. 아무 준비 없는 순결한 가슴 안에 밀주는 한 모금씩 쪼록쪼록 타고 내려 마침내 내 이성은 서서히 마비되어 갔다. 언젠가는 그것이 독주가 되어 숨 넘어 가게 할 줄은 꿈에도 모르고.
바람부는 날에는 더 심란했다. 무작정 거리로 나섰다. 허풍스럽게 으르렁거리는 바람은 성재산 꼭대기에 바람꽃을 뽀얗게 피우며 조그만 M읍을 난타 했다. 아무리 사납기로 4월 바람은 속살이 따습고 은근한데가 있다. 얼굴은 써늘해도 가슴엔 훈훈한 봄의 입김이 서렸다.
바람부는 밤, 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사람, 그는 긴 다리목에 혼자 서 있었다. 이상한 예감에 끌리 듯 가까이 섰을 때 냇물은 싱싱한 고기 비늘로 달빛에 출렁이고, 웬 사나이 혼자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를 감싸고 있는 암울한 회색빛에 취해 꽃다운 나의 감성은 멍울이 들기 시작했다. 그를 생각하면 나는 웬지 자꾸 작아졌다. 그의 영혼은 너무 높고 아득하여 손이 닿지 않았다. 사랑이라는 달콤함에 취하려 했지. 그러므로 감내해야 하는 고통에는 겁을 먹고 몸을 사렸다. 그의 방황과 고뇌, 절망 앞에 나는 무기력 했다.
그림은 곧 그의 신앙이요, 기도 였다. 술을 마셨다. 죽도록 마셨다. 그림과 글은 창문 하나 사이라고 결국 예술은 신의 메시지여야 한다고. 술잔에 넘쳐 흐르는 고독의 빛깔이 되어 그의 화폭에 어둡게 스며들었다. 내 얄팝한 상식으로는 그의 포효를 이해 할 수 없었다.
사람들은 서로의 기억에 아름다움으로 남고 싶어 한다. 그러니 나는 그를 생각함에 황괴(惶愧)의 아픔만이 전부다. 이제 나는 이십칠 년만의 아득한 거리에서 한 예술가의 깊은 고뇌와 조우하는 것이다. 어두웠던 화폭이 밝아졌다. 물방울 같은 무수한 타원의 보라빛과 하늘색으로 어울리며 말갛게 말갛게 살아 올랐다. 죽음보다 더 고독한 고뇌를 통해 비로소 환희에 다다르는 성숙한 한 영혼을 거기서 만난 것이다.
사랑은 인간을 인간답게 한다. 대나무가 자라면서 마디마디 아픔을 채워 더 곧고 푸르르듯 우리 삶의 내용도 사랑이라는 열병을 치뤄 내고 알차게 영글어 가는 것이다. 바람이 인다. 어떤 바람에도 흔들리지 않는 깊은 강물이고자 나는 문을 닫는다.
(한국수필신작 걸작선 6 84.)
45. 불 빛
그이는 밤마다 외등을 밝혔다. 늦은 밤 이우는 가을 길을 걸어 왔다. 달빛이 싸늘하게 온 누리를 비추고 있다. 타작 끝낸 논벌은 비어가고 가로수도 우수수 잎을 털어내며 겨울을 준비한다. 썰렁하게 비어가는 밤길을 혼자 걸어 오면서도 가슴에 그득한 위안이 고여오는 것은 웬 일일까.
맛있는 것을 흡족하게 먹고 난 뒤처럼 사랑하는 사람과 이제 막 따뜻한 손을 놓고 돌아섰을 때의 그 싫지 않은 섭섭함 같은 것이 성총 안의 평화일까.
멀리 평촌 마을 나트막한 창에서 비치는 불빛이 따스해 보인다. 그곳에는 가족을 기다리는 마음이 있고 무사함을 비는 기도가 있다. 따뜻한 아랫목에는 밥 주발 묻어 놓고, 담북장 투가리는 윗목에서 끓겠지. 평범하여 더 정이 가는 우리들의 일상이 오늘 따라 나를 적시는 이유는 무엇인가.
불빛이 그리워지는 것은 그 만큼 가슴에 한기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어쩌자고 이슥한 가을 길에서조차 불빛을 그리워 하나. 욕심 내지 말아라, 내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은 나를 기다리는 사람이 있다는 증거, 세상에 저 기다림의 불빛이 모두 꺼져버리면 우리들 삶은 산지옥이 될 것이다.
논둑 길을 빠져 나오자 큰 길이 나섰다. 그 때 청주 쪽에서 밤 열차가 돌무링이 마을 앞으로 들어섰다. 열차가 음성역에서 정거할지 그냥 지나칠지는 모르지만 그 차도 어딘가에는 머물러 화물을 하역 해야 할 것이다. 나도 이렇게 열차처럼 무거운 생활을 걸머지고 허둥지둥 달리다가 성당 주님 앞에 내 짐을 내려 놓는다. 그리고 열차처럼 다음 역을 향하여 또 달려야 한다. 끝 날까지 쉬임없이.
혼자 걷는 밤길은 멀고 호젓하다. 침묵이 부담스럽지 않은 이와 함께 걷는 기분이랄까. 평곡 석채 공장 긴 담모퉁이를 지나 컴컴한 굴다리를 빠져아노면 뽕나무고 골짜기에 외등이 하나 성큼 마중나온다. 온종일 가을 걷이로 동동거리다가 저녁상을 차려놓고 성당으로 치닫는 나를 그이는 못 마땅해 한다. 그러나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는 마음의 평화를 얻고자 하는 허기진 영혼을 어쩌겠는가. 그렇게 언짢게 보내 놓고 십 리 먼 길을 다녀오는 아내를 위하여 고단한 잠을 미어내며 외등을 밝히고 기다려 주는 것이다.
불빛은 이렇게 옹이를 풀고 기다리는 사랑의 징표다. 또한 불빛은 커가는 아이와 함께 밝아지기도 한다. 아가를 안고 있는 어머니를 바라보고 있으면 아주 소중한 불빛을 안고 있듯 충만한 기쁨이 주변까지 밝히는 느낌이 든다. 정말 아이들은 우리들의 불빛이다.
열 두살 딸아이와 목욕탕에 갔을 때, 양 가슴에 발그레 솟아오른 여성의 불빛, 이제 아이는 저 불빛으로 하여 그리움의 담금질을 받아야 하고 사랑의 환열도 알게 되리라. 그렇게 여인이 되고 어머니가 되고 인간이 되어가는 궤도를. 그리고 애무의 손길과 수유의 기쁨까지 모두 지나간 형체뿐인 유방을 거울에 비춰 보며 어느 날 아가야, 너는 비로소 여인의 길이 얼마나 아름답고 슬프고 애달픈가를 알게 될 것이다. 그 불빛은 이렇게 서서히 연소되고 마느니 영원히 꺼지지 않는 것은 사랑의 불씨이다.
불빛은 멀리 있을 때 더 따뜻하고 애련하듯, 사람도 그런 만남이 생길 때가 있다. 어쩌다 마주친 그윽한 눈빛, 먼데서 고만한 거리를 유지한 채 아스라이 반짝이는 불빛, 그런 불빛을 간직하고 산다는 것은 절벽을 딛고 한 발, 한 발 다가서는 환희가 있고, 갈수록 더 가까이 있고 싶은 아픔이 있다. 누가 나를 알아주기를 바라지 않고 풀잎 나부낌보다 더 가벼운 이름 석자에 집착하지 않고, 묵묵히 걷는 길을 비춰 주는 도반이며 불빛이기를.
꺼질 듯 바람 타는 나의 불빛은 가까이 갈수록 흐려져서 보이지 않고, 돌아서서 아득히 가늠하면 그제사 발갛게 내 안에 살아난다. 이것이 마음의 등불일까. 그이가 밖의 어두움을 사르는 외등이라면 나는 집 안을 밝히는 촛불이 되어야 한다.
부모님의 노후가 외롭지 않게 관심하고 공경하는 불빛이어야 하고, 아이들에게는 성실하게 살도록 정신적인 안내의 불빛이 되어야 한다. 이렇게 둘이서 밖의 어두움과 안의 혼미함을 구석구석 비추이면 부모님께는 안락한 황혼이 되고, 아이들에게는 당당하고 겸손한 인품이 형성될 것이다.
밖의 어두움이 깊을수록 안의 불빛이 밝아야 하듯, 나는 더 환한 광명으로 빛나기 위해 주님께 충전 받은 사랑의 심지를 돋우어야 할까보다.
(수필공원 85. 여름 호)
46. 사과꽃 필 때
달팽이처럼 숨어드는 내 서재에 오늘은 초록비가 내린다. 어제까지만 해도 송화가루가 날아와 잎맥마다 뽀얗던 사과나무 잎새들이 간밤부터 내리는 비에 씻겨져 앳된 얼굴이다. 아직은 아기손처럼 여리고 작은 잎새들이 바람을 맞고 흔들리는 모습은 애처롭다. 나무는 우두커니 서 있는 나무보다 바람타는 나무가 한결 아름답다.
가만히 살펴보면 아래쪽 가지보다 위쪽 가지들이 더 바람을 탄다. 아래쪽 이파리가 술렁거릴 때 상수리 이파리는 금방 까무러칠 듯 뒤채이다 가까스로 제자리에 선다. 창 바로 앞 의자에 앉는다. 사방이 초록 빛이어선지 빗줄기도 거기 지나가는 바람결도 초록 빛이다.
나는 몸살 감기약 한 병을 목 축이듯 마시고 눈을 감는다. 그 사람은 비오는 밤이면 몽환의 화필을 들었다. 밤새도록 불 켜진 아틀리에를 바라보며 나는 가슴으로 세설하는 빗소리를 들었다. 최초로 그리움을 알게 하고 떠나간 그가 20여년의 시공을 넘어 불현듯 찾아오는 까닭은 무엇인가. 나도 오늘은 화구를 챙겨 무한한 여백 위에 한 폭 그림을 그릴까 보다.
애증의 물결이 씻겨져 내린 내 중년의 빈터에 ‘사랑 받기 보다는 사랑하게 하소서’ 라는 성 프란체스코의 기도를 심으며 초록 붓으로 초록빛 그림을 그려야 하리. 초록은 희망과 믿음이라고 했지.
엊그제는 연 사흘째 꽃비가 내렸다. 꽃피기를 오래오래 기다려 오다가 지난 겨울 눈밭에서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다. 눈보라 속에 꽃눈은 지그시 눈감고 있었다. 나는 경이로운 생명 앞에서 중얼거렸다. 꽃이 봄 한철 피어나는 줄 알았어요. 꽃만 바라보고 아름답다고 했지요. 엄동 설한풍에도 꽃을 피우고 섰는 걸 나는 이제서야 보게 되네요. 문 닫고 누운 토방 안에 달빛 안고 뒹구는 꽃내음새를 겨우겨우 알았어요.
그날의 놀라움은 나를 오래도록 설레게 했다. 역사가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자연도 인간사도 그렇게 단순한 것이 아니었음을, 만나고 헤어짐도 억겁 전생부터 인연의 고리가 이어져 있음을 내 작은 가슴으로 어찌 가늠이나 했으리.
띄엄띄엄 한두 송이 피어나던 꽃이 한줄기 내린 봄비에 생기를 얻고 일제히 함성을 지르듯 피어나기 시작했다. 발그레하니 피어나서 하얗게 지는 꽃. 멀리서 바라보면 집은 어디로 가고 뭉게뭉게 꽃구름 내려앉는 꽃바다 같다. 오래오래 살고 싶어진다. 꽃이 많이 왔다는 것은 사과가 많을 것 이라는 예고이다. 우리는 신바람인 나서 신새벽에 일어나서 두엄을 주고 잡초를 뽑는다. 고단한 줄도 모른다.
달빛이 창을 두드린다. 바이올린 선율도 같고 클라리넷소리도 같은 저 소리. 홀린 듯 나가보니 과수원은 꽃 향기도 아스라히 등천하고 있었다. 꽃잎 사이사이 겹겹으로 스며든 달빛 속에 서 있으면 나는 착하게 살다 떠나는 거룩한 영혼의 진혼곡을 듣는 듯 싶어진다. 그것은 언젠가 본 도자기들이 마지막 불가마 속에서 천 도의 고열 속에 스스로를 달구는 그 아름다운 화염의 인종 같은 것과 흡사했다.
옷깃을 여민다. 여름날 저녁 온 바다 가득 피빛 놀을 토하고 태양이 지고 있을 때 기차의 창에 기대어 몹시 흐느낀 젊은 때가 있었다. 그렇게 아름다운 최후를 맞이하고 싶은 오랫동안의 염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게 꽃이 왁자하게 피어나기 고작 한 열흘, 꿈결 같은 며칠이 지나고 나면 꽃은 다시 생명의 잉태를 위하여 몸을 부순다. 살랑살랑 하늬바람에서도 부서지고 솨알솨알 흔드는 큰 바람에 갈가리 찢긴다.
그것은 위대한 부활의 진리이다. 꽃비가 설편처럼 무수히 흩날린다. 화사한 요정은 한(恨)도 눈물도 없이 정말 꽃답게 무너져 간다. 뜰에 쌓이는 꽃잎, 꽃잎. 포물선을 그리며 떨어지는 꽃잎, 어떤 것은 몸부림으로 뒤채다 풀 위에 눕는다. 해마다 이맘때쯤 몸살인지 맘살이지 한 번씩 호되게 앓는 나는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다. 너무 욕심내고 산 탓일게다. 봄채비를 서두른 과수원일, 해도해도 끝이 없는 아낙의 일, 속으로 앓는 글 쓰는 일, 세상사에 너무 많이 집착하고 덤벼든 탓일게다.
약을 먹고 진득하니 안방에 누워 취한을 해야 빨리 낫는 줄 알지만, 지는 꽃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는다. 내가 태어나기 전에 살았던 어머니의 뱃속처럼 그렇게 안온하고 고요로운 서재에 온종일 꽃비가 내린다. 오솔오솔 오한이 드는 얼굴을 찬 유리창에 부빈다. 연연한 꽃이파리에 나를 아로새긴다.
백년 살 것처럼 좁은 가슴 터지게 안고 싶었던 세상사, 저 꽃잎보다 더한 것이 무엇인가. “인간의 삶에 있어서 시간은 점이고 실체는 유동(流動) 하는 것” 이라고 한 로마의 황제 마르크스 아우렐리우스의 말이 오늘 따라 촉촉히 나를 적시는 까닭은 무엇인가. 뒤늦게 회오리 치는 인생의 무상을 몸살을 앓으며 깨닫는 나는 철없는 여인.
이제 초록비가 그치고 나면 한동안 이 창문은 열리지 않을 것이다. 씨앗을 심고 가꾸고 김매고 성숙을 향해 고난한 나날을 살아야 한다. 여름, 그것은 성숙의 투쟁이다. 열매를 키우고 익히는 사과나무처럼. 내 인생의 봄은 영문 모를 때 지나가 버렸고, 여름 또한 성숙의 문을 닫으려 하고 있다. 나는 조바심 치며 아직은 여름이고 싶어 스스로를 채찍질한다.
어느날 사랑으로 부서진 꽃잎이 크고 실한 과일로 무르익어 부활하듯 나 또한 사랑으로 부서져 메마른 가슴에 한 줄기 희망으로 피어나기를, 그것이 나의 진혼곡이었으면 얼마나 얼마나 좋을 것인가.
(현대문학 84. 11월 호)
47. 山이 걸어와서
산이 좋아서 산자락에 비둘기집 같은 둥지를 틀고 땅을 일구며 사는 내게 어느 날 산이 뚜벅뚜벅 걸어와서 “당신은 신선이외다.” 일러 주고 갔네. 초록빛 실바람을 타고 봄이 살포시 영 너머에 내려 앉으면 가슴을 마구 설레이게 하는 쪽빛 동경이 너울거리고 파아란 오월에는 터질듯한 그리움이 메아리되어 사는 곳. 비개인 아침에 반가운 얼굴로 한 달음에 달려와 다정히 악수하는 산. 거긴 긴장에서 풀린 지성인들의 안식이 있고 때묻지 않아 순수한 대화가 있다.
햇빛이 놀러 오는 어느 양지엔 생과 사의 막바지에서 방황하다 잠이든 아가의 애능도 있겠고, 길 잃은 짐승의 포효가 기약도 없이 떠난 사람을 기다리는 여인의 내일도 산을 간직 했다.
시한부의 생명에 댕그마니 마침표를 찍어 놓고 캄캄한 절망에 빠져 몸부림칠 때 하얀 병실의 커어튼 사이로 날마다 찾아와서 그렇게 늠름하게 짙푸른 삶의 의욕을 북돋우어 주던 산의 너그러움.
거긴 미움이 살지 못한다. 하찮은 배신도 뿌리박지 못한다. 오직 무한한 사랑이 있을 뿐이다.
어떤 날 수많은 발자국에 짓밟혀 시달린 밤이면 산은 그 큰 몸뚱이를 비스듬히 누이고 속으로 앓는다. 그러다가 온종일 쏟아놓은 세상 이야기에 절어 두 귀가 얼얼해 오면 솔바람 청해서 정갈히 씻고 긴 밤내 앉아서 묵상에 잠긴다.
산속 외딴 터에 파묻혀 사노라면 이따금 사람들이 못 견디게 그리워져 나는 마을로 내려간다. 쇠는 쇠에 대고 갈아야 날이 서고 사람은 이웃과 비비대며 살아야 다듬어진다는 ‘잠언’의 말씀처럼 이웃은 소중한 나의 일부라는 사실 앞에 얼싸안고 주고 받는 정다운 얘기, 채곡채곡 접어 놓은 색동보처럼 우리네 살림살이는 사연도 많고 시름도 많다. 떠나려면 문득 아쉬워지는 시각, 혼자 사는 신선보다 함께 사는 가난한 마을이 훨씬 따뜻하고 복된 곳임을 알게 된다. 돌아오는 길은 외롭다. 참으로 외롭다.
내 가슴엔 이웃들의 아픔이 조금씩 번져와서 공허의 구멍만 크게 뚫려 찬바람이 쏴아 지나간다. 이런 밤이면 민둥산은 감기 들어 컹컹 기침하고 춥고 배고픈 이웃 생각에 신열로 잠 못 드는 우리는 한 몸.
저절로 폈다 지는 들꽃이 좋아서, 잡초 속에 벙그러지는 산나리 노랑빛이 좋아서, 산새가 물어오는 조선땅 한 오백년이 좋아서 산은 나이를 먹어도 늙지 않고 병이 들어도 죽지 않나 보다.
인적 없는 섣달 그믐 밤 눈보라 속에 꽁꽁 언 외로움을 저 혼자 녹이다가 오솔길로 데그르르 굴러와 토라진 내 마음을 뜨거운 포옹으로 달래 주는 산.
천년 세월이 머물러 사는 곳. 거긴 절망을 속되게 하지 않는 굳센 의지가 있고 모든 욕망을 서서히 풀어버리는 여유가 있어 좋다. 청청한 소나무 숲, 이름 모르는 어느 병사가 뿌리고 간 평화의 씨앗이 움터 자라고 어느 계곡엔가 이끼 푸른 바위틈에 알피스의 고독한 땀방울도 고여 있으리.
산이 내게로 와 안겨주는 기쁨도 크지만 산을 찾아가 만나는 희열은 더욱 크다. 산에 가면 산은 원하는 이에게 절대로 빈 손으로 보내지 않는다. 바구니 가득 풋풋한 산내음의 나물을 주기도 하고 목타는 이에게 달디 단 생수를 주기도 한다. 심오한 천리를 조용조용 터득 시켜 주고 회의하는 젊은이에게 생의 확신을 주어 보낸다. 아무도 방해 할 수 없는 절대적인 질서와 깨지지 않은 평화. 그래서 산은 우리, 고달프고 메마른 현대인의 마음의 고향이며 사색의 요람이다.
힘겨운 작업에 휘어진 육신이 가을 날 풀씨처럼 뒹굴 때 산은 긴 팔을 뻗어와 자애 깊은 모성의 손길로 나를 어루만진다. 하루에도 수십번 애증의 거미줄에 얽매일 때 고만 쉬고 싶다는 안이로운 갈망이 움틀 때 멀리 바라보는 말없는 산, 냉정한 산.
시장통에서, 전자 계산대에서 반쯤 이그러져 돌아오면 산은 큰 가슴 열어 빈 지갑보다 더 가벼운 내 자존심을 가차없이 꾸중하는 옛날 은사님의 엄한 얼굴이 된다. 어쩌다 여울물에 비치는 아잇적 제 모습이 좋아서 입을 함박만 하게 벌리고 웃다가 물속에 첨벙 빠져 헤엄치는 산. 두고 온 고향이 생각나면 슬몃 돌아 앉아 향수를 달래는 산. 내 조국에 어려움이 밀어 닥치면 파리해지도록 근심하는 산. 이런 산이 좋아서 산사람이 되어 그 무릎 베고 잠이 들면 천년 울음을 달래노라 꿈결은 수선스럽다.
비오는 날 귀를 열고 대자연의 교향곡을 들어보라. 수만 악기의 질고운 하모니, 지휘봉을 힘껏 휘두르는 음악가. 거기서 피아니시모의 멀어져 가는 음향을 잡으려 거센 몸짓으로 피아노의 키를 두드리는 베에토벤의 고뇌를 통한 환희와 만난다.
시월이 와서 귤빛 노을이 갈대 숲에 불을 지르면 산은 화득화득 그 뜨거운 그림 붓을 내둘러 불멸의 화폭을 남겨 놓는다. 어느 화가가 있어 이보다 아름다운 그림을 그릴 수 있으랴. 거기서 만나는 세잔느, 고호, 만종의 화가 밀레, 현대의 피카소 모두 두 손을 내 젓는다.
산은 그 자체가 예술이요, 불후의 명작이다. 머나먼 타국 아프리카의 정글에서 인술을 펴 인류의 아픔을 치료해준 슈바이처 박사의 숭고한 일생은 산이 베푸는 덕과 같고 생동하는 예술이다. 수많은 생명을 간직한 모체. 굳은 신념이 살아 있어 변하지 않는 표정.
산아!
넌 알고 있으리라, 산을 찾는 이들의 속 마음을. 적당한 망각과 관용을 배우고 싶어서 질긴 인연, 아픈 사랑, 괴로운 육신, 훨훨 벗고 이 산속을 떠나는 날에 나 진정 구름 같은 신선이 되리.
산.
산.
높아서 좋기도 하지만
깊고 조용해 말없어 좋다.
(한국 수필 81. 봄호)
48. 설거지와 更年期
올 가을로 접어들면서 눈이 침침해지고 무릎께로 찬바람이 시실새실 파고 들더니 오늘 아침에는 흰머리를 서너개 뽑아 냈다. 나도 벌써 그렇게 되었는가 문득 거울을 들여다보니 세월이 긋고 간 주름살이 눈가를 어지럽힌다.
그래서 그런지 저녁 식사가 끝나고 나면 노곤해져서 설거지 하기가 죽기보다 싫다. TV는 연신 연속극이 나오고 궁둥이는 천근처럼 내려 앉아 허리를 꼬노라니 객지에 공부하러 갔던 막내가 상을 번쩍 들고 나가며 “엄마도 인제 갱년긴가봐.” 한마디 내 던진다. “오냐, 갱년기다. 너도 늙어봐라.”
나는 건성으로 대꾸하며 나가야지, 나가야지 벼르다 보니 연속극은 끝이 났다. 주방에 나가 보니 어느새 나왔는지 부자가 두팔을 걷어 부치고 부산을 떠는 폼이 가관이다. 개수대는 세제의 거품이 부글부글 부풀어 오르고 바닥은 질퍽하니 물 범벅 이다.
씻고 또 씻는 막내 얼굴에는 비누 거품이 방울진 채 있고 그이는 쉐터 앞자락이 다 젖어 있다. 내가 계면쩍고 미안하여 안절 부절 못 하자 부자가 합창하듯 “갱년기 나으리 시원하시겠습니다.”하며 정중히 허리를 굽혔다. 이래서 우리는 자주 웃는다.
남자만 많고 여자는 나 한 사람뿐인 우리집은 객지 나간 아이들이 모두 모이면 주방은 시장 바닥이다. 시실 도와주는 것이 아니라 더 일손만 더뎌지는 게 사실이나 그 효심이 가상하여 나는 일부러 감지덕지 하는 것이다. 이 아이들은 피붙이도 살붙이도 사실은 아니다. 다만 정붙이일 뿐.
새 엄마라는 어설픈 자리에서 작은 물고기가 역류하듯 안간힘 쓰며 살아온 지난 십여 년, 그 사이 철부지 아이들이 으젓한 젊은이들로 변한 모습도 대견하지만 언제나 부족한 엄마를 이해하고 사랑하려고 애쓴 마음들이 무한정 고마울 뿐이다. 타인의 자리라는 것이 얼마나 피곤하고 불편한 자리였던가.
몇 년 전 담석을 수술할 때 였다. 그 때 셋째 아이가 고3년 이었는데 학교에가서 앉아 있으면 아픈 엄마의 모습이 어른거려 수업이 안 된다고 했다. 수술실로 실려 가는 침대 머리에서 내 가슴에 제 얼굴을 비비며 “엄마! 죽지마. 꼭 살아나야 해.” 애원하는 아이 때문에 병실 복도가 모두 울음 바다가 되었다. 나는 두 눈을 꼭 감고 하느님께 간절히 기도 했다. 저 간절한 사랑을 지켜 주시라고.
무엇이 저 아이들과 나를 이렇듯 꽁꽁 묶어 놓았는가. 세월인가. 아니면 인연인가. 가만히 생각해보면 보다 더 큰 것은 정이다. 미운 정, 고운 정이 쌓이고 쌓여 이렇듯 아름다운 사랑으로 피어나는 것.
생사를 거는 분만의 진통 없이, 진자리 마른자리 가려준 일도 없이 나는 이들을 위해 모정으로 해준 것이 하나도 없다. 다만 있다면 정신적인 지주가 되려고 노력했을 뿐, 항상 반성하고 자문하며 조심스럽게 지내고 보니 이제는 위로 인자하신 시부모님과 자상한 아이들 아버지께, 그리고 언제나 마음의 짐을 덜어주는 시누이에게 감사의 염(念)만 샘 솟는다.
어제 낮에는 텅 빈 집에서 쏠베이지 노래를 들으며 무한정 울었다. 창밖에는 나뭇잎이 와르르 와르르 떨어져 쌓이고 중년의 공허는 쏠베이지의 한처럼 나를 흔들어 놓았다. 나는 가끔 음악을 들으며 이렇게 눈물로 씻어 내리고 나면 내 이성(理性)은 맑게 여과된다.
고뇌에 찼던 젊은 날들이 한 켜씩 여과되고 나면 나는 조금은 슬픔에서 또 애착에서 자유로와 짐을 느낀다. 이 무한한 자유를 위해서 망각의 술잔으로 입술을 적시며 나를 얽어 매고 있는 일상의 애증을 하나씩 잊어 먹기로 했다. 용서하고, 용서 받으며 그렇게 살아가노라면 고승의 뼈속에 사리가 남듯이 내 영혼 밑바닥에는 순수한 사랑만 고일게 아닌가.
주방쪽이 왁자지껄하다. 옆에서 허리를 주무르고 안마도 해주던 아이들이 엄마 글 쓰는데 야식 대접한다고 나 간지가 꽤 오랜데 냄새만 피우고 소식이 감감하다. 가스 불에 손이나 데이지 않는지 나 가봐야지, 봐야지 벼르면서 계속 펜만 놀린다. (요놈의 갱년기가 낙제생 엄마를 만드는 구만.) 나는 벌떡 일어 났다. 주방은 음식백화점으로 변해 있었다. “엄마 뭣하러 나오세요. 자 이제 진상 합니다.” 둘째, 셋째, 막내는 각자의 특기를 십분 발휘해서 새 까맣게 태운 카스텔라 한 접시, 질벅질벅한 호떡 한 접시, 와장창 깨넣은 계란부침 한 접시, 따끈따끈한 커피, 그야말로 진수성찬을 들고 들어왔다.
“자, 갱년기 여사님! 실컷 잡숫고 좋은 글 쓰세요.”
“오냐 알았다. 설거지는 내사 모른다 카이.” 갈갈 웃다보니 내 눈 꼬리엔 눈물방울 두개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었다.
49. 제4악장 알레그로
아름다운 저녁 노을을 보고 있으면 베에토벤의 운명 교향곡이 속울림으로 들려 온다. 내면의 깊은 골짜기에서 울려 퍼지는 넷소리의 힘찬 두드림.
그가 청각장애자 였다는 사실 때문만은 아니다. 1808년의 10월 그는 단풍이 짙은 하이리겐 스탓트에서 한 통의 유서를 썼지만 그는 드디어 검은 죽음에서 극복하고 가혹한 운명에 용감히 도전했다는 데서 나는 전율할 공감을 맛본다. 그 엄청난 고뇌를 통해서 만이 얻을 수 있는 환희 거기에 영적인 안식과 평화가 있는 것이다.
책상 앞 벽에 달랑하니 한 장의 카렌다가 걸려 있다. 임술년도 많은 흔적을 역사 위에 남겨 놓고 저물고 있다. 어떤 성급한 이는 6월쯤 되면 벌써 한 해가 다 갔다는 허망함에 가슴이 조여 진다지만 나는 웬지 한 장 남아 있는 카렌다에 위안을 받고 안도감을 얻는다.
한해를 보내고 맞는 감정이 20대, 30대의 생피를 끓이던 시절에 비해 한결 무뎌진 것은 사실이지만 한 해를 매듭 질 때마다 정수리부터 싸느랗게 식어 내리는 중년의 공허는 무서운 아픔이다.
어는 것 한가지 성공한 것 없이 20여 년을 허송해 온 사실을 잊지 못한다. 무엇인가 미미한 생명 하나 하늘의 명이 있어 세상을 살다 갔다는 흔적을 남기고자 무수히 고뇌해 온 시간의 편린들, 그 조각들이 모여 이제 철늦게 싹을 틔우는 내가 있는 것이다. 철지난 발아(發牙)여서 성장은 더디지만 기필코 한 송이 들국화를 피우리라 다짐을 거듭한다.
지난 9월 어떤 월간지에 짧은 글이 한 편 나갔다. 청탁에 의해 씌어진 자기 고백 같은 글이었는데 웬일인가 전국 각지, 나중에는 해외동포까지 보내오는 마음 조각들을 받으며 놀랍고 감사하고 감격에 떨었다. 나는 170여통이 넘는 독자들의 편지 속에서 세상의 색깔과 체취를 온 감각으로 읽어 내는 것이다.
어떤 이는 사랑을 나눠 주고 어떤 이는 희망을 나눠 주기도 한다. 그들이 내 이웃이고 어디에 있으나 한 핏줄이라는 사실 또한 감격스럽고 따뜻한 가슴이 있는 사회는 신뢰가 움트고 희망이 있다는 어떤 확신이 서는 것이다.
지난 가을을 감사의 기도로 보냈다. 그러면서 불혹의 나이에 설 때까지 모나디 못난 스스로에 편집되어 살아옴이 큰 오산임을 뼈아프게 느끼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지난 10월에 수원 새마을 지도자 연수원에서 일주일의 연수를 받으면서 나는 색맹의 질환을 앓고 있었음을 발견한 것이다.
거기서 나는 부끄럽지 않은 배달민족의 하나라는 긍지에 찬 국가관을 갖게 되었고, 어떻게 사는 길이 가장 인간적인 삶인가를 생각하게 되었다. 그곳은 새 인간을 만들어 내는 용광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바다가 아름다운 것은 스스로 낮추어 모든 물을 받아 안기 때문이라는 겸허의 극치를 터득한 것이다.
그곳을 수료한 스리랑카의 어는 수료생은 이 지구상에 이러한 곳이 있다는 사실을 자국민에게 최선을 다해 알리겠다고 했다. 누군가는 20대에 하바드 대학에 왔더라면 자기 인생이 달라졌을 것이라 했지만 나는 내가 20년 전에 그러한 곳이 있어 다녀왔다면 20년의 방황은 없을 것이고 지금쯤 한가지 일에 완성의 단계에 서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그러나 이제라도 내 운명의 제 4악장에 이러한 일들이 있었다는 것은 참 다행한 일이다. 그러나 초조해지는 것은 어쩌랴. 어느날 갑자기 개안(開眼)된 영혼에 비쳐오는 사물의 의미가 너무나 소중해지는 연고이다.
혈연의 인연이 그렇고 아웃의 눈길이 그렇고 하다 못해 낯익은 고향산천 음성의 돌비석 하나에도 뜨거운 애정이 감기는 것은 어인 일인가. 할 일은 왜 이렇게 많은지 보고 싶은 책, 가보고 싶은 여행지, 만나고 싶은 사람들은 점점 애틋해지고 남기고 싶은 이야기는 가슴속에 찰랑거리는데 아뿔사 또 한해는 저물고 있네.
10년만 하강할 묘안이 있다면 나는 참답게 뜻 있는 삶을 펼쳐 갈 텐데 안타깝다. 그래서 현자는 젊어서 뜻을 세워 면학의 길을 걸어온 사람이라 하지 않는가. 지난 날의 하루가 24시간이면 앞으로의 내 하루는 48시간으로 쪼개 살아야 허망하게 보낸 세월을 보상하게 되는 셈이다. 시간은 우리에게 주어진 가장 공평한 재산이라고 했다. 그것을 어떻게 지혜롭게 써 나가느냐에 따라 성패는 판가름 나는 것.
평생 소원이 책을 실컷 보는 것이었다. 그러나 쫒기 듯 살아온 시간들이어서 이제라도 보고 싶은 책들을 차근차근 읽으리라 마음 하지만 허사다. 책을 들고 30분쯤 읽어가다 보면 눈이 침침해지고 글자가 부우옇게 흐려진다. 슬몃 돌아 앉아 돋보기를 써본다. 알아챈 아이들이 멋있다고 손뼉을 치고 부추기나 이내 피곤해지는 안구, 그것도 어려운 일, 책갈피에도 게으른 자에게 보내는 질시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제야말로 미루지 말고 작은 일에도 봉사하며 살 일이다. 봉사에는 재물과 시간과 몸을 바치는 세가지 형태가 있다고 강론하신 신부님이 계시다. 첫째는 창조주께 공짜로 받은 재물을 가난하고 병든 이웃에게 나누어 주는 봉사이고, 둘째는 내 시간을 나누어 이웃의 어려움에 동참하는 사랑의 실천 행위를 통하여 내 삶의 의미를 찾는 일, 마지막에는 생명까지도 기꺼이 봉사하신 그리스도께 전생애를 바치는 가장 고귀한 봉사의 행위. 나는 어는 한 가지에도 나를 바친 일이 없다. 이제야말로 처음이듯 시작 할 때다.
한 해를 보내면서 크고 작은 주름살을 펴 놓고 반성하고 다짐하는 생활의 여백, 다시는 인색한 시간의 노예로 살지 않으리라. 지나간 세월 부질없음에 연연할 것이 아니라 운명의 목을 졸라 쥐고 힘찬 발걸음으로 전진할 것이다. 찬란한 크라이막스를 위해. 이제까지 갈망해오던 환희가 드디어 제 4악장에서 폭발하듯이 내 아픈 삶의 환희가 타 오르기를.
오늘 하루가 생의 마지막 날이듯 살아가는 수도자처럼 다시 한해가 내 생의 최후의 한 해이듯 진하고 뜨겁게 살아가리. 그래서 나는 노을을 바라보며 위대한 예술가의 생애를 우러르는 것이다.
(충청문예 82,12.)
50. 코끼리 거머리
녀석은 눈이 4개나 달려 있다. 4개가 아니라 8개가 있으면 무엇하는가. 시력이 나빠서 50cm밖에 안 되는 몸체를 꿈틀거리며 온 숲을 헤매고 다니며 먹이를 찾는다니. 얼어 붙은 안데스 산맥에 산다는 어리석은 녀석은L.
지난 휴가 때다. 서울과 시골에 각각 말뚝을 박고 사는 그녀와 내가 전화오고 편지가고 해서 만나게 된 것이다. 그 만큼 우리는 만남의 갈증상태에 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남영동 로터리에서 만나서 택시로 광화문으로 나갔다. 정갈하고 고급스러운 ㅇ정에서 맥주를 반주한 근사한 식사를 했다. 몇 년만의 만남이었으니 40고개 중년을 넘는 여인들의 가슴이 잠잠할 수 있겠는가. 장장 2시간의 오찬을 끝내고 밖으로 나오니 싸한 겨울바람이 화끈거리는 얼굴에 닿아 그럴싸한 기분이었다.
우리는 가까운 곳에 있는 K극장으로 갔다. 초대권을 가지고 나온 그녀의 배려에서다. 쌍쌍이 모여드는 극장 앞은 수런거렸다. 쥐포와 땅콩을 사고 음료수도 사고 인파에 휩쓸려 빨려 들듯 극장 안으로 들어 갔다.
홀짝홀짝 목 축이듯 마신 맥주가 두 컵쯤 되었던지 전신이 노곤 해지면서 눈은 게슴츠레하다. 소설을 쓰는 그 친구는 끄떡없이 앉아서 연신 쥐포를 뜯고 있다. “이봐요 B씨, 이렇게 밖에 나와서는 자질구레한 집안 일 싹 잊어버려요.” 그녀는 아마도 저 든든한 배짱 때문에 원고지 수백장을 너끈히 메우는 모양이다.
영화는 ‘솔저’ 가공할 공포로 몰고 가는 첩보영화였다. 우리가 극장을 나온 것은 오후5시 반쯤이었다. 가까운 다방에 가서 커피를 마셨다.
그녀는 문학을 허영으로 생각하는 자는 스스로 기만에 빠지기 쉽다는 이야기를 했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이름 석자 빛내기 위한 행위라면 차라리 희극 배우가 되는 것이 낫지 무엇 하러 뼈를 깎는 고독한 작업에 바치겠는가.
나는 말했다. “스스로 구원하기 위해 글을 쓰지요. 아무도 읽어 주지 않아도 나는 그 작업 속에 내 생명의 실존을 확인 하는 거예요.” 그녀는 갑자기 내 손을 잡았다. 맑고 커다란 눈망울에 이글이글 타오르는 공감을 감지 했다.
우리는 연인처럼 팔을 끼고 거리에 나섰다. 눈발이 풀풀 날렸다. 서울 거리는 역시 낭만과 환상의 거리, 문득 사랑하고 싶다는 욕망이 꿈틀거린다. 사랑은 마주보는 것이 아니라 함께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것이라고 한 쌩 떽쥐베리의 말이 떠오른다.
사람들은 서로가 마주보려고만 고집하는 까닭에 더욱 외로워 지는 것이 아닐까. 죽음 앞에서 완전한 고독을 느끼고 대중 속에서 외로우며 우리들의 불성실 앞에서 서로 외로워 하는 것을. 사랑하며 살아야지, 먼 훗날까지.
그때 ‘여의도’라는 해선지를 앞에 단 버스가 지나 갔다. 나는 건망증에서 깨어 났다. 아침에 시댁을 나올 때 L시인님과의 약속을 했던 것이다. 나보다 한참 위의 대선배이신 그분과는 20여년의 혈육 같은 정분을 간직하고 있다.
그 댁의 방문을 선약해 놓은 것이 나를 근심스럽게 하는 것이다. 안데스산맥도 아닌 서울 거리에서 길눈 어둡기로 유명한 내가 그 곳을 무사히 찾아 간다는 일이 아득해서다.
나는 창피를 무릅쓰고 말문을 열었다. “ S씨, 오늘은 참 즐거웠어요. 그러데 여기서 헤어지면 나는 미아보호소에 가기 딱 알맞으니 어쩌겠어요?” 그녀는 호탕하게 웃었다. 나는 이런 경우에도 곧 잘 내 생각에 빠진다. 시를 쓰시는 L시인은 유리그릇처럼 차디차고 예리하여 깊은 속정을 쉽게 드러내지 않는데 비해 소설 쓰는 S씨는 활달하고 탁 트이고 적당히 무디고 대담하다. 그럼 나는 어떤가. 겁 많고 미욱하고 정 많아 한가지에 옴팍 집착하여 놓을 줄 모르는 우물안 개구리.
우리는 여의도 66번 버스에 올랐다. 목적지까지 인도해 주겠다는 그녀의 친절에서다. 그녀는 이번 원고가 탈고 되면 시골에 꼭 한번 오마고 했고 나는 사과꽃 필 때쯤 기다리겠다고 했다.
우리는 여의도에서 내렸다. 그 사이 눈은 함박눈으로 쏟아지고 귀가길에 오르는 사람들로 거리는 붐볐다.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방향감각을 잃고 서서 택시를 찾았으나 번들번들 한 자가용뿐 택시는 없었다. ‘참 비정한 도시구나.’
우리가 공중전화 박스를 찾아낸 것은 선객들이 들어찬 뒤였다. 주머니를 뒤지니 동전 3개가 나왔다. 다이얼을 돌렸다. L시인은 낭패한 목소리다. “거기는 정 반대쪽이에요. MBC 방송국 쪽으로 와야 해요. 나갈 사람도 없고 이거 어쩌지요?” 이러구 저러구 하다가 ‘뻥’ 전화는 끊어졌다.
그때 옆에 있던 젊은이가 50원짜리 동전을 주며 잔돈으로 바꾸자고 했다. 무슨 자선가라고 그 지경에 내 주머니에 있는 동전 한 개와 그녀의 주머니에 있는 단 한 개의 동전을 빌어 선심 쓰듯 그냥 주고 나자 그녀는 내게 물었다. “몇번 버스를 타랍니까?” 나는 또 실수를 한 것이다. 그것을 묻지 않았다. 이제 우리에게는 동전도 없다. 눈은 어기차게 내리고 어디에도 구멍가게는 보이지 않는다.
나는 스스로에게 일어나는 짜증으로 만사가 귀찮아졌다. “이렇게 우왕좌왕 할게 아니에요. 서울이란데는 좀 너무하다 싶을 만치 복잡하니까요.” 빙판이 깔린 아스팔트 위를 앙금앙금 기다시피 찾아간 곳은 커피숍이었다. 따끈한 커피로 목을 적시며 “에라 모르겠다. 시인 댁 방문을 그만 두고 집으로 직행하는거다.”
그러나 그것은 헛기침에 불과하다. 코 앞에 둔 내노라하는 아파트도 못 찾아 가는 주제에 거기서 60리 밖 시댁을 찾아 가기란 도저히 불가능한 일. 오기도 오기 나름이지, 이쯤 되면 가여운 미아일 밖에L. 나는 짐짝에 불과 할 뿐, 어처구니 없게도 무능 도사라 비루먹은 강아지 모냥 고개를 살트리고 있었다.
맞은편 벽에 걸린 거울에는 서울 거리의 낭만이고 환상이고 말짱 깨어난 피곤하고 외로운 모습의 내가 비쳤다. 언뜻 올려다 본 벽시계는 바야흐로 9시 5분전을 가리키고 줄잡아도 2시간은 이 여의도 바닥을 눈오는 날 개쏘다니듯 기고 있는 것이다. 그녀의 주선으로 우리는 버스를 탓다. 차에서 내린 그녀는 “B씨, 당신은 충청도가 지상 낙원인 줄 아슈. 아예 서울 바닥에 올라 와 살 생각은 마우.”
고기도 저 놀던 물이 좋더라고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나는 묵묵부답으로 그녀를 따라 걸으며 내가 살아온 인생 길도 이렇게 시력 나쁜 눈으로 우왕좌왕 헤맨 것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단 한잔 가슴으로 떠 주는 진실을 마시고자 나의 목마름은 계속되고 있는 것이다. 시력이 나쁘면 요령이나마 갖고 살던가. 고지식 하나 붙들고 고해(苦海)라는 이 세상을 어찌 살아 갈 것인가.
그래서 배운 것이 하늘보기다. 내 선의가 무참히 짓밟힐 때,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통 가운데서 나는 하늘을 본다. 어떤 때는 뜨거운 눈물이 목구멍을 타고 내리기도 하고 어떤 때는 알 수 없는 평화를 얻기도 한다. 나는 지금도 하늘을 본다. 누가 쏟아 붓기라도 하듯 눈은 쏟아지고 있다.
우리는 S아파트 7동 수위실 앞에 섰다. 그녀는 인터폰을 빌어 L시인께 말했다. “L시인이신가요? 저는 소설가 S올시다. 여기 충청도에서 온 생화물(生貨物) 50kg 내려 놓고 가오니 빨리 내려 오셔서 인수하시기 바랍니다.
그녀는 씽긋 웃고 손을 흔들며 총총히 떠나고 있었다.
51. 탈춤을 추고 싶은 날
눈 감으면 은빛 파도가 부서지는 바다가 보였다. 밤새도록 베갯 머리에 꺄르르 키득 울음으로 토해 놓는 해조음(海潮音)이 아득한 귓가에 와 남실거렸다.
겨울 바다 여행을 예고하는 협회의 엽서를 받던 날부터 이렇게 바다는 조촘조촘 내 가슴 깊은 곳으로 다가서고 있었다. 두메골 산자락에 붙박힌 바위가 어떻게 관광여행을 다니겠느냐며 나를 맹추라던 친구들에게 전화통에 매달려 한껏 자랑을 하고부터 나는 오랜만에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참 신기한 즐거움이었다.켸켸묵은 권태의 앙금이 모두 풀어지는 것 같았다.
출발을 이틀 앞두고 조심스럽게 운을 떼었다. “모래 새벽에 떠난다는데요.” 그이는 신문에 시선을 꽂은 채 묵묵부답이다. 나는 초조해서 조금 큰소리로 “내일 청주에 가야 해요.” “정초부터 가정주부가 외박을 해도 괜찮은가, 바다구경도 좋지만 체통을 지켜야지. 다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이야L.”
이쯤되면 황홀하리만치 그려 본 바다 여행은 산산히 무산되고 마는 것이다. 매사가 그렇다. 나는 이제껏 그 체통이라는 미명아래 숨 죽이고 살아왔다. 사랑이라는 보이지 않는 창살안에 갇혀서 여인의 행복은 이런거라고 스스로 타이르며 살아오지 않았는가. 그러나 여인도 때로는 행주치마를 벗어놓고 갈대처럼 흔들리고 싶기도 하고 때로는 명분 없는 설움을 울어버릴 자연과의 만남을 갖고 싶은걸 어찌하랴.
자연이 하늘의 섭리를 거역 하지 않듯 여인 또한 인륜의 순리를 어찌 거역하겠는가. 층층시하에서 삼종지도(三從之道)로 묶고 체통으로 매여져 문밖을 모르고 살던 옛여인들의 피빛 외로운 인종이 오늘따라 홍두께 두드림으로 나를 두드림은 내 심사 탓이가. 그이의 말이 백번 옳다 싶어도 자꾸만 야속해지는 것을 속일 수 없어 현관을 나섰다.
겨울 과수원은 바람에 내 맡긴 채 깊은 침묵 속에 서 있다. 휘휘 불어 왔다 떠나는 바람. 마른 풀에 뒹구는 동지섣달 칼바람. 나목 사이로 조그마한 음성시가지가 한 눈에 펼쳐진다. 귀를 기울이면 부르르 떠는 빈가지들의 가냘픈 겨울 노래가 들리는 듯 싶다.
알몸으로 서서 몽땅 드러내 놓고도 부끄럽지 않는 과목들의 순수가 나를 사로 잡는다. 해탈한 스님의 얼굴이 저러할까. “나무들에게는 체통 같은 가면이 없기 때문에 저렇게 의연하고 정직한 거야.”
나도 나무처럼 순수한 자연인이고 싶어. 아무도 간섭치 않는 양심의 자유인이고 싶어 오늘 같은 날에는 해학의 탈을 쓰고 쿵닥쿵닥 울혈이 잦도록 춤을 추고 싶다.
바람도 나무도 될 수 없을 바엔 꺼이꺼이 울어 젓기며 넋마저 사뤄낼 춤사위로 한을 풀다가 고즈넉한 바닷가에 한송이 파랭이로 새초롬이 피어나고 싶다.
(충북 문협 회보 83. 2. 20)
52. 희성수난
자기가 태어난 조국과 부모는 자신의 의사와 관계없이 주어지는 것이라면 내가 반씨(潘氏) 성을 가진 것도 인연으로 치면 귀한 인연이다. 공씨, 긴씨, 명씨, 여씨, 제씨, 도씨, 감씨, 기씨, 모씨, 예씨, 설씨, 국씨 등 그 많은 희성중에 왜 하필이면 반씨였는지 국민학교 입학하고부터 지금까지 성씨 수난은 계속되고 있다.
그전에는 출석부가 한자(漢字)로 기입 되어 있었다. 예쁜 여선생님이 출석을 부르다가 33번 내 차례가 오면 고개를 갸웃거리다가 ‘번숙자’하고 불렀다. 아이들은 꺄르르 웃어대고 선생님 얼굴은 빨개지고 그쯤 되면 나는 눈물이 그렁그렁해서 고개를 책상 밑으로 떨구고 만다. 그리고 노는 시간이면 개구장이 사내애들의 놀림감이 되었다.
어린 속이었지만 참으로 야속했다. 그런 날은 집에 와서 아버지께 성씨를 바꾸자고 떼를 썼다. ㄴ자 하나만 뒤집으면 되니까 박씨로 바꾸자고 생떼를 쓰면 아버지는 노한 얼굴로 애비를 바꿀 것이냐고 호통을 치셨다. 그리고는 나를 덥석 안으시고 반씨의 내력을 일러 주셨다.
‘大東韻府群玉’에 의하면 반씨는 중국 주나라 문왕의 넷째 아들 季孫이 반땅에 봉해져 부왕으로부터 하사받은 성씨라고 했으나, 그 이하는 상고할 수 없다. 거제 반씨의 시조 ( )(자: 君秀, 호: 해여제, 시호: 문절)는 고려 때 (1220년생) 사람으로 1265년 사신으로 원나라에 갔다가 원제로부터 문무를 겸비한 훌륭한 재능을 인정 받고 신하로 삼고자 종용과 협박을 당했으나 끝내 굽히지 않았다. 원나라 세조는 그 절의에 감탄하여 그에게 제국 대장공주를 모시고 고려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 후 그는 충열왕에게 그 인품과 공적을 인정 받아 시중이 되고 이어 기성(거제의 별호) 부원군에 봉해졌으며 관성을 거제반씨라 명명하였다 한다. 이밖에도 광주, 남평, 등 여러 본이 있다.
장애 가득한 아버지의 가르침도 내 귀에는 소 귀에 경 읽기요, 그저 선생님도 아버지도 야속하다는 생각 뿐이었다. 어떤 남자 선생님은 숙제 검사를 할 때마다 반쪽이니 글씨도 반쪽만 쓰는 줄 알았더니 잘 썼다고 칭찬아닌 칭찬을 해 주었다. 그것도 귀에 거슬렸다. 그래서 더 공들여 글씨를 썼고 무엇이건 반이 아닌 하나보다 더 잘하자고 다짐했다.
학교를 졸업하고 교직에 있을 때는 2분의1 선생이라는 애칭을 얻기도 했다. 이름 석자가 활자화 되면서 번씨가 되고 박씨도 되고는 했다. 웬고 하니 한자로 쓰면 잘 틀려 한글로 써 보내면 그것이 무슨 까닭인지 박씨로 둔갑을 하는 것이다. 근래에는 심씨가 되어 곤혹을 치른다. 웬만하면 40년 풍상 속에 그 성씨의 집착도 좀 누그러질만한데 이제는 그만한 한자를 소화 못하는 편집자 쪽에 신랄한 항의를 보내는 것이다.
연전에 기독교 여류 문인들이 수상집을 낸 일이 있다. 작품 세편을 보냈는데 책이 나온 것을 보니 심씨가 되어있었다. 기가 막혔다. 한다는 출판사의 직원이 이럴 수가 없다는 실망이었다. 그러나 이미 쏟아진 물, 재판 때나 수정해 주겠다는 사과를 받았으나 이상한 일은 성씨가 바뀌어 나온 작품에는 애정이 가지 않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어느 일간신문의 심층분석처럼 나는 공명심(功名心)에 병들어 공명심(空名心)까지 싹이 튼 모양이다. 공(功)에 맞지 않는 지나친 명성을 바랄 때 공명(空名)의식 즉 허명 의식이 새긴다고 한다. 그러나 내 성씨는 언제나 들러리였다. 화려한 조명 받아 본 일 없이 그늘에서 숨어 있는 설움이었다. 그래서 남달리 온전치 못하다는 내 성씨에 집착했는지 모른다. 언제나 하나가 못 되는 반쪽이라는 수의 개념, 곰곰 생각해 보니 틀린 말은 아닌 성 싶다, 내 경우는.
우선 내 사람 됨됨이가 그렇다. 키만 멀쑥하게 컸지 어디 한군데 다부진데 라고는 찾을 길 없다. 그렇다고 속이나 야무지게 찼으면 오죽 좋으련만 피만 뜨거워 툭하면 열만 내는 천둥벌거숭이 아닌가. 이런 나를 어머니는 애물단지라 했다. 일주일이 멀다하고 골이 뜨근거리고 노다지 체하고 기침을 달고 사는 어린 것을 품에 안고 이걸 어쩌나 이걸 어쩌나 한탄을 하였다. 사람 노릇 못 할 바엔 애간장 그만 태우고 하루 빨리 정을 떼라고LL.
그렇게 가물가물 흔들리면서도 나는 죽지 않고 아직도 살고 있다. 그래서 궁색한 대로 찾아낸 위안이 달 보기다. 달도 휘영청 보름달이 아니고 생기다 만 듯한 반달이다. 초승달부터 하루하루 채워가는 달 모양을 바라보고 있으면 보름달이 아닌 반쪽 달이 왜 그렇게 좋아지는지. 무엇이든 가득 찼을 때 보다는 조금 모자랄 때가 여유롭고 희망이 있고 꿈이 있질 않던가. 가득 찼다 함은 언젠가는 기운다는 순리(順理)가 없다 해도.
사람은 육신과 영혼이 이루어 하나가 되었고 결혼도 반쪽 씩인 남자와 여자가 만나 하나를 이루는 우주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세상이치가 다 반쪽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이제는 그 반쪽 성씨에 연민과 애정을 가지고 산다. 부족한 나를 채근 하고 일깨워 온전한 하나가 되라는 숙명적인 인연이라는 생각이 드는 것이다.
이름이 곧 그 사람이라 함은 제 이름에 부끄러움 없게 살라는 것이 아닌지. 욕심이 있다면 반쪽 성씨로 태어나 성씨 수난을 받으며 살았어도 칠성판 등에 지고 이승을 떠날 적에 남기고 가는 것은 온전한 사랑이기를 염원한다. 하여 숱하게 바람 일고 뇌성벽력 치는 내 삶의 그림자 위에 ‘반숙자’ 그 이름 지워지지 않는 문신으로 오래오래 나를 대신하여 외로와 할 것이다.
(수필공원 86. 여름 호)
53. 고양이 발톱
고양이는 미물(微物)이다. 미물 중에도 사고능력이 있는 영악한 동물이다. 말귀를 알아 듣고 술취한 주인의 목숨을 구하고 불에 타 죽었다는 개보다는 못하지만, 사철 갇힌 우리 안에서 먹고 배설하는 일만 하는 감정 없는 토끼보다는 낫다.
사실 나는 고양이를 좋아 하지 않는다. 영계(靈界)를 넘나들며 원한의 복수를 한다는 속설이 아니라도 안광을 번뜩이는 섬찟한 눈이 요상한 괴기(怪奇)를 발하고 있어 정이 안 간다. 그러나 그것은 추상적인 감정이고 사실은 더 구체적인 나만의 이유가 있어서 이다.
열한 살짜리 나에게 전쟁은 공포였다. 조그만 시골읍 신작로가 이어져라 내려오는 피난민 대열, 날마다 찾아와서 아버지에게 총을 겨누다가 토끼 아홉 마리를 한자리에서 쏴 죽인 인민군들의 난폭함과 폭격 총소리, 죽는다는 무서움 그것이었다.
그 무렵 밤마다 고양이가 우리집 토담 담 용구새 위에서 울었다. 그냥 우는 것이 아니라 악을 쓰듯 바락바락 울었다. 밤새도록 고양이가 운 다음 날이면 영락없이 비행기 폭격이 심해서 여기저기에 시체가 널부러졌다. 끔찍했다. 인민군 시체, 피난민 시체, 그때 내 눈에 보이는 주검은 모두가 고양이와 무관하지 않으리라는 막연한 공포가 싸였다. 어린 생각이었지만 고양이 울음소리는 죽음을 부르는 소리가 아닌가 하는 의심이 났다.
그 후 많은 세월이 지나 갔는데도 고양이와 죽음, 그 둘의 연상은 계속되고있다. 먼저번 고양이를 기르는데 실패보고 다시는 고양이를 기르지 않겠다고 맹세 했었다. 그런데 찬창문을 여닫고 볼일 다 보는 쥐가 있고, 집안 구석구석 좀 쑤시듯 쑤셔놓는 배짱 좋은 쥐도 있다. 게다가 툭하면 자식 새끼 줄줄이 낳아 거느리고 시위하는 아주 괘씸한 쥐가 있어서 맹세코 안 기른다던 고양이를 다시 사왔다.
우리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삼천리 방방곡곡 쥐의 피해란 부지기수다. 놀라운 번식력으로 곡식을 축내는 것은 물론 건물을 도괴 시키고 전염병을 옮기고L. 혼자 생각이지만 쥐를 소탕할 방법이란 쥐가 정력이나 강장 성인병에 좋다는 성분이 있나를 알아내는 일이다. 연구가 시작되어 확인되는 날에는 누이 좋고 매부 좋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각설하고 우리집 늙은 쥐는 임신부여서 그런지 무우, 배추, 파, 마늘, 굴비 등 훔쳐먹는 식품이 다양하다. 궁리 끝에 쥐덫을 놓았다. 새벽마다 기대에 차서 들여다보면 먹이로 걸어놓은 멸치만 날름 따먹고 종적을 감췄다. 기가 찰 일이었다. 만물의 영장이라는 인간이 시궁쥐 한 마리 때문에 노심초사를 하다니 단번에 요절을 내리라 독한 마음을 먹고 쥐약을 풀었다. 인정이고 뭐고 생각할 여유가 없었다. 당근에도 풀고 라면에도 풀었다.
그러나 허사였다. 약물을 발라둔 쪽은 고스란히 남겨 놓고 안 바른쪽만 용용 죽겠지 하며 다 갉아 먹었다. 내가 수돗가에서 일을 하고 있는데도 살곰살곰 기어나와 물을 마시지만 쥐보다 내가 먼저 놀라 주저앉는 꼴이니 할 수 없이 다시 고양이를 사온 것이다.
노르레한 털이 등어리를 둘렀고 목덜미에서 가슴께로는 하얀 목도리를 폭신하게 두른 미녀측에 듬직했다. 나비라고 이름 했다. 미모(美毛)에다 훤칠한 키가 곱상이어서 ‘나비양’이라 했다. 나비양은 점잖고 우아한 외양과는 달리 좀 촌스러운 데가 있다. 고운 목소리로 야오옹 하는 게 아니라 찢어지는 목소리로 냐아옹이다. 아마 사투리를 쓰는 모양이다.
고것이 우리집에 오고부터 조금씩 정이 붙기 시작했다. 지겨운 쥐들을 모두 잡아 주리라는 기대와 함께. 그러나 고양이는 제사에는 마음 없고 젯 밥에만 정신이 팔리기 시작했다. 나만 졸졸 따라 다녔다. 어디든지 앉기만 하면 무릎 위로 기어 오르고 커피라도 마실 양이면 저도 따라 입맛을 다시고 혀로 내 손을 핥아 주었다. 신문 보는 손을 자근자근 씹기도 하고 발을 내밀어 장난을 청하기도 한다. 그 발길이 바단결이다. 얼굴에 스쳐도 괜찮을 만큼. 그래서 발가락을 펼쳐 보았다. 단풍잎처럼 생긴 다섯 발가락이다. 날카로운 발톱이 있다. 뒷발은 발가락이 넷이다. 발바닥에 도톰하게 살이 많아서 뛰어다녀도 소리가 나지 않는 것은 그 때문인 모양이다.
그런데 고양이에게 사나운 발톱이 있다는 것을 까많게 잊을만큼 고양이는 나와 놀 때는 절대로 발톱을 펴지 않았다. 아마 마음대로 폈다 접었다 하는 재주가 있는 모양이다.
어는 날 저녁 상머리, 응석이 늘 대로 늘어 밥상 위까지 넘보다가 급기야는 생선접시에 손이 가는 것을 번쩍 들어 내동댕이 치려는 순간 고양이는 날카로운 발톱으로 내 손등을 할퀴고 말았다. 두 줄로 긋고 간 상처에서 피가 솟고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빗자루를 들고 쫓아 갔지만 날쌔게 도망치고 말았다.
여태까지 쥐 한 마리 잡아놓지 못한 것이며 아무데나 치르는 대소변의 노르꼬름한 냄새에까지 한꺼번에 역겨웠고 울화통이 치밀었다. 손등에 머큐롬을 바르며 생각해보니 어리석은 것은 나지 고양이가 아니었다. 언제나 이 모양이다. 사람에게는 고양이보다 더 무서운 발톱이 있지만 그것을 아무 때나 쓰지 않는다는 사실. 고양이처럼 폈다 오므렸다 하는 재주가 능한 사람일수록 유능하다는 평가를 받는다는 사실이다.
고양이에게 발톱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까맣게 잊어먹고 있었다. 내가 살아오는 동안 언제나 이 망각증 때문에 억울해도 웃을 수 있었고 미워도 다시 사랑할 수 있었다.
발톱을 나무랄 일이 아니다. 생존이 있는 곳엔 어디에나 있는 것. 다만 할퀴고 덧나고 아픈 자리에 머큐롬을 바르듯 용서를 배워가며 살아갈 일이다.
(북한 86. 5월 호)
54. 꼬리표를 달고 온 사람
시골 성당 작은 뜰에 삼종소리가 평화롭게 퍼지고 있었다. 우리 일행이 ㅇ신부님의 안내로 허리를 굽혀 들어 선 곳은 아주 작은 토방, 손수건만한 창에서 2월의 썰렁한 햇살이 희미하게 비쳐 들었다.
방바닥은 찬데 얇은 모포 한 장에 여름 이불을 덮고 있는 노인은 언뜻 보기에는 환갑이 지나 보였다. “할아버지 연세가 지금 어떻게 되셨어요?” 일행중 누군가 말문을 열었다. 한참 눈만 깜박거리던 노인은 “스물여섯 살 먹었어.” 하는 게 아닌가.
우리는 의아해서 옆에서 노인을 지켜보고 계시던 신부님을 바라 보았다. 세간에 거지 신부로 알려진 ㅇ신부님은 노인의 손을 따뜻이 감싸쥐고 불편한 곳이 없는지 자상하게 묻고 있었다. 그곳은 지금의 꽃동네가 준공되기 전 초창기 시절의 꽃동네다. 충청도 두메골에 인정의 꽃, 사랑의 꽃을 피우고 있는 지금은 음성군 맹동면 인곡리.
ㅇ신부님은 자칭 거지 신부다. 그 분의 방에 잠시 들러 보면 그것이 입증되고도 남을 만치 검소하게 살고 있다. 단 두벌의 검은 수단, 우리 강토 어디에고 병들고 가난한 버림 받은 형제자매만 있으면 달려가서 싣고 오는 승용차 한대. 이것이 신부님의 전재산이다. 그러나 그 분은 가장 부유하고 가장 행복한 삶을 살고 있음을 그분과 대좌해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ㅇ신부님이 이곳 무극천주교회에 부임하고 였다. 하루는 병자 방문을 다녀 오던 중 다리 밑을 무심히 내려다 보았다. 한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여름 잠방이를 걸친 노인이 실낱간이 기어드는 겨울 햇살을 쬐기 위해 거적문 밖에 나와 앉아 있었다. 한눈에 보아 노인은 추위와 기아에 몹시 쇠약해져 있었다.
신부님은 노인에게 겨울 내의 한 벌을 사다주고는 총총히 돌아 왔다. 그러나 찬바람이 몰아치는 겨울밤 신부님의 마음은 무엇엔가 몹시 보채이고 있었다. 다음날 새벽 다시 찾아갔더니 노인은 여전히 그 차림새로 있었다. 까닭을 물은즉 자기보다 더 추워 떠는 병든 거지에게 주었노라는 대답이었다. 자신은 온몸에 동상을 입어 퉁퉁 부어 올라음에도 불구하고 단 한 벌의 방한복을 선뜻 내 줄 수 있는 그 마음은 큰 용기요 희생이 아니고 무엇인가. 그날 밤 신부님은 조용한 성당 제대 앞에 엎디어 영혼 깊이 움트는 간절한 소명을 인식했다. 소외되고 버림받은 이들의 아버지가 될 것을 하느님께 약속했다.
이 노인은 대동아 전쟁 때 강제징용되어 간 젊은이었다. 그 때가 스물여섯, 폭격으로 인하여 정신이상을 일으키자 해방되던 해 등에 꼬리표를 달고 부산항에 보내지게 되었다. 이름과 본적이 쓰여 있는 꼬리표였으나 고향에서는 아무도 그를 맞아주지 않았다. 노인의 기억은 스물여섯에 멈춰 있으나 가슴에는 선량하고 따뜻한 백의민족의 피가 살아 있어 그의 사랑과 봉사의 행위는 거지성인을 만들어 낸 것이다.
날마다 허름한 자루를 메고 골목을 누비며 깨어진 유리조각을 주워 담고 끼니 때면 먹고 남은 식은 밥을 구걸하여 동료거지에게 나누어 주는 그의 행위는 멀쩡한 정신과 육체로 살고 있는 사람들에게 큰 감명을 주고도 남았다.
그 무렵 하천정리도 다리 밑에 모여 살던 걸인들이 오갈데가 없게 되자 ㅇ신부님은 사제관 뒤에 거처를 마련하여 이들을 보살피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게 기구한 사연을 안고 얻어 먹을 수 조차 없는 행려 병자들이 모여 들었다. 그러자 반대는 거세게 몰아 쳤다. 거지동네를 만들 것인가. 자칫하다가는 대한민국 거지가 다 모여 들 테니 어쩌면 좋은가. 우려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그러나 ㅇ시부님은 제대 앞에서 눈물과 함께 드린 약속을 저버릴 수 없었다.
가족이 버리고 이웃이 버리고 나라가 버린 병들고 의지할 곳 없는 그들에게 마지막으로 하느님 나라만은 찾아주고 편안하게 임종할 수 있는 집이 꼭 필요해서 ‘꽃동네’를 세우노라고 ㅇ신부님은 말했다. 그것은 순결한 감동이었다. 멀고 아득한 곳으로부터 쏟아져 내려 내 육안까지를 밝히는 신부님의 영혼은 그리스도의 제자였다.
욕망을 가진 한 인간으로서 까만 수도복, 엄한 계율속에 모두들 묻어 버리고 크고 벅찬 아웃의 십자가를 자청해서 짊어지신 그분, 그 오묘한 사랑의 신비는 무엇인가? 오로지 자신의 영달을 위해서 자신만을 사랑하며 사는 우리들은 쉽게 절망하고 불행해 하는데 철저히 자기를 비워 낸 그곳에 이렇듯 헤아릴 길 없이 자유롭고 큰 용량의 사랑이 담겨지는 것이 아닌가 하고. 아씨시의 빈자 성프란치스꼬는 “가난한 이가 빵을 달라고 하는 것은 자기 것을 달라고 하는 것” 이라고 말했다. 우리 서로가 인생의 나그네인데 누가 주인이고 누가 객인가.
옹기 종기 모여 앉은 토담집을 뒤로 하고 돌아서는 우리들은 침묵가운데 아주 소중한 선물을 받아 안은 충만한 가슴으로 다시 성당으로 돌아왔다. 그때 수녀님 두 분이 어떤 여인과 실랑이를 벌이고 있었다. 머리는 풀어 산발을 하고 눈동자가 이상한 광채를 내는 여인, 그녀는 광녀였다. 수녀원 목욕탕에서 목욕을 시키고 옷을 갈아 입힌 수녀님들 수도복은 온통 물에 젖어 있었고 얼굴은 땀 범벅이 되어 있었다. 우리는 성당 생울타리 옆에 바짝 붙어서서 알 수 없는 감동으로 그들을 지켜 보고 있었다.
광녀는 이제 삼십 안팎, 그녀의 팔에는 첫돌을 지났은직한 아기가 안겨 있었다. 그때 본당 여교우 한 분이 말했다. 여인은 몇 개월 전부터 누구의 씨인 줄도 모르는 도토리 같이 생긴 남자 아기를 업고 다녔다. 이 여인이 어제 새벽에 사제관 앞에 피를 토하고 쓰러져 있었다. 이제 병원에 데려 가려고 수녀님께 부탁하여 목욕을 시켰다는 것이다.
수녀님이 아기를 뺏으려 하자 “ 안돼 애기, 애기 안돼, 안돼.” 여인은 사생결단으로 아기를 부둥켜 안고 놓지 않았다. 자기 치부를 가리는 치마가 다 벗겨져도 모르는 이성이 마비된 여인이 어찌 아기만은 놓지 않으려는가.
앙앙 울어대는 아기를 가운데 두고 안간힘을 쓰던 한 수녀님은 슬그머니 손을 놓고 돌아섰다. 그 순간 나는 수녀님의 고운 볼을 타고 내리는 눈물을 본 것이다. 수녀님은 성모 마리아상 앞에 서서 조용히 울고 있었다. 무엇에 감전된 듯 나는 콧등이 찌잉 아려 오더니 봇물 터지듯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린다.
더없이 순결한 동정녀 수녀님의 영혼 안에 차랑하게 고여 있는 모성애. 그것이 광녀의 본능적인 모성애였다면 지금 수녀님은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질 수 밖에 없었던 그리스도의 절대적인 사랑과 똑 같은 마음으로 울고 있는 것이라고. 눈물조차 말라버린 각박한 세상에 내가 만난 눈물은 스스로의 가슴을 자비로 적시고 넘쳐 나온, 그것만이 세상을 구원할 사랑임을 새삼 스꼈다.
얼마 전에 나는 꽃동네 회보를 받아 들고 아연했다. “도와주십시오. 저는 약소하지만 생명을 내 놓을 테니 형제님 자매님은 1개월에 1천원씩만 보태어 주십시오.” 새로 준공된 그 곳에 2백여명의 대가족을 돌보아야 하는 가난한 신부님의 피보다 진하고 절규보다 더 절실한 한 말씀이 오래도록 뇌리를 떠나지 않았다.
‘천국의 열쇠’의프랜치스 사제가 “제발 행위로서가 아니라 그 의도를 보아 내 생애를 심판하소서” 라던 기도를 한 평생이 끝날 무렵에는 ”의도로서가 아니라 행위로서 심판하소서” 라고 번복한 사실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많은 의미를 시사하고 이는 것이다.
사랑은 다가서는 것, 내 모든 것을 나누어주는 것. 그것만이 신뢰 안에 머무는 단 하나의 희망일진저.
(동아약보 84. 6월호)
55. 눈 오는 밤에
밖에는 싸락눈이 내리고 있다. 창백하리 만큼 밝은 등 밑에서 아까부터 조용한 바이올린 협주곡을 들으며 나는 지금 눈을 감았다 뜨곤 한다. 머리 맡에는 아무렇게나 흩어진 일간 신문들 내 사념 속에는 계통 없는 우수가 난무한다.
살기위한 직장이냐 아니면 내 인간 된 사명의 이행이냐? 하루 세끼 밥그릇이 비어 목을 매어 구걸하는 삶이라면 무슨 지천을 듣던 포식의 즐거움으로 거기 따르는 고통을 망각할 수 있겠지만. 적어도 내 심장에 맥박이 뛰고 있는 동안은 나 자신에 떳떳하고 싶고 밝은 하늘아래 아주 작은 일점으로 부끄럼 없기가 소원 아니드냐. 여러가지 악기에서 서로 다른 음들이 흘러 나와 조용히 서로를 흡수해 버릴 때 그 음악은 아름다운 선율로 완전히 승화 되는 게 아닐까?
인간과 인간이 인간의 눈길을 주고 받은 가정과 직장에서 아주 적은 일로 불신하고 오해하고 왜곡돼버린 감정으로 정말 참다운 휴머니즘은 이루어질 것인지? 인간은 미완성품이기에 매력이 있다고 한다. 또 완성에의 집념으로 성장한다고 한다. 마치 무질서 속의 무서운 전쟁속에서 뭔가 이루어지듯이 또 평화를 갈망하듯이L
그러면 그 미완성품으로서의 완성에의 길은 무엇이냐? 어떤 이는 문학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어떤 이는 교육이라는 빈곤한 명예를 지고 어떤 이는 미술이라는 십자가를 지고 각자 자기의 완성에의 길로 정진한다. 그리하여 톨스토이처럼 페스탈로찌처럼 아니 미켈란젤로처럼 자기만의 독특한 세계를 창조한다.
허지만 인간은 문호나 교육가나 그 번쩍이는 명예나 훈장 뒤에 밑바닥에 차분히 고여 있는 순진한 휴머니티의 가치를 도외시한다. 그들은 교육인가 그 이전에 고아의 아버지였던 아주 서민적인 인간 페스탈로찌를 이해할 줄 모른다. 무언중에 풍기는 인간성의 향기는 결국 가장 귀한 우리의 재산이 아닐지.
추운 동장군에 쫓기어 손을 호호불며 찾아오는 내 이쁜 꼬마들의 동그람 눈 모습이 크로즈업 된다. 기성회비 독촉으로 요즘 선생님이 무서워졌다는 친구들. “울아버지가 엄마돈 뺏어가지구 간난이네 사랑에 갔어유.” 울먹이는 분이의 얼굴. 참새 가슴 같은 어린 마음에 콩콩 분노를 일으킨 부모나 가르치는 교단에서 본의는 아니라도 심한 말로 돈 재촉하는 나, 교사라는 부끄러운 인간, 내게 순수한 휴머니티의 피가 흐를까?
십 몇 년이 흐르고 난 다음 지금 내 꼬마들이 젊은이가 됐을 때 일학년적 돈 재촉하던 은사의 이미지는 과연 어떻게 부각될 것인지? 제발 의무교육에서 만이라도 그 돈의 위력으로 맑은 동심에 상처 없을 날은 아직도 요원할까?
따뜻하게 피어오르는 난로 위에 차 주전자는 퐁퐁 평화로운 자장가를 연주하고 있다. 가만히 커튼을 열어 본다. 조용히, 변함없이 눈은 쌓이고 있다. 인간은 저렇게 순아한 상태로 살 수 있을는지. 미워하고 시기하고 절망하는 회오리 속에서 한 순간만이라도 대자연의 엄숙한 교훈처럼 겸손하게 따뜻한 눈길을 나눌 수 없을까LL?
(충북 교육신보 [교단 수상] 1966.
56. 뜻대로 하시옵소서
서른 아홉 살. 그 해 가을은 유난히 아름답고 풍요로웠다. 예년에 없이 과수원은 풍년이 들어 진홍의 사과 볼이 부지런히 익어가고 눈을 두는 곳마다 넘치는 은총이 온 밭을 채웠다. 그러나 나는 날마다 서러웠다. 식구들이 작업하는 밭에 따라와서 사과나무 밑에 쪼그리고 앉아 서리오기 전날의 풀잎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나는 끝없이 허무 속으로 침몰 했다.
봄부터 까닭 모를 오한과 구토증으로 시름시름 앓고 있었다. 지방 병원에서는 병세를 짚을 수 없다고 했고 가족들은 삼재가 끼어서 그러니 푸닥거리를 해야 한다고 우겼다. 나는 그 틈에서 뼈만 앙상하게 남은 채로 바람에 내 맡긴 일엽편주가 되고 있었다.
불교 신자인 시댁 집안에 교인은 나 한 사람, 노상 꺼려오던 시어머님은 날마다 푸닥거리에 정신이 없었다. 그럴수록 하느님께로 향하는 내 신심은 아무도 모르게 뜨겁게 타 올랐다.
연일 계속되는 그 일에 진액마저 다 빠져 버린 나는 푸닥거리가 정점을 이루던 날 밤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은 가물가물 어디론지 떠나는 듯 싶은데 육신은 고통 없이 편안해 졌다. 캄캄한 허공에 금빛으로 빛나는 십자가, 한편에는 오색찬란한 무녀의 치마 자락이 깃발처럼 나부꼈다.
십자가는 어디론지 조금씩 이동했다. 좀 더 높은 곳으로 서서히 올라갔다. 나는 십자가를 놓치지 않으려고 혼신을 다해 달렸다. 손 끝에 십자가가 닿는 순간 낭떠러지기로 한없이 떨어졌다.
나는 몸서리치며 깨어났다. 온 식구가 침통한 얼굴로 지켜보고 있었다. 맞은편 벽에 걸어놓은 십자 고상은 떼어지고 거기 부적이 벌겋게 붙어 있었다. 시어머님은 몇 달새 더욱 쪼그라 드신 듯 쇠잔해진 손으로 내 손을 잡으셨다.
“에미야, 조금만 참거라. 너 하나 살리자고 하는 짓이다.” 나는 인자하신 시어머님 손을 잡고 애원했다. “어머님 , 죄송해요. 차라리 저를 길가에 내다 버려 주세요. 저는 기어가서라도 성당 뜰을 베고 죽겠습니다.”
나는 그날 밤 가출을 결심했다. 미음 몇 모금으로 연명하는 건강으로 가출을 한다는 것은 무모한 짓임을 안다. 그러나 살기 위한 가출이 아니고 구원을 얻기 위한 결사적인 결심이었다. 그러나 그 결심은 대문 밖에서 끝나고 말았다. 집에서 성당까지의 거리는 3km가 넘는 거리다. 밤중에 몰래 집을 빠져 나왔으나 이미 도보까지 불가능했던 나는 3m도 못 가서 쓰러지고 말았다.
다음 날 L시인님의 배려로 서울 을지병원에 입원하게 되었다. 병원에서는 어디부터 손을 써야 할지 난감한 눈치였다. 일주일간에 걸친 종합진찰 결과 전신쇠약증 외엔 확실한 병명을 찾을 수가 없다고 했다. 어떤 날은 간염이라 하고 어떤 날은 위궤양이라고 갈팡질팡했다. 입원 8일째 되는 날 담낭X선 사진에 녹두알 크기의 담석이 나타났다.
삼재 때문도 아니었고 간염, 위궤양도 아니었다. 수술을 하기로 했다. 그러나 체력이 너무 소모된 탓에 서둘지도 못하고 영양주사로 다시 일주일을 보냈다. 담석의 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무지방 식사가 계속되고 수혈을 하고 사전 정밀 검사를 마치고 그러는 사이 12월 4일로 수술일이 결정 되었다. 나는 틈만 나면 링겔주사 바늘을 꽂은 채 창문을 열고 거리의 인파에 시선을 팔고 있었다.
파도처럼 일렁이는 인파, 두 다리로 씩씩하게 걸어다니는 사람들, 떠들고 웃고 밀고 밀리는 거기 생활이 있었다. 그 동안 나날이 주어진 내 몫의 생활을 나는 아무 생각 없이 의당 받을 권리인 듯 뻔뻔스럽게 받고 뜻대로 되지 않을 때는 원망하며 살아 왔다.
너무나 몰염치한 인간, 이제 죽음이라는 환상이 아닌 엄연한 현실 앞에 내동댕이 쳐지니 자만의 너울은 허무의 들러리 밖에 아무 가치가 없다는 것을 절감했다. 사실 나는 기가 죽어 있었다. 엊그제는 내 옆방 환자가 위암수술 도중 죽어 갔고 지하실에 있는 영안실에는 거의 매일이다 싶게 시신이 바뀌고 있었다. 자신이 없었다. 내가 다시 소생만 된다면 40후반의 무르익은 생을 겸손의 띠로 들러 나 아닌 타인을 위해 자헌의 촛불로 사루련마는L
수술전야. 가족이 한 차례씩 다녀 갔다. 마지막 인사를 나누는 것처럼, 다정한 친구들도. 그이는 허둥지둥 시골에서 올라와 겉으로는 태연한 척하나 몹시 초조해 하고 있었다. 밤이 깊었다. 수면제를 주겠다는 간호원의 말에 괜찮다고 해 놓고는 얼마나 후회를 했는지.
새벽 한시, 당직 간호원 한 사람뿐인 병원 8층은 고즈녁 했다. 동동거리던 내 옆 침대의 소녀 환자도 잠들고 사위가 적막했다. 수술 시간은 성큼성큼 다가오고 있었다. 반듯이 누워 무엇인가 정리를 하리라 생각은 했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멍하니 포도당 주사액만 바라보고 있었다.
또록또록 떨어져 내리는
노오란 저 물바울은
山 굽이굽이
서른 아홉골 누벼 온 눈물이다.
그리움을 알고 난 열아홉적부터
七八月 타는 野山에 저저끔 피어나는
파랭이꽃 수줍은 눈물과
생살을 가르고 소금을 붓는
아픈 모서의 그리움은
된서리 내린 날 아침
앙다물고 피워낸 들국화 꽃잎이다
강아지가 상처를 혀로 핥아 아무리듯이
숨어숨어 달래어 온 한스러운 내 아픔이
식도를 타고 내려 어디쯤에 멎었길래
발길 쉬인 별실에서
저 눈물을 듣고 있나
체념 마저 힘겨운 시각
마지막 드릴 말씀은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기독교 여류문인 수상 집 82. 9)
57. 默想의 빗소리
아침부터 진종일 비가 내린다. 뒷 창문을 열면 여리디 여린 능선을 따라 봉분(封墳)들이 다정한 이웃처럼 모여있는 공동묘지. 여기에 오는 비는 수많은 혼령들의 울부짖음 같기도 하고 수의를 스척스척 끌면서 누군가를 찾아가는 기척과도 흡사하다.
우리집은 바로 공동묘지 앞이다. 사람들은 누구라 할 것 없이 죽음을 두려워하고 오래오래 살기를 원한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이곳에 처음 이사와서는 생리적으로 뒷산을 거부 했다. 달밤은 시각을 통하여 그 하얀 달빛이 사자(死者)들의 눈빛 같아 두렵고, 비오는 밤에는 눅눅한 습기며 빗소리가 피부를 통하여 영혼의 밑바닥까지 파헤쳐 견디기 힘들었다. 그런데 한해 두해 살다보니 일년이면 서너번씩 올라오는 상여를 바라보면서 상주들의 설움에 내가 울고 떠나간 이웃들이 새삼 소중해지기 시작했다.
늘 같이 있을 때는 더러는 밉기도 하고 야속하기도 했지만 일단 우리의 곁을 떠나게 되면 그 아픈 별리를 통하여 새로운 사랑의 끈을 조이게 되는 것이다. 또한 막연하던 죽음이 구체적인 사실로 대두되고 한번쯤 자신의 종말을 생각하게 된다.
양지바른 선산에 드문드문 터를 잡은 묘지가 단독 주택이라면 공동묘지는 서민들이 사는 서민 아파트. 이곳에 비석 한 개 꽂힌게 없다. 죽음에도 귀천이 있을까마는서민의 애환이 잠들어 있고 세상 어떤 부귀영화도 다 부질없음을 여기에 오면 더욱 절실히 느끼게 된다.
무궁세세 살 것처럼 아둥거리던 나 자신이 한없이 왜소해지고 부끄러워지는 곳이다. 가장 공평한 것은 자연이다. 철따라 조촐하니 옷을 갈아 입히고 한 많은 영혼들을 잠재워 준다.
비는 저녁 어스름을 뽀얗게 적시며 내리고 있고 귓가에는 어느 수금사원의 말이 맴돈다. “좋기는 좋지만 와 하필이면 공동묘지 곁에서 사는교? 소름끼치게요.” 나는 피식 웃었다. 수금사원은 이상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더니 “비오는 밤에 개않습니꺼. 머리 푼 귀시이 내려오지 않능교?” “그들과 나는 육신으 옷을 입고 벗은 차이뿐인데요, 뭐.”
정말 그 차이뿐일까? 무덤들을 바라보면 빈 집을 생각한다. 죽음이 육신과 영혼의 분리 일진대 무덤이란 한갓 죽음의 상징일 뿐이다. “티끌로 된 몸은 땅에서 왔으니 땅으로 돌아가고 숨은 하느님께 받은 것이니 하느님께로 돌아 가리라.” 세상 모든 것이 헛되다고 탄식한 전도서의 말씀이 나를 흔든다.
껴입으면 입을수록 더욱 추워지는 탐욕의 의상을 벗어 던질 때 비로소 아무것도 가진 것 없는 참모습의 내가 보이려나. 비오는 공동묘지를 바라보며 아름답고 평화로운 죽음을 묵상한다.
(충청일보 82. 8. 18)
58. 默示의 새벽
“내일은 단수(斷水)입니다. 물 준비를 하세요.” 반장의 뒷모습이 골목을 사라지기 무섭게 빨래감을 꺼내 세탁을 하고 그릇이라는 그릇에는 물을 받아 놓았다. 단 하루가 단수가 아니고 영원히 단수일 것 같은 무서운 갈증을 느끼며.
때때로 그런 일을 종종 만난다.
어느 가을이었다. 마지막 소독을 잘못하여 한 해 과수 농사를 몽땅 망쳤다. 잎이 벌거죽죽 오므라들더니 급기야는 잘 익은 사과표피에 기미처럼 거므스레 약해가 생겨 났다. 모양이 바르며 과육이 실하고 때깔이 고와야 상품 가치가 좋은데 큰 일이었다.
실망한 나머지 식구들은 행랑어멈 내외를 데리고 논으로 나갔고 혼자서 집을 보며 사과밭에 퍼질러 앉아 싹둑싹둑 꼭지를 따고 있었다. 욕심의 군살이 디룩디룩한 탓인지 사과가 좋고 시세가 좋으면 육신의 고달픔도 잊고 일이 재미가 나는데 그렇지 못 할 때는 노동 자체가 지겹기만 했다.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 사과더미에 혼자 하는 일이어서 일은 줄지 않고 허리는 결리고 팔은 아파왔다. 에라 모르겠다. 풀밭에 벌렁 누워 버렸다.
하늘이 아득히 멀었다. 무애(無涯)의 하늘 끝 어디 쯤에선지 몽기몽기 솜털 구름이 피어 올랐다. 흰색과 보라색의 보카시 조가비 구름이 밭을 일군 듯 점점 넓어져 갔다. 이쪽에서 피어나는가 하면 저쪽 성재산 꼭대기에서는 사라지고 있었다. 누군가 삶이 무엇인가 물은즉
生也一片浮雲起
死也一片浮雲滅
이라 하지 않았던가. 구름을 보고 있으니 그 답이 명답임이 절실해 졌다.
바람이 스치는지 풀잎들이 흔들려 얼굴을 간질렀다. 씨를 배 풀잎에서 머리에도 가슴에도 씨를 쏟아 놓았다. 그때 건너편 아카시아 울타리에 섞여 있는 가죽나무 잎이 후두둑 떨어져 내렸다. 넓적한 잎이 떨어지는 무게에 못 이겨 아래 잎파리가 후두두둑 또 떨어졌다.
팔베개를 하고 누워 잎이 지는 모습을 오랫동안 바라보았다. 계단식 밭이어서 제일 위쪽 언덕에 핀 억새가 백발을 풀어 헤치고 서서 햇살 묻은 바람으로 빗질하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지 미루나무 잎새 하나가 팔랑팔랑 날아와 내 옆에 누웠다. 어딘가 싶어 몸을 반쯤 일으켜 내려다 보니 제일 아랫밭 봇도랑 둑에 심어놓은 미루나무에서 였다.
바람이 잔잔한데도 나무는 흔들리는지 우수수 우수수 잎이 떨어져 내렸다. 상수리로 더듬어 올라간 내 시선에 갈색 낙엽이 나비의 날개처럼 나풀나풀 날리고 있었다. 왜 그런 생각이 났는지 모른다. 가죽나무와 미루나무 잎의 떨어지는 모습에서 죽음을 생각한 것은. 가죽나무 잎이 많이 가진 자의 떠나는 모습이라면 미루나무 잎새는 빈손의 수도자가 떠나는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다.
물질의 다소(多小)가 아니다. 세상 것에 애착이 많으면 많을수록 두고 떠나는 안타까움에 더 고통스러울 것이다. 아마 그 가을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난 다복했던 친척의 죽음을 본 탓일까.
임종 하루 전 그는 내 손을 잡고 살고 싶다고, 죽음의 고통이 두렵다고 몸부림쳤다. 속수무책으로 서 있던 나. 그가 떠나고 난 12월. 떠나간 이들이 따스한 보금자리로 서둘러 찾아오는 계절에 빈 자리를 바라보는 아픔은 문득문득 통증이 되어 아렸다.
아무에게도 마음 주지 않으리라 다짐했다. 정 주고 아픔 갖는 내 못남이 야속했다. 근 열흘 동안을 잠들지 못했다. 어느 시인이 떠났을 때도 그랬다. 옛날 직장 동료가 떠났을 때도 나는 이렇게 허물어 졌다. 이번은 더 심했다. 그가 나와 동년배라는 사실이 내 죽음까지 연상시켰다. 웬일로 지나온 삶이 갈피갈피 부끄러운 모습으로 후회로왔다. 정말 다시 그릴 수 있는 그림이라면 모두 지워 버리고 새로이 그리고 싶은 삶.
창이 부우옇게 미명을 알렸다. 무겁게 아파오는 머리를 식히려고 창문을 열었다. 오 아름다운 새벽, 밤 사이 첫눈이 이리도 아름답게 천지를 누볐구나. 빈 벌판에 나의 과수원은 커다란 수묵화(水墨畵)를 그려 놓고 거기 묵시의 새벽을 맞이하고 있었다. 뜰로 내려 섰다. 발목까지 쌓인 애애한 눈빛에 충혈된 눈이 부셨다. 모든 것이 정지된 상태. 참으로 기묘한 것은 눈을 맞고 선 사과나무의 모습이었다. 굵은 가지에는 많이, 잔 가지에는 조금씩 그 나무의 굵기에 비례해서 눈은 공평하게 쌓여 있었다. 그것은 깨달음이었다. 우리들 삶 누구에게나 자기 몫의 고통이 있고 기쁨이 있다는 사실, 삶이 있으면 죽음이 있고 죽음이 있어야 영생이 있다는 사실이다.
반장이 단수를 예고하고 가듯 죽음을 예고해 줄 저승 반장이 없다 해도 하루하루를 눈 온 새벽 맞이하듯 그렇게 정직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맞고 보낼 일이다.
(수필공원85. 겨울 호)
59. 여름이 남긴 말씀
우연히, 정말 우연히 성당 뜰에서 매미 소리를 들었다. 성모몽소승천 대축일 미사가 끝나고 막 현관을 나서는데 큰 푸라타나스 나무 위에서 무성한 잎을 흔들어 대며 쓰름, 쓰쓰르름, 아니다. 으앙으앙, 아기 울음소리다. 이상하다. 나는 보청기의 보륨을 한껏 높혔다. 필경 갓난 아기의 울음소리다. 정수리로부터 피가 멎듯 온몸이 경직되었다. 가슴은 두방망이질을 치고 있다.
참으로 몇 십년만에 들어보는 소리인가. 녹음이 우거지고 더위가 고개를 들 때쯤 친정집 뒤뜰 살구나무에서 소나기 쏟아지듯 쏴아하고 들려 왔던 그 신선했던 유년의 매미 소리, 첫사랑의 목소리처럼 나는 그리움에 애가 타기 시작했다. 그 며칠 후 보청기가 달그락 대더니 고장이 났다. 가성(假聲)이나마 소리를 연명해주던 것이 그리되니 난감하다.
고요의 밀실 복판에서 나는 세상 밖으로 쫒겨난 비애에 젖는다. 사실 청력상실 상태에서 보청기를 쓴다고 세상소리가 다 들리는 것은 아니다. 노상 시끄럽다. 제가 제 몸뚱이에 비벼대는 금속성 소리, 시끌벅쩍한 소음은 자지러 들게 들어오고 정작 듣고 싶은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일테면 가을밤을 수놓는 풀벌레 소리라든가 맑고 초롱한 새소리, 이런 본연의 소리는 감감하고 필요 없는 잡음이나 들려 온다.
하기사 마음의 귀를 열지 않으면 아무리 아름다운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것은 자명한 일이지만 가장 시끄러운 소리는 외부로부터 들려오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가늠 못 할 때 일어나는 내면의 소음이다.
그림만 보는 텔레비전 수상기에서는 이산 가족들의 만남이 비치고 있다. 서울과 부산에서, 청주와 전주에서 서로 마주하는 그들, 33년의 두꺼운 단절 속에서도 하나같이 닮아 있는 핏줄의 정직성, 소리 없는 눈물이 쏟아진다.
그리운 사람은 어쨌거나 만나야 한다. 일손을 놓고 밤을 지새우며 내가 아프도록 확인한 것은 우리는 하나라는 사실이다. 지구 끝과 끝에 갈라 놓아도 언젠가는 꼭 만나야 할 하나임을. 그래서 여름이 이렇게 뜨겁고 애닯게 아파오는가 보다. 죽기 전에 만나야 할 사람을 그리며 사는 이들에게 이산가족의 만남은 하나의 희망을 남겨주고 있는 것이다.
이제 매미 소리는 들리지 않는다. 고장 난 보청기가 침묵하듯이 나의 일상도 침묵한다. 그러나 외롭다. 사람이 그립다. 한결 같은 자연, 응답 없는 시간에 매달리다 지쳐 거리로 나선다. 절벽 같은 귀를 달고 사람들 앞에서면 나는 금방 후회하고 만다. 한사람 만나면 한번 외롭고 두사람 만나면 그만큼 외롭다. 가만히 마주보고 앉아 있어도 전류처럼 맞닿는 마음은 외면하고 끝없이 설명하려는 세상이 어지러워 비실비실 돌아서면 텅 빈 영혼으로 와락 안겨 오는 청자빛 초가을 하늘, 벌써 가을이 건너온 거야.
다시는 사람을 만나지 말아야지, 이 산속에서 나무랑 어울려 목녀(木女)로 살아야지, 그렇게 다짐하는 날 나의 말씀은 빛으로 온다. 하얀 낮달이 제 빛을 낼 때가 밤이듯이 나의 말씀이 의미로 오는 것은 죽음 같은 고독에서 벗어난 새벽 먼동트듯 그렇게 영문 모를 얼굴로 온다.
다시 거리로 나선다. 다시는 사람을 만나지 말자고 수없이 다짐했으면서도 사람 그리는 선천성 건망증은 나를 거리고 내 몬다. 내가 사람을 오래 미워하지 못하는 것도, 이 건망증 때문이다. 가을 시장에서 몫몫마다 자기 삶을 좌판에 펼쳐 놓고 뜨거운 생명을 살고 있는 열기에 싸여 이리 밀리고 저리 밀리며 하나 잃고 둘 잃고 지친 몸으로 난전에 서면 사막 가운데 피어나는 선인장 하나, 햇감처럼 풋풋한 생활의 감미로움이 슬며시 구미를 돋군다.
성하면 성한대로 부실하면 그대로 인생은 최선을 다해 살아야 하는 거라고 큰 진리나 찾아낸 듯 언덕배기를 올라서니 과수원 뜰 가득 맑고 부신 9월 햇살 속에 사르비아는 샛빨갛게 타고 있었다. 살라, 살라, 웅변보다 더 큰 목소리로 외치고 있었다. 매미소리가 아기울음소리듯이 이명(耳鳴)에 걸린 내 영혼은 뒤늦게 그 까닭을 알아냈다.
사람들이 자꾸 이야기 하고 싶은 것은 그들 스스로도 감당 못할 침묵이 두려워서, 죽을 것처럼 불안해서 그렇게 소리치고 몸짓하고 요란한 것이라는 것을, 지난 여름이 슬며시 내게 귀뜀 해준 말이다.
그런데 언젠가는 고즈넉히 만나야 할 것이 있다. 이산가족이 세월과 사상의 단절 속에서도 서로 만남을 지향하고 있듯이 그렇게 우리들이 만나야 할 것은 마음의 본향이다. 흙의 마음이다. 언제부터인가 사람들은 어린왕자가 말했듯이 버섯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 무엇을 찾는지도 모르게 바쁘게만, 욕심스럽게만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의 삶이 아닌가.
여름이 신산(辛酸)한 아픔속에 가을을 잉태하듯이 위대한 여름을 보내며 나는 생각한다. 이 가을에는 사람냄새 풀풀나는 이들과 들길을 거닐며 이름없는 들꽃이 어찌 그리 아름다운지 그 까닭을 알아 보아야겠다. 그리고 성모님께 작은 풀꽃까지 사랑하는 마음을 줍시사고 부탁해야겠다.
(내륙문학 84. 여름)
60. 예수 부처님
우리 803호 병실은 3인용이었다. 봄부터 시름시름 팔개월을 앓다가 뼈만 앙상하게 남은 내가 을지병원에 입원했을 때는 11월도 저문 늦가을 이었다.
일주일에 걸친 종합 진찰결과가 담석증으로 판명되었으나 너무나 체력이 약해진 탓에 선뜻 수술 날짜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때 내 옆 두 침대에는 중2짜리 볼이 통통한 여학생과 50대 중반인 듯 싶은 아주머니가 있었는데 모두 교통사고 환자였다. 우리는 금방 친했다. 그곳이 병원이라는 특수한 상황이었기 때문인지 몰랐다.
어제는 801호실 환자가 위암 수술도중 죽어나갔다. 언제 어떻게 죽음이 내게 닥칠지 모르는 절박한 상태 여서 환자들은 서로서로 따뜻했고 무사하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이 귀여운 소녀는 골이 좀 띵해도 내 옆에 와 기댔고 생리진통에도 베개를 들고 아주 내 침대 속에 들어와 같이 앓자고 졸랐다. 내가 노상 들고 있는 묵주알이 곱다고 제 목에 걸기도 했고 하느님이 더 유명한가 부처님이 더 유명한가 묻기도 했다. “아주머니, 대답해 주세요. 나는 더 유명한 사람을 믿을 테야요.” 밝고 순진했다. 늘 터무니 없는 뗑껑 때문에 우리 병실은 웃음바다였다.
12월 4일로 담낭 절제 수술일이 결정 되었다. 준비의 하나로 2일 전인 12월 2일 밤에 수혈을 했다. 당직 간호원 한 사람뿐인 8층은 고즈넉했다. 그날이 마침 서울 특별시 민방위 훈련 일이어서 사방은 암흑과 정적뿐이었다. 전지불로 수혈주사를 놓고 희미한 촛불 한 대 밝힌 침대머리는 섬찟했다. 누구의 것인지도 모르는 자주 빛 선혈이 고무 호스를 통하여 뚝 뚝 떨어지고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핏방울이 커졌다 작아졌다 요술을 부렸다.
옆 환자는 일찍이 잠든 모양인지 잠잠했다. 소녀만 대퇴부에서 발끝까지 기브스한 무거운 왼쪽다리를 의자에 받쳐놓고 내 침대에 턱을 고인 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머니 푸욱 주무세요. 제가 안자고 지킬게요.” 아무리 침대에 가서 편히 자라고 일러도 막무가내였다. 아주머니가 아픈데 제가 어떻게 잠이 오겠느냐고 우겼다.
우리는 침묵한 채 핏방울만 바라보고 있었다. 옆방 환자가 마취에서 깨어 났는지 “아이구 아파 엄니, 엄니, 나는 죽네.” 고함을 쳤다. 밖에서는 이따금씩 여기 저기서 조명탄이 터졌다. 조명탄이 터질 때마다 소녀의 실루엣이 벽에 출렁였다.
“아주머니, 수술할 때 마취에서 안 깨어나면 어떻게 하죠.” 근심스러운 얼굴이었다. “죽는 거지 뭐, 편안히.” “싫어요. 죽는 거는 무섭고 싫어요. 나는 아주머니가 좋아요. 무지무지 사랑해요. 안 죽는다고 약속하세요.”
소녀는 조그만 두 손으로 내 손을 감싸 안았다. 눈물이 빙그르르 돈, 맑은 눈빛 속에서 착하디 착한 순백의 영혼을 보았다. 밤이 깊었다. 스팀이 꺼졌는지 냉기가 스몄다. 시계는 새벽2시. 소녀는 앉은 채로 잠들어 버렸다.
다음날은 수혈 후유증으로 으슬으슬 오한과 메스꺼움 때문에 온종일 고생을 했다. 그날 밤 수면제를 준다는 간호원의 말에 괜찮다고 해 놓고는 온 밤을 뜬눈으로 지새웠다. 새벽이 가까워 올수록 미칠 것 같은 불안과 두려움이 한꺼번에 엄습해 왔다.
죽음이 왔을 때 내가 남길 것은 무엇인가. 삼십 구년 동안 무엇을 위해 살아 왔는가. 입술은 바작바작 타 들어가고 깎아 세운 벼랑에 한발로 서 있는 듯 암담하고 처절한 고독이 밀려왔다.
그냥 앓다가 죽더라도 수술을 취소할까. 죽음이라는 불가항력의 거대한 벽 앞에 내가 얼마나 불충하고 미소한 먼지의 존재인가를 아프게 인식하는 순간, 절재자에 대한 절실한 신뢰가 무릎을 꿇게 했다. “저를 태어나게 하신 분이 계시듯이, 저를 떠나게 하실 분도 계시옵니다. 당신이 ‘오리와 동산’에서 간곡히 빌었듯 그렇게 조촐하고 하얀 마음 모두어 비오니 주여, 뜻대로 하시옵소서. 뜻대로 하시옵소서.”
수술 날이 밝았다. 침대 시이트로 나신을 가리고 이동 침대에 눕혀 수술실로 향하는 데 소녀가 다가왔다. “아주머니, 이 묵주 제가 가지고 있을게요. 기도 많이 할께요.” 소녀는 파랗게 질려 있었다. 내 몰골이 말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코로는 호스를 꽂아 빈 링겔병에 연결시켜 오른쪽에 차고 링겔주사병은 왼쪽에 찬 채 죽을지 살지 모르는 수술실로 가는 것이다. 복도에는 동병상련의 이웃 환자들이 나와서 무사하기를 바라는 기원을 보내주고 있었다.
나는 어젯밤과는 달리 담담한 심정이었다. 오전 열 시에 시작한 수술은 오후 세시에 의식을 찾게 되었다. 가물가물한 눈 앞에 다투어 손잡는 이웃 환자들의 얼굴이 어른거렸다. 그때 난데없이 콰당하며 달려나온 소녀. “예수 부처님 감사합니다. 예수 부처님 감사합니다.” 소녀는 내 가슴에 엎드려 엉엉 목놓아 울고 있었다.
아무리 예수님을 불러도 대답은 없고, 아주머니는 살아날 것 같지가 않다고 했다. 시간은 제자리에서 맴돌고, 숨조차 가빠져서 죽을 것 같은데, 예수 부처님을 한꺼번에 불렀더니 살려 주신 거라고.
나는 가슴이 저려와서 아무말도 할 수가 없었다. 예수님도 부처님도 저 간절한 소원을 어찌 물리칠 수 있으셨을까. 나는 어쩌면 이리도 큰 사랑 속에 사는가. 넓은 우주, 세 평 남짓한 병실 안에 잠시 마주본 인연이 신의 가슴을 두드려 생명을 구함은 얼마나 큰 억겁의 은총인가.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비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영리를 떠난 순수한 마음으로 얼마나 간곡히 매달려 빌었는가가 문제 아닐까. 나는 지금도 분홍빛 로사리오를 알알이 바칠 때마다 온 몸과 마음으로 내 생명을 지켜준 귀여운 소녀를 생각한다. 다함없는 애정을 보내면서.
(법륜 82. 2월 호)
61. 자살이 아니고 順命입니다
나는 그때 작은 시골국민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다. 가을 운동회를 마치고 까닭 모를 오한에 여러 날을 시달리다가 읍에 있는 병원을 가기 위해 버스를 탔다. 행길 가에는 코스모스가 함빡 피어나서 하늘거렸다. 나는 차창에 얼굴을 부벼 불덩이처럼 달아오르는 신열을 식히면서 내가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지 가물가물했다.
내가 눈을 뜬 것은 12월도 저문 성탄 전야, 첫눈이 소복소복 내리는 밤이었다. 3개월의 기나긴 혼수에서 깨어난 신생의 강가에 닻을 내린 것이었다. 그러나 세상의 어는 음향도 내 귀에는 담아지지가 안았다. 41도의 장티푸스열로 청력상실이란 진단이 내려졌다.
살아 났다는 안도감보다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가. 암담하기만 했다. 체력조차 쇠약해져서 걸음마부터 다시 시작하며 반듯이 소리를 되찾고야 말겠다는 집념은 체력을 돋우며 새학기부터 교단에 서게 되었다.
우선 보청기를 사용하여 수업을 하며 일요일에는 전국의 유명하다는 이비인후과를 찾기에 여념이 없었다. 3년을 지칠 줄 모르고 찾아 다녔으나 어디에서고 대답은 한결 같았다. 해열제로 사용한 스트렙토마이신 부작용으로 오는 청신경 마비는 회생시킬 가망이 없다는 선고였다. 그 사이 믿고 사랑한 남편은 아이들을 데리고 내 곁을 떠나 갔다.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건강도, 가정도, 철저하게 빈 손인 겨울나무가 되어 눈보라 치듯 들판에 혼자 남아서 그래도 겨울이 가면 봄이 오리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모정의 아픔이 질타 할수록 더 거센 불길로 나를 사뤄 교단에 바치며 착하게 살자고 다짐했다.
그러나 귀머거리의 설움은 말이 아니었다. 분명히 좌측통행을 했으면서도 운전기사 들에게 수모를 당하고, 시장 바닥에서의 질시, 또한 가족과 사회에 짐이 되고 있다는 사실이 나를 끝없이 괴롭혔다.
강습장에서 보청기를 라디오로 오해한 강사로부터 많은 수강생들 앞에서 심한 수모를 받던 날 나는 더 이상 견뎌낼 여력이 없었다. 처음으로 죽음을 생각 했다. 수면제 40알을 포도주에 타 넣고 십자가 앞에 간절히 탄원했다.
“주님, 저는 이제 죽습니다. 살고 싶어요. 뜨겁게, 열렬히, 이것은 자살이 아니고 순명(順命)입니다.” 떠나간 아이들을 마나기 전에는 죽을 수도 없었던 질긴 그리움까지 조용히 체념했다. 전등을 꺼버린 방에는 무거운 암흑과 침묵 뿐, 어디서도 구원의 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나는 천천히 글라스를 집어 들었다. 그때였다. 난데없이 눈앞에 반짝 섬광이 비쳤다. 암흑을 가르고 비친 한줄기 빛. 나는 보았다. 볼 수 있었다. 이윽고 소나기가 억세게 퍼부었다. 나는 그만 복받치는 감동으로 뜨겁게 뜨겁게 울어 버렸다.
“주님, 제 교만을 용서해 주십시오. 성한 두 눈, 두 손발, 이것만도 제게는 과분합니다.” 죽음의 직전에서 듣지 못하는 불행보다 볼 수 있는 희망을 선택하게 하신 그분의 의도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사방의 문을 다 닫아버린 후 오직 한 길, 글을 써서 불행한 이웃에게 사랑을 전하라는 소명을 주신 것이다.
사람들 사이에 서면 나는 아직도 이방인이다. 그것이 두려워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사과나무를 기르며 침묵 가운데 더욱 생생하게 들리는 진리의 육성을 온 가슴으로 짚어내 글을 쓴다.
나는 귀머거리가 아니다. 소리를 잃은 것이 아니고 빛과 함께 응취된 지고(至高)의 음향과 살고 있는 것이다.
(샘터 82. 9월 호)
62. 파 한 뿌리
삼월 초순께 시골 다녀온 그이 손에 파 한 줌이 들려 왔다. 이제 갓 해토(解土)하는 밭이라 파는 떡잎 속에서 얼굴도 비치지 않은 채 뿌리만 성하다. 그것도 고향에서 온 손님이라고 반갑기 그지없어 비어 있는 화분에 촘촘히 꽂고 다독다독 흙을 담았다. 3층 유리창 가까이 화분을 놓아 두고 생각날 때마다 물을 주었다. 밖의 날씨는 좀 누그러지는가 싶으면 진눈깨비가 내리고 또 화창해지고 번갈아가며 뒤채더니 추위는 슬그머니 물러가고 한결 따스해졌다.
어느 아침 유리창을 열어 놓고 아침해를 맞이하다가 우연찮게 화분에 시선이 닿았다. 거짓말 같이 거기에는 파아란 싹이 소복하게 돋아있지 않은가. 누가 일부러 벗겨 주기라도 한 듯 누렇고 보기 흉한 떡잎은 말끔히 벗겨지고 파는 4, 5센티쯤 싹을 키워 제법 푸른 윤기를 내 뿜고 있었다. 하도 신기해서 화분 앞에 앉았다.
자세히 바라보니 새로 돋는 연초록빛 새싹도 아름답지만 비들비들 말라 널부러진 떡잎에 이상한 감동이 묻어 왔다. 눈쌓인 허허 벌판 들녘에서 새싹을 지키노라 모진 추위와 싸웠을 떡잎, 뿌리까지 뽑혀서 긴 여행을 하며 그저 죽은듯 생명하나 보듬었을 위대한 본능. 이제 화사한 봄볕의 축복 속에 장한 출발을 기뻐하며 조용히 임종하는 지순한 자연의 모성. 아름답다. 어여쁘다. 기쁘게 자기를 내어 주는 자헌의 모습이다. 도시 어디에고 정붙이기 어려운 비정한 시멘트 벽 안에 파가 차지하는 공간은 생기찬 봄의 빛깔이고 살아 있음의 언어이다.
요즘은 일부러 가파른 계단을 자주 오르내린다. 자지러질 듯한 거리의 소음에 쫓기거나 그리운 사람들의 편지를 받는 날 나는 감추어둔 정인을 만나러가듯 그렇게 설레이고 달콤한 마음으로 3층엘 간다.
바라보면 볼수록 그것들은 많은 이야기를 건네준다. 쪼그리고 앉은 다리에 쥐가 나서 의자를 당겨 앉아 내려다보니 도스토예프스키의 작품에서 읽은 것으로 가억되는 설화가 생각났다.
어는 인색한 노파가 죽음을 맞이해서 절대자 앞에서 심판을 받는다. 노파는 위로 올려다보면 천국이고 발 아래를 내려다 보면 유황불이 이글거리는 지옥인 그 사이에서 질문을 받는다.
그대는 일생을 통하여 누군가에게 자기 것을 나누어 준 일이 있는가 하고. 그러나 아무리 생각해도 남에게 준 것이라고는 한 가지도 없었다. 절망에 찬 노파가 고심 끝에 기억해 낸 것은 언젠가 이웃에게 건네 준 파 한 뿌리였다. 노파가 덜덜 떨며 사실을 아뢰자 하늘로부터 파 한 뿌리가 노파 앞으로 내려왔다. 그것을 잡고 천국으로 오르도록 하라는 명령과 함께.
노파는 사력을 다해 금방 끊어질 것 같은 파 한 뿌리를 잡고 일각이 여삼추 같은 시간 위에 앉아 비로소 깨닫는 것이다. 죽음까지 동행할 수 있는 것은 일생을 매달려 모아온 황금이 아니요 명예도 아니요 오로지 그가 행한 행적 뿐이라는 사실을.
자세히 들여다 보니 파들은 날마다 달라진다. 우쭐우쭐 자란 것들은 통통한 둥근 기둥 모양의 잎들을 꼿꼿이 펴들었고 뿌리가 채 심기지 않은 것은 뿌리를 허옇게 내놓고도 자라고 있다. 이제 겨우 떡잎 속을 비집고 나오는 새싹들은 볼그레한 끝이 갓 깬 병아리 부리 같다. 귀를 기울이면 금방 삐약 소리가 터질 것 같다.
화분을 돌려 놓았다. 창쪽을 향한 파들은 짙은 초록빛인데 비해 그 반대쪽은 연한 연두빛이다. 햇빛이 그리웠을 것이다. 잎을 만져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손 끝만 스쳐도 부러져서 눈물 같은 진액을 철철 흘리고 있지 않은가. 나는 부러진 잎을 손에 들고 좀 더 튼실하게 키울 수는 없을까 생각했다. 사실 너무 과보호한 탓이었다. 화분을 창밖에 내어 놓고 맵싸한 바람이나 진눈깨비도 맞아가며 그것을 극복하며 생존하게 했어야 했다.
어디 식물 뿐인가. 사람도 고통에 단련되지 않고는 어떠한 영혼도 위대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보록이 올라온 그것들을 보고 식구들은 움파 장국이라도 끓이라고 성화지만 사실 파 한 뿌리에 백원이 넘는 금값 시세에도 울며 겨자 먹기로 그것을 사다 먹을 망정 고향에서 온 그것에는 손을 대고 싶지가 않은 것이다.
바라보고만 있어도 나는 고향 집 새 밭에서 씨를 뿌리는 심정이고 종달새가 까마득히 떠 오르다 곤두박질 치는 보리밭 이랑을 타고 앉은 느낌이다. 지금쯤 경희네 옥화네 밭에 수건을 덮어쓴 이웃들이 나와서 봄 채비를 서둘 것이다. 새참을 지으러 가다가도 고추 온상에 기름 푸새를 푸짐하게 뽑아 건네던 기와집 아주머니의 무던한 마음이나 주지 않고는 못 배기는 자잘한 인정들, 그들은 순수한 덕행으로 하여 노파 보다는 더 천국에 있음이다. 자기가 행한 것이 덕행이라 의식하지 않는 상태에서의 모든 것이 훨씬 보배로운 것은 떡잎 같은 사랑에서 시작된 행위이기 그러하다.
파는 인간적인 풀이다. 아무리 깊은 산사의 선원일지라도 뒤뜰에 심겨진 파들로 하여 인간적인 체온을 느끼게 해 준다. 이제 떡잎은 파스스 부서져 간다. 지금 새싹이던 순들도 한 계절을 못 넘기고 떡잎이 될 것이다. 피고 지는 순환의 질서 속에 무엇을 할 수 있다는 가능을 안고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실존 하나만도 가히 큰 은총이 아닐는지.
(초교파 85. 3월 호)
63. 해바라기 合唱
나의 일과는 해바라기의 합창 속에 시작된다. 어쩌면 노오란 해바라기의 환상 때문에 일생을 그림 붓을 들고 헤매던 반 . 고호의 혼령이 실렸는지도 모른다. 너무나 가엾게도 해를 바래 쫓는 해바라기, 해를 닮아서 끝간데 없이 둥근 원형의 그리움을 가슴에 심고 영원을 사는 혼.
나의 건강한 아침이 열리는 해바라기의 숲, 화창한 7월의 오전이 숲을 거닐면 아름다운 선율이 창마다 흐르고 발돋움해 이슬을 찾는 늠름한 잎들의 나직한 숨소리를 듣노라면, 내 가슴의 맥박은 뛰고 그리하여 얼굴 가득히 태양처럼 환한 미소를 뿌리며 교실 문을 연다.
안녕, 짹짹, 소르르. 태양과 해바라기의 작은 왕국, 다함없는 애정과 신뢰가 연연히 하모니되는 시간속에 해바라기의 입을 모은 합창은 설된 태양의 나약한 심지(心志)를 나무람 주며 서로 다른 음색으로 무늬진다. 허설게 웃지 않고 쉽게 절망하지 않는 사색자, 과묵하게 내일 피울 소망을 위해 고달픈 몸짓의 해바라기.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조그만 뜰에 틈틈히 몇그루 해바라기를 가꿔 왔다.
항상 의젓하다. 무서운 소나기 속에서도 동요없이 미소짓는 믿음직한 자세, 뜨거운 폭양에도 지칠 줄 모르는 끈기. 바람따라 하늬거리는 코스모스를 수줍은 소녀라 친다면 해바라기는 억센 산그늘 속에서 자라난 투박한 머슴애랄까?
나는 이 해바라기의 숲을 가꾸면서 참으로 과장 없는 보람을 느껴본다. 내 왕국의 소녀들 팔십여명이 온종일 나를 향해 웃음과 슬픔과 곤비함을 바쳐 줄 때, 고된 오후의 수업에서 해방된 순간 창너머의 해바라기에 눈을 주면 태양은 곧 부실한 나요, 내 소녀들 또한 이쁜 눈매의 해바라기, 그것은 조금의 차이도 없는 이코르(=)인 것을 알게 된다.
해바라기들은 군더더기를 싫어 한다. 한꺼번에 확 울어버릴 뜨거운 공감을 그들은 원한다. 색깔로 치면 아주 선명한 원색이랄까? 단 한번의 시선으로 희(喜)와 노(怒)가 구별되고 애증(愛憎)이 그들 전신에 배어온다.
비록 가난으로 해서 정상적인 교육과정을 밟을 수 없는 비진학 어린이지만 그들에겐 꿈이 있다. 남몰래 가슴 깊숙이에서 피워보는 알뜰한 꿈, 나는 멋쟁이 재단사가 될래, 난, 예쁜 미용사가 될래, 아냐, 난 흙속에서 살래, 이 가난한 소망들이 열매 맺는 날 나의 작은 왕국엔 비로소 아름다운 합창이 똑 고른 음질로 메아리 치겠지. 그리하여 고뇌로운 많은 영혼 속에 오래오래 지워지지 않는 영상으로 머무를 거야.
시시각각으로 부딪혀와 출렁이는 분노가 있을 때, 진실이 통하지 않는 미망에 빠질 때, 나는 울창한 녹색의 요람을 거닐면서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들의 태양이 되고자 다짐한다.
천둥이 으르렁대는 여름 밤, 내, 내뜰에 잎들이 다칠라 잠이서는 소심증도 알찬 그들의 성장과 더불어 치료되겠고, 이렇게 해서 부끄러운 나의 하루도 해바라기들의 미완성 합창을 들으며 조용히 막을 내린다.
(충북 교육신보 ‘교수단상’ 1967)
64. 還 生
몇 년 전 바우라는 검둥개를 기른 적이 있다. 이 놈은 훤칠한 키에 까만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폼이 똥개 종자로는 일품이어서 누가 보아도 탐을 내었다. 늘 물기가 고인 듯한 눈매며 주인을 알아보는 지혜 또한 미련한 인간에 비하랴.
추운 겨울이었다. 읍내의 볼일이 있어서 자전차를 타고 떠났다. 동구밖 까지 쫄랑쫄랑 따라와서 집으로 돌아가라고 돌 팔매질을 해서 간신히 따돌리고 읍에 도착하여 이것 저것 볼일을 보고나니 해가 뉘엿뉘엿 넘어가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책방에 들러 월간지를 살펴보다 전등불이 들어와서 깜짝놀라 책을 사 들고 막 문을 나서는데 거기 오두마니 앞발을 모우고 앉아 있는 바우가 있었다. 반가웠다. 늘 버릇대로 두 귀를 잡고는 가슴께에 끌어 안았다. 바우는 그 소담스런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2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따라와서 해저무는 줄도 모르고 기다리고 앉아있는 바우. 나는 빵 한 봉지를 사서 둘이 나눠 먹고 캄캄한 시골길을 달렸다.
뒷산 양지쪽에 할미꽃이 피고 외딴터 우리집 과수원 사과나무에도 연옥색 봄기운이 감돌 무렵이었다. 이 놈은 수컷이라 집에 붙어있는 날보다 나가 있는 때가 훨씬 더 많았다. 또 없어졌다. 돌아 오겠지. 돌아다니다가 배가 고프면 허기진 배를 채우러 돌아오겠지. 그러는 사이 한달 두달 석달이 지났다. 이제는 식구들도 누가 잡아 먹었나 보다고 애타게 기다리던 때와는 달리 쉽게 체념해 버리고 빈집이 보기 싫다면서 강아지라도 한마리 구해야겠다고 했다. 그리도 나는 막연히 돌아올 것 같은 예감에 해만 설핏하면 밥그릇에 밥을 담아 놓고 무작정 기다리고 있었다.
계절도 개가 나간 이른 봄에서 총총 건너와서 과수원 사과꽃도 왁자하게 폈다 졌고 마디마디 대추만한 사과를 달고 섰는 6월이 되었다. 그 날도 땅거미 지도록 사과열매 속기에 여념이 없다가 집으로 들어 가려는데 사과나무 밑에 시커먼 것이 웅크리고 있었다. 이상해 하면서 한편으로는 섬찟해서 아이 아버지를 불렀다. 아이 아버지가 다가와서 쿡쿡 찌르니까 섬찟한 물건이 벌떡 일어서는가 싶더니 그 자리에 도로 쓰러졌다. 너무나 놀라워서 손전등을 가져다 비춰보니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모습의 바우였다.
오른쪽 눈과 눈썹 귀까지 사나운 도끼 날에 찍힌 듯 떨어져 너풀거렸고 선지피가 흘러 내리고 있었다. 온 몸뚱이는 뼈와 가죽만 남고 누구의 손길인지 목에는 굵직한 사슬이 매어져 있었다. 너무나 반갑고 가엾어서 나는 치마 폭에 감싸 안았다.
돌아온 것이다. 단발마의 고비에서 사력을 다해 이 산꼭대기로 돌아 온 것이다. 돌아 왔다는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바우는 우리의 신뢰와 사랑에 백프로 보답한 것이다. 눈뜰 기력 조차 없는 바우는 내 두팔에 안겨 미미하게 꼬리를 흔들었다. 나를 바라보고 있는 눈길에서 무한한 안도와 평화가 배어 나왔다. 응급치료를 하는 동안 바우 몸은 식어 갔다.
“죽지 마라. 바우야. 죽으면 안돼. 바우야.” 미미한 꼬리 짓도 그쳤다. “바우야. 불쌍한 바우야. 인도환생하거라. 어느 부잣집 귀한 아들로 인도환생하거라.”
불교 신자도 아닌 내 입에서는 간절한 기원 한없이 흘러 나왔다. 인 환생하거라. 부디 인도환생하거라.
(수필문학 80. 10.)
65. 고등어 한 손
오늘은 읍내 장날이다. 한파수가 되기를 얼마나 고대 했는가. 그동안 일로 장에 갈 짬이 없었다. 이제 모는 꽂아 놓고 고추며 담배도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정신없이 돌아가는 일 틈에 시아버님상에 반찬 한 토막 올려 드리지 못한게 죄송하다.
새벽부터 서둘러서 준비를 했다. 우선 돈 될 것을 마련해야 했다. 시나리 고추 댓근, 참깨 둬됫박, 들기름 대두 한병, 애호박도 서너개 따 넣었다. 이것들을 올망졸망 보자기에 싸이고 새마을 광장으로 나갔다. 웬걸, 동네 부녀들이 옴팍 다 쏟아져 나온 모양이다.
소독약과 비료 사러 가는 경운기 세대가 발동이 걸린 채 탈탈거리고 여기 저기서 보따리를 안고 올라 타느라 부산하다. 새까맣게 그을은 얼굴에 분 바르고 입술연지도 칠했다. 한껏 치장을 했지만 분은 겉돌고 땀으로 범벅이 되어 엉망이지만 그래도 모두 신바람이 나는 것은 사실이다.
유일한 외출이다. 눈만 뜨면 밭으로 논으로 들짐승처럼 쏘대다가 저녁 한술 뜨고는 송장이 되는 것이다.
읍내까지는 십리 길이다. “우리 오늘 점심에는 일미식당에 가서 자장면 한 그릇씩 사 먹고 올까?” “그랴, 그랴, 일년 내내 해다 바치는 시녀가 가만히 앉아 먹는 상전 한번 되어 봐야지.” 모두 군침을 삼키며 깔깔거린다.
우선 도부꾼에게 잡곡을 내고 돈을 손아귀에 움켜 쥐고는 저마다 볼 일 보러 안 장터로 간다. 우체국에 가서 전화세를 내고 약국에 들러 파스 한 갑사고 국민학교 다니는 녀석 운동화 한 켤레 사고 단위조합 구판장에 가서 빨랫비누 치약 퐁퐁 파리약 사고 나면 손아귀는 헐거워진다.
어물전으로 갔다. 등때기가 시퍼런 간 고등어며 갈치 동태 많기도 하다. “ 이 생선 한 손에 얼만가유.” “천원만 주쇼. 싸게 드리는 거요.” 아휴, 너무 비싸유. 좀 깎아유.” “아주머니, 천원이면 공것인줄 아슈.” 고등어 한 손을 받아 들었다. 돌아서서 지갑을 열어보니 만원권 한 장과 천원이 남아있다.
아쉬운 것이 어디 한두가지랴만 두 눈 딱 감고 타달타달 걷기 시작한다. 경운기 타고 올 때 자장면 먹자던 생각도 잊어먹은 체 하고 냉수로 배를 채우고 먼 십리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시내버스비 1백 20원이 아까워서다.
아침마다 학교 갈 때 손 내미는 네 아이의 학용품 값도 수월찮다. 그래도 장날은 기다려 진다. 반찬 한토막으로 해서 기뻐하실 시아버님과 결린다는 옆구리에 파스 붙이고 거뜬히 일 나갈 남편과 착하고 똑똑하게 커 가는 아이들 생각을 하면 저절로 기운이 나는 것을 .
이것이 흙을 타고 앉은 농촌 어머니의 소박한 기쁨이며 행복이다. 앞서거니 뒤 서거니 도란도란 모여 가는여인들 위로 원칭이 쪽에서 마파람이 불어와 땀방울을 시원히 씻어 주고 달아 난다.
(서울신문 )
66. 고추 농사 정말 맵네
마을 회관에는 부숭부숭한 얼굴들이 모여 들었다. 온 종일 고추 밭 골에 엎드려서 고추를 따느라 앉기가 무섭게 하품을 하고 꾸벅꾸벅 졸기도 하고 있다.
잘 돌아 왔다고, 힘을 합쳐 어려운 고비를 슬기롭게 넘겨 보자는 이장님의 훈시가 끝나자 환영 박수 속에는 비아냥도 섞여 들려 왔다. 성공한다고 떠났으면 독한 맘 먹고 성공하고 올 일이지 남우세스럽게 뭣하러 왔느냐 하고, 그래도 잘 왔다고 등을 두드려 주는 것은 어른들이다. 그때 미경이 삼촌이 일어섰다.
“미안 합니다. 동네분들 심려를 끼쳐드려서요. 우리 같이 배운 것 없고 기술 없는 사람들이 어중간해서 찾아갈 곳이 아니예유. 취직이 되나요, 장사 잘못하면 밑천 떼이기 쉽고 품을 팔아야 생활비가 많이 들어 남는 게 없더군요. 상추 한 잎도 돈 내고 사야 먹지 어디 공것이 있는 감유. 셋집 주인은 애가 운다고 야단이지, 아휴, 진땀나유. 곧바로 내려 오고 싶었지만 용기가 안났어유. 나 같은 사람들이 많이 있어유. 인자는 죽으나 사나 여기서 살겁니다.”
철순네 아재는 양념거리 장사를 했는데 큰 장사꾼들이 좌악 뻗쳐 있어서 발 붙이기가 어렵고 마늘 값 고추 값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도 장사꾼 수작이라고 했다. 괜스리 2년간 손해 보았노라고, 곧이 곧대로 살아온 촌사람들 섣불리 서울 갈 거 아니라고L.
막걸리 대접이 이리저리 돌아 갔다. 안주는 고추장 종지, 풋고추 한 대접이지만 술 맛이 좋다고 벌컥벌컥 마셨다. 철순네서 쪄 내온 감자하고 옥수수가 여자들에게 돌려졌다. “집에 고추는 괜찮은감?” “ 말 아녀. 탄저병, 오갈병이 들어서 고스란히 말라 죽는겨, 참말로 미치겠어.”
아랫마을 어씨댁에는 사과 나무 캐어내고 천여평에 심은 고추가 모조리 죽어서 다 뽑아 던지고 밭을 들여다 보지도 않고 있다. 또 영농후계자가 되어 소 열여섯마리를 기르는 창진네는 기운이 빠져 날마다 부부싸움이라고. 이제는 송아지가 망할망자 망아지가 되어 근심만 안겨주고 있다. 정작 소 난리에 눌려 신음하면서도 쇠고기 한 근 사 먹지 못하는 농민이다.
79년도 돼지 난리때는 돼지를 잡아서 경운기에 싣고 동네마다 돌면서 씨돼지 값이라도 건져 보려고 애를 태웠지만 지금 소난리는 속수무책이다. 그저 답답한 것은 붙들고 있어야 할지 내다 팔아야 할지 그것 뿐이다.
“병든 고추에다가 마이신을 뿌렸더니 살아났드랴, 한벌리서도 그랬댜.” 옥수수를 한 입 베어물고 우물거리던 용근네는 정신이 번쩍드는 모양이다. 탄저병 소독약을 사흘 도리로 뿌려도 약물이 효과가 없다. 이제 한창 수확을 볼 철인데 애간장이 타들어간다.
“무슨 마이신이랴? 그럼 얼매치를 사야 다 뿌리남?” “그 돈두 수월찮어, 그래도 봄부터 나댄 생각하면 어쩌겠어.” 난이 엄마다. 백번 잔손질이 가야 건고추를 만져보는 고추농사, 마을 여자치고 손 반반한 사람이 없다. 독한 고추에 절고 소독약에 절어서다. 이렇게 농사지어 놓으면 관광 고추다 해서 버스타고 온 서울 귀부인네들, 집집마다 돌면서 하는 말이 비싸도 좋으니 최상품 달래 놓고 아등바등 깎아 내리는 값에 그저 아득할 지경이다.
“에또 여러분들, 고단하실텐데 나와주셔서 감사합니다. 인자는 힘든 일 있거덩 이 젊은이들 데려다 시키세요. 에또 내일은 우리마을 공동방제 합니다. 경운기가 모조리 동원되고 반끼리 합쳐서 도열병은 싹 몰아 내야 합니다”
아까만 해도 되돌아 왔다고 수근 대던 이들도 당장 내일부터 동네 일이 수월할 것이 분명해지자 느긋해지는 모양이다. “ 그려, 그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지 사는겨, 잘해 보자고, 고추농사 한 해만 잘하면 월급쟁이 월급에 대어?”
회관을 나서자 밤이 이슥한데도 집집마다 대청에 불이 환하다. 봉당에 피워 놓은 모깃불도 잦아들었다. 오는 따 들인 고추를 선별하는 작업이다.
도시 사람들이나 정치하는 사람들이 고단한 잠을 미어내며 한 개 한 개 들여다보고 좋은 것 나쁜 것을 가려내는 구부정한 저 어깨를 바라보면 그렇게 쉽게 농사꾼을 생각하지는 않을 것이다.
(서울신문 85. 9. 8)
67. 고향의 목소리
날씨가 무더워 지면서 여름 휴가를 생각한다. 숨막히게 죄어오는 도시생활의 톱니에서 벗어나 대자연을 찾아 피로를 씻는 것은 휴가의 가장 큰 매력이다. 그런데 휴가를 인산인해를 이루는 해수욕장이나 명산 사찰을 찾아가야만 하는지, 좀더 실리적이고 유용한 휴가를 보낼 방도는 없을까.
많은 사람들이 농촌에서 태어나고 성장했으면서 본의 아니게 고향을 떠나와 이산(離散)의 그리움을 갖고 살고 있다. 이러한 기회에 고향 품에 안겨 노부모님 곁에서 같이 밭을 매고 고추를 따며 도란도란 대화를 나눌 때 어버이는 큰 위안을 받을 것이요, 자녀들은 부모님의 노고에 더욱 감사하게 될 것이다.
일가 친척이며 이웃들과 소원(疎遠) 했던 정을 도탑게 하고 시멘트 상자 속에서 하얀 얼굴로 커가는 어린이들에게 산과 들을 누비며 마음껏 뛰어 노는 가운데 자연의 아이들로 돌아가 착한 인성이 싹트고 생명의 외경을 배우게 함도 어떤 지적(知的)학습보다 풍부한 삶의 체험이 될 것이다.
모두가 고향이 변했다고 한다. 당연한 사실이다. 그러나 모두가 변했다 해도 변하지 못하는 것이 하나 있다. 자식을 생각하는 부모의 마음이다. 부모 마음이 흙의 마음이자 고향 마음인 것을 왜 모르는가. 많은 흙의 자손들이 고향을 잊지않고 염려하고 사랑할 때 농촌은 헐벗지 않고 건재할 수 있을 것이다.
휴가가 자기를 만나러 가는 귀중한 기회라 할 때, 담담한 마음으로 온 가족이 고향을 찾아가 손 시린 우물물에 목축이고 그 동안 잊었던 흙의 마음을 안아 보면 풀 때묻은 손끝에서 알알이 성숙해가는 우리들 고향의 목소리를 듣게 될 것이다.
‘너는 흙에서 왔으니 흙으로 돌아가리라’ 는.
68. 되돌아 온 젊은이들
그 날 따라 온 마을이 마늘 캐는 일로 부산하였다. 중부지방에도 곧 장마가 오리라는 일기예보가 있어서다. 오전에는 행개울 할머니네 마늘을 캐었다. 이백 여접을 수확하여 밭에서 장사꾼에게 넘겨 백만원의 수입을 올렸다. 조씨댁에는 백 여 접을 수확해서 추녀 밑에 주렁주렁 달아 매었다. 좀 기다려 보기 위해서다. 고추 밭 소독을 하느라고 짬을 낼 수 없어서 우리도 오늘서야 밭으로 갔다.
지난 가을 씨마늘 예닐곱접을 언덕밭에 심었다. 싹이 실하게 자라 갔다. 마늘은 금비를 싫어 한다. 그래서 두엄을 두둑이 넣는 덕에 비가 한줄금 내린 뒤면 너울너울 그 모습이 푼푼했다. 결실기에 들어 때 아닌 재앙으로 물 한 모금 얻어먹지 못하고 고전을 하고 있다. 경운기로 냇물을 퍼 올려 해갈해 주었는데도 웬지 가뭄은 더 탓다.
밭골을 들어서자 심란했다. 도무지 마늘 밭 꼴이 말이 아니었다. 기운없이 호미질을 하는데 이게 웬일인가. 딱딱하게 굳은 땅 속에서 알토란 같은 놈이 쏘옥쏘옥 빠져 나왔다. 신기롭고 대견했다. 간혹가다 곤자리가 먹어치운 자리는 흔적도 없이 비어 있다.도둑 맞은 기분이다.
첫째둑을 다 캐고 돌아다 보니 무더기 무더기 마늘덤이 대견스럽다. 땔 나무로 아궁이에도 들어가지 못할 시시꺼벙한 마늘대 밑에 주먹 같은 마늘통이 어떻게 영글었을까. 온갖 시련 속에 숨 넘어 가면서도 아무 원망없이 제 생명의 몫을 다 하는 작물들의 모습을 보고 있으면 쉽게 판단하고 쉽게 절망하는 인간들의 우매가 가소로와 진다.
그때 뒷산 참나무 꼭대기에 매어 단 확성기에서 이장님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 에, 반가운 소식입니다. 서울로 떠났던 젊은이들이 돌아 왔습니다. 에, 저녁 잡숫고 새마을 회관으로 나오십시오. 에,L” 미경이네 삼촌과 철순네 아재는 우리 마을이 아끼는 젊은이들이다. 양돈으로, 비육우로 성공해 보겠다고 열심히 일했으나 어느것 하나도 그들이 수고한 대가를 얻지 못했다. 그들이 고향을 떠나던 날 우리는 서로가 목이 메어 말을 못하고 그저 손만 흔들었다. 착실한 젊은 이들이 그들의 꿈을 실현 시킬 여건을 만들어 주지 못했다는데서 우리 어른들은 더욱 부끄럽고 미안스러웠다. 그리고 그들이 남기고 간 빈자리가 온 마을을 텅 비게 했다.
해가 서산마루에 걸칠 때 마늘을 다 캤다. 헛간이 그득 했다. 나는 마음속에 마늘을 몫몫이 나누어 두었다. 객지에 나가 사는 일가 친척, 그 끈끈한 끄나풀을 위해 고향 마음을 묶어 보내기 위해서다. 젊은이들이 돌아온 것도 이런 마음 때문이리라.
땀 흘려 가꾼 정직한 수확의 기쁨을 안 이들은 도시 어디에서도 그 기쁨을 찾기 힘들다. 올 가을이나 내년 봄쯤 떠나갔던 영숙이네, 최씨네, 헌용이네 모두 돌아 오리라는 소식이다. 종종걸음으로 저녁을 짓다가 마을을 내려다 보니 죽은 듯 고요했던 마을이 생기가 돌고 고샅길이 환해 지는 느낌이다.
(서울신문 85. 8. 4)
69. 반짝 관심
생각해 보면 우리나라 만큼 ㅇㅇ주간이나 ㅇㅇ캠페인을 좋아하는 나라도 드물 것이다. 각 백화점에서 바겐세일 하듯. 그래 그런지 모든 일이 반짝 관심일 뿐 지속성 있게 지켜지는 것이 없다.
교통질서 확립 기간에는 거리의 질서가 서구의 어느 도시를 능가하리 만큼 잘 지켜지다가 그 기간이 지나고 단속하는 교통순경이 잘 보이지 않으면 언제 그런 것 했느냐 싶게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어디 이뿐인가. 자연 보호 캠페인이 그렇고, 혼식장려가 그렇고, 독서주간 청소년주간이 그렇다.
요즘 관광철을 맞아서 명승고적으로 몰리는 관광객이 자연을 훼손시키고 오염시킨다는 보도를 종종 듣고 있다. 이상한 일은 관광주간이나 캠페인이 없는데도 제철이 되면 자연 발생적으로 붐을 이루는 일이다. 생각해보면 누가 시켜서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오래인 피압박 민족으로의 지긋지긋한 한이 남아서 이제는 묶어 두는 일 제지하는 일을 의식적으로 도리질 해 온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당국은 거창하게 구호를 먼저 내 걸고 무턱대고 끌어 당기기만 할 것이 아니라 문화시민의 지성과 애국심에 호소할 일이다.
오순도순 모여 앉은 반상회의 자리나 직장의 모임에서부터 출발하여 발전시켜 나간다면 그렇게 반짝 관심으로 끝나는 일은 없지 않을까. 앞으로 다가올 우리 민족의 거사 86 아시안 게임, 88 서울 올림픽 준비로 모두가 들떠 있다. 국민 학생들에게 갑자기 영어를 가르치는 일부터, 체육관이며 경기장을 신설하고 관광시설을 대폭 개선하고 질서의식을 고취시키고 나무를 옮겨 심고L. 모두가 마땅히 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지나치게 서두르다 보면 내용이 엉성해지고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을까. 급하게 먹는 밥 체하기 쉽다는 속담을 생각해 본다.
우리는 너무나 서둘러 왔다. 도시계획이 그렇고, 철도 공사가 그렇다. 많은 국고를 들여 지었다 헐었다 하다 보니 경제적 시간적 낭비가 컸다고 본다. 농부가 나무 한 그루를 심는데도 10년을 내다보고 심거늘 하물며 한 국가의 일에서랴. 역사적인 긴 안목을 가지고 이성적으로 고찰하고 알찬 내용으로 준비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이제는 ‘반짝관심’ 에서 벗어 날 때이다. 언제까지나 수동적인 태도로 끌려갈 것이 아니라 국민 스스로가 솔선하여 참여하고 지키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우리를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할 일들을 언제까지나 강조주간에 맡겨야만 할 것인가.
이제 우리는 선진국의 문화시민이 되기 위해 가슴으로, 온몸으로 애국을 실천할 때이다 피고 또 피는 무궁화의 끈기와 열성으로.
(충청일보 칼럼 82. 4. 20)
70. 서울 나들이
충청도 시골에 살고 있는 우리는 가끔씩 서울나들이를 한다. 서울에서 생활하고 계시는 부모님을 뵙고 또 아이들을 만나기 위해서다. 모처럼 가는 길이니 으레 올망졸망 보따리를 거느리고 가야 하기 때문에 싸움터에 나가는 비장한 각오로 서울행 직행버스에 오른다.
며칠 전부터 들기름 참기름을 짜고 콩이며 팥이며 골고루 챙겨 들다 보면 보따리는 서너개가 넘게 마련이다. 그러나 서울 마장동 시외버스터미널이 가까워 오면 언제나 걱정과 실망이 먼저 온다. 그 많은 시외버스가 수없이 들며 나는 그곳에는 어찌 된 셈인지 아직까지 택시 승차장이 없다. 또 이상한 것은 빈 택시일 망정 짐이 있는 승객은 태워주지를 않는다는 사실이다.
손가방 하나 달랑달랑 든 신사 숙녀분은 잘도 타고 가는데 자식들에게 주려고 뼈빠지게 일해서 머리에 이고 들고 늘어선 촌로들이나 아주머니들은 부지하세월이다. 어디 이런 일이 마장동 터미널 뿐인가. 서울천지 택시 타는 곳 어디고 보따리를 든 시골사람은 귀찮은 존재다. 대부분 기사 양반들은 못 본 척 그냥 지나치기가 예사고 어쩌다 태워주기라도 하면 짐을 들고 앉아라, 요금을 더 내라, 재수가 없다는 등 구박이 말이 아니다.
바람이 차고 기온이 영하로 뚝 떨어진 요즘에도 농촌에서는 한가하지가 못하다. 볏짚을 작두로 잘라서 논에 까는 일, 객토를 하는 일, 봄에 심을 고추 온상을 미리미리 손보는 일, 과수전정에 비닐하우스 돌보기 등 어느 한가지 소홀할 수가 없다.
곤두박질 치는 축산물 시세에도, 연거푸 치솟은 사료 값에도, 적정가를 밑도는 농산물 가격에도 이제는 놀랄 여력조차 없어 그저 막막할 뿐이다. 동네 고삿터나 경로당에 두세 사람만 모여 앉아도 무얼해다 먹고 자식들 공부시키느냐는 걱정이 태산이다.
자립, 자조 의식 개혁은 철저히 되었지만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야 현상유지도 어려우니 채무밖에 늘어날 것이 더 있는가. 전기세 기천원을 마련하기 위해 고추 열근을 이고 장에 간다는 이웃들의 이야기는 농촌의 현실 그대로다.
어느 한철 편하게 앉아 볼 수 있는가. 논일 밭일 앞장서야 하고 영농바라지에 집안살림 도맡아야 하는 1인 다역의 농촌 주부들. 자녀들의 학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모처럼 얻은 농한기에도 파출부자리라도 찾아 나서야 겠다는 농촌 어머니들의 모성애가 가슴을 아프게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자식들에게만은 흙두더지 같은 이 삶을 물려주지 않겠노라는 그들의 열망을 누가 탓할 것인가. 이렇듯 현실이 아무리 냉엄해도 우리 다수의 농민들에게는 땅은 우리를 배반하지 않는다는 믿음과 진실이 있다. 세태가 그렇지 조상대대 뼈 묻고 살아온 고향산천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도 천대하지도 않는다는 죽음 같은 신앙이 있다.
장기적인 영농정책은 요원한 것인가. 과잉생산의 조절은 그리도 힘이 드는 것일까. 농한기라도 일할 수 있게 부업을 맡겨줄 기업체는 없는가. 정말이지 이제는 이 헐벗음에서, 이 불안에서 헤어나 안심하고 농사짓는 농부가 되고 싶다. 노력한 만큼의 대가를 보장 받는 농민, 따뜻한 대접 받는 농민이 되고 싶다.
(한국일보 84. 1. 26)
71. 歲 月
세월(歲月)은 두 가지의 얼굴을 가지고 있다. 자라나는 어린이들과 함께 크는 5월의 신록처럼 자르르 윤기가 흘러 대견하고 흐뭇한가 하면 나날이 깊어지는 부모님의 노안에 주름이 지는 세월은 안타깝고 허무하고 야속하기 이를 데 없다.
고우시던 모습이 가을날 고목처럼 쇠잔해가고 평생을 자식을 위해 기꺼이 바쳐오신 사랑과 정성은 메워도 메워지지 않는 우물처럼 아직도 솟아나고 있으나 자식은 품안에 자식, 모두 떠나간 빈자리이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사무쳐지는 불효의 한은 어찌 나 혼자만의 심사랴. 어려서는 철 없어서 불효하고 철들면 가솔거느리랴, 생활에 쫒겨 그럭저럭 보내고 불혹의 나이가 되어 이제는 부모님께 효도하려하나 야속한 세월은 기다리지 않고 떠나가 버린다. 남은 것은 불망(不忘)의 회한, 가슴 저미는 후회 뿐이다. “평생을 고쳐 못 할 일은 이뿐” 이라고 한 선현의 말씀이 진리인 줄도 이제사 느껴옴은 어인 일인지.
자식에게 쏟는 정성과 사랑을 그 절반이라도 부모님께 받친다면 효자라고 했다. 그 만큼 자식에게는 본능적인 애정을 바치나 부모에게는 의무적이기 쉽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사실 엄밀히 생각해 보면 자식은 부모님으로부터 내려진 선물이다. 이 선물이 귀엽고 사랑스러울수록 선물을 주신 어른께 더 큰 존경과 흠모를 바쳐야 하거늘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는 현실이 문제 아닐까?
경제적인 여유가 없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드리지 못한다고 한다. 그것도 큰 이유이다. 그러나 효가 꼭 경제적일 수는 없지 않을까?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관심이다. 따뜻한 눈길이다.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미국의 노부모들이 자살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인정이 메말랐기 때문이다.
그들의 고독은 가정이라는 사랑의 보금자리에서만 치유될 것이기 때문이다. 경로헌장이 생기고 경로 우대증이 생긴다고 노인의 해라고 할 수 있을까? 노인을 모시고 공경하는 일은 자녀가, 사회가 해야 할 문제이다.
인생은 윤회의 연속일진대 오늘의 나는 내일, 그 어느 날의 노인인 것이다. 그러므로 가정은 효의 근본을 본 보이는 가장 좋은 장소가 되어야 할 것이다. ”지금의 노인들이야 말로 부모에게는 절대적인 효를, 자식에게는 절대적인 희생을 바쳤던 그들이 오늘날 공경 받는 노인이 되지 못한 채 외로운 노후를 보내고 있다.” 고 지적한 안인희 교수의 말이 이 시대의 노인들을 대변한 적절한 표현이다.
세월을 어느 누가 잡아 둘 것인가? 부모님을 공경하는 일, 연만하신 분을 찾아 뵙는 일 이것만은 내일을 기약할 수 없는 것, 미루지 말 일이다. 오늘이 마지막이듯 사랑의 정화수 고이 떠 올려 따뜻하고 평온한 일생이 되시도록 최선을 다할 일이다.
(충청일보 칼럼 82. 5. 15)
72. 스물여섯 村婦의 하루
진이 네는 새벽 4시에 일어난다. 다섯 살과 세 살짜리 남매를 둔 어머니며 논밭 3천 여 평을 내외가 농사 짓고 있다. 떨어지지 않는 눈을 비비며 일어나서 네 식구가 후질러 놓은 빨래를 하고 아침을 준비하고 나면 다섯시, 호미를 찾아 들고 밭으로 나선다.
몸살을 끝낸 고추는 땅 내를 맡고 대추씨만한 고추가 달렸다. 아직 손을 보지 못해 풀이 무성한 마늘 밭을 매고 나니 날이 환히 샌다. 서둘러 아침 한술 뜨고 곤히 자고 있는 남매를 깨워 작은 것을 둘러 업는다.
아이는 질색을 하고 등에 업히려 하지 않는다. 이 봄 내내 마을 여기저기 노인들이 계신 집 마당에 내려 놓고 품앗이 일을 다니고 있기 때문에 아이는 벌써 눈치를 채고 엄마를 떨어지지 않으려 한다. 앙앙 울어대는 아가의 울음소리에 발목을 잡히면서도 영식이네 논으로 달려간다. 고추를 심을 때부터 줄곧 이렇게 바장이고 있다.
그나마 서로 품앗이 할 사람이 없는 집은 외래일꾼을 경운기로 모셔와야 한다. 품삯도 더 주고 식사문제도 훨씬 신경을 써야 한다. 그래서 웬만한 집에서는 품앗이로 일을 추어나가는 것이 상책이다. 아이는 할머니의 꽁무니를 따라다니며 저 혼자 논다. 칠십 고령의 노인들도 아이나 보고 있을 계제가 아니다. 젊은이들처럼 들일을 못한다 뿐이지 짐승 거두랴 살림 도우랴 텃밭에 씨 붙이랴 잠시도 짬이 없는 것은 마찬가지다.
다섯 살짜리 또래의 아이들은 모두가 저희들끼리 이리저리 몰려다니며 논다. 군것질도 없어 배가 고프면 들밥 내 가는 꽁무니에 따라가서 한 술 얻어 먹고 만다. 그러다가 졸리면 논둑이나 밭둑 아무데서 쓰러져 낮잠을 잔다. 누가 거두어주지 않아도 그렇게 저들대로 큰다. 그 흔하다는 우유 한 병 못 먹이고 다독이지 못해 얼굴이 노랗게 뜬다고 젊은 엄마는 속을 끓인다.
세살 아가는 이제는 쪼글쪼글 늙으신 노인네만 보면 자지러지게 울어 버린다. 농사짓는 일도 때를 놓치면 어려운데 자식농사 그르칠까 애가 탄다. 유아원이 있지만 멀리 있고 찻길이어서 혼자 보낼 수 없고 어린 것은 받아주지 않는다. 농번기 때 만이라도 마음 놓고 아이를 맡아 줄 탁아소가 있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엊그제 수입자유화 뉴스를 보고 가슴이 철렁 내려 앉는 듯 했다. 수입쇠고기, 수입고추, 수입양파, 어쩌면 그리도 골고루 수입해서 골고루 골탕을 먹이는지 아직도 궁금하기만 하다. 그런 식품 조금 덜 먹기로 생명에 지장은 없을 텐데 지그시 참고 곤궁을 헤져나가는 슬기로움이 아쉽다고. 단무지 하나도 외제것을 사야 직성이 풀리는 외제병에 걸린 이들에게 섭섭한 생각이 든단다.
텔레비전에 비치는 농촌의 모습은 하나 같이 잘 사는 농촌인데 그런 집이 몇 집이나 되느냐고 되묻는다. 이제 스물여섯 젊은 촌부는 마디가 튀어나온 조그만 손으로 논물에 탄 종아리를 문지르며 흙강아지가 된 아이들에게 안타까운 시선을 보낸다.
(서울신문 85. 6. 1)
73. 씨를 뿌리는 마음
햇살 따습고 바람 고요한 날을 가려 농부는 씨를 뿌린다. 마치 임부(姙婦)가 해산할 날을 설레이며 준비하듯이 밭을 일구고 자갈을 골라내고 퇴비를 넣어 차근차근 정성을 다해 한해의 소망을 파종한다.
이렇게 씨 뿌리고 밭둑에 앉으니 봄빛이 더욱 화창하다. 과수원 밭에 지천으로 돋아나는 꽃다지의 여린 잎에도, 우뚝선 과목의 살갗에도 불빛이 머무는 곳엔 환한 생명이 움트고 있다. 봄이 봄다운 것은 공평한 햇살과 무한한 가능의 영토가 준비 되어 있음이다.
지금은 봄, 봄에 종자를 갈지 않으면 가을에 뉘우친다는 주자(朱子)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우리의 삶에는 파종과 성숙과 수확의 계절이 있거늘 서둘러 스스로의 가능의 영토에 바른 뜻을 세워 소신껏 가꿀 일이다.
뿌리지도 않고 거두려 함은 대지(인생)에 대한 모독이며, 가꾸지 않고 좋은 결실을 기대 함은 성실에 대한 기만이다. 한 뼘 땅이나마 가진 것에 만족하며 묵묵히 수고하는 농부가 마음의 평화를 누리고 사는 것은 흙을 믿고 내일을 여는 씨앗을 가꾸기 때문이지만 많이 소유하고서도 기쁨 없이 사는 것은 마음밭을 갈지 않고 손보지 않은 탐욕의 씨 때문이다. 로버트 프로스트는 “ 일 때문에 죽는 사람보다 걱정 때문에 죽는 사람이 더 많은 것은 일하는 사람보다 걱정하는 사람이 더 많은 탓”이라고 했다. 들꽃은 내일을 염려하지 않고 단 한 벌의 옷으로 완전한 아름다움을 피워낸다.
찬란한 이 봄에 우리는 서로의 가슴에 뿌리가 실한 믿음의 씨앗을 뿌려 보자. 번식이 강한 사랑의 씨앗도 뿌려보자. 그리고 나서 진인사대천명(盡人事待天命). 기다려 보자.
(농민신문 청담칼럼 84. 4. 21)
74. 씨오쟁이
옛말에 ‘남이 장에 간다니까 씨오쟁이 짊어지고 따라 나선다’는 말이 있다. 직설하자면 주체성 없는 행동을 두고 하는 비유이다.
이 말이 실감 났던 때가 있다. 79년도 ‘돼지파동’이다. 톡톡히 재미본다는 말에 너도나도 할 것 없이 빚을 내다 축사를 짓고 종돈장을 뒤져 씨돼지 사기에 혈안이 되었다. 온 마을이 돼지 없는 집이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인간의 심사가 요사스럽다고 한 것일까.
과수원 경영자들 까지 대를 이어온 성목(成木)을 캐내고 돼지를 쳤다. 새끼돼지가 마리당 5만원을 홋가 했으니 어미돼지 10마리만 있으면 팔짜까지 고치게 된다고 흥분 했다. 그러다가 한 달이 채 못 가서 돼지 시세는 곤두박질을 쳤고 양돈가는 깨끗이 거덜이 났다.
그 후유증이 발생한데 한바탕 마늘 소동이 났다. 밭에도 마늘, 논에도 마늘, 토질을 살펴 볼 겨를 없이, 판로는 염두에 없이 남이 하니까 재미 본다니까 달려든 것이다. 결과는 보나마나 생산비와 종자대는 오리무중이었다. 이렇게 무서운 시련을 겪은 뒤 좀 잔잔한가 싶더니 근년에 와서는 과수원이 위기다. 부란병에 죽고 생산비 건지기도 힘든 상태에서 노동력이 부족한 것도 큰 원인이지만 지난날의 교훈을 잊어서야 될까?
작년부터 사과나무를 캐기 시작하자 너도나도 다 캐내고 그 자리에 고추를 심었다. 과잉생산, 어쩔 것인가. 누구를 탓할 것인가. 매스콤을 통해서 아파트다 투기다. 골동품 투기다. 요즈음은 사슴피까지 투기의 대상이 된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어왔다.
그렇다고 농심(農心)에 사는 농촌에서까지 그 회오리 바람에 함께 쏠려야 하는가. 농민이 어떤 분야보다 푸대접 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렇다고 천심(天心)을 거슬리며 횡재의 꿈에 편승한다면 불행을 자초하는 일일 뿐이다.
농업협동조합이 잘 발달된 나라가 과잉생산일 경우 모두 수매해서 농산물 가격 하락을 마고 농민을 보호하는 신축성있는 운영을 하고 있는 것은 얼마나 부러운 일인가. 금년부터 당국은 계약재배의 길을 터서 농민의 생산의욕을 고취시키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앞에서 이끄는 정책에 순응하며 내 가정 우리고장 토질에 맞는 농작물을 연구 개발하여 최선을 다해 나갈 일이다. 그러자면 교육을 받은 젊은 두뇌가 농촌을 지키고 연구하고 개선 발전시켜야 할 것이다.
농촌 청소년이 농촌이 싫다고 무작정 상경대열에 나선다면 농촌은 더욱 더 빈곤해질 것은 자명한 일이다. 이제는 내 생각으로 내 두 다리로 굳세게 설 때다. 흙은 가장 정직하고 근면한 사람만을 사랑하고 지켜준다. 이 말은 흙속에 사는 나 스스로를 추스리기 위해 늘 생각하는 말이다.
(충청일보 칼럼 82. 3. 13)
75. 씨줄과 날줄
우리네 인생이 한 필의 명주라면 혈연은 씨줄이요, 벗과 이웃은 날줄. 이 두 줄이 쫌쫌이 싸여져 포근하고 윤택한 생활이 직조 되는 것.
내게는 생울타리 같은 친구들이 있다. 사철을 시들 줄 모르고 요란하지 않게 야트막한 울을 두르고 마주서서 바라보는 그런 친구들, 가지를 뻗거나 눈짓을 하지 않아도 거기 서 있는 것 만으로도 방풍이 되고 위로가 되는 미더운 친구들.
그런데 세상에는 쾌락이나 이익, 공사의 필요에 의하여 만들어져 키워 올린 교제의 우정도 있는 모양이다. 이러한 우정에는 곧잘 모반과 이기심으로 금이 가고 상처를 입는 수도 허다하다. “말 없이도 우정 속에는 모든 생각 일체의 욕망, 온갖 기대가 요구하지 않아도 기쁨과 더불어 태어나고 나누어지는 것” 이라고 한 칼릴 지부란의 말을 빌리지 않더라도 사심이 없어야 하는 것이다.
신문이나 잡지만 보면 내 이름 석자부터 찾는다는 친구, 신문에 난 못생긴 내 얼굴을 보고 밤새도록 기뻐서 잠을 설쳤다는 친구, 먼발치서 지켜보고 내가 지쳐 나른해 지면 넌지시 눈길을 보내는 그들.
나는 글을 쓸 때마다 적어도 친구들의 기대와 우정에 실망마은 주지 않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한다. 사랑의 빚을 지고 사는 동안 내 삶은 아름답고 정교한 한 필의 명주가 될 것이다.
또한 내게는 수수한 들꽃처럼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있다. 세상에 번쩍번쩍 빛나지는 못하고 살지라도 가난한 이웃과 병든 자매들을 위해 시간과 사랑을 나눌 줄 알고 자기를 비워내 보이지 않는 사회 구석구석을 봉사의 손길로 어루만지는 제자들, 때묻지 않고 보통의 인간으로 주어진 삶을 성실히 가꾸는 그들.
들의 잡초처럼 사는 부족한 스승을 자랑으로 알아 흠모와 애정을 바치는 그들이 있어 내 뜰은 항상 생기에 차고 황혼 길은 외롭지 않은 것이다. 요즘 세상에 교사와 학생은 있어도 스승과 제자는 없다고 비관하는 사람도 있지만 나는 도리질 한다.
시골에 파 묻혀 사는 내게 사철 없이 찾아오는 수 많은 제자들. 언뜻 지나가 버린 국민학교 때의 기억을 소중히 간직하고 바쁜 시간을 쪼개어 먼 길을 찾아 드는 그들 앞에 내가 살아온 지난 날이 결코 헛된 시간이 아니었음을 감지하고 콧날이 찡하니 감격한다.
명주 한 필을 짜는 것이 내 인생일진대 지금까지는 좋은 실을 가지고도 누더기를 짜 왔으나 이제는 차분하게 사랑과 믿음과 소망으로 마무리 해야 할 것임을 다짐한다.
생울타리 같은 친구들의 기대와 가슴에 키우는 소중한 나무, 사랑하는 제자들의 무언의 격려 속에 소박하고 진실된 삶의 비단을 짜야 하리라.
(충청일보 칼럼 82. 5. 26)
76. 애타는 父情
영식이 아버지는 젊은 시절 남의 집 살이로 보냈다. 탯줄처럼 감고 나온 가난, 그것으로 해서 얼마나 많은 육신 고생, 마음 고생을 했는가. 그래서 죽도록 일을 했다.
땅마지기라도 내 것을 갖기 위해, 오 남매 자식들 훌륭히 가르치기 위해서 언제 하루 편히 쉬어 볼 날이 있었던가. 그 덕에 지금은 먹고 살만 해졌다. 자식들도 애비 뜻대로 공부를 잘해줘서 고등학교 대학교에 갔다.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겼던 땅뛔기를 팔아가면서 자식하나는 대학공부를 시키고 있다.
작년 봄 녀석이 대학교 합격통지서를 갖고 오던 날 동네 사람들에게 자랑하다 못해 그 감격이 하도 벅차서 외양간에 있는 황소에게까지 자랑을 한 이서방이다. 아들녀석 늠름이 커 가는 것, 그것들 성공하는 것이 애비의 낙이었다. 환갑이 가까워 오도록 생 일을 장정만큼 해낼 수 있는 것도 다 그 기쁨 덕이었다.
그러나 올들어 그 꿈이 자꾸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어제 저녁나절 소 꼴을 한짐 잔뜩 베어 가지고 미역바우 하천 둑에 올라서니 숨이 턱에까지 가빠왔다. 다리가 후둘 후둘 떨리고 눈 앞이 노랗게 얼룩졌다. 현기증이었다. 아직은 쉬어야 할 때가 아닌데 옆구리가 쑤셨다. 새마을 회관 앞을 지나려니 누군가 불렀다.
“이서방 아녀? 좀 쉬었다 가지.” 임서방, 최서방, 순우 아버지, 여럿이 담배를 피우며 앉아 있다. 그들도 들에서 돌아오다 쉬는 모양이다. “영식이 한테는 무슨 소식이라도 있는 겨?” “학근이 한테서는?” “큰일났어, 큰일. 이놈들 부모 피땀 짜내다가 공부한답시고 대학 간 놈들이 공부는 안하고 밤낮 데모만 하고 있으니 쯧쯧.” “글씨 말여, 지놈들 믿고 사는 우리 말짱 헷 고상 하는겨. 호의 호식 한번 못 해보고 일벌레로 살었는데 한심햐. 자꾸 억울하다는 생각여.” 꼴짐을 받쳐 놓고 담배 한 개비를 피워 물었다. 입안이 소태처럼 쓰다.
그전과 달리 농촌에도 교육열이 높아져서 몇 집 건너 한 사람 꼴 대학생이다. 빚을 내어서라도 공부는 시켜야 한다고 발벗고 나서는 부모들이다. 그러자니 농사비용보다 더 앞서는 것이 교육비다. 서울이나 타 지방으로 보내는 대학이어서 등록금 외에 하숙비며 책값 용돈까지 합치면 그야말로 피가 마를 지경이다.
그렇게 큰 희생을 지불 받고 공부하는 학생들이 정신 못 차리고 천방지축 날뛰고 있다니. 이서방은 통곡이 나올 것 같아서 끙하고 꼴짐을 짊어졌다. ‘우리 영식이는 그런 놈이 아녀, 내가 알지, 우리가 저를 얼마나 믿고 있는데L.’ 그렇게 스스로에게 타이르면서도 다리에 힘은 왜 자꾸 빠지고 있는가.
빚을 져서라도 대학을 마치면 우리집 우리 마을은 물론 이 사회에 커다란 등불이 될 거라는 간절한 소망, 이것이 어찌 이서방만의 소원이겠는가. “고얀 놈, 내가 생일꾼으로 밭을 갈아 농사지어 학비 대주면 지들은 부지런히 마음 밭을 갈아서 어엿한 재목이 되어야 하거늘L. 이녀석들 이러다간 큰일 저지를 녀석들 아닌가.”
간신히 꼴짐을 부리고 담배 한대를 피워 문 이서방은 내일은 만사 제쳐 놓고 이놈을 만나서 담판을 지으리라 다짐하는 것이다.
(서울신문 85. 7. 21)
77. 외로운 文化財
국보(國寶)란 나라의 보배요, 세계 문화사의 처지에서 보아 중요한 문화재중에서 특히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 미술적으로 뛰어난 것, 문화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으로서 문화공보부장관이 지정한 건조물 조각 공예품 고문서 서적 회화 따위이며 국보로 지정된 물건의 소유권은 여러가지 제한을 받으며 법률로 특별한 보호를 하도록 되어있다.
특별한 법적 보호를 받아야 하는 국보가 고즈넉한 달래강가에 무명의 ㅏ탑처럼 서있는 것을 보았다. 이르하여 7층석탑(중앙탑) 그 옆에 국보 6호라는 하얀 푯말이 생경하다.
현존하는 신라 석탑 중 가장 높은 것으로 이중기단 위에 7층의 탑신과 옥개석이 조화 있게 중첩되어 정상에는 소발 복발 양화가 받쳐져 있었다. 거긴 포장된 도로도 정성 들여 가꾼 수목도 애정을 가지고 관리하는 관리인도 아무도 없었다. 방치하다시피한 곳에 어쩌다 찾아 오는 관광객의 뜨악한 발길만이 국보의 존재함을 일깨워 주는 듯 하다.
청자 빛 하늘을 이고 묵묵히 서있는 외로운 탑신을 바라보며 서울 우리나라 문화재의 제 1호인 남대문(숭례문)의 고색 찬연한 단청 빛이 오버랩 되었다. 또한 제 2호인 탑골공원(파고다공원)에 있는 원각사의 다층 석탑의 위용과 잘 다듬어져 보존된 분위기가 상기 되었다.
도시가 문화재를 만드는 것일까, 아니면 문화재가 도시를 만드는 것일까. 어느 곳에 가든지 탑이 있는 곳엔 절이 있고 절이 있는 곳에 탑이 있어 왔다. 그렇다면 중앙탑이 있는 중원(中原)은 많은 역사적 유물이 사장되어 있을 것이다 지금은 평범한 촌가의 모습이 자리 했지만 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면 반듯이 이곳에 중앙탑에 버금가는 사찰이 있었을 것이라는 상상은 나만의 비약일까.
찬란한 문화유적을 찾아 잘 보존시키고 연구 계승하는 것이 우리의 뿌리,우리의 얼을 지키는 일일 것이다. 지방오지 한구석에 있다 해서 그것이 어찌 국보가 아니겠는가. 중앙탑이야 말로 학술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문화적 의의를 충분히 지니고 있는 우리의 정신적인 유산이다.
우리나라는 5천년의 찬란한 문화를 가진 복된 민족이다. 방방곡곡에 산재해 있는 값진 문화재가 무관심 속에 손실되고 파괴되는 역사적인 우매를 범하지 않나 생각해야 한다. 또한 호구지책이 어려운 인간 문화재는 없는지 철저한 관심과 애착으로 보존해야 하리라. 중국의 진나라가 뿌리째 멸망한 까닭은 그 나라에 정신적인 문화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공감이 가는 말이다. 외국 관광객이 수 만리 먼 이역 동방의 작은 나라를 찾아오는 것은 산수경치가 아름다움도 있지만 더 큰 이유는 유구한 역사 찬란한 문화유산의 발자취를 더듬기 위한임을 알아야 한다.
이곳에 조촐한 공원이라도 가꾸어 진다면 금이 가고 외로운 중앙탑은 탄금대의 가야금 소리를 들으며 수 천년을 더 건재하리라.
(충청일보 칼럼 82. 4. 15)
78. 人 生 等 數
지난 일주일은 가는 곳마다 점수 타령이었다. 자모 두셋이 앉은 자리나 교사들 서너 명이 모인 자리나 예외 없이 점수 노이로제에 걸린 것을 보고 많은 것을 느끼게 했다. 시기가 마침 학년 말이었기 때문에 계절병처럼 지나가는 정도로 보아 넘기기에는 심각성이 깊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에서는 지식만이 최고인양 의식이 바뀌어 가고 있다. 과연 지식만이 전부인가. 자문해보면 아니다. 분명 아니다. 지식보다 우선되어야 할 것은 착한 감성이다. 가정은 가정대로, 학교는 학교대로, 사회는 사회대로 지식의 아집에서 벗어나야 한다.
인간다운 인간의 바탕이 갖추어진 상태에서 올바른 지식이 주입되어야 바른 인격을 형성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마치 통신표에 기재된 성적표가 그 아이의 일생을 좌우 할 듯 집착한 나머지 새순처럼 돋아나는 자녀의 심성을 짓 밟아서는 안되겠다. 숫자로 표기되는 점수나 등수가 그 아이의 일생의 등수가 절대 아니다.
그보다는 변화무쌍한 행동발달 상황에 애정어린 세심한 관심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보다 중요한 교육은 가정 교육이다. 학교가 지식을 터득하는 교육 장이라면 가정은 지혜를 배우는 또 하나의 학교이다. 부모가 보이는 제반 행동은 무언의 교육으로써 자녀의 일생을 통해 가장 오래 기억되는 영향력을 지녔다고 한다.
세계적인 물리학자 아인슈타인은 말을 잘 못하고 학교 성적도 최하위인 열등아였다. 그러나 아들의 장점을 발견하고 자신과 용기를 잃지 않도록 격려한 어머니의 사랑과 가정교육, 그리고 개성을 존중하고 그것을 최대한으로 길러주시는 부모의 태도가 세계적인 학자로 키운 원동력이었음을 우리는 주시해야 할 것이다.
한가지 더 생각해 볼 일은 교육 행정면이다. 교사들은 교사대로 자신의 근무평점에 전전긍긍하여 동료 교사간에 불신이 싹트고 신성한 교단에 권모술수가 따른다니 재고해 볼 여지가 크다고 본다. 한 나라의 장래는 교육에 달려 있음은 극명한 사실이다. 교사는 교사의 긍지를 가지고 일체의 잡념이나 걱정없이 오직 제2세의 교육에 전념하고 학생은 점수 벌레 아닌 자연의 아이들로 활발하게 커가는 그런 사회, 교육 풍토는 요원한가.
모름지기 우리는 영악한 아이로 키우기보다는 착하고 성실한 아이로 키우기에 힘쓸 일이다. 성실을 뿌리로 한 나무에는 많은 가능의 열매가 맺히기 때문이다.
(충청일보 칼럼 82. 3. 31)
79. 일하며 생각하며
나는 흙 내음이 좋아서 농촌에 산다. 값도 안 나가는 토종사과를 가꾸며 이웃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자연의 아낙으로 살며 글을 쓴다.
어떤 이는 이런 나를 신선이라 부러워하고 어떤 이는 못난이라 비양을 한다. 부러워 하는 사람들은 시멘트 정글속에 갇혀 마음의 고향인 흙을 그리며 사는 도시인들이고 후자는 도시로만 나가면 뼈 빠지게 일 안하고 편히 살 수 있다고 그곳을 동경하는 가난하고 순박한 내 이웃들이다.
나는 그 틈에서 머리는 사람이고 꼬리는 물고기인 인어 아가씨오 흡사한 아픔을 느낄 때가 많다. 사실 나는 먹지 않고 사는 신선도 아니고 생각조차 없는 못난이가 아니기 때문이다.
올 가을은 예년에 없이 농산물마다 풍년이었다. 채소, 과일, 고추, 벼농사도 대풍이라지만 풍년속에 찌들어 가는 농민의 빈혈은 누가 짚어줄 것인지. 김장시장에서 바구니마다 싼값에 장보기를 한 주부들이 행복한 얼굴로 돌아가는데 따라서 즐겁지 못함은 어인 일인가.
무우 몇 단을 앞에 놓고 앉은 촌로의 주름진 얼굴이 지워지지 않아서 일까. 내일의 농어촌 후계자의 양성도 시급한 일이지만 당면하고 있는 농촌의 어려움을 해결해 줄 방도는 없는 걸까.
하필이면 농산물만 ‘반자리 숫자’에 머물러야 하는지. 농가마다 무리를 해서 구입한 농기계는 좀더 내실을 기하여 해마다 부품 고장으로 겪는 경제적 시간적 낭비를 줄일 수 없을까.
의료 보험도 그렇다. 가난하고 현금 없는 농민들은 엄청난 의료비에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죽어가는 불행을 수없이 당하면서도 아무도 원망할 줄 모른다. 이러한 농민들에게 의료시혜를 베풀 날은 아직더 요원한가.
연말이 가까워지면 농민들은 농협 채무로 혹한보다 더 무서운 마음의 추위에 떤다. 과감한 정책으로 농민들이 발 붙이고 살 여건이 마련 된다면 따로 떼어서 후계자를 양성하지 않아도 고향에 머물러 젊음을 사를 인재는 많아질 것이다.
지난 가을 풍요로운 사과 밭에 친구들이 찾아왔다. 아름다운 자연에 매료된 친구들은 저마다 환성을 지르며 내가 사는 삶이 부럽다고 야단이었다. 나는 그들 속에서 아무도 모를 나만의 눈물겨운 기쁨을 간직 했다.
내 기쁨은 손가락 마디마디 흙에 절인 노동과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밤 잠을 못자는 걱정과 힘겨운 가지를 받쳐주는 세심한 애정이 한데 어우러진 소중한 기쁨이다. 더러는 세상사 심기가 편치 않으면 시골 가서 농사나 지으며 살리라는 이야기를 한다. 반가운 말씀이다.
그래서 대지는 우리들의 영원한 고향이라 하지 않던가. 다만 잠깐 쉬었다가 떠나가는 간이역이 아니라 흙을 사랑하고 그 흙 속에 땀과 노력의 뿌리를 함께 내려 결실을 얻는 종착지로서 선택되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농사를 짓고 살면서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파 한 뿌리. 과일 한 개에 농부들의 수고가 담겼듯이 성냥 한 개비, 생선 한 토막에도 누군가의 수고가 있다는 생각, 그러고 보면 우리들의 일상 생활에는 감사하지 않을 것이 하나도 없다. 누구라도 다 사랑하는 마음, 이것이 우리 조상들이 살아온 농심의 씨앗이고 열매인 것이다.
창문을 연다. 눈길닿는 곳마다 과수원은 허허롭다. 무성한 나뭇잎도 달콤한 열매도 모두 돌려주고 나무는 처절한 자태로 겨울 하늘을 우러른다. 앙상한 가지 끝 빨간 사과 서너알이 보인다. 사과를 따는 마을 아낙네들은 해마다 여기저기 까치밥을 남겨둔다.
텅 빈 잿빛 겨울 과수원에 덩그마니 매달린 까치밥은 정겨운 기쁨이고 반가움이다. 나는 여기에 토종 사과와 살면서 까치밥을 남겨두는 넉넉한 마음으로 글을 쓰리라.
때로는 흙처럼 무던하게, 때로는 푸성귀처럼 풋풋하게 우리의 삶을 가꿔 가노라면 농촌은 멀지 않아 비옥한 안식처가 될 것을 믿기 때문이다.(한국일보 82. 12. 2)
80. 和 音
텃밭에 봄 채소 씨앗을 다독다독 뿌려 놓고 밭둑에 앉으니 햇살이 눈부시다. 여기저기 검불 속에서 지난 겨울을 이겨낸 잡초들이 다투어 돋아 난다.
봄은 그래서 자애로운 어머니. 꽁꽁 얼어붙은 대지를 따뜻이 녹여 서로 화해의 손을 잡게 한다.
자연의 섭리란 참으로 신비하고 위대하다. 꽃다지는 작은 키를 돋보이려 애쓰지 않는다. 양지쪽 어느 곳이든 조촘조촘 돋아나서 제 나름의 작고 노란 꽃을 피우기에 여념이 없다. 아무도 보아 주는 이 없다고 비탄에 젖거나 좌절하지 않는다.
자족의 슬기로 신의 영광을 찬미 할 뿐. 눈을 돌리면 죽은 척 주눅이 들어있던 냉이가 푸수수 하품을 한다. 얼음 속에 뿌리를 내리고서도 동사(凍死)하지 않는 의지와 인내력을 꽃피울 때를 기다려 온 것이다. 지천으로 자라나서 꽃 피고 열매를 맺을 것이다. 단 한번도 버젓이 서 있는 과일나무를 부러워 하거나 시샘하지 않는다. 내일 비가 올까 바람이 불까 쓸데없이 걱정하지 않는다.
큰 키 나무는 큰키나무대로, 잡초는 잡초끼리 제자리에 서서 절대자의 질서 속에 하나가 된다. 해질녘 사과밭에 서 있어보면 우주는 거대한 관현악단, 거기서 울려 퍼지는 장엄한 교향시는 완전한 화음이다. 곳곳에 피고 지는 어느 한가지 아름답지 않은 것이 있으랴. 베이컨은 말하기를 “지상천국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인간의 마음이 자애롭게 움직이고 하늘의 섭리속에 안주하며 진리의 양극을 축으로 하여 회전 될 때” 라고 했다.
살아가노라면 얼마나 많은 불협화음속에 시달려야 하는가. 불협화음은 자기 자신이 다른 사람보다 월등하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애 쓸 때 커지기 마련인 것, 또한 무례한 강자에 무참히 짓밟히는 약자, 하지만 용서하며 살일이다.
내가 쏜 미움의 화살은 다시 나를 찌르고 사랑의 화살은 무한대로 뻗어가며 신뢰의 기쁨을 확산시킨다. 아웅다웅 불신하고 원망 하다 보면 그 만큼 나 스스로가 먼저 괴로워야 하는 미움의 대가를 치러야 하는 것. 지금은 봄. 만물이 소생하는 싱그러운 대지에 입 맞추고 다정한 눈길을 건넬 때이다.
부자는 가난한 이와, 높은 이는 가장 낮은 자와, 건강한 사람은 병든자에게, 젊은이는 노인들과 이 화창한 봄볕을 나눌 때 우리는 상춘(常春)의 풍토 속에 시들지 않는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 우리에게 참된 평화란 가지고 있는 것에 있지 않고 포기하는데 있음을 봄의 교향시는 일깨워 주고 있다.
(충청일보 무심천 칼럼 82. 4. 8)
81. 책 끝에
나무는 더 이상 벗을 옷이 없을 때 비로소 새잎을 마련하는 것을 알았습니다. 어줍잖게 글을 쓴다는 일이 내게는 삶의 복판을 흐르게 하는 원류이고 옷을 벗는 작업입니다. 한 겹씩 벗어내며 알몸의 진실을 만날 때까지 나의 부끄러움은 더해 갈 것입니다.
반생을 가꾸어온 첫 열매입니다. 변변치 못한 수확이지만 열심히 살고 열심히 가꾼 것만은 확실합니다.
발표했던 글들을 한자리에 모아 놓고 보니 선뜻 용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좁은 울타리 안에서 평범하게 살아 온 흔적이어서 비슷하고 중복된 것도 많은 다듬어지지 않은 흙의 언어 입니다. 그러나 그 동안 내가 만난 자연, 사람들, 그런 인연들의 이야기어서 애착이 가는 것도 사실입니다.
이만큼 걸어 온 고개 마루에서 잠시 멈추어 뒤 돌아 볼 때 후회스러운 점이 많습니다. 비틀거리며 예까지 오는 동안 깊은 애정으로 다독여 주신 여러분께 이 책으로 조금이나마 기쁨을 드렸으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마음과 육신이 고통 중에 있는 고단한 이웃에게 보잘 것 없는 글을 통하여 하느님의 사랑과 희망을 나누고 싶습니다.
살아가는 동안 우리가 만나는 고통이나 시련은 어느 날엔가는 기쁨의 꽃으로 피어난다는 것을 말하고 싶습니다.
‘몸으로 우는 사과나무’라 제목을 삼은 것은 농사를 짓고 과수원을 하며 쓴 글들이 많고 우리의 역사 한구석에서 꽤나 심한 몸살을 앓고 있는 우리의 농민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입니다.
십여년 간 내가 동참했던 농촌의 아픔을 아는 여기에 증언합니다.
책이 나오기까지 격려해 주신 여러 선생님과 표지화를 주신 최종태 교수님, 교음사 강석호 사장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1986년 8월에
潘 淑 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