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꽃, 밥꽃 하나 피었네 - 이방주
주중리 들녘이 입추를 맞았다. 그래도 더위가 가려면 아직 멀었다. 낮에는 정수리에 화상을 입을 만큼 따갑지만 새벽에 농로를 달릴 때 가슴에 스치는 바람에는 서늘한 기운이 묻어난다. 볼때기에 서늘한 바람을 맞으니 문 듯 햅쌀밥이 그립다. 혀에 닿는 부드러운 햅쌀밥이 여름내 보리밥으로 거칠어진 입안을 어루만져주리라. 길가에 무궁화가 소담하다. 무궁화가 피기 시작하고 100일이면 고대하는 햅쌀밥을 먹는다고 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는 농로 아래 벼는 아랫배가 통통하다. 내 아랫배까지 통통해진다.
시멘트 다리를 건너 140도쯤 돌아서면 버드나무 우거진 방천둑길이다. 우거진 버드나무 가지마다 가시박덩굴이 올라타기 시작했다. 태양은 버드나무나 가시박이나 공정하게 볕을 주고 생명을 준다. 그런데 가시박은 기어이 버드나무 명줄을 졸라댄다, 주중리 농부들은 가시박을 미워하면서도 베어내지는 않는다. 볏논에 더 부지런하고 알뜰하다. 길가 자투리땅에도 도라지꽃이 하얗다. 땅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도라지 밭가에 부추도 심었다. 모두가 우리 몸을 지탱하는 보약이다. 한 배미을 지나고 또 한 배미를 지나 자전거를 딱 멈추었다. 꽃을 본 것이다.
벼꽃이 피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논두렁 아래로 내려갔다. 엊그제까지도 통통했던 아랫배가 터져 올라온 것이다. 아, 그래서 벼꽃이 피었다고 하지 않고 패었다고 하는구나. 오늘 새벽 벼꽃을 본다. 꽃 한 송이에 쌀이 한 툴이다. 한 줄기 벼이삭은 밥이 한 공기이다. 한 배미 벼꽃은 수천 명 생명줄이다. 벼꽃은 곧 우리 목숨이다.
밥꽃이 핀 볏논 자투리땅에 도라지꽃, 부추꽃, 호박꽃, 가지꽃을 함께 피우는 주중리 사람들의 슬기가 아름답다. 풋고추 붉은 고추까지 주렁주렁 매달린 농로에 서서 들판을 바라본다. 칠첩반상을 바라보는 것이다. 이렇게 너른 들이 그냥 우리네 밥상이다. 나으리들이 제 밥사발을 채우려 싸움질할 때 농투사니들은 이 들판에서 겨레의 밥상을 준비한다. 우리는 들풀 같은 민초들에 기대어 산다.
계룡산 신원사 고왕암은 백제 마지막 태자 부여융이 숨어 있다가 김유신의 부하에게 잡혀 소정방에게 넘겨진 일이 있는 절이다. 지금도 태자가 숨어 있던 토굴이 남아 있다. 언젠가 고왕암을 답사하고 내려오는 길에 신원사 일주문 바로 아래에서 밥꽃을 발견했다. 밥집 이름이 ‘밥꽃 하나 피었네’였다. 밥집 이름 치고 좀 길기는 하지만 도저히 잊어버릴 수 없을 것 같았다. 좋은 사람과 마주 앉아 밥꽃 한 상을 받았다. 상을 두 번 차려 내온다. 첫 상은 자투리땅 모습이고 두 번째 상은 볏논을 옮겨온 듯하다.
먼저 나온 상에는 두부김치, 가지고기볶음, 애호박고지볶음, 떡볶이, 나물전과 양념장, 청국장김쌈, 남새샐러드, 감자샐러드이다. 밥상이 꽃밭이다. 젊은 밥상 도우미는 벼꽃처럼 음전하다. 나직나직한 말씀씀이가 미덥다. 물을 때마다 고분고분 차림을 일러준다. 둘이 다 밥꽃을 닮아 있다. 첫 상으 ㄹ거두고 이제 밥꽃이 나왔다. 가운데에 떡갈비가 떡하고 놓이더니, 된장찌개, 고추잎무침, 방풍나물무침, 부지깽이나물장아찌, 쌈채소와 쌈장, 마늘과 풋고추, 견과류 볶음으로 상이 가득하다. 그리고 밥꽃 한 사발이다. 밥상 위에 주중리 들판을 옮겨왔다. 벼꽃이 피고 가지꽃이 피었다. 노란 호박꽃도 하얀 도라지꽃도 피었다. 벽 한 면을 털어 만든 통유리창으로 세상이 보인다. 가까이 밥꽃 피우는 농장에서 천년초를 비롯한 가지가지 채소가 올라오고, 멀리 관음봉에서 연천봉으로 이어지는 산줄기가 용틀임하는 기운도 밥상 위에 내려앉았다. 천년초 차를 마실 때쯤 나는 주중리 볏논의 오래되고 깊은 의미를 미각으로 깨우쳤다.
벼꽃은 생명이고 명줄이라고 해서 그렇게 예쁜 것만은 아니다. 논두렁 아래 내려가 가만히 패어나오는 벼꽃을 살펴본다 나락 알알에 먼지가 묻은 것 같다. 불타던 솔가지가 사위어 날린 재티 같다. 시시하다. 어느 시인이 오래 보면 예쁘다고 했다. 어느 스님은 일부러 멈추어 서서 보아야 할 것도 있다고 했다. 이미 멈추어 섰으니 오래 보자. 말란 연두색 벼 알갱이 뽀족한 꼭대기가 약간 벌어져 있다. 벼를 말하는 벼 도稻 자를 보면 벌어진 모습이 그대로 상형되었다. 벌어진 틈으로 꽃술이 비어져 나왔다. 재티 같기도 하고 동부 거피가루 같이 하연 것은 꽃잎이 아니라 꽃술이었다. 조심스럽게 세어보면 똑같은 꽃술이 여섯 개다. 그렇다. 여럿인 걸 보면 틀림없이 얘들이 수술이다. 그럼 암술이 있어야 한다. 안경을 다시 얼려 쓰고 들여다보았다. 여왕 같은 암술이 수술들 가운데 그 안에 계시다. 육판서가 시위한 암술 여왕님이시다.
들으니 벼꽃은 벌 나비의 도움을 받지 않고도 은밀하게 사랑을 이룬다고 한다. 이른바 자가수분이란다. 볏잎 무희들이 살랑살랑 미선을 흔들어 바람을 보내면 벼꽃은 합궁을 이룬다. 합궁은 주로 볕이 화사한 정오에 치른단다. 이슬이 허튼 물방을 보내는 것을 경계함이다. 운우의 즐거움을 누리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비롭고 신성한 한낮이다. 合巹합근의 순간이 수줍은 벼 껍질은 갑자기 옷깃을 오므려 수술을 떼어내고 암술만 다독여 내밀한 여왕의 산실로 모신다. 산실에서 땅의 기운에 의지하고 태양의 힘을 얻어 알이 차고 영글어 한 톨의 쌀이 된다. 벼꽃은 밥꽃이다. 가을 들판은 밥꽃이 신비롭게 영그는 보석의 밥상이다.
밥꽃이 아름다운 것은 신이 내린 생명의 꽃밭이라 그렇다. 벼꽃은 우리 생명을 다지려고 피어난다. 주렁주렁 풋고추 붉은 고추도 밥꽃을 밥꽃답게 하려고 볕을 받는다. 벼꽃은 밥꽃이다. 생명의 꽃이다.
오늘 새벽에도 주중리 들에서 생명의 꽃을 얻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