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다운 맛 / 장미숙

 

며칠 전, 가까이 사는 친구가 커다란 봉지 하나를 건네주고 갔다. 무라고 하기에 처음에는 약간 귀찮은 생각이 들었다. 식생활이 워낙 단출하다 보니 음식 만드는 일에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런데 봉지 안을 들여다본 순간 눈이 번쩍 띄었다. 파릇파릇한 무청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무청 시래기 된장국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무청을 잘라내 무르게 삶았다. 뭉근하고 쌉싸름한, 담박하고 엇구수한 냄새가 집안에 가득했다. 익숙하고 친근하면서도 추억을 건드리는 냄새였다. 매년 이맘때쯤이면 시골 마당에서 맡았던 냄새는 오만가지 감정과 기억들을 깨웠다.

새파랗게 데쳐진 무청을 찬물에 담가 식혔다. 몇 끼는 거뜬하게 해결해 줄 자연의 맛 앞에 마음이 숙연해졌다. 이는 의식 깊은 곳에 내재한 본연의 순수함 같은 것이라고 할까. 온갖 첨가물이 제거된 오롯함, 그 깊이에서 우러나는 고유한 맛의 정감이었다.

워낙 양이 많아서 몇 덩이로 나눴다. 당장 해먹을 만큼을 남기고 나머지는 냉동실에 넣었다. 시골이라면 햇빛 낭창낭창 들어오는 처마나 빨랫줄에 주렁주렁 매달아 말릴 수 있으련만 마음뿐이었다. 남겨둔 무청을 알맞게 잘라 물기를 꾹 짰다. 냄비에 넣고 된장과 들깻가루, 바지락살과 마늘, 액젓을 넣어 조물조물 무쳤다. 그리고 다글다글 볶았다. 뒤이어 쌀뜨물을 자작하게 붓고 미리 준비해둔 멸치육수를 넣어 바특하게 끓였다. 곧 편안하고 정다운 냄새가 우러나기 시작했다.

보는 것만으로도 맛을 알 수 있는 치유의 음식 앞에 그리운 얼굴들이 떠올랐다. 낡은 두레상이며 투박한 국그릇, 김을 뿜어대던 가마솥이 눈에 아른거렸다. 그 옛날, 김장과 더불어 무청 시래기는 겨울을 나기 위한 중요한 먹을거리였다. 나는 엄마가 끓여주던 무청 시래기 된장국을 특히 좋아했다.

큰 그릇에 된장국을 퍼 놓고 혼자 식탁 앞에 앉았다. 울컥, 감정 한 덩어리가 눈물방울로 솟아났다. 정다운 사람들은 옆에 없지만, 기억만은 충실히 남아 함께 해주었다. 내게는 최고의 만찬이었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