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메기, 그 바람의 유랑 / 하재열

 

글을 쓰면 세상일에 대들고 싶은 의식이 꿈틀거린다. 내 얼굴에 물음을 던지는 일이다. 한편의 글 상이 떠오르면 눈이 아프고 머리가 어질하도록 달려든다. 하지만 붙잡은 글은 장타령 노랫가락을 풀고 난 각설이의 내민 손이 허하듯 그렇다. 홀로 흔드는 글 품바다.

글 쓰는 연유를 헤집으려니 무춤해진다. 밭둑길에 자욱했던 아지랑이를 잡는 것 같다. 어쨌든 뭔가 쓰고 싶었다. 이 쓰고 싶었다는 것은 유년부터 내게 어룽대었던 아지랑이 그림자 같은 거였다. 그것은 내 고향의 산천이 내게 심은 심상이요, 우렁각시 이야기를 실타래처럼 풀어내시던 할머니의 품이었다.

내 고향은 경주에서 오십여 리 떨어진 산골 심곡深谷이다. 사랑메기라는 산 고개에서 내리뻗은 산자락이 소쿠리처럼 감싼 십여 호 좀 넘는 작은 마을이다. 앞엔 심곡천이란 넓은 내가 위쪽 산협에서 흘러나와 들판을 가로지른다. 경주의 서쪽을 휘돌아 영일만으로 흐르는 형산강에 합류하는 지류다. 사랑메기 고갯길과 심곡천에 내 유년이 아로새겨졌다. 십 리는 되는 먼 초등학교를 하천의 자갈길로 고무신을 끌며 풀숲과 내를 건너다녔다. 경주의 중고등학교도 같은 길로 걸어 학교 옆 기차역에서 통학을 했다. 아득한 자갈밭과 푸른 물길, 둑길의 미루나무, 들판과 사과밭의 풍광, 멀리 산모롱이를 도는 기차의 기적소리, 그리고 꼴 베고 소 먹이러 오르내렸던 사랑메기 고갯길이 내 문학의 모태다. 〈사랑메기〉란 글에서 이렇게 썼다.

왜 사랑이란 말이 산 고개 이름에 붙여졌는지 이순에 들었건만 지금도 모른 채 산다. 아무도 이야기를 해준 적이 없다. 긴 겨울밤 할머니가 베갯머리에서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그게 무서워 움츠리는데 사랑메기에도 도깨비와 호랑이가 산다고 했다. 한밤중 앞산, 뒷산을 오르내리는 푸른 불빛도 도깨비불이라고 했다. 그 고개에는 진달래가 피는 꽃 대궐이 있다고도 했다. 잠결에도 더 뚜렷이 들린 건 사랑메기를 지나 산을 넘고 또 넘으면 어머니가 산다는 성내城內가 있다는 말이었다.

청보리밭이 샛바람에 희끗희끗하게 흔들리던 봄날, 아파서 한참이나 학교에도 못 갔다는 기억이 어렴풋하다. 보리밭이 짐승 소리를 냈다. 그쪽 산을 타고 넘어온 바람이었다. 내 심한 배앓이는 별복이라고 했다. 할머니는 잠도 자지 않고 애타게 중얼대며 배를 쓸어내리다가는 뒤 각단 점쟁이 ‘짝부리 할매’를 부르곤 했다. 부엌칼을 내 목에다 대고 물 한 사발 놓인 밥상 위에 콩을 뿌리며 흥얼대는 주술에 잠이 들곤 했다. 사랑이란 뜻을 알 리 없었지만 사랑메기엔 내 두려움과 그리움이 배어 있고 외로움이 노을처럼 스며들어 있었다.

나는 외톨이일 때가 많았다. 경주에서 교편 잡았던 부모와 떨어져 촌에서 더 오래 자랐다. 손자 하나는 옆에 두려 했던 할아버지의 원이었다고 했지만, 비좁은 접방 살림에 5남매를 다 거둘 수 없어 둘째인 나를 떼어 놓았던 어머니의 아픔은 뒤에야 알았다. 할머니 팔베개에서 잠을 보채며 낯설어지는 어머니 얼굴이 그래도 그리웠다. 중학, 고등학교에서도 자꾸만 홀로 떠도는 내가 되었으니 몸에 밴 갈 길이었나 싶다.

그런 내게 학교 도서관은 안온한 진지의 터였다. 친구와 어울리기보다 책이 더 좋았다. 국내외 문학책을 잡히는 대로 읽어나갔다. 다 알아먹지를 못 해도 왠지 뿌듯했다. 수업 시간에도 몰래 꺼내 읽다가 선생님에게 혼쭐나기도 했다. 그래도 몸살 하듯 책을 뒤적이며 글의 품에 젖어갔다. 그게 좋았다. 천년 고도의 땅 곳곳에 서린 문예적 기운도 책으로 이끄는 힘이 되었다.

 

영문학을 공부하겠다며 지원했던 대학에 낙방했다. 교과 공부는 밀쳐두고 어머니 나무람대로 헛책만 봤던 벌이라 여겼다. 다른 대학 국문학과에 들어갔다. 읽었던 책과 끈이 닿은 셈이다. 대학 시절 문학의 뜻은 나아가지 못했다. 대구로 이사와 시작한 선친의 사업이 여의찮아 가세가 내려앉았다. 공부는커녕 지원하여 군에 입대했고 제대 후엔 용케도 대구시의 공무원이 되어 정년까지 그걸로 밥벌이했다.

관공서의 무거움 속에서 이따금 문학의 언덕을 힐끔거렸다. 취향은 어쩔 수 없었다. 일의 틈새에 소설을 읽고 시집을 뒤적였다. 이어령 선생의 문화비평 글, 법정 스님의 글과 같은 세상 바람을 꿰매는 글에도 달리 심취했다. 내 글을 붙들려 다시 대학 강의실을 찾아 시론, 소설론을 더듬기도 했으나 녹록지 않았다. 일 좀 하는 친구라는 평에 올라탄 몸과 마음은 정녕 하고 싶은 건 외면해야 했다. 아렸다. 때론 기울어진 공무의 갇힌 말들과 부딪쳤고 불의한 나랏일 앞에 갈등하며 고심했다. 혼자 돌팔매 던지듯 일기 글을 끄적대며 마음을 덮었다.

일에서 물러났다. 글을 써보고 싶었다. 왜관 구상문학관에서 시를 가르치는 친구의 강좌에 몇 번 얼굴을 내었다. 대학 초년, 시를 써본다며 우상을 쫓듯 선술집으로 쏘다니며 어울려 들떴던 전력에 끌려서다. 부유하는 언어의 파편들이 내겐 어질했다. 번민 끝에 수필을 쓰기로 했다. 소설에도 마음을 냈는데 더 짧은 무기를 쥐고 유목의 민첩한 말처럼 글 초원의 변경을 휘돌고 싶었다. 일찍이 1970년대 자크 에르만이, 1990년대 앨빈 커넌이 ‘문학의 죽음’을 거론한 이래 경고등이 수시로 울린다. 문학의 효용성에 대한 담론이 이어진다. 디지털문화의 해일에 휩쓸려 융숭했던 으뜸의 자리가 흔들린 지 오래다. 문인의 손끼리 주고받는 품앗이 글로, 자기 위안의 여흥 문학으로 버거운 숨을 쉰다고 하면 과한 말이겠는가. 영화와 드라마에 열광하고 트로트 가락에 흥청거리는 어깨춤 사이에 문학은 이제 1만 권만 팔려도 베스트셀러가 되는 현실이 그렇다.

수필을 왜, 뭘 써야 할지보다 어떻게 써야 할지 고뇌했다. 다듬이 같은 글로 세상을 두들겨보고자 했는데 파장 같은 마당에 내지른 혼자의 고함으로 울렸다. 어느 장르도 떠난 독자를 붙들기엔 역부족의 시대 상황이 아리다. 품바의 곤한 외침 같다. 그래도 내 글을 흔들어 문학 장터의 웅성거림을 붙잡아보려는 간절함이 크다.

하여 다르게 쓰고 싶었다. 쉬 될 일이 아님을 안다. 글 그릇의 틀을 으깨가며 세상일을 쟁여 넣어보려 안간힘의 용을 쓴다. 글에 원래 장르가 구분되어 있었던 듯 경계를 들먹이는 일에 늘 심통했다. 문학을 더 가두는 일이라 여긴다. 허구의 세상 언어, 그 얼굴을 불러와 내 글의 밭을 더 넓게 벼리려 했다. 이른바 어름의 선을 문지르며 새 터에 달구질을 하고 싶다.

시를 따온 수필, 소설을 따온 수필, 희곡을 따온 수필을 다듬는다. 상상과 풍자와 해학으로 확장된 땅에 더 곡진하게 시대를 담아보려 한다. 박수 소리도 들리지만 몇 사람의 독자라도 더 고개를 끄덕일 글을 쓰려 바둥댄다. 수필을 따온 시, 수필을 따온 소설도 고개를 내밀어 죽지 않을 문학의 지평을 함께 받쳐 들기를 소망한다. 할머니의 우렁각시, 호랑이와 곶감 이야기는 오늘로 치면 통섭의 장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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