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촌의 여름은 수십 가지로 어우러진 녹색으로 전개된다. 수십 가지가 아니다. 수백 가지의 녹색인지도 모른다. 녹색은 녹색이지만, 백훼白卉의 녹색이 모두 다르다. 감나무와 밤나무, 콩, 고구마, 호박잎의 녹색이 엇비슷하지만 서로 다 다르다. 어떤 것은 심록深綠인가 하면, 어떤 것은 담록淡綠이다. 김서방 논과 박서방 논의 색깔이 다르고, 한 나무라 해도 새로 핀 눈록嫩綠과 묵은 농록濃綠이 완연히 다르다.
녹색은 아무리 보아도 싫증을 느낄 수 없다. 그것은 날로 싱그러워진 생명의 빛깔이요, 젊음의 색깔이기 때문이다. 볼수록 눈이 맑고 기분도 쇄락해진다. 농촌의 들판은 잔잔히 물결 이는 녹색의 바다요, 바다에 언뜻언뜻 보이는 노란 빛깔이 띄엄띄엄 우리의 눈을 밝혀준다. 호박꽃이다. 호박꽃은 농촌의 대표적인 꽃이며 순실純實한 농부들의 꽃이다. 이른 아침, 쟁기 메고 논밭으로 나가는 농부들을 반갑게 맞아준다.
호박꽃은 아침의 꽃이다. 어둠 속으로 별똥별이 빛화살로 내리고 반딧불이 떠도는 짧은 여름밤이 물러가면, 청포도 맛의 아침이 아무도 몰래 수숫대 위에 앉는 잠자리 날개 빛으로 밝아온다. 나뭇잎과 풀잎이 수만 개의 진주알로 눈뜨는 여름날 아침은 붉고 하얀 석류알처럼 청신하기만 하다. 그리고 이슬 젖어 무언가 감격하여 울고 난 듯 함박 피어난 호박꽃이 막 솟아오르는 해를 바라볼 때 그 얼마나 아리잠직하고 눈부신가? 이 호박꽃이 농촌의 아침을 평화롭게 활짝 열어 놓는다.
언젠가 해인사海印寺 대웅전에서 뵈온 금불金佛은 넉넉한 미소를 띠고 있어 늘 내 가슴에 남아 있었다. 그러나 두 손을 모아 합장하는 듯한 봉오리에서 갓 피어난 호박꽃은 그 금불의 미소를 훨씬 넘어 다만 황홀하게 활짝 웃음 지어,, 보는 이의 눈과 넋마저 황홀하게 만들어 버린다. 농촌의 푸르름 속에 샛노란 호박꽃이 없다면 농촌은 얼마나 허전해질까? 울타리에 지붕에 언덕배기에 밭두렁에 개울가에 산비탈에 아무 데서나 돌보는 이 없어도 호박꽃은 조금도 움츠림 없이 순란하다.
호박꽃은 장미나 튤립처럼 화려하지 않다. 그런 꽃들처럼 겉멋만 풍겨지는 것이 아니라 볼수록 가슴이 밝아오는 순금빛 꽃이다. 시원스럽게 큰 오각형의 꽃송이는 지난밤 하늘에서 떨어진 별똥별이 그대로 꽃으로 피지 않았는지, 호박꽃은 고상한 이의 거실이나 정원에서 사랑을 받는 꽃과는 거리가 멀다. 호박꽃은 청아하고 요나한 난蘭이 아니며, 책 읽는 이의 설창雪窓에 일영미향一影微香을 던지는 매화도 아니다.. 서리 속에서도 의연히 고취高趣를 뽐내는 국화 또한 아닌 것이다.
호박꽃은 농촌의 들판 아무 곳에서나 흐드러지게 피는 농부들의 꽃일 따름이다. 호박꽃의 어여쁨은 야생적인 순수함에 있다고나 할까. 화장을 시키는 듯 누가 손질하여 가꿈이 없이, 소박하고 해맑은 얼굴이 티없이 순일純一하기만 하다.
호박꽃을 바라보면, 아침을 열고 오는 종소리가 들린다. 종소리에 묻어오는 번쩍번쩍 빛나는 아무도 침범하지 못할 황금빛 평화와도 만난다. 그렇다. 호박꽃은 그 모양이 빛나는 별이요, 황금빛 종鐘이다.
호박꽃을 보고서 다른 욕심은 하나도 일어나지 않는다. 꽃을 꺾고 싶다거나 한 그루 얻어오고 싶은 그런 꽃이 아니라, 아침마다 들판으로 가 호박꽃의 그 순박한 즐거움을 얻고 싶은 것이다. 호박꽃은 오만도 없고 긍지도 없다. 겸허하고 경건하다. 착한 얼굴이 진솔한 농부이거나, 불타는 모습이다.
이른 아침 들판에 나가보라. 밤사이에 호박덩굴은 한 뼘이나 더 뻗었고, 귀여운 덩굴손은 나뭇가지나 풀잎들을 붙잡고 무슨 말인가 속살거리고 있다. 그리고 갈매빛 우산을 펴 들은 잎들은 줄지어 어디로 나들이 가는 것일까. 경쾌하게 노래마저 부르고 있다. 맑은 대기를 호흡하면서, 졸졸졸 흐르는 개울물을 따라 가보고, 풀밭의 뱀과도 만나 인사하는 호박꽃이다. 개구리를 넓은 잎으로 올려 떠받쳐 주고, 풀벌레들과 이야기하면서 풍성한 대지의 품속에서 떼지어 허벅지게 자란다. 장난꾸러기처럼 울타리를 살금살금 기어올라 매미 이야기 전해주는 바람결에 귀 기울이고, 옥수수에게 올라가 옥수수수염을 만져 보기도 한다. 호박은 후둑후둑 떨어지는 소나기로 더 자라고, 산숲에서 우는 부엉이 소리, 논에서 개굴거리는 개구리 노래 듣고 해를 우러러 발돋움한다.
호박꽃은 넓은 아량과 포용성을 지니고 있다. 가시덤불이나 자갈밭, 탱자나무 울타리도 따뜻하게 감싸주고. 쇠똥도 웃으며 가슴으로 안아주는 호박꽃. 농부들이 논밭으로 나가는 이른 아침, 구름 속에서 거꾸로 떨어지며 부르는 종달새 노래로 피어난다. 어떤 때는 황금빛, 어떤 때는 보랏빛, 분홍빛인 저녁놀을 받으며 농부가 집으로 돌아갈 때, 호박꽃은 다소곳이 절하듯 고개를 수그린다. 호박꽃은 소박하고 순량淳良하여 어딘지 연약한 듯해 보이나 어디에라도 뻗을 것만 같은 호박 줄기를 보면, 쟁기질하는 농부의 구릿빛 팔뚝을 느낀다. 대지 위를 기어오르는 그 줄기에는 금시라도 푸른 맥박이 툭툭 뛰는 것 같다.
호박꽃은 화장이나 한 날렵한 여인과는 거리가 멀다. 소 먹이려 가 풀 이슬에 치마가 젖고, 논밭에 나가 김매며, 머루를 따 술도 빚을 줄 아는, 솔잎 향내 은은히 풍기는. 이미 아이도 몇 낳아 기르는 산골의 중년쯤 되는 여인이다. 농부들의 손길이 닿는 산야의 어느 곳이나 농부를 맞아 주는 이 호박꽃이야말로 농촌의 꽃이요, 농부들의 꽃인 것이다. 그리고 가장 한국적인 꽃이라 할 것이다.
호박꽃이 피지 않은 우리나라의 농촌을 어찌 상상인들 할 수 있을까. 예로부터 우리네 농부들은 호박꽃을 사랑하였다. 으레 봄이면 울타리 밑이나 논두렁, 잡초더미 아무 곳이나 호박 구덩이를 파고 퇴비를 듬뿍 넣어 호박씨를 두세 알 넣어둔다. 그렇게만 하면 호박은 몇 번의 봄비에 싹을 트고, 뿌리 하나에서 뻗은 줄기는 울타리나. 땅 위를 성큼성큼 기어오르는 것이다. 정말 호박덩굴의 성장처럼 발랄한 게 어디 있을까? 얼마 아니 가서 호박순은 줄기에 노란 봉오리를 맺고 호박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호박꽃은 아침에 피어 정오 때쯤이면 곧 시들어 버린다. 하지만 봉오리에서 연이어 피어나는 새 호박꽃은, 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줄기차게 핀다. 농가의 울타리나 남새밭에는 으레 호박꽃이 피기 마련이지만 호박꽃이 피지 않는 집은 어쩐지 허전한 느낌을 준다. 그래서 농부는 언제나 울타리에 호박덩굴을 올려놓아 단장하는 것을 잊지 않는다.
농사철 동안 밤낮으로 호박꽃이 피면 그 농가는 이들 호박꽃으로 어쩐지 평화스럽고 안온하며 순탄해 보인다. 모든 것이 풍성하고 느긋해 보인다. 한 번 호박꽃 안을 들여다 보라. 하나의 큰 꽃술이 혀를 내놓고 방글방글 웃는 아기처럼 천진스럽지 않은가. 호박꽃은 다른 꽃과는 달리 금방 친해져 버리며 인정미가 넘쳐흐른다. 벌들은 다른 꽃에겐 꽃가루를 조금씩 찍어가지만, 호박꽃은 마치 주인이 대문 안으로 들어가듯이 날아들어 꽃가루를 흠뻑 묻혀 나온다.
호바 꽃은 매우 능동적이다. 보고 싶은 곳, 가보고 싶은 친구에게로 뻗어가 활짝 웃으며 덩굴손을 내밀어 악수를 청한다. 일 년 내내 한 송이 꽃도 못 피우는 미루나루를 칭칭 타고 올라가 그대로 꽃이 되어 준다.
들판에 어느덧 늦더위가 물러가고 삽상한 소슬바람이 온갖 열매를 붉히는 가을이 오면 들판의 녹색은 이제 차츰차츰 누렇게 변하고 가고 만다. 들판뿐만이 아니라 나무도 산도 노랗고 빨갛게 바뀌어 버리는 것이다. 농부는 이제 즐거운 마음으로 들판에서 누렇게 변한 농작물을 추수하기에 바빠진다. 추수가 끝나 꽉 찬 들판이 비어 허전할 때쯤, 농부는 달덩이처럼 둥글게 익은 호박을 지게에 지고 느긋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한국의 푸름 속에 순금으로 빛나는 호박꽃! 영원히 농부와 같이 호흡하는 농부들의 가슴속에 시들지 않는 한국의 꽃인 호박꽃, 우리나라 산야에는 무수한 호박꽃이 농부들의 별이 되어 피어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