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술잔 / 김만년

 

아마 고1 여름방학 때쯤으로 기억된다. 우리 네 명의 깨복쟁이 친구들은 일찌감치 저녁을 먹고 방천 둑으로 내걸었다. 주머니에 딸랑거리는 몇 푼의 동전을 십시일반 모아서 인디안밥, 쥐포, 참외 몇 개 그리고 생전 처음으로 샴페인 두 병을 샀다. 고등학교를 각자가 다른 도시로 유학(?) 갔다가 방학을 계기로 만났기 때문에 반갑기가 그지없었다.

우리는 건달처럼 제법 의기양양해하면서 긴 방천 둑을 끼고 뿌연 달밤을 걸어갔다. 어디선가 여인네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농사일을 마치고 저녁상을 물린 여인네들이 정미소 앞 냇가에서 멱을 감는 모양이다. 우리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힐끔거리며 걸어가는데 친구 한 녀석이 느닷없이 논두렁을 낮은 포복으로 기어가는 게 아닌가. 고재종 시인의 “그 희고 둥근 세계”를 염탐해보려는 수작임이 분명해 보였다. 여인네들은 마치 세상근심 모르는 십대소녀들처럼 연신 키득거리며 멱을 감고 있었다. 풍덩거리는 소리와 깔깔거리는 소리들이 앞산 벼랑에 부딪히고 달빛에 부딪히며 한층 호기심 많은 십대들의 귀를 자극했다. 우린 묘한 공범의식을 느끼며 척후병처럼 염탐 나간 친구의 동태를 살피고 있었다. 둥글고 희끄무레한 여체들이 달빛을 타고 풍덩 미끄러지고, 반딧불은 살랑거리는 바람을 타고 깜빡거린다. 우리는 그 몽환적이면서도 신비로운 풍경에 심취해 침을 꼴깍거리고, 이 광경을 지켜보던 물푸레나무만이 부동자세로 바짝 긴장하고 있었다. 그때 누군가 “휘익!” 휘파람을 불지 않는가. 순간 정적이 감돌고, “누구얏!” 하는 고음의 소프라노가 냇가 쪽에서 들려온 것이다. 우리는 누구 먼저랄 것도 없이 방천 둑길을 내달리기 시작했다.

“야, 어차피 옷 벗고 있어서 잡으러 오지도 못하는데 뭐 글케 죽고살기로 뛰냐!”

염탐 나간 친구가 논에 빠진 신발 한 짝을 들고 툴툴거리고 있었다. 우리는 사선을 넘어온 전우들처럼 서로의 무사함에 안도하며 낄낄거렸다. 친구 중 누군가가 참을 수 없는 키득거림에 그만 휘파람을 불었던 모양이다. 우리는 억새소리 소소한 외진 천변에 자리를 잡았다. 풀벌레소리를 안주 삼아 별들의 후광까지 받으니 술자리가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생전 처음 사본 술인지라 호기심과 설렘으로 마음이 먼저 딸꾹질을 해댔다. 한 친구가 호기스럽게 샴페인을 땄지만 아뿔싸! 잔이 없었다. 궁리 끝에 우리는 참외를 반으로 뚝 갈라서 속을 후벼내고 술잔으로 대신했다. 노란 참외 잔으로 연신 건배를 외치며 우리는 그 여름밤에 까까머리 우정을 달달하게 섞어 마셨다.

그날 파장 무렵에 우리는 심한 논쟁을 했다. ‘有識이 無識하다'와 '無識이 有識하다’라는 화두를 두고 그 뜻의 해석을 놓고 한참을 옥신각신 설전을 벌였던 것 같다. ‘유식이 무식하다’와 ‘무식이 유식하다’는 결국 같은 뜻으로 결론은 ‘무식’하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고, 한 친구는 그 뜻의 해석을 달리했던 것 같다. 또 한 친구와는 ‘형설지공螢雪之功’을 이야기하다가 반딧불로 책을 보았다는 대목에서 나는 호리병 같은 데에 잡아넣어 둔 채로 보았을 것이라고 했고, 그 친구는 호리병이 없던 시대일지도 모르니 그냥 책 위에다가 한 오십 마리쯤 잡아놓고 보았을 것이라고 했다. 나는 반딧불이 기어가는 상황에서 어떻게 책을 보느냐고 반론하다가 도가 지나쳐서 언쟁으로까지 번졌고 결국 화를 풀지 못하고 씩씩거리며 헤어졌다. 그 일 때문에 그 친구와는 그 여름방학 내내 조면(말을 않음)을 하고 지냈다.

세월이 제법 많이 흘렀다. 그 여름밤의 일화가 이제는 돌아갈 수 없는 저 언덕 너머의 추억이 되었다. 그 옛날 방천 둑에서 처음으로 마셨던 알딸딸하던 첫 술잔의 맛이 첫사랑 같은 향기로 지금도 내 입술을 맴돌고 있다. 아마 그 여름 내 마음에 분홍빛 파문을 일으킨 살구나무집 소녀의 추억도 함께 묻어 있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비 햇살을 머금은 살구가 주홍빛 실금으로 톡톡 갈라지고 그 집 파란 대문이 열릴 때마다 내 마음도 덩달아 갈라지던, 그해 여름은 유독 달았다.

그때 방천 둑을 걷던 그 친구들은 지금도 한 하늘 아래서 저마다 살뜰한 둥지를 틀고 잘 살아가고 있다. 가끔씩 만나 술잔을 기울이며 달고 알딸딸했던 그 여름밤의 추억을 나누어 마시기도 한다. 꿈 많던 열일곱 살 때의 노란 참외술잔! 돌이켜보면 아마 내 생애에서 가장 근사한 술잔이 아니었을까 싶다. 올여름엔 다시 그 친구들과 고향 천변에 앉아서 천렵도 하면서 농익은 참외 주酒 한잔 마셔 보고 싶다. 그 둥글고 희끄무레한 달빛 여신女神들을 훔쳐본 우리들의 무도함을 위하여!

그날 파장 무렵 우린 술잔을 깨물어 먹었다.

『한국산문』 2022.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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