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 고수 / 김순경

 

 

버려야 채울 수 있다. 틈이 없으면 빛도 들어오지 못한다. 여백과 공간이 있어야 뭐든지 받아들일 수가 있다. 비움을 강조하고 버려야 한다며 입버릇처럼 말하지만 정작 행동은 따라가지 못한다.

 

드디어 북채를 잡았다. 판소리를 시작한 지 다섯 해가 지나서야 북을 안았다. 늘 마주하던 사이지만 막상 채를 드니 처음 만난 것처럼 서름서름하다. 조심스럽게 몇 번 두드려봐도 다스름이 없어서인지 반주는 고사하고 소리도 잘 나지 않는다. 자세를 다잡고 정수리를 내려치자 그제야 야무지게 화답한다.

 

기본 열두 박을 천천히 쳐본다. 큰소리를 내려고 애를 쓸수록 자꾸만 북통이 외면하듯 돌아앉는다. 한 장단을 마치기도 전에 채가 엉뚱한 곳에서 논다. 지나치게 긴장한 탓인지 제 차례를 잊은 두 손이 연달아 뒤엉킨다. 한 소절도 마치지 못하고 북편도 채편도 허둥댄다. 장단은 비틀거리고 등에서는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고법鼓法은 전혀 몰랐다. 수년간 노래를 배우면서도 반주법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저 빨리 배우고 싶은 욕심에 진도에만 신경을 썼다. 그냥 젓가락 장단처럼 적당히 치는 줄 알았지만, 실제로 접하고 보니 반주가 가락을 살리고 망쳤다. 배웠던 가사집을 찾아 북장단을 달았다. 소리를 배우며 들었던 박자를 표시하는 일은 쉽지 않았다. 수없이 뇌까리며 한 장단씩 만들어 갔다. 혼자 연습하려면 어쩔 수가 없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리듬을 무시하고 마음대로 고함만 질러댔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수鼓手는 북재비다. 판소리의 가락과 박자에 맞춰 북을 치는 사람이다. 혼자서 반주를 책임지고 추임새 등으로 청중의 흥을 돋운다. 초보 고수는 정해진 박자만 고집하거나 어울리지도 않는 가락을 아무 때나 넣어 소리꾼의 기량을 훼손하지만 명고名鼓는 다르다. 다양한 제制나 유파를 완전히 소화하고 그 특성에 맞게 반주를 하되 귀에 거슬리거나 시끄럽지 않고 상서로운 기운을 뿜어낸다. 최고의 고수는 청중이 가락을 잘 감상할 수 있도록 북소리를 자제하며 선율의 참맛을 살려낸다. 정박을 또박또박 치기보다는 맥을 정확히 짚어 있는 듯 없는 듯 장단을 맞춘다. 강조하고 생략할 부분을 속속들이 파악하고 보이지 않는 여백을 만들어 청중의 몫을 남겨둔다.

 

소리꾼도 고수와 같다. 창자唱者가 혼자 감정에 취하면 관객들은 공감도 감동도 하지 않는다. 극적으로 몰고 가되 비집고 들어올 틈을 남겨두어 스스로 젖도록 해야 한다. 감정 이입이 공연장을 달군다. 비단 판소리만 그런 것은 아니다. 글도 지나치게 복잡하거나 감정에 치우치면 감상이 힘들어진다. 보일 듯 보이지 않고 잡힐 듯 잡히지 않을 때 궁금증을 자아내고 오래 머물게 된다.

 

어느 유명 고수가 말했다. 평생 북재비로 살았지만 잊지 못할 공연은 소리꾼이 되어 북을 친 날이라고. 북자루가 허공에서 춤을 추고 명창의 성음이 천상을 드나들자 가객과 고수가 하나가 되더라고 했다. 언감생심 늦깎이 초보 고수에게 그런 날이 올까마는 오늘도 추임새를 넣고 소리북의 대점을 내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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