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화분에 심다 / 안경덕

 

 

이웃집 일산이 엄마가 뜬금없이 여러 개의 화분을 갖다 주었다. 작고 앙증맞은 게발선인장부터 다년초, 아마릴리스, 군자란, 행운목, 관음죽, 큼지막한 소철까지. 이미 꽃이 진 것, 막 몽우리가 오동통해진 것, 예쁜 꽃을 활짝 피운 화초들이다. 꽤 오랫동안 애써 가꾼 것이니만큼 푸른 이파리가 한창 반들거린다. 선명한 꽃 색깔이 아기의 눈망울처럼 맑다. 이렇듯 사랑스러운 화초를 왜 내버렸을까. 그는 이유를 거두절미하고 갑작스러운 심경 변화로 화초가 보기 싫어졌다고만 했다.

 

사람의 변덕으로 상처받는 게 화초뿐이랴. 택배 회사엔 물건을 주문해 놓고 배달이 취소되거나 반품이 비일비재하다고 한다. 가정에서도 애지중지하던 반려동물, 멀쩡한 가구, 가전제품, 그릇, 옷, 신발들의 신세가 하루아침에 천덕꾸러기로 내몰리기도 한다. 아주머니를 탓하기 전, 그가 말 못한 사정을 정작 헤아려야 했던 것을. 항상 밝고 활기찼지만, 어떤 극진한 아픔은 화분에 다 꼭꼭 묻고 꽃처럼 해맑게 웃었나 보다.

 

특별히 화초를 좋아하는 남편이 무척 반긴다. 화분이 올 것을 마치 알고 있었다는 듯. 뜨악하던 화초들도 뜻밖의 환대에 자못 놀란 모양이다. 화초는 주인의 변심에 필시 낭패스러웠을 터. 그동안 공들여 보살핀 정성에 응당 여정을 함께할 거라고 철석같이 믿었으리라. 꽃들은 더 예뻐 보이려고 방싯거렸을 테다.

 

남편은 학창 시절 장래 화훼 단지 할 꿈을 키우며 열심히 꽃에 관한 공부를 했다고 한다. 졸업 후 비닐하우스 짓는 데는 부모의 절대적인 지원이 필요했지만, 반대에 부딪혀 그 꿈은 싹도 틔우지 못했다. 그 일이 자못 야속하여 서둘러 공군에 지원했다. 부모가 힘을 실어주지 않았던 것은, 맏아들이 도시 생활하는 걸 원해서였다. 하지만 입대한 지 얼마 후 공교롭게도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아버지를 입대 전날 본 게 마지막이었다. 그 일로 가슴에 돌을 얹어 놓은 듯 답답하다고 내게 토로했다.

 

남편은 한쪽 날개 꺾인 어머니가 농사로 고생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는 말도 몇 번 했다. 그게 나와의 진로 의논이 전부였는데. 어느 날 덥석 전역하고 말았다. 평생 군인을 직업으로 삼겠다고 자신과 약속했다는 굳은 다짐도 한순간 깨고 말이다. 내 복이 그뿐이라는 걸 터득하기까지 나는 속을 몹시 끓였다. 십 년이 넘게 군 보급대의 근무로 부대에 들어오는 물건 입출고만 맡았다. 삽 한 번 안 들어보고 일이라곤 안 해 본 남편이 무슨 농사를 짓겠는가. 이도 저도 아닌 아들을 보다 못한, 시어머니는 우리 네 식구를 부산에 분가시켰다. 남편은 본인 의지와 상관없이 작은 가게 점주가 되었다.

 

우리 부부는 새로운 환경에 여러 달 동안 적응하지 못했다. 세상 물정도, 가게가 뭔지도 몰라 그저 막막할 뿐이었다. 결혼 후 시장 구경 한 번 제대로 못해 본 처지인 나도 그랬다. 가게에 고객이 오면 둘 다 부끄러워 서로 먼저 숨기에 바빴다. 얼마나 숫기가 없었던지 이웃 사람들이 마음 모아 물건을 팔아 주자고까지 했을까. 남편은 그걸 알고도 전업은 뒷전이었고 화초에 애착 두는 것으로 일관했다.

 

봄마다 매주 이삼일은 유명한 산을 헤집고 다니며 매 발톱, 할미꽃, 금낭화, 초롱꽃, 춘란을 고이 채취해 왔다. 그때는 그 일이 법에 저촉되지 않았으므로, 거기에 화초 심어 놓은 화분들을 사다 날랐다. 몇 년 지나자 화분의 개수가 엄청나게 불어났다. 자연스럽게 화초 관리가 어려워졌다. 결국 미처 손길이 닿지 못한 화초가 하나둘 시들어 영영 눈을 뜨지 못했다. 급기야 늘어난 빈 화분들이 애물단지 신세로 전락했다.

 

궁리 끝에 빈 화분을 장독대 앞 자갈밭에 나란히 줄 세워 텃밭을 만들었다. 해마다 봄이 되면 고추, 들깨, 가지, 오이, 방울토마토 모종을 심었다. 옹기종기 몽우리를 틔우고 열매를 맺었다. 잡다한 일로 마음이 꿉꿉할 때, 햇살에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푸른 식물들이 가슴을 뽀송뽀송하게 해 주었다. 그 덕분에 버려진 화분처럼 내 꿈도 사그라들고 말 것만 같던 그 조바심도 달아났다. 남편이 지나치게 화초에 쏟는 열정도 이해할 만큼 내가 모오리돌을 닮아갔다.

 

무슨 일이든지 대부분 탄탄대로는 없다. 하지만 남편이 화훼 단지의 꿈을 이루었다면 한층 윤택한 삶이지 않았을까. 나 홀로 가게보다야 네트워크가 활성화인 화훼 단지와 더불었다면 세상을 더 넓게 볼 줄 아는 안목을 키웠을 테고, 마음 밭 또한 꽃향기로 한자리를 차지했을 것이다. 남편도 그걸 아는지 탄탄한 직업을 쉽게 놓아 버린 후회와, 사방이 푸르른 화훼 단지에 대한 미련을 떨치지 못한 것 같다.

 

우리 집은 작으나마 마당이 있다. 화초를 가꿀 수 있고, 나무를 키울 수 있는 여건이다. 또 가게 앞 야산의 온갖 나무와 새소리가 사철 벗이 되어 준다. 남편은 그것들이 오래전 봄날이 다 간 가게를 접지 못하게 발목을 붙든다는, 그래서 야산의 대정원과 이별할 수 없다는 핑계를 댄다. 가게가 남편의 일터인지 놀이터인지 가늠 안 된다. 남편이 이런 것도, 틈만 나면 화초를 돌보는 것도 못 이룬 꿈에 대한 보상 심리로 그러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남편이 젊은 날의 그 꿈과 영 멀어진 것만 아닌 듯도 하다. 하나 화분에 화초 심어 꽃피웠다고 꿈을 충족시켰다고는 할 수 없다. 가게가 화훼 단지만한 수지타산에 못 미쳤을지도 모르니까. 첫 직장에서 정년을 맞이했다면 나도 남들처럼 꽃가마도 타보고, 평생토록 연금도 받을 텐데. 이것저것 다 아쉽지만 남편이 많은 날 화초로 소소한 기쁨을 얻었으니 그것으로 마음을 달래 본다. 꿈이란 본디 무지개 너머 파랑새를 좇아가다가 놓치는 게 아니던가. 그리고 자다가 깨지는 게 꿈이 아니던가.

 

새 식구가 된 화초들도 내 말에 수긍하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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