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자꾸 오는 것이었다* / 이운경
-토산못에 대한 이야기-
토산못에 노을이 내려앉는다. 못둑 너머로 보이는 서녘 하늘에 한 무리의 새 떼들이 날아간다. 흑백으로 떠오르는 토산못의 풍경은 내 무의식과 육체에 깃들어 있다가 미명 속에서 하나둘씩 형체를 드러내는 물체처럼 되살아난다. 실체가 없는 그림자를 쫓아가듯 나를 찾아 나선다. 못둑에 도열해 있던 큰 나무가 환영처럼 떠오른다. 작은 여자아이 하나가 단발머리를 나풀거리며 동무와 같이 못둑을 걸어간다. 이 못에서 멱을 감고 스케이트를 타던 아이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토산못은 내 생의 수원지 혹은 뿌리의 은유이다.
내 의식 속 유년기의 공간은 빛나는 폐허다. 생의 기저를 이룬 공간에 대한 천착은 파편화된 시간에 대한 복원작업이다. 시간에 매몰된 기억을 하나씩 건져 올려 꿰매고 연결하는 일을 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최근이다. '옛날은 가는 게 아니고 자꾸만 오는 것'이라는 시구를 발견하던 시점부터다. 솔직히 몇 년 동안 낡은 언어와 진부한 감상이 직조된 회고조의 글쓰기에 질려있던 참이다. 하지만 나도 늙음을 향해 간다는 자각은 냉혹한 진실이 아닌가. 생의 비등점에서 끓어오르는 비애가 목까지 차오르면 유년기의 고향을 떠올린다. 그곳은 무쇠 난로의 온기처럼 따스하다.
토산못은 내 고향 경산 진량에 있는 저수지다. 지층이 청석돌이라 물이 귀해 저수지가 많은 고장이다. 토산못은 대구 근교의 낚시터로도 유명했지만, 마을 사람들에게는 논농사에 필요한 물을 대는 중요한 수원지였다. 그뿐만 아니라 마을 아낙들에게는 공동 빨래터였으며, 아이들에게는 중요한 놀이터였다. 지금은 일부가 매립되어 예전보다 크기가 줄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마을 앞산에 골프장이 들어서기 전까지 토산못에는 가시연꼿, 물밤, 말나물 등이 자랄 정도로 맑은 물이 그득했다. 못둑에는 아름드리 물버드나무가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했고, 마을 사람들에게는 중요한 삶의 터전이었다.
바다를 처음 본 것이 초등학교 6학년 수학여행 때였다. 그때까지 토산못이 내게는 바다보다 더 크고 넓었다. 억울하게 죽은 아기 귀신이 다른 아이를 잡아간다는 속설이 난무하던 시절, 토산못에는 익사사고가 잦았다. 여름방학과 얼음이 녹을 무렵 동네 아이들이 못에 빠져 죽었다. 어머니는 우리 집 형제들을 별나게 단속했던 탓에 수영을 못했다. 무더운 여름날 아이들은 낡은 팬티만 걸치고 세숫대야를 앞에 쥐고 쫑대라 부르는 보 근처에서 헤엄을 치면서 놀았다. 겁이 많았던 나는 나무 그늘에 앉아 줄지어 기어가는 개미를 보거나 그것도 심심하면 풀각시놀이를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봄볕이 도타워지면 못둑에 연둣빛 풀이 돋아났다. 봄이 짙어지면 아이들은 간식으로 삐삐순(삘기순)을 뽑아 먹었다. 피막을 까면 나오는 연한 새순을 먹으면 단맛이 났다. 먹고 나면 입안에 풀 향기가 가득했다. 초여름에 손이 미처 닿지 못하는 풀숲에 숨어있던 산딸기를 향한 유혹은 얼마나 강렬하던가. 못둑 아래 수로 주변에 노란 미나리아재비꽃이 지천으로 피어나면 논에도 파란 모들이 바람에 출렁거렸다. 못둑 아래 수로에서 아이들은 구멍이 뻥 뚫린 속옷으로 고기를 잡았다. 까만색 거머리가 내 다리에 붙어 하얀 다리 위로 흘러내리던 새빨간 피는 선명한 색상의 대비로 더욱 무서웠다.
어느 해 여름 큰물이 졌다. 초등학생 남자아이가 하굣길에 물이 철철 흘러넘치는 물마루를 건너다가 물에 휩쓸려 떠내려갔다. 물에 떠내려가는 아이를 본 동네 어른이 용감하게 뛰어들어 아이를 구했다. 그 아이는 우리 반 영식이었다. 3대 독자 외아들이 물에 떠내려간다는 소식을 들은 영식이 엄마가 얼굴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어 달려왔다. 다음날 영식이 엄마는 팥 시루떡을 해서 동네에 돌렸다. 밤이 되면 물마루는 동네 아낙들과 아이들의 물놀이장이자 피서지가 되기도 했다. 깜깜한 어둠 속을 날아다니던 왁자한 소리가 사무치게 그립다. 그날 밤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질 듯 반짝였다.
겨울이면 토산못은 스케이트장으로 변했다. 중학교 2학년 무렵 아버지가 동생과 내가 같이 신을 수 있는 스케이트를 사주었다. 나는 혼자서 넘어지고 비틀거리며 스케이트를 익혔다. 나는 날마다 토산못으로 나가 스케이트를 탔다. 내가 좋아하는 남학생을 보기 위해서였다. 사춘기의 첫사랑이었다. 내 시선은 고동색 털실로 짠 스웨터를 입고 스케이트를 타는 그 아이만 쫓아다녔다. 한 번도 말을 붙여보지 못했지만, 봄날의 아지랑이 같은 울렁거림이 얼음판에서 피어올랐다. 그해 겨울 나는 몇 줄 안 되는 내 사랑의 이력서에 첫 줄을 썼다.
성장기의 공간과 그 공간에서 만난 몇 개의 풍경은 흩어진 기억들을 모아 입체적으로 복원시켜 준다. 그 첫 번째 공간이 토산못이다. 다행스럽게도 토산못은 아직도 고향에 남아있다. 세월이 흐르는 동안 토산못의 풍경은 변했다. 가장 안타깝고 아쉬운 것이 못둑의 나무들이 모두 사라진 것이다. 그 나무가 만들어주던 그늘의 넉넉함과 그 사이를 불어오던 바람의 결은 아직도 생생한데 말이다. 여름날 해가 질 무렵이면 나는 자주 토산못 둑을 걷고 싶다는 갈망에 시달린다. 그때 어렴풋하게 다가오던 엷은 비애감은 나를 지배하는 근원적 정서로 남아있다.
본래 생이란 사막을 걸어가는 낙타의 보행처럼 지난하고 완강하지 않던가. 그 길에서 가끔 돌아보는 유년의 시공간은 감미롭고도 선명하다. 유년기는 식물성의 시간이다. 경쟁이나 생존의 절박함이 없는 무균실과같은 시간이기에 순결한 자연으로서 나를 만날 수 있다. 존재와 공간은 운명적으로 엮어진다. 그 공간에 피어나던 작은 풀꽃 같던 아이가 자라 어른이 되고, 늙어간다는 사실은 슬픈 진실이다. 나를 찾아 떠나는 여행은 쓸쓸하지만 감미롭다. 실존적 삶에 매장당한 기억과 공간을 탐사하는 일은 미래의 나를 맞이하는 준비이기도 하다. 옛날은 가는 것이 아니라 자꾸 오는 것이기에.
*이문재의 시 「소금 창고」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