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 / 안경덕

 

 

땅이 얼마나 깊고 탄탄한지 바닷속처럼 가늠 안 된다. 그 깊이를 세계에서 제일 높은 건물과 견주면 어떨까. 추측에 불과하니 도저할 뿐이다. 수 십 층을 넘어 백 층대의 대형 아파트를 보면 가슴 서늘해진다. 땅이 이고 진, 어마어마한 중압감이 떠올라서다. 건축자재인 쇳덩이, 철근, 시멘트, 목재만 해도 그 무게가 실로 엄청나다. 거기에 가가호호의 몇 톤씩 될, 세간을 보태면 획기적인 숫자가 나오지 않겠는가. 대체 지반이 얼마큼 당 지면 짓누르는 그 무게에 끄떡없을까 싶다. 참으로 불가사의하다.

 

땅이 가진 능력은 우리의 상상을 초월한다. 그 초능력에 방대한 것 중에는 세상에서 최상의 겸손을 지녔다. 땅이 겸손의 미덕에 시원일 테니까. 가장 큰 스승이고, 마음을 보듬어주는 고향이다. 우리는 어감이 다소 강한 땅에 필명처럼 붙은 토지, 대지, 흙이라고 나눠 부르기도 한다. 땅 하면 딱딱함, 토지 하면 넉넉함, 대지 하면 푸근함, 흙 하면 포실함이 느껴진다. 또 뭇 생명을 품은 광대무변한 갯벌과 대륙의 광활함은 가슴 뛰게 한다.

 

사람들은 땅의 면적을 늘리기 위해 바다를 매립하고, 황무지를 개척한다. 땅을 더 갖기 위한 전쟁은 인류가 살아오면서 끊임없이 이어졌다. 세계 역사에서 남의 나라를 호시탐탐 넘보고 침략하고 정복한 예는 참으로 많았다. 우리나라도 땅을 지켜온 선조들의 뼈아픈 희생의 피와 땀, 한숨과 눈물이 우리 땅에 고스란히 점철되어 있으리라.

 

너나없이 땅을 선호한다. 땅 없는 생존이 있을 수 없고, 생의 끝이 한 줌의 흙이 되기에. 또 부의 상징물로도 땅 부자. 땅장사, 땅 투기란 말이 성행하고, 땅덩어리가 금덩어리라는 말엔 더 큰 무게가 실렸다. 위치 따라 금싸라기, 노른자라는 명패를 달아 우대해 준다. 빌딩의 상가 밀집 지대와 고급 브랜드 아파트가 숲을 이루는 곳은 집이며 땅값이 금값과 어금 버금 한다. 건물과 땅이 합쳐진, 그 값이 하늘만큼 높은 건 당연하다. 어제오늘 일이 아닌데 새삼 현기증이 나는 건 무슨 연유인지. 최근 몇 년 사이에 시선을 압도하는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불어나서일까. 시세가 너무 큰 폭으로 급등해서일까.

 

언젠가 내가 경험한 일이다. 건물끼리 어깨동무한, 높은 키를 뽐내는 건물에 부딪힌 맞바람 소리가 땅과 건물의 신음으로 들렸다. 태연자약한 건물들은 당진 땅에 힘입어 더욱 견고하고 당당한 품새였다. 나도 굳건한 건물이 영원할 것 같은 땅처럼 오래오래 건재해 주면 좋겠다는 바람이 일었다.

 

한때 우뚝우뚝 솟은 빌딩에 보내는 동정과 호감이 컸다. 유독 도드라진 멋스러움이 마음을 사로잡았다. 서울의 63빌딩을 구경하는 게 로망이었던 사람이 참으로 많았다. 그 시절 나는 전면이 유리창으로 반짝이는 빌딩 앞을 지나가면 발걸음이 절로 멈추어졌다. 눈 부신 빛의 화려함이 세상 근심 걱정을 다 거둬가는 것 같았고, 어디에도 음지는 없을 거라는 희망을 주는 것 같았다. 건물 안에는 좋은 일이 일사천리로 진행된다는 착각이 빠졌다. 그땐 내 마음도 유리처럼 해맑았던가 보다.

 

빌딩 또한 개발 논리의 상징물이다. 언제부턴지 고층 건물을 훌쩍 넘은 아파트가 하늘을 훔쳤다. 예전에는 마을을 조성할 때 사람이 얼마나 자연과 동화하겠는가가 첫째 조건이었다. 한 채의 집을 지을 때도 주변의 산세와 하천, 자연환경과 조화를 어떻게 이루느냐를 우선시했다. 그 기운을 집터가 충분히 품어야만 집을 앉혔다. 그만큼 전통과 철학을 앞세운, 포근한 이미지가 중점이었지만 이젠 먼 이야기가 됐다.

 

도시는 빌딩과 고층 아파트의 터뿐만 아닌, 도로도 숨 쉴 여지가 없다. 도로에서 신호를 기다리거나 버스 정류장에 서 있을 때 가끔 지축이 흔들흔들하는 것을 감지한다. 크고 작은 자동차들이 날마다 줄지어 달리고, 짐이 가득 실린 덤프트럭이 왕바람을 일으키며 싱싱 달리기 때문이다. 도로가 아파서 몸서리치는 것 같다. 그 여파로 하루, 한 달, 일 년이 더 해져 몇십 년을 견뎌내다 더러 옴팍하게 꺼지기도 하고, 싱크홀이 생기기도 한다. 막상 그 현장과 맞닥트리면 섬뜩해진다. 지반이 스르르 내려앉는 상상이 꼬리를 문다. 끝내 도로가 지쳐 도로이길 포기하고, 건물과 자동차, 사람이 싫다며 지각 변동을 꿈꾸는 건 아닐까 하는, 한낱 부질없는 생각에 젖어들곤 한다.

 

도심 거리의 미관상과 편리를 위해서라는 명목 아래 도로를 무차별 파헤치는 일이 너무 잦다. 도로 지하에 묻어둔 전기 가스 수도 하수도 정화조 선로를 교체하느라, 고장 난 것들을 수리하느라 만신창이가 된다. 도로는 그 고통을 버티고 견뎌야만 세상 빛을 보는 신세다. 측은지심이 든다. 사람도 숨 쉬는 흙 밟을 곳이 줄어든다는 건 슬픈 일이다. 인도엔 여러 색상과 반짝이가 든 새 타일로 옷을 갈아입히고, 차도는 아스팔트로 번드르르하게 포장하지만 마음이 푸근해지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도로는 별별 나무들과 새소리 벗 삼는 산이, 오곡백과가 무르익는 문전옥답이, 오색 꽃으로 수놓은 포실한 공원 흙이 부러울 테다. 이처럼 땅도 크게는 비옥한 땅, 알토란같은 땅, 척박한 땅으로 나누어진다. 땅도 주어진 운명 따라 수월하고 힘들기가 다른 인생길과 흡사하다.

 

내 일터의 출퇴근길, 차창너머로 유독 많은 마천루가 스쳐 지나간다. 그 전엔 해운대하면 바다가 먼저였다면, 이젠 빌딩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달라진 그 풍경을 매일 만난다. 삐죽삐죽 솟아오른 건물의 높이가, 생긴 모양이, 색상이 다른 게 볼거리이긴 하다. 하늘을 수놓은 구름과 어우러진 배경 덕이 크다. 때로는 건물 위에 음전하게 자리 잡은, 건물과 건물 사이에 걸쳐진 해와 달이 내 감성을 깨워준다. 날씨 따라, 내 마음 따라 새로운 느낌으로 안긴다.

 

그래도 마을 앞으로 사시장철 시냇물이 흘러가는, 드넓은 들판이 펼쳐진, 새들이 지저귀며 나직한 산이 감싸주는, 그 고향 땅의 그리움은 잠재울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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