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도道 / 장미숙
색이 터졌다.
이른 아침, 갈색 화분에서 잎 하나가 고개를 뾰족 내밀었다. 새끼손톱만큼이나 자그마한 싹이다. 날 때부터 초록 옷을 입은 싹은 흙 속에서 단연 돌올하다. 흙의 진통은 언제부터 시작되었을까. 눈치채지 못하게 생명을 잉태한 후 조용히 품고 있었나 보다. 큰일을 하고도 짐짓 태연한 모양이라니, 흙의 몸에는 신비로운 비밀이 깃들어 있는 게 분명하다. 갓 태어난 초록은 수직의 상승을 꿈꾸는 듯 너볏한 모양새다.
소생의 계절은 흙의 아우성으로부터 시작된다. 뿌리의 움직임에 땅속은 분주해지고 대지는 서서히 몸을 연다. 겨우내 웅크리고 있던 안온한 음지를 박차고 모험 속으로 뛰어든 색들은 여리지만 당차다. 봄은 기다림과 어울림의 계절이다. 기다림 속에는 봄을 봄답게 하는 초록의 존재가 있다. 그 기운을 흠모하여 합일하고 싶은 사람의 욕망이 계절을 부르고 피어나게 한다. 봄의 시작을 알리는 건 바람도 햇빛도 아니다. 밭두렁이나 논두렁에 돋아나는 작은 생명이 봄의 전령이다.
신이 초록을 우주의 바탕색으로 빚어놓은 건 탁월한 선택이다. 빨강의 지나친 개성이나 노랑의 애매모호한 흐릿함은 초록이 가진 품의 넓이에 미치지 못한다. 겨울의 딱딱한 이미지를 생동감으로 바꿔 가는 초록은 깃듦의 미학이다. 천천히, 보일 듯 말듯 세상 속으로 스며든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정이 흐르듯 서서히 물들어간다. 그러면서도 빈틈없이 채우는 세심함이 있다.
또한, 질서를 거스르지 않는다. 낮은 것은 낮은 것대로, 높은 것은 높은 것대로 자리를 지킨다. 나무에 돋아나는 싹들도 때가 되어야 겉껍질을 찢고 나온다. 빨리 나왔다고 거침없이 자라거나 늦게 나왔다고 소심하게 움츠리지 않는다. 사람의 조급함과 다르게 우주의 질서 속에 앞서거니 뒤서거니 조화로운 층위를 이루며 번식의 순리를 따른다.
초록은 꽃처럼 급하게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지 않는다. 화르르 피었다가 어느 순간 시르죽는 꽃의 나르시시즘이나 가을날 산을 붉게 물들이는 단풍의 호들갑스러운 열정과는 다르다. 요란스럽지 않게, 차분히 제자리를 찾아간다. 후미진 세상 곳곳에 번듯하게 자리를 잡고 나서야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홀로 아름답거나 홀로 돋보이려 하지 않고 함께 있어야 빛을 발한다. 배경이 될 줄 아는 색의 아름다움이다. 울창한 숲이나 보리밭, 밀밭이 그렇다.
초록에는 표정이 있다. 이제 갓 돋기 시작한 나무이파리에는 호기심이 서려 있고 천변에 피어난 풀은 장난기가 다분하다. 담을 기어오르는 담쟁이덩굴은 삶에 대한 애착을 보이고 마당을 가득 채운 잔디에서는 생기발랄함이 엿보인다. 호수를 감싸고 있는 야생의 풀은 강인함으로 다가오고 숲의 웅장함에는 기품이 있다.
어떤 경우는 현실의 사색을 넘어 내면 깊숙이 파고든다. 감정에 강한 붓질을 했던 시원의 색을 강원도 여행 중에 만났다. 초여름 강원도는 초록의 성지였다. 넓은 밭에 펼쳐진 감자, 양상추, 브로콜리는 신성함과 감동으로 다가왔다. 마치 초록의 모음집을 펼쳐놓은 듯했다. 연하고 부드러운 게 있는가 하면 강하고 냉철한 색도 있었다. 은근하거나 얇은 게 있고 두껍거나 직설적이기도 했다.
양상추는 흙이 피워 올린 연초록 꽃이었다. 만지면 부서질 것 같은 연약함, 하지만 비바람을 이겨낸 내공을 겹겹이 두르고 햇볕과 열애 중이었다. 감자의 진한 초록은 의연했다. 온몸의 기를 뿌리에 내주고도 색을 붙잡고 있는 뚝기가 프로다웠다. 브로콜리의 야무진 색은 진영(陣營)을 연상케 했다. 동그마니 부풀어 오른 꽃을 지키고 있는 초록의 병사들, 굵고 튼튼한 잎줄기는 꽃을 보호하느라 눈을 부릅뜨고 사방을 노려보았다. 단단한 갑옷처럼 무장한 줄기 안에서 브로콜리의 기운은 절정을 향해 치달았다.
초록의 세상에는 질서와 아름다움,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땀이 녹아 있었다. 아름다워서 오히려 깊은 슬픔이 묻어날 것 같은 색 앞에서 도(道)라는 단어가 생각났다. 색이 어떤 경지에 다다른 듯한, 순환의 진리를 깨우친 색이 있다면 바로 햇볕 아래 뜨겁게 달아오른 초록이 아닐까 싶었다. 순간적인 즐거움이나 위안, 혹은 경이로움이나 기쁨을 맛보기 위한 초록이 아니었다. 인간에 대한 자연의 보시(布施)이며 생명으로 이어진 선(宣)의 색이었다. 농부의 영혼에 색이 있다면 초록일 거라 확신했을 때 색은 시공을 뛰어넘었다.
과거의 어느 시점에서 만난 초록은 시간의 흐름에 상관없이 강한 색채로 남아 현재의 삶을 주도한다. 초가 옆 담벼락 밑을 푸르게 물들이던 토란잎은 시골아이의 눈에 최초로 각인된 색이었다. 그때 순수의 눈에 새겨졌던 토란의 의연함은 초등학교 건물 뒤에 있던 느티나무로 이어졌다. 그리고 직장생활의 현장에도 뛰어들었다. 공장에 있던 작은 공원은 숨을 쉴 수 있는 공간이었다. 아침마다 마주한 생기로움이 시르죽은 청춘의 색을 살려주었다. 초록은 그렇게 내 몸에 깃들었다.
마흔이 저물어갈 즈음 출근길에서 만난 가로수의 초록과 쉰을 넘어선 뒤 천변에서 본 초록은 이제 편안함과 위안의 색으로 다가온다. 가파른 인생길처럼 색도 거친 세파를 함께 건너온 셈이다. 집안에 화초를 두고 그들과 눈을 맞추는 건 탁해진 내 안에 숨어있을지 모를 작은 선을 찾고자 함이다.
초록이 터진 날, 마음이 환해졌다. 티끌만 한 선의 씨앗이 살짝 고개를 쳐들고 있음을 어렴풋이 알 수 있었다.
<작가 메모>
사람의 기억은 불완전하고 순서도 뒤죽박죽 얽혀있지만, 창조의 근원이 되기도 한다. 어쩌면 카이로스의 시간과 상통하는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바라보고 해석하느냐에 따라 새로운 이야기로 거듭나거나 다른 의미를 창출한다. 하나의 기억을 길게 세워놓고 시간의 마디를 자르면 그 속에는 여러 가지 색깔이 존재한다. 색깔은 과거와 현재를 연결해주는 통로가 된다.
태어난 곳이 산골이어서 그랬을까. 초록은 본디 타고난 색처럼 친숙했다. 마당에도 담벼락에도 장독대에도 텃밭에도 그리고 하늘과 맞닿은 허공에까지 푸른 기운은 스며 있었다. 턱없이 커다란 이파리를 나풀거리며 반듯하게 서 있던 토란대에서 바람의 현을 켜는 대나무숲에 이르기까지 눈을 감아도 초록의 잔상은 늘 아른거렸다.
스물도 되기 전에 고향을 떠나 객지 생활을 할 때 담벼락 밑의 토란이 사부작거렸고 감나무의 연초록 잎들이 울음을 몰고 왔다. 위안과 안정과 희망을 품은 색 앞에서 순정해졌다. 그때부터 옷마저 초록색을 선호했던 것 같다. 그렇게 마음에 들어앉은 색을 안고 이십 대, 삼십 대, 사십 대, 그리고 중년에 이르렀다.
마음이 복잡할 때면 숲에 들고 나무를 바라보며 생각을 갈무리한다. 문학으로 승화시키고 싶은 생각은 아주 오래전부터 가슴 밑바닥에서 들썩이고 있었다. 색깔에 언어의 옷을 입혀 올곧게 세우고 싶었다. 카이로스의 시간이 필요했다. 기억을 더듬어 초록의 조각들을 마음 행간에 차곡차곡 채웠다. 저절로 발효되고 숙성되기를 끈질기게 기다렸다. 완숙한 경지에 이르기까지 아우르고 다독였다. 스스로 색이 터져 나오기를 고대했다.
봄이 되면 가슴앓이는 시작되었다. 여름이면 고뇌가 절정에 다다랐다. 색을 풀어내지 못하고 또 한해를 넘길 때 거리의 나무들은 내 마음처럼 시르죽었다. 색을 살려야 하는데 설익은 관념만 앞설 때의 괴로움이란, 그러던 어느 날, 초록의 장관을 만났다. 뭉쳐두었던 언어들이 들썩이기 시작했다. 그렇게 초록은 답답한 추상을 찢고 현실로 튀어나왔다. 진통 끝에 툭 터진 자그마한 싹, 그건 초록의 근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