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너편 풍경 / 장금식
드디어 돌다리가 완성되었다. 중랑천을 경계로 도봉구와 노원구를 연결해 주는 다리다. 도봉구에 사는 나는 산책 중에 가끔 건너편 풍경이 궁금했다. 그러나 그쪽으로 가려면 천변을 따라 한참을 걸어간 후, 높고 긴 다리를 통과해야 했다. 선뜻 맘먹기가 어려웠는데 양쪽을 쉽게 오갈 수 있는 징검다리가 놓였다. 두 개의 큰 다리 중간쯤에 있는 돌다리, 편리함은 물론 낭만과 운치를 더해준다.
내가 사는 쪽 산책로 주변엔 쥐방울덩굴 새순이 온통 초록으로 물들었다. 덩굴마다 곧 방울이 주렁주렁 달릴 것 같다. 그 곁엔 사각 지지대가 단장을 하고 있다. 마치 덩굴에게 ‘하늘 쳐다보며 잘 자라라. 내게 맘 놓고 기대봐.’라고 말하는 듯하다. 쥐방울덩굴에는 꼬리명주나비가 서식한다. 잡초가 나비의 생명을 돕는 것이다. 월동을 끝낸 꼬리명주나비 번데기는 쥐방울덩굴 새순에 알을 낳아 여러 과정을 거치면서 우화의 꿈을 키운다. “산책로에 있는 저를 쥐방울 조성지 안쪽으로 보내주세요.”라고 적힌 안내판에서 자연생태계가 훼손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을 읽는다. ‘쥐방울덩굴 조성지’와 ‘꼬리명주나비 서식지’ 팻말이 오늘따라 예사롭지 않게 보인다. 조성지를 따라 걷노라면 겨우내 땅과 한 몸이 되어 자신을 숨기고 있던 들꽃들이 일제히 몸을 일으킨다. 꽃밭 옆에는 주택가로 갈 수 있는 나무계단이 있다. 위로 벚꽃 가로수도 보인다. 이쪽에 사는 이들의 감성 세포는 늘 진초록에 물들어 있을 것 같다.
오늘은 돌다리를 건너볼 참이다. 나는 저쪽으로 가고, 저쪽 사람들은 이쪽으로 온다. 널찍한 돌이 일정한 간격으로 놓여있다. 하나씩 세며 건넌다. 졸졸졸 물소리 들으며 걸으니 보폭이 흔들리지 않고 마음도 차분해진다. 하나, 둘, 셋, 넷 …, 일흔한 개째, 마지막 돌다리를 건너니 노원구민이 된 기분이다.
직접 건너와서 보니 우리 쪽과는 다르게 천변엔 농구대가 있고 여러 종류의 운동기구가 놓여있다. 벤치가 많고 농구를 하는 젊은이들의 함성도 들린다. 자전거 길에서 달리는 페달도 힘차다. 건너편에 서서 바라보는 우리 쪽 풍경, 달라도 너무 다르나 낯선 듯 낯설지 않다. 오히려 가까이에선 못 보던 풍경을 새롭게 보니 그 또한 좋다. 내가 늘 다니던 길에서 가로수를 볼 때면 아래에서 위만 올려다보아 나무의 일부만 보였는데, 멀리서 보니 길게 띠를 두른 듯 숲이 모두 보인다. 부분이 아닌 전체를 보니 내 마음도 덩달아 넓고 깊어진다. 내 눈 가득 푸름이 들어차는 듯하다.
돌아오는 길에 돌다리 하나에 걸터앉았다. 돌다리가 양쪽 구민들의 경계를 허물고 이해와 소통을 이어주는 매개체 역할을 할 수 있을까. 이쪽과 저쪽이 서로 관심을 갖고, 상호 처지를 이해하며 오갈 수 있는 마음의 징검다리도 필요하지 않을까.
소통은 관계에서 나온다. 부모와 자식, 형제, 이웃, 사제, 선후배, 노사 간 등등 우리는 관계 속에서 살아간다. 관계가 잘 이어지려면 징검다리가 필요할 때가 많다. 이제 성인이 다 된 자식이지만 유달리 진로 때문에 방황하던 시간이 길었던 아들, 나와의 거리는 쉽게 좁혀지지 않았다. 어떤 디딤돌을 놓아야 할까. 이리저리, 끊임없이, 소통의 길이 열리기까지 나는 애간장을 태웠다. 세대와 가치관의 차이로 점철된 갈등들. 어떤 상황이 닥치더라도 ‘아들, 네 편에 설 수 있도록 애써볼 게’라는 무언의 신호, 사랑의 메시지만이 어지러운 파고波高를 넘을 수 있었다. 그 힘든 시기를 뚫고 나온 오늘, 깜깜했던 시간들이 이제 볕 바라기를 한다.
이웃과도 마찬가지다. 얼마 전 가족처럼 지냈던 옆집 형님이 이사 가고 새로운 이웃을 맞았다. 우리 집 반려견이 평소 복도에 지나는 낯선 사람을 보면 유독 많이 짖는다. 산책하려고 문을 여는 순간 옆집 아저씨가 순식간에 나오더니 강아지에게 입에 담지 못할 말을 했다. 나이가 한참 위인 나를 보면서도 눈을 부라렸다. “내가 더 큰 강아지를 사서 더 시끄럽게 짖어야 정신을 차리겠어요?” “구청에 민원 넣을 거예요.”라며 윽박질렀다. 그와 나 사이에 징검다리 같은 건 아예 없을 듯했다. 며칠 전에 하천을 흐르던 거친 물살과 물소리가 떠올랐다. 그의 거친 말투와 숨결이 꼭 그 흙탕물 같았다. 두려웠다.
당황한 마음이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어쩌지? 저녁 무렵에야 겨우 마음을 추슬렀다. 얼른 일어나 사과문을 쓰고 케이크 하나를 사서 옆집 문을 두드렸다. 서로 다른 두 구역을 이어주듯, 케이크가 아저씨와 나 사이의 가깝고도 먼 하천을 건너는 징검다리 역할을 해주기를 바라는 마음이 컸다.
할머니가 반갑게 맞아주셨다. 우리 사위가 그럴 사람이 아닌데 욱하는 성질이 있다며 오히려 어찌할 바를 모르셨다. 민망한 쪽은 내 쪽이고 잘못도 우리 집에 있다. 가족처럼 지냈던 형님이 많이 생각났다. 서로 강아지를 키우고 예뻐하다 보니 이런 문제가 생길 거라곤 상상하지 못했다. 새로 이사 온 분들의 심정을 미처 헤아리지 못한 잘못이 컸고 배려가 부족했던 탓이었다.
내 마음이 전달되었는지, 이웃끼리 심했다 싶었는지, 아저씨도 저녁에 음료수를 들고 우리 집에 와서 사과했다. 하루의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그 날로 강아지 목 수술을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병원에 상담하니 극구 반대를 해서 포기하고 차선책으로 짖음 방지 목걸이를 달기로 했다. 전기 충격요법이라 상당히 마음 아프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번 일로 옆집 입장이 되어보며 상대를 이해하고 그의 입장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 나와 아저씨는 승강기에서 둘이 만나도 어색하지 않고 마주치는 횟수가 늘수록 더욱 자연스러워졌다.
살다 보면 제각각의 사람들, 변화무쌍한 순간들, 돌풍처럼 불어오는 상황들을 마주하게 된다. 모든 것이 다양성에서 빚어지는 관계라 이해하면 살기가 수월해질까. 인간은 근본적으로 내가 네가 될 수 없고 네가 내가 될 수는 없다. 매 순간 조화와 부조화, 타협과 불협 사이에서 서로 멀리 있는 건너편 풍경이 되고 만다. 오죽하면 ‘타인은 지옥’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그만큼 세상사에서 벌어지는 간격을 좁히기는 어렵다는 말이 아닐까.
생각의 변화, 진심이 담긴 편지, 케이크 한 조각, 음료수 한 병이 징검다리가 된다면 팍팍한 삶에도 순풍이 불지 않을까. 마음의 골이 깊어지기 전에 징검다리가 필요하다. 둘러가다 보면 서로가 닿지 않을 수도 있고, 단절과 불통이 깊은 골을 만들면 끝내 빠져나올 수 없는 계곡이 되고 만다. 한여름 울창한 녹음방초도 순풍이 없으면 그 색깔과 향기는 퇴색할 게다.
돌다리에 걸터앉아 물에 발을 담그고 건너편 풍경을 다시 바라본다. 산들바람과 볕살에 힘입어 곧 쥐방울덩굴 위에 꼬리명주나비가 사뿐히 내려앉으면 좋겠다. 낯선 행인인 줄 알고 짖어대던 순돌이도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면 좋겠다. 왁자지껄 승강기에서 나는 관계의 소리가 이 하천에 넘쳐나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