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나무 / 김잠복

 

텃밭으로 가는 길목에 집채만 한 은행나무 한 그루가 있다. 시도 때도 없이 그 앞을 오가지만, 오늘 아침에 바라본 나무는 달랐다.

회갈색 속살을 오롯이 드러낸 은행나무다. 봄부터 걸쳤던 옷을 미련 없이 내려놓고 차가운 바람 앞에 선 것이 마치 속세를 떠나 참선에 든 수행자의 모습니다.

수행자는 봄부터 여름 내내 푸른 법복을 걸치고 지냈다. 삼복더위는 뭇 매미를 불러 모아 경전을 설하고 아래로는 시원한 그늘을 드리워 사람들에게 쉼터를 내주어 자비를 실천했다. 계절을 지나 선들바람이 찾아들자 ‘수우 수우’ 깊은 명상에 젖어들었다. 자연의 섭리대로 순응하고, 이제는 근원인 뿌리로 돌아갈 때를 알았던지 이파리를 노랗게 물들였다. 바람에 흔들리는 것들은 죄다 대지로 돌려주고 마지막 남은 사리 열매까지 내준 다음 빈몸을 자청했다. 그를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편안했다. 그것은 내년 봄에 새로이 채워질 다음 세대에게 자리를 기꺼이 내주기 위함이었다. 아름다운 소멸이었다.

이 겨울, 은행나무는 가장 원초적인 모습으로 서 있다. 있는 것을 없는 체하거나, 없는 것을 있는 체하지 않은 말간 나체다. ‘빈몸으로 태어나, 옷 한 벌을 건졌다.’라고 노래하는 인간과는 격이 다른 모습니다.

유독 걸치는 것에 길든 동물이 인간이다. 때와 장소에 따라 걸치고 가리는데 온갖 공을 들이며 에너지를 소비한다. 거기다 눈에 보이지 않는 명예까지 걸치지 못해 안달들이다.

나도 예외는 아니다. 현관문을 나설 적에는 거울 앞에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요모조모 치장을 하고서야 대문을 나서지 않는가.

얼마 전 동네 목욕탕에서 아는 이웃을 만난 것이 부담스러워서 언뜻 눈인사로만 지나쳤다. 아무리 나이 들어가는 중늙은이라지만 알몸 대면은 그리 달갑지가 않았다. 상대의 시선을 벗어나 구석 자리로 간 다음에야 편안하게 목욕을 즐길 수 있었다. 하나, 잠시 뒤에 그는 다시 한증실 안에서 마주치고 말았다. 동네 여자들의 수다를 피해 돌아앉은 내 어깨를 흔드는 바람에 어쩔 수가 없었다.

“전혀 볼라볼 뻔했어요.”

한정된 공간에서 그냥 스쳐 지나가는 말이려니 생각할 수도 있었지만, 은근히 그의 속내가 궁금했다. 이것저것 걸치고 가려서 잔뜩 멋을 부렸을 때와는 판이하게 느낌이 다르다는 말뜻이었을 게다.

그렇다 나는 어쩌면 두 얼굴을 가진 존재였을지 모를 일이었다. 그이 말대로라면 겉과 속이 다른 인상이라는 말임이 틀림없다. 알몸일 때가 그간 내 이미지와 퍽 다르다는 사실은 한참이나 생각해 볼 일이었다.

은행나무는 겸손하다. 인간처럼 으스대거나 일부러 꾸미려 들지 않는다. 민낯 그대로 보여주고, 자연의 순리대로 따르고 순응한다. 결국, 겸손이란 있는 그대로를 보여주는 것이리라. 대부분 사람은 자기를 낮추는 것을 겸손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알면서 모르는 척, 있으면서도 없는 척, 잘났으면서 못난 척 낮추기만 하면 겸손일까? 그것은 위선이다. 속으로는 상대를 자기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면서도 굳이 허리를 굽히는 것은 마치 한 표를 얻기 위해서 굽실거리는 정치꾼의 속셈과 뭐가 다를까.

솔직하게 드러내는 것이 겸손이다. 무조건 상대는 높이고 자신을 낮춘다고 다 겸손은 아니다. 비싼 옷을 걸쳐 자신을 과장하거나 꾸미려 들지 말 것이며 미화하거나 변경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보이는 것이 겸손이다.

은행나무를 올려다본다. 걸치고 가리는 것만이 대수가 아니라 드러내는 데 익숙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솔직하게 보여주는 따뜻한 가슴만이 상대와 나를 편안하게 하는 방법이라 한다. 그것이 나와 이웃을 데우는 일어서서 마침내 서로 간에 더 웅숭깊은 사랑이 생겨날 것이고 믿음을 주는 상대로 인정될 것이라고 전한다. 은행나무는 이 겨울, 설법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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