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탁(語拓) / 제은숙
훤칠한 붕어가 목상에 누웠다. 입을 벌리고 희멀건 눈을 뜬 채 초점도 잃었다. 목욕재계 마치고 꼼꼼히 물기를 닦았으나 황망히 떠나올 적 입었던 비늘옷 그대로다. 몸은 축 늘어졌으되 유선형의 몸매가 매끈하고 지느러미는 한껏 펼친 모양으로 줄에 엮여 고정되었다. 거칠게 치뻗은 모습이 펄떡거렸을 생명의 움직임을 감지하게 한다.
가지런한 비늘 위로 차가운 물감이 덮인다. 생전의 몸피와 흡사한 색으로 배합되었다. 붓으로 드문드문 안료를 올리고 색깔의 틈이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공을 들인다. 지느러미 사이도 놓치지 않고 촘촘히 공간을 채운다. 이승의 마지막을 곱게 화장化粧시키어 생기를 불어넣는다. 몸단장이 끝나면 물을 뿌려둔 정갈한 한지를 덮어 꼼꼼하게 누른다. 마르기를 기다리면 겉피에 남아있던 습과 종이의 물기가 어울려 이미 제 세상을 떠나온 물고기를 지면 위에 고스란히 옮겨놓을 것이다. 화면 속에서 펼쳐지는 어탁魚拓의 과정은 염습과 비슷하여 눈을 뗄 수 없는 엄숙한 기운이 감돈다.
강을 누빌 때 붕어의 지느러미는 나비의 날개와 같았다. 부드럽게 펼쳐지고 모아지기를 거듭했고 휘고 꺾이어 온 몸에 피돌기가 일었다. 유속이 느린 곳에서는 천천히 팔랑거리며 물의 온기를 누렸고 여울목에 닿아서는 가슴에 바짝 붙여 물살을 거침없이 거스르기도 했다. 붕어 떼가 저마다의 몸짓으로 물결을 수놓을 때 사람들은 어김없이 물속 군무에 낚싯대를 드리웠다. 물 밖으로 무참히 끌려나왔을 때는 성난 등지느러미를 있는 힘껏 세워보았지만 그럴수록 매료되는 낚시꾼들로 돌아갈 길은 사라져 버렸다. 고운 물나비는 이내 캄캄한 얼음통 속에 처박히고 말았다.
나는 이따금 언어를 낚는다. 딱히 정해진 채집 장소는 없지만 여기저기 어슬렁거려본다. 사람의 말이 떠도는 곳이라면 어디라도 적당하다. 책을 뒤적이다 발견하기도 하고 영화를 보며 눈에 담고 노래를 따라 부르며 입으로 되새김한다. 가끔은 어린 아이의 입에서 천사 같은 말이 튀어오르는 광경을 목격하고 귀한 천상의 언어를 포획한다. 산 채로 잡고 싶을 때는 복잡한 시장으로 나선다. 활어活語는 유연한 지느러미를 펼치고 은빛 비늘을 반짝이며 사람들 사이를 재빠르게 헤엄친다. 나는 행인의 등 뒤로 숨는 순간을 놓치지 않고 잽싸게 낚아채어 작업실로 데려온다. 신선도를 유지하기 위해 기록하는 일도 잊지 않는다. 그러나 미처 적지 못하고 머릿속에 넣어둔 낱말들은 다른 말과 뒤엉켜 생기를 잃고 만다. 아예 흔적 없이 도망가 버리는 것들도 허다하다.
작업실로 붙잡혀온 말들은 하나하나 닦아서 붕어의 비늘처럼 가지런히 열을 세운다. 어탁語拓을 시작한다. 본을 뜨는 방법은 다양할 터인데 내가 갖춘 도구는 연필과 노트 혹은 키보드와 모니터가 전부이다. 연필로 하나하나 새기는 작업은 초보자에게는 힘겨운 일이다. 언어의 문법과 구조를 능숙하게 알아야 하고 손가락 힘과 끈기도 적잖이 갖추어야 하는 고된 노동이다. 일이 끝나면 고치기도 쉽지 않아서 매 순간 심혈을 기울여야 실수하지 않는다. 키보드로 꾹꾹 찍는 탁拓법은 고수 흉내를 내보기에 적당하다. 어려운 문자의 해석이나 짜임은 기계 문명이 도와주고 순서를 바꾸거나 다시 쓰기에도 수월하다. 다만, 글자가 살았을 적 무게를 가늠하기 어렵고 색깔과 순서와 스미는 시간까지 스스로 정해야 하는 까닭에 완성하기는 매한가지로 힘들다.
눈에 띄는 묵직하고 거대한 어휘를 골라낸다. 아직 누구도 본뜨거나 내걸지 않은 희귀종이면 더 만족스럽다.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감당하기에 버거운 대물이라는 현실을 맞닥뜨린다. 습한 정도를 조절하지 못하거나 여기저기 분칠을 더하여 번지기 십상이고, 지나치게 마르거나 칠이 덜 된 곳은 끝끝내 허점으로 남는다. 허방을 채우기에 식견은 얕고 허술하여 더 이상 옮기지 못한 채 포기하고 만다. 그 보다 조금 가벼워 보이는 화소 두 개를 잡는다. 이럴 때는 서로가 썩 어울리는지 깊이 고민해야 한다. 겹칠 지점을 찾았다면 종이 위 어디에 박을지도 고심해야 한다. 자칫 어물쩍거리기라도 하면 외따로 떨어지거나 꼬리지느러미가 잘리는 형상이 된다. 물고기도 언어도 꼬리가 없으면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욕심을 내어 서너 개를 택했을 때는 화폭이 쉽사리 꽉 차지만 서로 긴밀하게 연결하지 못하여 따로 노는 꼴이 되고 만다. 감성돔 옆에 산천어를 놓고 그 사이에 피라미를 끼워 엉터리 연못을 만들기 일쑤다.
어느새 화면 속 물고기를 둘러쌌던 종이가 말랐다. 껍질과 혼연일체가 된 한지를 벗겨내면 붕어의 거죽이 모조리 딸려온 듯 생생한 무늬가 돋아 있다. 그러나 눈동자는 따라 오지 못했기에 영혼을 빼앗긴 듯 기괴하다. 눈을 그려 넣어 살아있는 모습을 연출하지만, 유영하는 등지느러미가 그토록 가시 돋친 듯 펼쳐진 외관이 수상하고 배지느러미 위치 또한 맞지 않아 어색하기만 하다. 입체의 물고기를 평면에 옮겼으니 형체가 멀쩡할 리 없고 반만 본을 떴으니 생전에 꾸었을 꿈과 고뇌가 옮겨왔을 까닭이 만무하다. 붕어가 숨쉴 때만큼 활기차거나 고통스러울 수도 없다. 물고기의 정령은 지느러미를 날개 삼아 종이 밖 세상을 날고 있는데 사람은 한낱 작은 틀에 겉모습만 묶어두려 하였을 뿐. 탁본에 서툰 출연자가 급기야 배지느러미를 잘라 따로 색을 입힌 뒤 이어 찍는다. 그럼에도 칭송받는 어탁魚拓 작품이 있는 까닭은 물고기의 생을 진정으로 담으려 한 흔적이 미세한 떨림으로 남아 있어서가 아닐까.
신선하다고 여겼던 문장도 발품을 팔아 수집한 말도 온전히 내 것이 될 수 없었다. 억지로 눈을 그려 넣고 지느러미를 오려 붙였지만 말들은 종이 밖에서 내가 만든 어설픈 시늉의 실체를 꿰뚫어 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내가 찍은 어탁語拓에는 말 너머의 반쪽이 깃들지 못했다. 그저 열을 세우고 종이를 채우기에 바빴던 뼈와 살점이 없는 비늘가죽이었다. 때로는 심해까지 내려가 보아야 하고 수평선을 끌어당겨 격랑의 소리를 들어 보아야겠지. 말을 가두려 하지 말고 내가 그 속으로 철버덩 뛰어들었으면 좋았을 것을. 새로운 본을 뜨려 모니터를 물끄러미 바라본다. 갇혀있던 엄중한 말씀 하나가 깊고 그윽하게 꼬리지느러미를 흔들며 내게로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