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 / 엄현옥

 

 

무대는 은은함이 감돈다. 부드러운 조명 때문만은 아니다. 바닥과 벽면을 채운 질 좋은 나무 결이 한 몫을 한다.

목재는 금속이나 플라스틱에 비해 질감이 좋다. 결코 자신을 내세우지 않으면서도 주변과 잘 어울리는 조화로움을 지녔다. 요란한 색상으로 시선을 모으려 하지 않는 겸손과 중후함까지 갖추었다. 사람이라도 그만한 품격을 지니기는 어려운 일이다. 연갈색의 목재가 주는 온화함에 잠겨본다.

현絃을 고르는 미세한 음이 흐르고, 이내 연주가 시작된다. 그곳에는 나무로서 가장 그럴듯한 위치에 오른 현악기들이 있다. 은발이 잘 어울리는 노老 연주자의 품에 안긴 더블베이스와 깔끔한 중년 단원과 포옹하는 첼로, 그들은 나무라는 재질의 악기가 아니라 연주자의 분신이다.

상팔자를 누리는 것은 바이올린이다. 날렵한 미모의 젊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어깨에 실려, 그녀의 턱에 몸의 일부를 맞대고 있다. 그 모양이 여인의 몸매를 닮았다는 사실을 처음 느낀다. 검은 연주복을 입은 미녀 주자奏者의 어깨에 지그시 기댄 채 은근한 사랑을 나누다가, 새처럼 솟구치는 지휘봉에 따라 과격한 애무도 불사한다. 그들이 만들어낸 화음은 거침없는 고음의 테너를 돋보이게 한다. 이어서 중후한 음색의 베이스나 바리톤이 깔리면 카펫처럼 낮게 드리워진 포근함으로 실내를 감싼다. 연주가 끝나기가 무섭게 감당하기 힘든 박수 세례를 받는다.

저들은 하루아침에 근사한 무대에 오르게 된 것이 아니다. 어느 장인匠人의 정교한 손놀림에 자신을 단련시킨 후에야 저렇듯 우아한 자태로 서게 되었으리라. 저들은 공연이 끝나고 무대를 내려와서도 극진한 대우를 받는다. 행여 상할세라 단단한 케이스에 담겨, 차를 탈 때에도 주인보다 먼저 오른다. 언젠가 연주자가 무대를 떠날지라도 그의 애장품으로 사랑받게 된다.

아무도 그들이 나무로서의 생을 마감했다고 하지 않으리라. 수종樹種과 자란 모습으로 어떤 용도로 거듭날지 결정된다. 나무에게도 내세來世가 있다면, 그들은 전생에 베푼 덕德으로 이렇듯 귀한 몸으로 다시 태어난 것일까.

그들은 인천항 8부두를 빠져나오는 거대한 몸집의 트레일러에도 실려 있다. 열대 우림의 울창한 밀림 속에서 생을 마감했음이 분명한 아름드리나무다. 그들을 실은 차가 지날 때면 거대한 굉음이 지축을 흔든다. 옆 차선의 자동차는 서둘러 창문을 내리고, 행인들은 인상을 찌푸린다. 거기에 실린 녀석조차도 곱지 않은 눈매로 바라본다.

오랜 항해에 시달린 그의 몸에는 원산지 표시가 낙인처럼 찍혀 있다. 그들은 적도 가까운 고향에 대한 향수에 시달릴 겨를도 없이, 해안의 야적장으로 실려 간다. 뙤약볕에 시달리거나 비가 내려도 그 큰 몸뚱이를 거두어 주는 이는 없다. 사위가 어두워지면 밤하늘에 드문드문 반짝이는 별을 바라보며 향수를 달랠 뿐이다. 어디가 뭍이고 바다인지 모를 어둠 속에서 보내야 했던 서러운 밤은 헤아릴 수도 없다. 몸의 습기를 태양과 해풍에 증발시킨 그들은 기중기에 매달린 채 옮겨져 어디론가 또 팔려나간다. 더러는 낯선 이방인의 집에서 가구나 건축자재로 다시 태어나리라.

그들 중 튼튼한 놈은 광산의 갱도를 유지하는 버팀목으로 쓰이기도 한다. 한 번 쓰임 받으면 햇빛은 보는 일도 없지만 매순간 위험에 직면한 광부들의 목숨을 지킨다.

인고忍苦의 시간을 견뎌내기는 레일의 침목枕木도 마찬가지다. 매일 누군가의 떠남과 돌아옴을 위해 천문학적인 숫자의 중력을 기꺼이 안고 있다. 마음에 가라앉은 일상의 앙금을 걷어내고 한 줌 바람결에도 생활의 활력을 얻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기꺼이 자신을 내준다. 그들의 몸을 딛고 달리는 열차는 서먹한 연인들 사이를 동반자로 바꾸어 놓기도 한다.

나무, 그들은 흙에 뿌리를 내리고 잎의 광합성으로 살아간다. 그러나 모든 나무들이 한곳에 오래 뿌리내리는 것만은 아니리라. 대부분은 사람들의 필요에 의해 각기 다른 용도로 쓰이기 위해 톱과 대팻날에 몸을 맡긴다.

사람도 각기 다른 삶의 몫이 있듯이 저들도 여러 형태로 다시 태어난다. 우리네 사는 모습도 저들처럼 다양한 모습이 아니던가.

그렇다면 나는 어떤 나무인가. 가까운 이에게 바이올린처럼 살갑게 다가가지도 못한다. 천성이 상냥하거나, 외모가 빼어나지도 않으니 관상용 분재나 근사한 정원의 수목도 아니리라.

내가 만일 나무로 태어난다면, 시골집 울에 아담하게 서 있는 싸리나무나, 마을의 고샅을 지키는 회양목이어도 좋겠다. 아니면 양지바른 묘지 둘레에 선 도래솔이 되어, 세상의 힘든 여행을 끝낸 망자亡者와 긴 대화를 나누고 싶다.

될 수만 있다면 어느 가난한 문사文士의 앉은뱅이책상이라면 더욱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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