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 생각 / 박동수
할머니 생각 / 박동수
강천산에 갔다. 잘 물든 단풍이 아름다웠다. 강천사 요사채 옆 마당에 서 있는 큰 감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주황색 감은 더 아름다웠다. 겨울 눈 오는 아침, 한옥마을 전통문화연수원에 <문학으로 대학을 읽다> 강좌를 들으러 골목길을 걸어가는데, 민박집 담장 너머 감나무가 춥고 쓸쓸한 겨울 속에서 보석같이 빛나는 빨간 감을 달고 있다. 나는 감을 참 좋아한다.
해마다 내장산 단풍이 절정에 이를 때면 아내와 함께 새벽에 출발해서 내장산 단풍을 구경하고, 산 넘어 백양사로 가서 그곳 단풍도 구경한다. 그리고 근방의 산골에서 생산된 대봉감이 다 모여드는 백양사 아래 대봉감 도매장터에서 대봉감을 사 온다.
지금은 늦가을, 감을 파는 곳이 많다. 로터리에 감을 담은 상자를 내놓고 파는 아저씨, 아파트 입구에 앉아서 홍시를 파는 할머니, 홍시 열 개를 상자에 담아 놓고 앉아서 할머니가 사람이 지나갈 때마다 힘없고 작은 목소리로 10개에 5천 원, 5천 원이라고 한다. 인근의 시골에서 버스 타고 와서 홍시를 파는 것 같다.
할머니는 입성도 부실하게 입고 앉아서 쌀쌀한 가을바람을 맞고 있다. 저 홍시를 내가 사줄까? 산책 나오면서 지갑을 가지고 나오지 않았다. 언제 저 홍시를 팔고 집으로 갈지 걱정이다. 홍시를 팔면 할머니는 그 돈을 손주에게 용돈으로 전부 주거나 아니면 알사탕 몇 개를 사서 함께 쥐여 줄 것이다.
어렸을 때, 내 할머니는 장에 갔다 오면 항상 큰 손주인 나에게 알사탕을 쥐여 주었다. 할머니가 손수건에 싸서 가지고 온 알사탕, 그 맛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 할머니의 사랑은 그런 알사탕 맛이었다. 저 할머니도 알사탕 맛, 사랑을 손주에게 안겨 주기 위해서 홍시를 팔려 나온 것일까? 지금 아파트 입구에 앉아 있는 할머니를 걱정하면서 나는 공원으로 산책하러 간다.
쌀쌀한 오후, 아파트 숲에 둘러싸여 있는 작은 공원 안의 연 방죽에는 잎이 다 말라 버린 연들이 무거운 연밥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다. 계절은 쌀쌀한 날씨로 변해 간다. 자연은 그 속에서 결실을 맺어간다. 공원 모퉁이의 한 그루 감나무가 주홍빛 감을 주렁주렁 달고 있다.
시골집에서 감이 익어갈 때, 홍시를 따 먹기 위해서 몇 그루 안 되는 감나무 아래에 장대에 망태를 매달아 놓고 수시로 홍시를 따먹었던 추억이 생각난다. 홍시 따기 힘들어하면 할머니가 와서 직접 따주시기도 했다. 할머니는 유독 큰 손주를 아꼈다. “너는 크게 될 사람이야, 너 태어날 때 산에서 선비가 큰 갓을 쓰고 내려왔다. 너는 틀림없이 관록을 먹을 것이다.” 할머니는 큰 손주에 대한 태몽 때문에 큰 손주의 미래를 믿었다. 그런 큰 손주가 잘되도록 할머니는 항상 천금같이 아꼈다.
할머니는 참 정갈하셨다. 아침 일찍 일어나 세수를 깨끗이 하고 머리를 곱게 빗었다. 마치 오늘 하루도 빈틈없이 살겠다는 모습이었다. 그런 모습으로 아침마다 장독대에 나가서 정화수를 떠 놓고 빌었다. 우리 식구 모두 무탈하고 큰 손주 잘되라고 빌었다.
그런 할머니가 내가 군대에 있을 때 돌아가셨다. 휴가 가서 편찮은 할머니를 보고 복귀한 지 딱 일주일 만에 할머니가 돌아가셨다. 할머니는 보고 싶은 큰 손주를 보았으니 마음 놓고 떠나셨는지 모른다. 나는 할머니 임종도 못 보고 장례식에도 가지 못했다. 휴가 다녀온 지 일주일뿐이 안 되었는데 또 휴가 가려고 할머니 사망이라는 가짜 전보를 시골집에서 보낸 것으로 부대는 생각했던 모양이다. 다시 휴가를 보내주지 않았다. 정말 옛날 군대에서는 그런 일도 있었다.
그렇게 허망하게 할머니와 헤어졌다. 그때가 늦가을, 주홍빛 감이 주렁주렁 익어갈 때였다. 그래서 감을 보면 할머니에 대한 애절함이 떠오른다.
공원을 산책하고 집으로 돌아오면서 갈 때와는 다른 길로 오는데, 로터리 둘레에 과일 상이 감을 진열해 놓고 판다. 한 상자에 7천 원, 한 상자에 만원이라고 쓰여 있다. 대봉감을 그렇게 판다. 물론 한 상자 가득하지는 않았지만, 아파트 입구에 앉아서 홍시를 팔고 있는 할머니의 열 개의 홍시보다는 훨씬 숫자가 많다. 할머니의 홍시가 다 팔렸을까? 더 걱정된다.
지금 내장산 단풍이 절정이다. 올해도 아내와 함께 단풍 구경도 하고 대봉감도 사 와야겠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집에 들어와 있는데, 아내가 전화해온다. 밑으로 짐 끄는 거 가지고 내려오라고 한다.
대봉감을 두 상자 싣고 왔다. 아내가 나가는 도예 공방이 있는 마을 감 농장에서 싸게 팔아서 사 왔다고 한다. 아내와 함께 베란다에 신문지 깔고 대봉감을 줄 맞추어서 잘 정리했다. 이제 시간이 지나면 홍시로 익어 갈 것이다. 그러면 하나둘 가져다 먹으면 된다.
이 가을 감을 보니 자꾸 할머니 생각이 난다. 잊지 못할 할머니 사랑이 너무 그립다. 할머니는 보석처럼 빛나는 별로 내 가슴에 항상 살아 계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