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려의 격(格) / 윤혜주
“아줌마. 나잇살이나 먹은 사람이 격에 맞지 않게 이게 무슨 짓입니까.” ‘뭐라 격이라고.’ 생소한 단어다. 숨이 턱 막힌다. 순간 머릿속이 하얘진다. 진퇴양난의 길에서 마주한 젊은 아가씨의 서슬 퍼런 삿대질도 대략난감이다. 차창에 쏟아져 내리는 겨울비를 멍하니 바라본다. 세상사 모두 그렇다는 듯, 구겼다 다시 펼치는 은박지 소리를 내며 빗물은 몸을 낮추고 낮은 곳으로 흘러내리고 있다. 낯설게만 느껴지는 격이란 바로 저 빗물 같은 것이라면.
차를 몰고 도심의 좁은 양방향 길을 지나는 일은 곡예다. 양 옆으로 빼곡히 주차된 차를 피하고 오는 차를 비켜가노라면 오금이 저린다. 자칫 겁 없는 초보운전자가 행차해 어물거리는 날이면 도로는 삽시간에 주차장으로 변한다. 둔감해진 다리와는 달리 눈과 귀는 밤 고양이처럼 예민해져 짜증나고 답답하다. 그런 날엔 빤히 보이는 만만한 길도 지루하고 어렵게 느껴진다.
백 미터 남짓한 동네 뒷골목 양방향 진입로에서 차를 멈춘다. 반대편 차가 좁은 길을 여유 있게 지나가라는 배려다. 다행히 내 뒤를 따르는 차는 없다. 몇 대를 그렇게 지나 보내고 여유 있게 출발한다. 아뿔싸. 그런데 이게 웬 일인가. 막 골목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언제 들어왔는지 잽싸게 차 한 대가 들어와 막아선다. 주차로 가득해진 양옆엔 더 이상 비껴 설 공간은 없다. 그리고 나는 이미 많이 와 버렸다. 오는 차를 여러 대 양보도 했다. 물론 상대방 차는 모르겠지만. 황당하다.
이제 막 진입한 차가 조금 뒤로 물러나 비껴 주길 기다려 본다. 대여섯 바퀴만 구르면 되는 거리다. 그런데 꼼짝 않는다. 당황한 초보자일수도 있지 않는가. 좀 더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린다. 그러나 미동조차 않는다. 조금 후, 얄밉도록 천연덕스러운 아가씨는 창문을 열고 다짜고짜 나보고 비끼란다. 보시다시피 나는 너무 멀리 왔고 후진해 다시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걸린다고 설명했지만 막무가내다. 이런 경우 먼저 진입한 차가 우선이고 서로 조금씩 양보만 하면 소통할 수 있다고 사정해 본다. 그러나 작정하고 버티겠다는 젊은 운전자에겐 소용이 없다. 망신스럽다 못해 답답할 노릇이다. 급기야 나잇살이나 먹어 가지고 격에 맞지 않는 짓 한다고 언성을 높이고 있다. 당당하게 교통법규로 따지다 먹혀들지 않으니 격이란 한마디로 두 손 들게 한 그녀의 눈에 나의 격은 어떻게 비췄을까. 나의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저토록 화를 나게 한 걸까. 어떤 기준을 갖고 판단과 선택을 해야 하나. 이 상황을 헤쳐 나갈 기준을 생각해본다.
가끔은 신호등 없는 사거리에서 먼저 가라고 정중하게 손 신호를 보내주는 이들을 만난다. 멋진 양보의 배려다. 가벼운 목례로 감사를 표하고 나면 기분까지 좋다. 뒤섞여버린 도로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운전대와 시름하는 노인을 보고 선뜻 긴 거리를 후진해주는 아름다운 마음의 젊은이들도 본다. 어떻게든 좁은 공간을 비집고 들어가 상대의 길을 더 내어주려 애쓰는 고마운 이들도 있다. 그 뿐인가. 어렵고 힘든 그 상황을 무사히 해결해준 낯모르는 이들을 위해 백발의 노신사는 차에서 내려 정중히 머리 숙여 감사 인사를 하고 돌아가기도 한다. 그런 모습들은 우리 모두에게 격 높은 배려의 무한한 정이 존재한다는 증거다.
양보를 잘하는 사람이 운전 잘하는 사람이라고들 한다. 좁은 길에 늘어나는 차로 팽창해진 길 위에서 선뜻 양보하는 마음먹기란 쉽지 않다. 어려운 상황과 맞닥뜨렸을 때 노련한 운전 실력과 양보의 미덕이 전제될 때라야 가능하다. 그러나 실력 있는 이들만 거리로 나서는 건 아니다. 양보만을 원할 수도 없다. 현명한 상황판단과 함께 다양한 이들이 함께 가는 길 위에서 상생의 지름길은 배려라는 본질을 먼저 생각해 볼 일이다. 왜 사랑하는지, 또는 사랑이 무엇인지 결코 알 수 없음이 사랑의 능력이듯이. 자기가 처한 상황에서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먼저 생각한 뒤, 행동한다면 타인에 대한 배려는 모두의 품격을 높이는 동시에 좀 더 올바른 선택에 다가 설 수 있다.
가는 날이 가는 날인 인생을 지나고 있다. 고작 남은 영혼의 무게 21그램에 무슨 격의 무게까지 보태나 싶어 잊고 산다. 그러나 나이 먹을수록 깔끔보다 허름함에 익숙해진 탓일까. 도무지 어수룩한 생각과 판단, 어렴풋한 여유조차 낡고 허름해져 보이는 것만 믿게 된다. 막히고, 부서지고, 무너지는 것들조차도 어떻게 생각하느냐 보다 어떻게 보느냐로 결정해버린다. 그러다보니 상대를 위해 배려하는 마음을 담는 일이 쉽지 않다. 안타까운 일이다.
우리 모두는 제각각 다른 환경과 영역에서 자기만의 색깔을 가진 격을 추구하며 살고 있다. 저녁노을처럼 그럴싸해 보이는 빛깔만 요란한 격도 보았다. 정오의 햇살처럼 너무 뜨거워 차마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는 신분과 지위로 잘 포장된 격도 보았다. 색을 입히고 애써 포장해 자신의 위상을 높이려는 격에는 닦고 가꾼 흔적을 찾아볼 수 없어 불편하다. 참다운 인간의 진실 된 내면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찾아 볼 수가 없어서다. 우리는 너무 높은 격을 추구하여 거짓과 색깔만 요란한 격이어서도 안 되고, 너무 가까이 있기에 잘 보이지 않는다고 소홀해서도 안 된다. 화려함도 포장됨도 없이 그저 자신만의 진솔한 삶이 묻어나는 소중한 격을 가꾸고 사랑하여 보자. 진정으로 상대방을 배려하는 나의 모습을 보여줄 때 그것 또한 자신만의 소중한 격이라면 이제라도 소중히 가꿔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