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즈 끊기니 / 허숙영 - 제4회 선수필 문학상

 

 

나, 개망초 우거진 밭 어귀에 초연히 누운 냉장고일세. 무슨 헛소리냐고. 자네 기억하는가. 동네 사람 누구나 스쳐가는 길 가장자리에 나를 내다버린 날을.

누군가 얼핏 보더니 꼭 새하얀 관 같다고 하더구만. 그러고 보니 잦은 비에 웃자란 잡풀들이 에워싸 조문하는 것 같은 신세가 되어버렸지 뭐야. 아니지. 으늑하게 누울 날들을 기다렸던 만큼 잘강이는 바람 소리를 자장가삼아 편안하게 지내고 싶었다네.

한때는 주부들의 성소였던 부엌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지. 집안의 번영을 위해 내가 할 일이 좀 많았나. 제일 중요한 먹을거리의 부패를 막기 위해 최선을 다했네. 그뿐인 줄 아나. 집안 사람들 입맛에 비위를 맞추고 지켜 주느라 더 차갑게 굴 수밖에 없었지. 생각나는가. 내 배 채우기 위해 숨 돌릴 틈바구니도 없이 꽉꽉 쟁여 넣던 모습 말이야. 그때 이웃과 조금씩 나누었더라면 숨쉬기가 좀 편했을지도 몰라.

자네는 내 속이 차갑기만 하다 했지. 뜨거운 걸 품어 본 적 없는 냉혈한이라 했던가. 젊은 한때 그랬을지도 모르지. 아니 그래야만 했어. 그게 내 사명이었거든. 하루도 쉬지 않고 온몸 바쳐 일하면서 늙는 줄도 몰랐어.

깜빡깜빡 퓨즈가 수시로 끊기고 내 의지와 상관없이 내 몸을 벗어난 멀건 물이 아래로 시도 때도 없이 질질 흐르게 되었지. 자네는 기억에서 지웠을 테지만 부엌에서 끌려 나오던 날은 날씨마저 우중충 했다네. 길 가장자리에 내몰린 내가 건실한 농부 어깨에 얹혀 밭 귀퉁이로 자리를 옮겨 앉은 것은 한 계절이 후딱 지나간 가을이었지. 그 때는 생각했어. 이제야 산새소리 들으며 고요히 잠드나 했지. 그런데 그게 아니었어.

내 속이 다시 채워지는 거야. 지구의 잔등 긁던 호미와 괭이, 모종 삽, 고춧대를 일으켜 세우던 지지대와 끈, 쩍쩍 갈라져 타는 대지의 목마름을 해결해주던 물 조리개가 내 품을 파고들었어, 나도 그들을 품고 품어 안았지. 말하자면 낮은 곳으로 향하는 것들의 안식처로 내가 선택 된 거였어. 쓸모없다고 버려진 내가 말이야.

햇볕 쨍쨍 내리쬐는 날이면 그들의 그늘이 되어주고 비바람 휘몰아치면 포근하게 감싸 안았지. 세상이 꽁꽁 얼어붙는 날도 별 탈 없이 지내도록 다독였어. 내게 이런 능력이 있는 줄 아무도 모를 거야. 살기위해 차갑기만 했던 내 몸에 온기가 돌기 시작했어.

자네도 뒤늦게 나와 꼭 같은 신세가 된 것을 알았네. 집안의 안방 아랫목이 영원히 자네 자리인 줄 알고 큰 소리 빵빵 쳤잖은가. 젊어서 는 행여 자식들 엇나갈 새라 노심초사했고 먹고 살기위해 최선을 다 했지. 인정머리 없고 차갑기만 한 사람이라고 뒤에서 수군거리는 소리도 들어 알테지. 그게 다 비어가는 쌀독 채워 넣기에 바빠 힘든 날들 보내던 나름대로의 처신이었을 테지만 아무도 그렇게 봐주지 않는다는 걸 이제야 깨달았겠지. 세상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닌데 왜 그렇게 억척을 떨었는지 몰라.

이웃과 조금 더 나눌 걸 싶겠지만 이미 늦었어. 늙어 갈수록 기억력 깜빡거리고 똥오줌 흘리고 다니니 요양원이란 곳으로 내몰렸잖은가.

너무 설워 말게. 이제야 겨우 일에서 풀려났잖은가. 그곳도 사람 사는 곳이라 먹여주고 입혀주니 편안할 거야. 자식도 하지 못하는 일을 지극정성으로 수발하는 이들이 있지 않은가. 거기다 포근한 잠자리까지 봐주니 열심히 살아온 대가를 받는 거라 여기면 위무가 될 걸세. 거기선 무섭게 변하는 사회의 속도에 발맞추느라 허둥거릴 필요도 없고 온갖 소음에 시달리지 않아도 되네.

자네도 나처럼 퓨즈가 끊긴 게 오히려 더 나은지도 몰라. 자식의 알뜰살뜰한 보살핌을 원했을 자네가 아닌가. 버림받았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를 일인데 말이야. 그럴 땐 제정신으로는 못살지. 내 자식만큼은 영원토록 효자일거라 여겼는데 남의 손에 자네 육신이 맡겨진 걸 알면 화병이 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마 자식욕심 많은 자네 가슴은 젖은 장작 타들어가듯 불길이 이는 건 고사하고 시커멓게 그을리기만 할 거야. 젊었던 시절 열두 번도 더 짐을 싸고 싶었지만 저그들이 밟혀 인생 저당 잡히고 산 걸 내가 잘 알지. 저희들을 어떻게 키웠는데 보답 은커녕 깊은 산속에 유폐를 시켰을까 싶겠지만 어쩌겠어.

쾌청한 곳에서 맑은 정신으로 돌아오라는 염원을 담았다고 여기면 좀 나을 거야. 세상 뒤꼍으로 밀려나고 보니 이제야 지나온 길이 보이잖은가. 좋은 자리에 있을 때는 홀대했던 것들을 새롭게 보기 시작 했다는 말이야.

바라보이는 밭에는 넙데데한 토란잎에 수정구슬이 맺혀 있다네. 아무리 많은 비가와도 자기 힘에 알맞은 작은 구슬만큼만 물을 채우고 다 쏟아내 버리네.

늙어가는 것도 괜찮은 것 같으이. 난 지금 충분히 만족하고 있거든. 여태껏 시답잖은 말을 늘어놓은 것은 우리가 한 때 같은 공간에서 숨 쉬었다는 인연으로 해 본 혼잣말일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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