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 한 그릇 / 김순남
냉이 향이 집 안 가득하다. 된장을 넣고 한소끔 끓이다 콩가루를 뽀얗게 묻힌 냉이를 넣자 구수한 향이 온 집 안에 퍼졌다. 뭇국, 김칫국, 시래깃국도 맛있지만 된장국 속 냉이의 고소한 향은 마음을 따뜻하게 해준다.
어머니는 밥솥 옆에 걸린 무쇠 옹솥에다 아침마다 국을 끓이셨다. 할아버지께서 국을 한술 뜨시고 밥그릇으로 수저를 옮기시면 부모님, 삼촌, 우리 자매들은 식사를 시작한다. 산골의 밥반찬이야 사계절 빠지지 않는 김치와 제철에 나는 채소를 무치거나 볶거나 하는 것뿐이니 밋밋하기 그지없었다. 단출한 밥상에 변화라고는 조금씩 달라지는 국에 달린 듯했다.
매일 먹는 국이지만 재료에 따라 맛도 다르고 가족들의 반응도 달랐다. 된장국에도 때로는 배추를, 아니면 무시래기를 삶아 넣어 맛을 달리하였다. 같은 콩나물을 넣어도 고춧가루를 풀고 얼큰하게 끓이면 할아버지와 아버지께서 “시원하다.” 하시며 밥을 말아 드시곤 하셨다. 나는 무채를 조금 넣고 들기름에 달달 볶다가 콩나물을 넣은 맑은국을 좋아했다. 어쩌다 고깃국이라도 끓이는 날이면 이웃집까지 국 냄새가 퍼지는 듯했다.
국 한 그릇은 정을 나누게 해준다, 할아버지, 할머니 생신에는 이웃 어르신들과 친지들도 오시기 때문에 큰 가마솥에 미역국을 넉넉하게 끓이셨다. 손님들이 모두 돌아가시고 저녁 준비를 하며 어머니는 이웃에 형님, 동생 하며 지내는 아주머니를 불러 “국 한 그릇 먹고 가라.” 권하셨다. 밥 한술 국에 말아 부뚜막에 걸터앉아서도 달게 드시며 동기간 같은 도타운 정을 나누셨다.
뜨끈한 국 한 그릇이면 얼었던 몸과 마음도 따뜻해진다. 오래전 내 집이 없던 시절, 집을 구하려고 종일 추운 거리를 돌아다니다 보니 몸도 꽁꽁 얼고, 마음마저 얼어붙어 냉혹한 세상이 얼음판 같은 적이 있었다. 마침 지나는 길가 순댓국집에서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솥이 눈에 들어왔다. 밖에서 음식을 잘 사 먹지 않지만, 그날은 국밥 한 그릇을 시켜 허기진 마음을 달랬다. 정신없이 국밥을 먹고 있는데 “새댁이 국밥을 참 맛나게 먹네.” 하시며 국밥집 아주머니는 국을 한 국자 더 주셨다. 뜨끈한 국 한 그릇으로 속이 데워진 탓도 있지만, 아주머니의 그 한마디가 나를 훈훈하게 만들었다.
옛말에 “국물도 없다.”라는 말이 있다. 그 말은 모든 국에는 건더기가 있기 마련인데 건더기를 국그릇에 뜨다 보면 국물은 자연적으로 따라가게 된다. 상대에게 한 번 두 번 편리를 봐줬지만, 상대가 고마움을 표현하기는커녕 기대에 어긋나게 행동할 때 대개 그런 말을 한다. 앞으로는 절대 안 봐준다고 호언장담을 해도 그런 사람치고 그다음에도 몰인정하게 상대의 어려움을 몰라라 하는 사람은 없는 듯하다.
따뜻한 국 한 그릇은 때때로 위로가 된다. 오래전 큰 수술을 받고 건강이 회복되지 않아 두문불출하고 있을 때였다. 많은 사람이 음료나 과일을 들고 병문안을 다녀가곤 했다. 어느 날 지인 한 분이 병문안 오면서 국을 한 냄비 끓여 와서 식탁에 올려주었다. 그 국을 먹으며 평소에 무뚝뚝하던 그녀가 그렇게 살갑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그래서인지 나도 때론 국 한 그릇으로 위로하는 마음을 전한다.
큰아들이 전공의 시절 힘든 시기에 맞닥뜨리게 되었다. 전공의 수련 과정이 밥을 제때 먹기도 어렵거니와 잠도 푹 잘 수가 없는 처지인데 여러 가지 힘든 일을 겪게 되었다. 긴 세월 힘겹게 달려가던 길을 다시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분명 며칠 동안 밥 한 끼 못 먹고 눈도 한 번 못 붙인 듯했다. 아들의 소식을 전해 듣고 자취하는 집으로 급히 올라갔다. 입술이 바짝 타들어 갈 정도로 힘들어하는 아들에게 힘든 길을 계속 가라 할 수도, 그만 가라 할 수도 없으니 가슴만 탔다. 가져간 국을 데워 밥을 한술 뜨게 하고 새벽 5시 병원을 향해 나가는 아들을 배웅했다. 캄캄한 세상을 향해 나가는 아들을 한 번 안아 주는 것밖에는 해줄 것이 없었다. 그때 국 한 그릇은 아들보다 어쩌면 어미에게 더 위로가 되었지 싶다.
국그릇도 세월 따라 변해간다. 노동에 힘을 많이 쓰던 농경시대에는 국 사발이 양푼만큼이나 큼지막했었다. 한국 사람들 음식문화가 염분을 많이 섭취한다는 통계를 거론하며 건강상 좋지 않다고 하여 국그릇은 점점 작아지거나 이즈음엔 아예 국물을 꺼리며 잘 먹지 않기도 한다. 아들 집에 가보면 마트에서 사다 놓은 일회용 용기에 국들이 다양하다. 북엇국, 된장국, 육개장 할 것 없이 입맛대로 골라 먹을 수 있다고 편리함을 얘기하면서도 아들은 엄마가 끓이는 배춧국을 주문함은 어인 일인가.
요즘은 식탁에서 국은 크게 대접받지 못한다. 먹을거리가 궁핍하던 시절 국 한 그릇에 식은 밥 한술 말아서 허기를 면하고, 어쩌다 닭장에 암탉 한 마리 잡아 닭개장이라도 끓이는 날이면 이웃을 불러 이마 맞대고 정을 나누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 우리는 물질 풍요 시대에 살고 있다. 물론 아직도 소외된 어려운 사람들도 많지만 기름진 식단 탓에 건강을 지키지 못한다는 말을 종종 듣는다.
윤택해진 식생활만큼 우리의 마음도 넉넉해졌을까. 나이가 지긋한 세대들 사이에는 “우리,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을 자주 하며 같이 식당에 앉아 밥 먹는 것을 좋아한다. 반면 이삼십 대 젊은이들 사이에는 ‘혼밥’ 즉 혼자서 밥 먹는 일이 많다 보니 음식점에서도 이를 겨냥해 메뉴를 홍보하고 있다고 한다. 같은 국 한 그릇씩 받아놓고 마주 앉은 사람에게 건더기 한술 더 건져 주고 싶어 안달하는 정겨운 모습은 이제 보기 드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