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잔 / 유현주

 

 

시골집에 들렀다가 허드레 것을 쌓아 둔 창고에서 등잔과 부러진 등잔대를 발견했다. 석유 냄새는 사라진 지 오래고 심지는 죽은 뿌리처럼 부서져 있었다. 골동품이라도 되는 양 조심스레 챙겨와 깨끗하게 닦았다. 명주실로 새 심지도 만들어 끼웠다. 부러진 곳까지 붙이니 본래의 모양새가 되었다. 여기저기 편안한 자리를 찾다가 아이의 책꽂이 한 칸에 세웠더니 맞춤이다. 겸손한 도령의 얼굴처럼 하얗게 빛나는 것이 환귀본처還歸本處를 이룬 듯했다. 등잔! 불러 보니 따뜻한 발음에서 봄볕의 나른함이 돌았다. 등을 담는 잔이라니, 세상 어떤 잔이 이렇게 아름다울까.

등잔은 소심하지만 진실성 있는 맏이의 느낌이 난다. 꾸밈없는 단순함이 외곬수의 믿음을 준다. 위태로운 흔들림은 보호 본능을 자극하여 관대함과 너그러움을 끄집어낸다. 더불어 소소함이다. 화려하지 않은 일상이고 나만의 공간을 밝히는 따스한 온기다. 네온의 날카로움에 입은 상처를 치료하는 온유이며 번잡한 세상을 3장 6구로 정리하는 시조이다. 덧붙이자면 끊임없이 솟는 상상력의 길을 알려 주신 할머니와의 소통 통로이다.

어렸을 때 작은 등잔이 불만이었다. 석유를 담는 공간이 너무 좁아 자주 채워야 했는데 넘치거나 흘리기 일쑤였다. 그럴 때면 됫병을 한꺼번에 쏟아 넣을 수 있는 항아리 모양의 등잔이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등잔의 크기와 생활수준이 비례하는 것이라면 어지간히 궁핍했던 시절이다. 1970년대 산골의 삶을 그대로 보여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또래마저 믿지 않지만 나는 등잔의 마지막 세대이다. 나고 자란 곳이 읍내보다 십 년도 훨씬 지나 전기가 들어왔다. 마루에 거는 호롱은 특별할 때 켜는 것이었고 초는 제사 때나 꺼냈으니 우리 집의 밤을 밝히는 건 순전히 등잔불이었다. 석유를 사려면 시간 반이나 걸어 장벌까지 가야 해서 오래 켜 둘 수도 없었다. 그러니 석유를 하루라도 더 쓰려면 최대한 아끼는 것이 수였다. 방편으로 심지를 줄였고 그마저 일찌감치 꺼진 밤은 첩첩으로 길었다. 그 밤의 반은 할머니가 이야기로 메꾸었다. 옛날이야기뿐 아니라 직접 지으신 동화까지 달빛에 버무려졌다. 할머니의 목소리가 조곤조곤 풀어지면 사위는 더 이상 어둠이 아닌 상상의 세계로 연결되곤 했다. 흥부와 놀부가 사이좋은 형제가 되어 볏단을 나르고 인당수에 몸을 던지던 심청이가 밧줄로 구명되었다. 끝에는 흥부의 무능과 청이의 불효가 지적되기도 했다. 이야기를 섞고 비틀어 사고의 방향을 전환하는 방법ㅁ을 일찌감치 알려주셨던 것이다.

등잔은 바람이 덜 닿는 윗목에 고정되어 그쪽께 천장은 그을음으로 얼룩했다. 그것은 할머니의 자화상이었다. 원인도 알 수 없이 주저앉은 이후 세 번이나 변한 강산을 한 번도 밟지 못한 할머니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관보다 당신이 아는 이야기로 나와 이어지는 튼튼한 심지를 엮을 줄 아는 철학자였다. 등잔 불꽃처럼 나긋이 피운 속병 같은 그을음은 얼룩이 아닌 추상화였던 것이다.

벽은 여백이었다.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앙상하게 굳은 할머니의 다리를 주물렀고 종종 슬퍼졌다. 그랬다. 한 번도 할머니가 땅을 딛고 선 모습을 보지 못한 것을 깨달은 순간부터 슬픔이 일렁거렸다. 부러진 등잔대를 이어붙인 것처럼 할머니의 멎은 걸음도 이을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고정된 등잔대와 마른 장작처럼 핏기 없는 할머니의 다리가 하나로 겹치기 시작하면서 나는 철이 들고 있었던 것이다.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할머니는 돌아가셨고 내 유년의 한 대목이 끝났다.

우리네 삶처럼 위태했던 가녀린 불꽃. 어린 네 자식을 방 안의 할머니에게 맡기고 들과 산으로 뛰어다녀야 간신히 풀칠이나 했던 어머니의 여린 숨 같은, 선반 위에서 내내 주인의 재기를 기다렸던 할머니의 흰 고무신 같은 불꽃, 그럼에도 그립고 애틋한 웃음소리와 연료와 심지가 되어 추억을 밝히는 빛으로 돌아온 등잔이다. 지리멸렬한 가난에서 벗어나 행복해지기를 바라는 꿈을 꾸게 한 매개이기도 하다. 그래도 그날들이 얼마나 큰 지적 재산인지 알고 있기에 마음으로라도 돌아가 보곤 한다. 동화 속에서 밀려난 개구리여도 그 따뜻한 우물의 온도를 기억하고자 애쓰는 것이다.

삶이, 유리창을 깨고 튀어나올 듯 강렬한 빛이 아니어도 괜찮다. 은은하게 창호지를 적시며 훈훈한 정을 토닥거리는 등잔불 같으면 어떠랴. 포강 안의 달처럼 넘치지 않는 빛으로 감추고 싶은 곳을 가릴 수 있으면 된다. 구석을 엿보지 않는 등잔불 같은 삶이라면 과욕이 부르는 불행은 없을 것이다.

어딘가 허전하다. 받침대에 놓여 있어야 할 성냥이 없다. 조만간 성냥을 한 통 구해 와야겠다. 이 대명천지에 등잔은 다시 불꽃을 일으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결국 신어 보지 못하고 만 할머니의 고무신처럼 소용되진 않겠지만 성냥이 대기하고 있다는 건 희망이다. 바깥 세상에 대한 동경과 깊어지는 절망을 이야기로 풀어낼 때 순수한 가슴으로 여과 없이 들어주던 어린아이. 어쩌면 나는 할머니의 등잔에 불을 일으키던 성냥이 아니었을까? 그나마 내가 당신을 빛이 되게 한 존재이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불현듯 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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