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씨전 / 제은숙
그러니까, 불과 몇 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그 애물단지 자씨가 우리 집에 당당하게 굴러왔다. 처음에는 그보다 맵시가 조금 못한 이가 합당한 이유를 앞세우며 들어왔으나 이내 천덕꾸러기가 되어 밀려나고 지금의 그 꼴불견 상전이 납시게 된 것이다. 가뜩이나 좁은 현관을 반 이상 차지하고 늘어져 있는 모습을 보면 발로 한 대 콱 차버리고 싶은 충동이 인다. 들이기를 최종적으로 허락한 사람도 나이건만 왜 이토록 원수 대하듯 얄미워졌는가를 생각해 본다.
얼마 전 남편의 심장이 고장났다는 소식에 하늘이 무너질 만큼 깊은 절망에 빠졌다. 관리는 않고 세상은 그저 넓은 줄로만 알며 영역 확장을 벌이던 고무줄 몸매에 제동이 걸린 것이다. 남편은 몇날 며칠 고민한 끝에 자전거를 구입했다. 남편의 건강에 도움이 될 듯했고 혼자만의 자유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동상이몽에 나도 선뜻 허락했다. 거기에 자전거방 주인장의 달달한 입담이 더해져 물건을 단박에 사 본 역사가 없는 남편이 거금을 들여 본 즉시 집으로 데려 오게 되었다.
예상대로 자전거는 충분한 자유를 선사했다. 주말이면 아이들을 대동하고 나가주는 것도 고마운데 점점 더 멀리까지 가고 싶어 하니 어찌 사랑스럽지 않겠는가. 거기에 아이들 점심도 살뜰히 챙겼고 그들이 움직일 때마다 남편의 심장도 제 호흡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딱 거기까지였다. 갑작스런 행운을 마음껏 누려보지도 못하고 밀린 집안 일만 잔뜩 해대던 내게 꿈같은 시간은 신기루처럼 지나가 버렸다. 그리하여 나는 첫 자전거가 가져다 준 혼자만의 달콤한 순간을 아직도 잊지 못한다.
웬 자전거를 타는 인구는 그렇게도 많은가. 그 중 한 사람이 남편의 회사 선배일 줄이야. 더군다나 그 선배는 값비싼 전기자전거를 가지고 있었다. 남편은 그 선배와 함께 산에 다녀온 후 꿈에서도 산악자건거로 활강하는 지경에 이르고야 말았다. 남편의 말에 따르면 산악자전거는 높고 험한 산도 단숨에 올라갈 수 있고 내려올 때의 쾌감은 말도 못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자신을 얼마든지 멀리 데려다주던 첫 번째 자전거는 자전거도 아니라며 틈만 나면 보채기 시작했다.
마침 기다렸다는 듯 좋은 물건이 반값에 자신을 부르고 있단다. 매일같이 중고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자전거 사진을 보여준다. 작년부터 허리띠를 졸라맨다며 십 원도 허투루 쓰지 말라고 잔소리를 해대던 사람이 아무리 반값이라도 기백에 이르는 큰돈을 한꺼번에 쓰게 해 달라며 징징거리니 부아가 치밀었다. 이 남자가 진정 내 남편이 맞는가 하고 의심이 들면서 비싼 장난감을 사 내라고 떼쓰는 아이처럼 철딱서니가 없어 보였다. 전화로, 문자로, 퇴근 후엔 찰싹 붙어서 온갖 감언으로 꾀는 터에 그만 허락해 준 것이 돌이킬 수 없는 내 실수였다.
자씨가 들이닥치던 날은 지금도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어마어마하게 큰 키와 도도한 자태에 나는 그만 기가 꺾였다. 어부인이라도 모셔온 듯 굽실대며 헤실거리던 남편의 표정과 자신의 자리를 시앗에게 빼앗기고 뒷방으로 물러나던 첫 자전거의 쓸쓸한 뒷모습까지. 남편은 자씨를 밖에다 두면 뭇사람들의 눈에 띌 것이고 누군가는 눈독을 들일지도 모른다며 기어코 방 안으로 모셨다. 육중한 몸집으로 왜 혼자 서 있지도 못하는지 이것저것 받쳐서 방안까지 들이닥친 꼴이라니. 뻔뻔한 행태로 말할 것 같으면, 남편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안방까지 밀고 들어온 애첩과 같으니 얄밉기 한량없다.
방 안에 들여 놓은 것도 기함할 노릇인데 필요한 살림살이는 왜 그리도 많은지, 남편은 새로운 애인을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온라인 쇼핑몰을 헤매고 다녔다. 자고 일어나면 장바구니에 장갑이며 가방에 의상까지 대여섯 가지의 새로운 물건들이 담겨 있었다. 아이들 간식도 마음 편히 사주지 못하는 처지에 자전거 사치품이라니. 그것들을 담아놓고 흐뭇해하고 다시 열어보고 만족해하는 남편이 그토록 한심해 보인 적은 없다. 둔하고 미련해 보이는 자씨가 무슨 비책을 지녔기에 구름 위에 올라탄 듯 저리 홀딱 빠졌는가.
게다가 자씨는 유독 등산을 좋아하고 성격이 까칠하여 아이들이 따라붙는 것을 싫어한다. 오로지 남편과 오붓하게 동네 뒷산이라도 산책하고 오셔야 직성이 풀리니 그동안 주말에만 만끽해 오던 내 자유는 일장춘몽처럼 사라져 버렸다. 나는 다시 독박 육아에 시달렸고 눈꼴사나운 한 쌍을 질투 어린 시선으로 지켜보아야만 했다. 남편은 자씨를 불면 날아갈까 넘어지면 멍들까 싸고돌며 비위를 맞추려고 밤낮 애면글면하였다.
집으로 돌아오면 베란다에서 목욕재계까지 시켜주니 상전이 따로 없다. 애들이나 나한테 그 정성의 반이라도 쏟았으면 멋진 아빠, 좋은 남편으로 대접이나 받을 텐데. 간드러지는 눈웃음도 없는 그것이 뭐 그리 좋아서 청승을 떨고 있나 싶은 생각에 측은지심까지 인다. 며칠 전에는 바퀴를 다 떼어내고 욕실로 모셔가서 그동안 손이 닿지 않았던 곳까지 빈틈없이 씻겨드리는 것이 아닌가. 세상에 이런 정성스런 세신사가 또 있을까. 아마 자씨도 속으로 홍홍 거리며 흡족해했겠지. 인정하기 싫지만 진실로 자리를 빼앗긴 이는 첫 자전거가 아니라 아내인 나였다.
자씨는 얼마 전부터 아예 현관에서 상시 대기 중이다. 삐딱하게 앞바퀴를 꺾은 채 기대고 있으니 드나들 때마다 걸리적거리고 손님들에게도 여간 미안한 일이 아니다. 신발 놓을 자리도 마땅치 않으니 이래저래 나만 낭패라서 현관을 나설 때마다 원수 보듯 대한 지도 꽤 되었다. 바퀴라도 한 대 차 버리고 싶은데 잘못 건드리면 고장이 난다는 남편의 말에 소심하게 손도 대지 못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전국 명산으로 꽃구경이며 단풍놀이를 가자고 아양을 떨 텐데 그 모습은 또 어찌 볼지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거린다.
성은 자요, 이름은 전거. 너는 무슨 복인가 하며 미운 생각이 들다가도 어쩌면 내 인생에 참으로 고마운 존재가 아니냐며 금방 후회한다. 자씨가 들어온 후로 남편의 운동량은 몇 배로 늘었고 병원에서도 좋은 경과를 들을 수 있었으니 그 공을 치하하지 않을 수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니 그동안 고약하게 대한 일도 미안해진다. 비 내리는 날도, 미세먼지가 심한 날에도 멈추지 않는 둘만의 나들이를 이제 그만 인정해 주려고 한다. 저들의 기세라면 태산준령인들 못 넘을까. 오히려 볼썽사나운 쇠 덩어리 자씨를 ‘자귀비(自貴妃)’에 책봉해야만 할 것 같다. 이랬다 저랬다 하는 변덕은 오직 내 몫인가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