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써본 유서 / 허정진

아버지 산소에 갔다. 증조부부터 모시는 선산이다. 망자의 정령이 모인 터에도 봄은 오는지 파릇한 생명이 생동 거리며 고개를 들고 있다. 멀리서 해토머리 봄바람이 불어올 때마다 산 아래 산수유 무리부터 입덧을 시작하고 언덕배기 다랑이 밭들도 층층이 겨울잠을 푼다. 겨우내 차디찬 허공을 뛰어다니던 산까치가 미루나무 꼭대기에 밤송이 같은 집을 완공할 채비를 서두르고 있다. 곧 산란이 시작될 모양이다. 희망의 계절이다.

아버지는 죽음에 대해 무척 허망해하셨다. 적지 않게 산 나이였지만 우연히 발견된 병으로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이하는 바람에 상심이 크셨다. 죽음을 반길 사람은 없다. 아버지도 그랬다. 죽음이 무섭다기보다는 이 세상을 더 살고 싶어 했다. 해야 할 일이 태산같이 많이 남았다고 삶에 욕심을 내셨다.

입원하고 있던 어느 날 아침, 상시 하고 있어야 하던 산소마스크를 당신 손으로 갑자기 떼어버린 일이 있었다. 모든 병이 다 나았으니 퇴원해도 좋다고, 전날 밤 꿈에 분명한 신의 음성을 들었다는 것이다. 절망의 늪에서 빠져나온 사람처럼 희망과 기대에 부풀어 순간적으로 환하게 밝아졌던 표정을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얼마나 살고 싶으셨으면 환영이 현실이 되었을까. 사실이 아님을 깨닫고서 며칠 뒤 생명의 끈을 놓으셨다.

죽음은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조금 늦고 빠를 뿐 언젠가는 가야 하는 길이다. 건강관리를 잘하고 안전사고를 조심해서 좀 더 오래 살 수는 있지만 죽지 않기 위해 발버둥 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다. ‘죽음도 삶의 한 과정’이라던 법정 스님의 말처럼 종교도 편안한 죽음을 맞이하기 위한 깨달음의 한 방편일 것이다. 생명에 대한 맹목적인 집착이나 욕망보다는 죽음 앞에 솔직해지고 당당해서, 담담하게 받아들이는 것도 행복의 조건이 아닐까 한다.

흔히 죽음을 이야기하면 재수 없는 소리라고 거부반응부터 보인다. 나이 든 사람들도 아직 먼 뒷날의 이야기라고 밀쳐놓고, 젊은 사람들은 자기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듯 생뚱맞다는 표정을 짓는다. 맞는 말이다. 죽음이 반갑거나 듣기 좋은 말은 아니다. 하지만 터부시한다고 일어나지 않는 일도 아니다. 사건·사고는 예고도 없이 언제 어디서나, 남녀노소 구분도 없이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다. 불행은 남들에게만 있으라는 법은 더더욱 없다. 알고 보면 삶과 죽음은 서로 동떨어진 무엇이 아니라 빛과 그림자처럼 서로의 이면일 뿐이었다. 클림트의 <죽음과 삶> 그림에서 보듯 죽음은 삶의 바로 옆에 서 있는 것이 아닐까 한다.

아버지는 죽음을 통고받고 한 달을 넘기지 못하셨다. 정신은 온전하셔서 사후 뒤처리와 유언도 하셨고, 가까운 지인이나 친인척과도 문병을 겸한 마지막 인사도 나누었다. 죽음이 예정되어 있었기에 사후 과정을 준비할 수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내가 갑자기 세상에서 없어진다면?

나이도 들고, 예상치 못했던 신체 이상징후도 불쑥불쑥 나타나니까 가끔 그런 생각이 든다. 헛헛하고 씁쓸한 마음이 앞선다. 새처럼 허공에 발자국도 남기지 않으면 좋으련만, 이렇게 저렇게 떠나는 나의 뒷모습은 어떠할까. 그래도 현실이라면, 생에 미련은 없다고 해도 사후 바람은 있을 것 같다.

사후에 대해 주변 가족과 진지한 논의를 해본 적이 없다. 나의 의도를 모르는 이상 임의로 뒤처리할 것은 자명한 일이다. 고령이나 질병처럼 자연사라면 사전에 유언 한마디, 어느 정도 삶의 뒷정리도 할 수 있겠지만 교통사고나 심장마비처럼 돌발적인 상황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하니 괜히 조바심이 인다. 죽음을 인정하게 되면 사후 과정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더군다나 요즘은 1인 가구 시대다. 결혼은 안 하고, 이혼은 많고, 수명은 늘어난다. 친척은 없어지고 가족은 무덤덤해졌다. 타인과 어울리는 것보다 혼자서 자기만의 삶을 즐기는 세상이다. 혼밥, 혼술 등 혼자 사는 문화가 일반화되었다. 몸이 아프거나 위급한 일이 생겨도 옆에서 챙겨줄 사람이 없다. 자기 삶에 대한 책임을 오롯이 혼자 짊어지고 가야 한다. 그래도 좋단다. 독립성과 자유를 이유로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주거 공간만 중요시할 뿐이다. 자의든 타의든 나 홀로 가정은 앞으로도 늘어날 것이라고 한다.

나도 혼자 산다. 시골에 멀리 떨어져 있어 들락거리는 사람도 없고, 자식들도 자주 만나기 쉽지 않다. 깊은 산속 외발로 홀로 서 있는 황새와 다름없다. 혼자 살아 외롭거나 불편한 것은 없다. 나의 존재와 정체성을 의식하고 살지만, 그것도 내가 살아있을 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갑자기 정신이 혼미하거나 심한 어지럼증, 심장이라도 은근히 아파져 오는 날이 있으면 덜컥 겁이 난다. 스스로, 또는 주변에서 아직은 젊다고 말하지만 어디까지나 신체적 나이일 뿐이다. 오늘 하루의 결과는 오직 신만 알뿐이다.

유서라는 게 꼭 생을 하직하는 사람만 필요한 게 아닐 것이다. 나를 돌아보고 오늘의 삶에 의미와 가치를 더할 수 있는 계기가 될 수도 있다. 내가 걸어온 길은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의 이유가 된다. 남보다 더 많이 갖고, 남보다 더 잘살아야 한다는 강박관념 때문에 내 삶이 힘들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무엇이 귀하고 중한 것인지, 어떻게 살아야 잘 사는 것인지를 몰라 세상 탓만 하면서 결핍 증세만 느껴오지 않았을까. 나만 올곧은 줄 알고 ‘다름’을 ‘틀림’으로 주장하며 자기중심적이고 자기도취적으로만 살아온 것은 아니었을까. 죽음 앞에서는 살아가며 악착했던 서운함도, 미움도, 그리움도 모두 다 내려놓게 되는 것 같다.

장례는 어떻게 해 달라는지, 남겨진 유품 중 내게 의미 있고 소중한 것은 무엇이었는지, 자산 관계는 어떻게 되는지, 꼭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인지, 나의 죽음을 알려주어야 할 평생 마음을 나눈 친구는 누구인지, 혹시 의식이 없거나 내가 나를 몰라보는 일이 생긴다면 어떻게 처리해달라든지.

죽음 앞에 자연스러워지려 한다. 오늘과 내일을 분별없이 취하듯 생전과 사후를 무람없이 인식해 보려 한다. 자필로 잘 정리한 유서를 누군가에게 잘 보이도록 벽에 부착하고 보니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진다. 추가할 내용이 생길 때마다, 마음이 변할 때마다 그때그때 유서도 ‘오늘의 운세’처럼 바꿔 써놓을 작정이다. ‘사전연명의료의향서’도 그런 마음의 의지로 이미 등록해두었다.

어느 시인의 말처럼 ‘새벽하늘에 걸린 별은 밤새 떠난 이들이 남긴 유서’라는데, 마지막이 되어서야 비로소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말이 떠오르는지 모르겠다. 빠뜨린 게 있다. 살아온 소감도 한마디 유서에 첨부해야겠다. ‘더 친절하게 살걸!’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