쉰 / 엄현옥
이럴 줄 몰랐다. 십진법으로 묶인 나이 숫자가 바뀌면 어디선가 사전 통보라도 해올 줄 알았다. 생각해 보니 사십에도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자고 일어나 보니 유명해졌다는 어느 문사는 이름이라도 남겼다. 어영부영 하다 보니 쉰이란다. 죽어서도 천 년을 간다는 태백의 주목을 보면 한없이 좋은 나이다. 그렇게 말하는 이는 좋은 세월 다 갔다는 말을 괄호 안에 써놓았으리라.
아무려면 어떠랴. 이미 쉰인 걸…. 마흔일 때도 ‘불혹’ 영역에서 제대로 된 등급을 받지 못했다. 재수라도 했다면 좋았으련만 생략했다.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건너 뛰어, 지천명 반에 편입해 버렸다. 턱없이 모자란 실력으로 월반한 학생의 학교생활처럼 세상은 만만한 것이 없다. 마냥 봄날도 아니다.
그럴 줄 알았다. 지천명에 입문했다고 하여 묘책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등 떠밀려 온 터라 ‘하늘의 뜻’까지는 언감생심이다. 멀리 갈 것 없이 내 뜻만이라도 짐작케 되기를 바랄 뿐이다. 다만 낯선 대상과 마주쳤을 때 스파크가 순하다. 치우침도 덜하다. 그것이 사람일 때면 예외다.
아직 멀었다. 반백년을 살았으니 뭔가 좀 다르려니 했던 것은 착각이었다. 잡다한 것들은 내 안의 체에서 자동으로 걸러지려니 했다. 어지간한 일 앞에서는 ‘그러려니…’의 느긋함을 즐기게 될 줄 알았다. 그런 여유는커녕, 변덕이 죽을 끓는다. 금방 해치우려 했던 일도 심드렁하고 작은 일에도 몸을 사린다. 가급적 생략하고 마는 일이 부지기수다. 그러다가 엉뚱한 곳으로 튀는 일도 다반사다. 대책 없는 일이다.
웬만한 것들은 내 안에서 곰삭으려니 했다. 쉰 냄새가 나는 그것들을 항아리에 담아 두려 했다. 볕 좋은 날 걸레질이라도 하면 장독대는 촉촉한 물기를 받아 빛나겠지. 안에서는 옹글게 숙성되고 겉으로는 은근한 반짝임으로 내가 써버린 시간을 대변해주리라.
생각해 보니 억울한 것만은 아니다. 쉰이 지났다고 크게 잃은 것이라도 있는가. 동안 열풍이 분다 해도 젊음만이 경쟁력일 수 없다. 나이 듦이 무력함을 안기는 것만은 아니다. 나이는 생각보다 먹을 만하다. 그 맛이 의외로 괜찮을 때도 많다. 그동안 꿈꾸어왔던 중년의 그림이 있다면 지금부터 붓을 들면 된다.
영화도 나이대로 느낀다. 젊었을 때라면 놓치고 말았을 행간의 의미가 보인다. <사랑 후에 남겨진 것들>을 이삼십 대에 보았다면 영화가 끝나자마자 출구를 향했으리라. 그 영화는 멀티플렉스 상영관에서는 일찍이 막을 내렸다. 삼청동의 후미진 언덕에 자리한 영화관은 시간이 멈춘 듯 한적했다.
독일의 시골 마을이 무대였다. 트루디는 공무원이던 남편 루디가 불치병에 걸렸음을 알고, 그 사실을 숨긴 채 여행을 떠난다. 베를린의 자녀들을 찾아가지만 나이든 부모에게 시간을 내어주기에 그들은 너무 바쁘다. 바다를 보기 위해 찾은 발트 해에서 뜻밖에도 아내가 죽는다. 홀로 남은 루디는 여행을 떠난다. 죽은 아내가 소망했던 것들을 찾아 둘만의 추억이 담긴 하늘색 카디건을 껴입은 채 낯선 도쿄를 헤맨다. 아내가 생전에 보고 싶었던 눈 덮인 후지 산과 벚꽃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죽음의 춤, 그녀는 부토춤 무용수가 되고 싶었다. 사랑 때문에 그 꿈을 접었음을 뒤늦게 알게 된 루디는 떠돌이 소녀에게서 그 춤을 배운다. 부토춤에는 죽음이 담겨 있었다. 절명의 순간에 추는 춤을 상상해 보았는가. 숨을 몰아쉬며 안간힘을 다해 일어나려는 몸부림은 죽음을 부정하기보다는 온몸으로 껴안으려는 몸짓으로 보였다. 자신과 아내에 대한 깊은 이해에 도달하기 위함이었을까. 슬픔을 승화 시키려는 듯 그는 온몸으로 죽음의 춤을 추었다.
쉰이 아니었다면 그를 온전히 이해했을까. 영화는 기승전결의 보편적인 절차대로 구성되지 않았다. 삶 역시 정해진 수순의 징검다리를 건너는 과정만은 아니듯이…. 아내의 꿈에 다가가는 루디의 여정에 동행하는 동안 마음에 파장이 일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컴퓨터 자판 위로 그날의 벚꽃 비가 하염없이 내린다.
순이 던진 선물은 뜻밖이다. 삶의 모든 순간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고 아름답다. 이 새삼스러울 것 없는 진실에 비로소 눈뜬 것이다. ‘시간이 많은 줄 알았다’며 후회하던 루디의 목소리가 울린다.
‘견하지 말고 관하라’던가 꽃도 나이대로 느낀다. 지난 가을 안양천변을 걸을 때였다. 서둘러 내린 무서리에 코스모스가 시들어갔다. 사람들은 꽃의 시절을 보내고 갈색 마른 줄기로 성숙기를 갖는 코스모스에는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만개한 그것들의 하늘거림에 발걸음을 늦추던 이들이었다. 저 혼자 씨앗을 여물게 하고 있는 시든 코스모스 앞에서 한참을 보냈다. 지는 꽃의 평화로움을 쉰이 아니면 알 리 없었으리라.
되돌아본다. 쉰을 맞을 준비는 되어 있었는가. 이 길에 꽃을 뿌려줄 이 없으니 스스로를 충전한다. ‘언제나 네가 옳았어. 그러니 거침없이 세상으로 나가렴.’ 나를 향해 근거 없는 허풍도 떨어본다. 다만 그 시간들이 내 의식에 아무런 흔적도 없이 지나가 버릴 것만을 우려한다.
아직 알 수 없는 나, 이쯤해서 너의 정체를 순순히 밝혀라. 굳이 자백할 것도 없는데 가슴 한 켠을 움켜쥔다. 통증이 인다. 쉰, 그간의 시간이 뭉친 아픔이다.
* 엄현옥 - 1996년 『수필과 비평』 수필 등단, 2008 『수필시대』 평론 등단 - 한국문협회원, 수필과비평 편집위원, 북촌시사 동인, 『The 수필』 선정위원 작품집 ; 『다시 우체국에서』, 『나무』, 『엄현옥의 영화읽기, 『아날로그-건널 수 없는 강』, 『질주』, 『작은 배』, 『발톱을 보내며』 등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