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혼, 나의 문학 / 최명희
1998년 12월 11일 오후 5시 서울대병원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향년 51세
이 글은 '혼불'의 작가 최명희 씨가 1995년 10월 31일 스토니 브룩 뉴욕주립대학교 한국학과 초청으로 대학에서 강연한 것과 스토니 브룩 한국학회와 미주지역 문인협회가 공동주관하여 뉴욕에서 강연한 내용을 작가가 정리한 글로써 현재 뉴욕주립대학교 한국학과 고급한국어 교재입니다.
아주 어려서부터 오로지 소설을 쓰고 싶은 꿈을 가지고 있던 제가 대한민국 문단에 공식적으로 등단한 것은 1980년 1월 1일, 중앙일보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에 '쓰러지는 빛'이 당선하면서였습니다.
그러나 막상 저의 생애를 꿰뚫고 저의 덜미를 잡은 소설에 붙들린 것은 그 이듬해 1981년 5월 28일, 동아일보 창간 60주년 기념 2000만원 고료 장편소설 모집에 '魂불' 제1부가 당선된 순간이었습니다. 이 소설은 당선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아직도 계속 쓰이고 있는데, 많은 상금을 받고 당선한 작품을 이토록 오랜 세월 이어쓰는 형태의 이상한 작업은 아마 달리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이 '魂불'의 자료를 수집하고, 구상, 구성, 준비한 시간을 빼고, 원고지에 첫 줄을 쓰기 시작한 것이 1980년 봄, 4월이었으니 지금까지 만 15년 6개월이 흘러 달수로 186개월이 지났습니다. 그리고 월간 시사종합지 '신동아'에 제2부를 연재하기 시작한 것은 1988년 9월호부터였는데 만 7년 2개월간 집필하고 마침 이번 10월호를 끝으로 마감했습니다. 그러면 소설이 끝났는가, 생각하겠지만 '끝'이 아니! 고, 먼 길을 가는데 신호등이 바뀌는 네 길거리에 잠시 멈추어 선 것과 같은 상황입니다. 이제 앞으로 또 얼마나 더 멀리 가야 할 것인지 저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지만, 엄청난 자석의 강물 같은 이 흐름은 깊고 큰 힘으로 저를 관통하며 흐르고 있습니다. 저는 이! 흐름 위에 저의 사랑과 슬픔과 그리움, 절망, 그리고 모든 부르고 싶은 것들을 띄웁니다. 그리고 내가 만난 모든 이야기를 띄우고 싶습니다. 사람들만이 아니라 기후와 풍토, 세시풍속, 사회제도, 촌락 구조, 씨족, 역사, 관혼상제, 통과의례, 주거형태, 가구, 그릇, 소리, 빛과 향기, 달빛, 어둠을 빨아들여 흐르는 강물이 되기를 저는 감히 이 소설에 원하였습니다.
저의 고향은 전라북도 전주인데, 가까운 곳에 고창 선운사가 있어요. 그 선운사에는 백제 때부터 내려온 꽃이라 하는 동백이 아주 유명합니다. 꽃이란 수명이 있어서 그렇게 오래 살 수 없을 터인데, 저 아득한 삼국시절 백제의 누군가가 심어 놓은 동백이 50년생이 되고, 500년생이 되고, 죽으면 그 옆에 새끼 씨들이 떨어져서 또 나고, 죽고, 또 나고, 죽으면서 이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더욱더 울창하게 피어나! 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꽃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꽃잎이 아주 붉고, 두텁고, 송이도 크고, 모양이 단아 단정하면서도 요요한 정열에 불타 황홀합니다. 한 번 보면 그만 홀리어 사로잡히고 마는 이 꽃은, 피어 있는 모습도 좋지만, 질 때 더욱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합니다. 목숨의 절정에서 선혈처럼 툭, 떨어지지요. 그 떨어진 꽃꼭지 주워서 다시 갖다 붙이면 금방이라도 피가 돌아 역력히 살아날 것만 같은 낙화. 눈이 부시게 하얀 봄날의 산길에 새빨간 동백꽃 툭, 툭, 떨어져 누운 모습은 하도 선연하여 가슴이 뭉개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선운사 동백은 예로부터 적공을 많이 해야 볼 수가 있답니다. 헛걸음도 공력에 들어 가겠지요? 공을 많이 쌓아야 볼 수 있다는 그 선운사 동백을 저는 어느 해 봄날, 제 친구와 함께 보았습니다. 그때 저는 너무나 너무나 그 꽃들이 아름다워 울었습니다. 온 산에 만발한 동백의 난만한 꽃그늘은 우리를 취하게 하여 어질머리를 일으키는데, 한쪽에서는 시인의 무정한 모가지처럼 툭, 툭, 붉은 동백꽃 떨어지고, 나른한 봄날의 벌들은 닝닝거리고, 온 숲속은 향내와 매혹에 가득 차, 알 수 없는 설움이 북받칠 정도로 선운사 동백은 충격적이었습니다. 이 기름진 꽃나무의 동백꽃은,! 머리 꼭대기와 뺨이며 어깨, 팔, 다리, 그리고 발등에까지 피고 또 피어 온통 꽃불이 난 꽃덩어리같이 보였습니다. 그렇게 만발한 꽃은 처음 보았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잎사귀들은 시들시들했습니다. 비명처럼 자지러지게 휘황한 꽃송이들과 누릿누릿 힘없이 시들어 마르고 있는 잎사귀의 대조. 그것은 참 기이해 보였지요.
그런데 그와 꼭 같은 형상의 꽃나무를 몇 년 후에 어느 선생님 댁에서 보게 되어, 문득, 예전에 본 선운사 동백꽃 생각이 났습니다. 그때 그 선생님은 말씀하셨지요. "아이구, 저게 꽃이 저렇게 너무나 흐드러지게 많이 피어가지고 꽃몸살을 하느라고 잎이 다 시들어진다." 저는 정말 놀랐습니다. 꽃도 너무 많이 피면 꽃몸살을 하는가. 순간 저의 귀에는 그 말씀이 우리 욕심 많은 인생살이 사바 예토의 중생들이 집착의 꽃 더덕더덕 양껏 탐욕적으로 피워낸 부귀영화 만발한 풍경으로 환치되어 들리는 것이었습니다. 만일에 어떤 부귀영화 만발한 집안에 너무 지나치게 많은 행복의 꽃들이 저토록 다투어 피고 있다면, 그 꽃 뒤편에서 시들고 있는 것은 무엇일까. 온갖 소망을 다 이루었다 하는 사람도 마찬가지 아닐까. 눈은 우리 몸에 너무나 소중한 것이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만일 온몸에 눈 투성이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괴물인 것과 같이, 꽃투성이, 행복투성이인 사람 또한 삶으로서는 기괴한 것이며 저도 모르는 사이에 아주 귀한 그 무엇인가를 잃고 있는 것이 분명할 것입니다. 가장 귀중한 것을.
그런데, 다시 그 선운사 동백을 친구와 함께 볼 때의 이야긴데요, 우리들은 꽃에 취해서, 꽃에 치어서, 인산인해를 이루며 몰려드는 온 나라 사람들에 지쳐서, 그냥 꽃나무 그늘 아래 하염없이 앉아 있는데, 제 친구가 문득 미소를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아주 고요히 손가락을 들어 요렇게 자기 자리 밑을 가리켜요. 무심코 그 손가락 끝에 눈을 준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어쩌면 거기에는, 이끼가 파랗게 돋아 있는데, 그 진초록 우단 같은 이끼에는 이끼꽃이 피어 있었어요. 아주 쬐끄만 그 꽃은 꼭 좁쌀을 튀긴 듯한 하얀 색깔 점들 같았습니다. 톡, 톡, 톡, 톡, 피어 있는 그 꽃들을 보며, 아아, 이끼도 꽃이 피네. 저는 탄식을 했습니다. 온 산이 무너지게 불타는 동백꽃 그늘의 이끼꽃 핀 바위 언저리는, 화면이 정지한 것 같은 정적에 에워싸여 숨이 막힐 지경이었습니다. 저렇게 잘난 동백이 아득한 세월의 백제 전통과 가문을 자랑하며, 자기의 맵시를 자랑하며, 자기의 빛깔과 종자를 자랑하며 흐드러지게 피어서, 온 나라 사람들은 모두 다 동백꽃을 보러 오지 이끼꽃 보러 온 사람은 하나도 없지만, 어쩌면 그 이끼꽃 생긴 이래로 자기! 를 발견해 준 사람은 그 친구와 저, 둘 뿐이었는지도 모르지만, 그 이끼꽃은 너무나도 당당하여 그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위엄까지 갖추고 있었습니다. 어쩌면 그렇게도 그 이끼꽃은 그처럼 기 안죽고, 온 산을 뒤덮은 주인공 흐드러진 동백잔치 속에서 조금도 구겨지지 않고, 나라고, 나답게, 반짝, 별처럼 피어 있었을까.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제가 고개를 숙이고 그 꽃을 가까이 들여다보았는데, 노란 꽃술까지 다 있었습니다. 아, 우주가 거기 이슬 같은 점 하나로 맺힌 듯한 완전함. 저는 그때 이 꽃이 정말 자랑스럽게 느껴졌습니다. 그 자랑스러움이라는 것은, 그 꽃이 그 순간 마치 꼭 저와도 같이 느껴진 때문이었습니다. 나도 어디 가서 기죽지 않고, 누가 아무리 빛깔을 자랑하고, 몸매를 자랑하고, 무리를 자랑해서, 온 산을 동백이 뒤덮으며 세력을 떨쳐도, 바위 밑 습지에 눅눅한 자리 한 뙈기가 내 땅의 전부! 라 해도 '나'라고 피어, 나의 우주를 이루어 낼 때 내 생의 섭리가 완수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때 저는 확실히 알았습니다. 그 봄날, 온 산의 동백꽃은 이 조그만 이끼꽃으로 인해 비로소 완성되었다는 것을, 또한 그 온 산의! 동백꽃을 장악하고도 남는 무게와 힘이 그 이끼꽃에서 뿜어져 오래오래 저를 사로잡으리라는 것도 알았습니다.
그런데 요즘은 조화를 어떻게나 잘 만드는지 생화와 구분을 할 수가 없을 정도입니다. 기술이 발달한 요새 조화는 감촉이며 빛깔이 뛰어날 뿐 아니라 꽃잎에 이슬까지 뿌려가지고 아주 금방 갓 피어난 것처럼 싱싱해 보이지요. 거기다 은은한 조명을 받으며 고급스러운 실내를 장식하고 있으면, 누구라도 그것이 조화라고 알아채기 어렵지요. 그러면 어떻게 우리는 조화와 생화를 구분할 수 있을까요? 정확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썩은 자리'가 있는가 살펴 보는 것입니다. 썩은 자리가 있는 꽃은 생화입니다. '산 것'은 꼭 썩은 자리가 있습니다. 이 충격적인 사실은 저에게 놀라운 위로를 주었습니다. 상처야말로 생명의 상징이요, 흔적인 것입니다. 사람의 한 세상이라는 것이 금방 이슬이 돋아난 장미꽃처럼 피어나 끝끝내 시들지 않고 화려하게 만개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삶은 그런 것이 아니어서, 눈물 떨어진 자리는 썩게 마련이지요. 그 썩고 상한 자리가 너무나 아깝고 억울해서, 슬프고 분해서, 무엇으로도 위로받을 수 없을 것만 같은 생각을 할 때도 있지요. 메워 보고자 부질없는 한숨으로 제 가슴의 구멍을 어루만지며 남모르게 눈물을 떨구기도 할 것입니다.
하지만 자기 가슴속에 썩은 자리 있으시다면, 당신은 살아 있는 사람입니다. 만일에 그런 자리가 하나도 없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자신의 삶에 대한 감수성과 '생명성'에 대하여 한 번 돌이켜 보아야 할 것입니다.
'상한 것들이야말로 살아 있다'는 것을 역설적으로 알려주는 이 경이로운 경험을 이야기하니, 또 하나의 감동적인 경험이 떠오릅니다. 인생은 정말 다채로운 이미지와 암시로 가득찬 비밀의 동굴 같습니다. 그 동굴의 암벽을 더듬어 읽어내는 암호 문자, 그것은 신비로운 전율을 느끼게 합니다. 어쩌면 저는 거기서 읽어낸 세상을 여러분들에게 '읽어드리는'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그중에 저한테는 마치 '부적'(符籍) 같은 이야기가 하나 있습니다. 그 부적은 나무로 깎은 화병입니다. 그것은 어머니와 늘 함께 다니던 전통 목기점 주인이, 어머니를 여읜 저의 슬픔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름난 장인(匠人)의 솜씨로 빚은 것을 주신 귀한 선물이었습니다. 모양에 아무런 장식도 하지 않고 나무색 나뭇결이 그대로 드러난 이 화병은 마치 목이 긴 조선 백자 술병을 닮았습니다. 넉넉하게 떠오르는 보름달같이 풍요로운 몸통이 봉긋 부푼 여인의 치마폭 같기도 한데, 간절한 기다림이 솟구친 꽃대인 양 뻗어 난 화병의 모가지는 가늘고 길어서 아득했습니다. 그 둥글고 어진 몸에는, 속 깊은 곳으로부터 은은히 배어나 비치는 온갖 무늬가 흡사 탈속의 동양화마냥 어리어 있었습니다. 저는 그 나무의 이름도 모릅니다만, 이 화병의 재료가 된 나무는, 저 숲 속에 우렁찬 아름드리 몇십 년생 나무였다고 합니다. 청천 하늘 아래 거칠 것 없이 커 오르던 이 나무는 어느 하루 영문도 모르면서 무참히도 나무 깎는 장인의 도낏날에 여지없이 찍히어 잘린 뒤, 그것만으로는 불행이 모자라서 다시 토막, 토막, 여나믄 토막으로 잘린답니다. 죄 없이 자기의 토양에서 잘 자라던 나무가 느닷없이 밑둥을 잃고, 또 토막쳐질 때, 만일 나무가 생각이 있다면 어떻게 견디겠습니까? 또 이것을 사람마다 겪는 자신의 경험이나 인생이라 생각한다면, 또는 조국의 역사나 시대의 아픔 같은 것으로 환치시켜 본다면. 이 수난과 핍박과 좌절과 고통을 어떻게 견딜 수 있을까요? 외부, 혹은 운명의 도낏날에 허리가 찍힌 나무토막들.
그런데 이 나무의 참경은 여기서 그치지 않습니다. 장인은 이 열 토막 난 나무토막들을 시궁창에 처박습니다. 순결한 나무가 운명에 폭행당한 것이지요. 생의 모욕. 그리고 처박은 사람은 석삼년을 잊어버립니다. 그 시궁창이란 이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곳 아닙니까? 온갖 하수물과 쓰레기가 썩고 있는 시푸르둥둥한 시궁창 속에는 실지렁이 뭉텅이 살고, 부글부글 끓어서 숨도 쉴 수 없지요. 늪처럼 고여 썩어가는 시궁창 그 천하고 더러운 밑바닥에 처박힌 생나무 토막은 뜨겁게 들끓는 석삼년 세월을 그냥 속수무책 썩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삼년이 지나면 장인은 그것들을 건져 올리지요. 허나 열에 아홉은 대개 참으로 썩어버리고, 요행히도 한 토막 건질 수 있다면, 그것은 정말 그야말로 보물단지, 그 어떤 금덩어리와도 바꾸지 않는 보석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도 온전한 것이 아니라 살점이 떨어져나가 뭉그러진 고갱이 한 토막이지만, 이 세상의 무엇보다! 소중한 귀물로 소중히 보듬어 올린 이 나무토막을 이제는 흐르는 냇물에 석 달 열흘 동안 담가 놓습니다. 시궁창에서 건져 올린 냄새도 씻어내고, 마지막 원한처럼 썩어 부스러지는 나뭇결도 저절로 다 떨어져 씻겨 내려가게 하는 것이지요. 실핏줄까지 깊이 밴 시궁창의 세월을 씻어내는 것입니다.
그리하여 건져 낸 나무토막을 이제 처마 밑 그늘에서 말립니다. 그것도 석달 열흘. 그동안 네가 얼마나 억울했느냐, 얼마나 서러웠느냐, 얼마나 답답하고 어두웠느냐, 죄도 없이 썩느라고 얼마나 애썼느냐, 해서 모든 세월을 갚아 주느라고 찬란한 햇볕에 내세워 보란 듯이 바짝 말려주는 것이 아니라, 다시금 그늘진 자리에 버려지듯 매달린 나무토막은, 저절로 바람 불고, 저절로 이슬 내리는 시간이 삭아 마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마른 나무토막은 이제 드디어 돌덩어리보다 더 단단하고, 종이보다 가볍고, 천년을 두어도 다시는 썩지 않는 재질로 바뀐답니다. 그러니까 생나무가 원통히도 잘리어, 시궁창에 처박힌 채 썩어서, 건져져서, 물에 씻겨, 마르니, 전혀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 것이지요.
"썩어서 썩지 않는 그대." 저는 열의 아홉을 다 잃어도 이 하나를 얻을 수 있다면 이 세상에 두려울 것이 없을 것 같았습니다.
저는 어느날 이 화병을 소재로 글을 쓰고자 했습니다. 밤이 이슥하도록 홀로 그 화병을 깊이 바라보노라니까, 보면 볼수록 신비로운 한 폭의 동양화가 이승의 산수 어디에도 없을 듯한 기암괴석과 천인단애, 구름과 물결을 이루며, 속된 세상 티끌이나 잡티라고는 단 한 점도 없는 초연함으로 무궁무진한 진경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정말 아름다웠습니다. 그런데, 아아, 그 무늬들은, 더러운 시궁창 속에서 생나무 토막이 견디다 견디다 못하여 비명처럼 진액을 토해 낸 자리라고 합니다. 또한 더는 못 견디던 가슴이 쩍 벌어졌다가 저절로 아문 금이 그런 선으로 남았다고도 합니다. 제 살점이 녹아 떨어진 흔적이라고도 합니다.
그 신묘한 추상화의 살 속에는 서럽도록 투명하고 아련한 비취빛 물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시궁창 물이라고 합니다. 어떠한 세상을 견디어 냈길래 시궁물이 비췻빛으로 떠오르는가. 저는 울었습니다. 시궁창이 은하수보다 찬연히 물든 가슴, 그것은 아름답기보다 거룩했습니다.
제 마음 속에 어떤 풍경화를 저는 그리고 있었습니다. 나의 생애가 머금은 온갖 수모, 절망,! 슬픔, 아픔, 상실, 배반, 억울함, 이런 것들이 한 세월을 견디며 어떤 무늬와 빛깔을 이루고 있을 것인가. 이 모든 풍경은 지금 다른 이들의 눈에는 어떤 모습으로 비칠 것인가.
저는 이 나무 화병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마음이 평온해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최악의 상태가, 사실은 가장 고결하고 아름다운 몸으로 태어나는 모태가 된다는, 이 엄청난 비밀.
이 한 토막 나무는, 그 나무의 혼일 것입니다.
대금을 불 때 입김으로 부는데, 그 입김의 9할은 허공으로 흩어지고 다만 1할이 대롱 속으로 깊이 들어가 떨리며 음이 되는 것이랍니다. 그 1할의 입김. 이것도 입김의 혼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도근점'(圖根點)이라고 봅니다. 저는 이 '도근점'을 참으로 어려운 과정을 통하여 알게 되었는데, 지도를 만들 적에 삼각측량의 중심점을 말하는 것으로, 도근점은 우주 전체에 하나가 있을 수도 있고, 수억만 개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말하자면 우주 전체를 하나로 삼각측량하겠다 하면 가장 중심되는 단 한 점이 있겠고, 우주를 수억만 개로 쪼개서 삼각측량하겠다 하면, 그 낱낱의 삼각형마다 중심점에는 심이 되는 도근점이 있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것은 바로 내가 앉아 있는! 이 의자 밑에 있을 수도 있고, 집 앞 골목에 있을 수도 있고, 흐르는 냇물 속에 있을 수도 있답니다. 도근점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으며, 설령 한 번 찾아낸 도근점의 표지가 없어져도 다시 재면 정확하게 그 자리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그 말에 전율을 느꼈습니다. 존재의 근원점. 우리가 시대와 역사 속에서, 내 가정에서, 나 자신의 인생에서, 만일 '도근점'을 찾는다면 그것은 어디에 있을까. 만발한 성공과 성취의 한가운데서 찾을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고통과 절망 속에서 찾을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 한 예로 여기 김경 선생님의 종이 옷을(선물로) 보여 드리려고 합니다. 이 종이는 우리나라 '닥'을 빚어 만든 한지로서, 70 평생 종이와 더불어 살아오신 선생님이 문헌에만 남아 있고 소멸된 신라시대 '잠견지'와 '옥충지'를 복원하고 오랜 연구 작업 끝에 발견한 작품입니다.
종이는 두 가지 상극이 있습니다. 물과 불이지요. 물에 들어가면 녹아 버리고, 불에 들어가면 타 버리는 종이. 그런데 전 세계에서 물에 들어가 녹지 않는 종이는 우리 닥으로 만든 한지뿐이라고 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신기한데 이 닥종이를 물속에 넣고 가만 두는 것이 아니라 3시간이고 4시간이고 꽉꽉 쥐어짜고, 주무르고, 치대고, 때리고, 펼치었다가 다시 담가 두드리고, 밤새도록 작업을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누더기 걸레가 되고 형체도 안 남아서, 쇠심줄도 못 견딜 일이언만, 웬일인가. 이 연약한 것이 종이의 살은 다 녹아 스러져도 종이의 핏줄, 종이의 섬유질은 꿈결같이 남아서, 불란서 망사보다 아름답고 환상적인 무늬를 이루어냅니다. 그 어떤 추상화도 이를 당하지 못하며, 가장 얇은 서리 같은 옷감도 이를 당하지 못합니다. 그러니까 이것은 이미 종이지만 종이가 아니지요. 다시 태어난 새로운 존재입니다. 이로 바느질을 한 옷이 이것입니다. 이 종이로는 깨끼 바느질을 해서 뒤집어도 찢어지지 않습니다. 섬세하고 기품 있는 이 종이의 결과 무늬, 감촉을 좀 보십시오. 그리고 이 온화함.
저는 이 종이가 온 몸이 잠긴 채 시련을 겪은 물을 '눈물'이라고 생각합니다. 본질적으로 제 존재의 상극인 저 눈물 속에서, 온전한 몸으로 있지 못하고, 살이 다 녹을 정도로 시달리고 고통을 당하면서, 끝내는 그것을 견디어 내면, 저렇게 그냥 평범한 종이로서는 도저히 도달할 수 없는 구극, 극치의 세계를 이루어 낸다는 것이 오로지 감격스러울 뿐입니다. 이 눈부신 상징.
저는 제 자신의 삶뿐 아니라 조국의 역사와 운명에 대해서도 이 비유를 적용하여 큰 위안과 해답을 얻곤 합니다.
어느 날 저는 여섯 살박이 조카와 함께 밥을 먹는데, 이 아이가 밥상에 나온 생선을 보고 "야, 물고기 날개다" 하고 좋아했습니다. 지느러미를 가리킨 말이었습니다. 저는 얼마나 놀랐는지 모릅니다. 세상을 3 등분한다면 하늘, 땅, 물(지하)로 할 수 있겠는데, 물은 '눈물'로 볼 수 있습니다. 가장 낮은 자리니까요. 비유컨대 만일에 우리를 물고기라 한다면, 물고기 알이 태어나 처음으로 눈 뜬 곳이 물속이라면, 즉 우리의 인생살이, 환경이 그처럼 서러운 것이었다면, 자신의 태생을 얼마나 원망하였겠습니까. 오로지 그 한평생은 눈물 속에서 헤엄치다 죽어가는 것일 뿐일까. 저 높은 하늘의 푸른 새와 땅 위의 기화요초 온갖 생물의 아름다운 세상에는 닿지도 못하고 궂은 세상을 헤매며 초라하게 살다 가는 것이 다일까? 저는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 어린 조카의 한 마디에서 깨달았습니다. 홀연 어느 한순간 물고기가 제 젖은 지느러미를 날개로 깨닫기만 한다면, 물고기의 우주는 한순간에 변하리라! 생각했습니다. 눈물의 지느러미를 날개로 느끼는 순간, 그의 눈에는 수초와 영롱한 구슬 같은 물고기 알과, 보석처럼 어여쁜 색색깔 산호초며 구름보다 부드럽고 가벼운 물살의 흐름을 감미롭게 즐길 수 있게 될 것입니다. 그는 여태까지 보고도 못 보았던 온갖 것을 보게 되어, 결국 자신의 참모습을 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물속이 곧 하늘이라는 것을 깨친 그는 벌써 날고 있는 것이지요.
상상의 자유로움은 우리한테 새 인생을 열어줍니다.
저는 느낌이 살아 있는 사람을 사랑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는 누구한테나 '혼불'이 있다고 합니다. 헌데 이 혼불은 죽기 사흘 전에 우리 몸속에서 나갑니다. 다른 말로 하면 혼불이 나가고도 사흘은 산다는 말입니다. '혼불'이란 '정신의 불' '목숨의 불' '존재의 불' '감성의 불' 또는 사람을 가장 사람답게 하는 정령의 불을 가리키는 말이지요. 이 혼불이 환히 살아서 빛나는 개인과, 이웃과, 지역사회, 국가, 혹은 시대와 역사, 문명도 있을 것이고, 이미 불이 꺼져 버린 존재와 관계들도 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나의 혼불은 밝은가, 어두운가, 위태로운가, 돌이켜보게 됩니다. 자기 자신의 마음의 불꽃이 자기를 밝고 환하게 비출 때! , 내 지느러미가 바로 내 날개였구나, 깨치는 것 아닐까요? 저는 그 마음의 불빛을 찾고 있는 사람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그 밝은 세상을 꿈꾸면서 소설에서는 가장 어두운 일제 암흑기를 쓰고 있으니, 작은 불꽃 하나라도 가장 저답게 빛나려면 어둠이 필요한 것과 같은 이치라고나 할까요?
이 어둠이 가장 극명한 상징으로 빛나는 것은 우리 단군 할아버지의 어머니이신 곰 할머니 신화일 것입니다.
5천년 전 우리나라 건국 신화의 곰 할머니는, 하느님의 아들이신 환웅에게, 호랑이와 함께, 사람이 되게 해 주시라고 빌었습니다. 그러자 환웅은 하느님의 아들답게 기적을 베풀어 지팡이 하나로, 마치 신데렐라의 호박을 마차로 만들 듯이, 혹은 마법에 걸린 개구리 왕자의 오랜 껍질을 공주의 눈물로 벗기듯이, 그렇게 순식간에 사람으로 만들어 준 것이 아니었습니다. 환웅은 곰과 호랑이한테 쓴 쑥과 마늘을 주면서 "이것을 먹고 삼칠일 동안 금기하며 백일 동안 햇빛을 보지 말라"고 했습니다. 성질 급한 호랑이는 견디지 못하여 굴 밖으로 뛰쳐나가고, 우직한 곰은 그 어둠을 견디었습니다. 이 고독한 어둠 속에서 곰이 먹은 것은 달콤하고 기름진 산해진미가 아니라 쓰고 매운 쑥과 마늘이었지요. 아마도 곰은 많이 울었을 것입니다. 그 곰이 견딘 세월은 어쩌면 나무토막이 시궁창 속에서 견디는 3년의 세월, 혹은 저 종이가 물속에서 제 살이 다 녹아버리도록 견디는 시간이었을는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그 곰은 어떻게 그 길고 긴 어둠을 견디어 끝내는 이길 수 있었을까요? 그리고 드디어 '사람'이 될 수 있었을까요? 뿐만 아니라 그는 만인의 아버지가 될 아들을 낳았습니다. 저는 그것을'자기가 자기를 버리지 않은 힘'이라고 생각합니다. '사람'이 되기 위하여 어둠과 고통과 외로움을 견딘 마지막 힘. '내가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아무도 나를 버리지 않는다'고 저는 믿습니다. 그리고 반드시 나의 '때'는 온다고 확신합니다. 그것이 비록 나의 생각보다는 더디 온다 할지라도.
그가 견딘 눈물은 5천 년 뒤의 한 후손인 저에게 살아 있는 힘을 줍니다. 단군을 낳으신 어머니의 어두운 세월, 그 긴 세월은, 진실로 자신의 '혼불'을 지펴 불씨가 꺼지지 않도록 한, 창조의 모태였지요. 제가 소설 '魂불'을 쓴 것이 벌써 만 16년이 지나고 있지만, 그것은 결코 화려한 세월이 아니었습니다. 어두운 골방이나, 캄캄한 동굴에서 암각벽화를 손가락으로 새기는 것과 같은, 막막하고 쓸쓸한 시간들. 바깥은 난만한 햇빛에 꽃들이 피는데, 이 길고 긴 발효의 시간들은 좀체 저를 놓아주지 않았지요. 그러나 단군의 어머니가 견디신 시간이라면 그 후손인 저도 능히 견딜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한 나라의 건국신화가 무단히 이야깃거리로 생겨났을 리는 없기 때문입니다. 곰 할머니의 백일이란 어쩌면 백년일는지도 몰라요. 인간의 한 세상이지요.
이와 함께 생각나는 차(茶)가 있습니다. 중국 운남성(雲南省) 보이현(普 縣)에서 생산되는 것이라 '보이차'라고 합니다. 한국에서 즐겨 마시는 차는 '덖음차'여서 해마다 덖어 만들고, 일본에서는 가루차인 '말차'를 많이 마신다고 하는데, 중국차는 주로 '발효차'가 많다 합니다. 보이차는 발효차의 대표적인 차이면서 가장 절묘한 진수를 보여 주는 차입니다. 이 차는 찻잎을 쪄서 죽순 잎으로 감싸 발효하게 두는데, 묵을수록 기가 막힌 맛이 납니다. 저는 보이차를 처음 맛 본 순간을 잊지 못합니다. 톡톡하게 짙은 갈색 차 한 잔이 제 앞에 놓인 순간, 차를 따른 주인은 말했습니다. "문향(聞香) 해 보시지요." 차의 향기를 들어 보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차향기는 '맡는 것'이 아니라 '듣는 것'이랍니다. 그래서 대답은 "향이 참 맑다"든가 "향의 소리가 부드럽다"고 하지요. 참 운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저는 보이차를 문향해 보았습니다. 그 향기는 마치묵은 흙이 삭은 토담에서 풍겨 오는 흙내와 같았고, 옛날 큰집이나 외갓집에 갔을 때 장판방 바닥에서 은근하게 올라오던 황토 흙내와도 같았습니다. 혹은 뙤약볕 내리쪼이는 여름날 시골의 고샅길에 갑자기 소나기 쏟아지면 부우옇게 오르던 흙냄새, 또는 묵은 짚더미 삭는, 그 형언할 길 없는 향기였습니다. 저는 정말 깜짝 놀랐습니다. 어떻게 차에서 이런 향이 난단 말인가. 그것은 저 아득한 상고 시절의 악기 음색을 연상시켰습니다. 황토를 빚어서 만들었다 하는 그 악기를 불면 맑고도 부드러우면서 우주평화의 한가운데 고요히 앉아 있는 듯한 소리가 울렸다는데, 차의 향기에서 그 소리가 들렸습니다. 저는 이 보이차의 향기에 그만, 제 몸이 이 복잡하고 날카로운 현대 문명의 도회지 복판에서 한 순간에 촉촉한 고향의 흙맛, 그 이전의 그리운 시간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데 맛을 보니, 과연 그 한 모금에 저의 몸과 정신을 지극히 깊은 맛의 손길로 위로하는 평온이 있었습니다. 결코 휘황하지 않지만 순식간에 제 뇌의 뿌리까지 적시어 메마른 갈피를 젖게 하는 보이차. 마음을 쓰다듬어 달래주는 이 차 한 잔.
그런데 기가 막히게 놀라운 것은, 이 차가 물경 40여 년씩이나 발효된 차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풀 잎사귀 하나가 무슨 힘으로 40여 년씩을 썩을 수 있겠습니까? 발효라는 게 사실 썩고 삭는 것 아닌가요. 이 세상에서 제일 힘 없고 하찮으며 가냘픈 것을 풀잎이라 하는데, 그것이 10년도 아니고 20년도 아니고 40년씩 묵어서, 삭아서, 썩어서, 사람인 저를 한 순간에 모태 이전의 평화로 돌려놓는 조화라니, 저는 탄복하였습니다.
이 차는 맛과 향만 좋은 것이 아니라 우리 몸에 작용하여 많이 마실수록 다다익선으로 효능이 있는데, 몸이 찬 사람은 덥게 해주고 더운 사람은 화기를 가라앉혀 주며, 콜레스테롤을 분해하는 능력이 뛰어난 데다가, 잠 못 드는 사람을 숙면하게 해 주는 등, 일일이 열거를 할 수 없습니다. 오직 할 수 있는 말은 '정말 좋은 차'라는 것이지요. 40년씩이나 제 몸을 삭혀서 자기 자신의 독성을 모두 약성으로 바꾸었으니, 그 세월만으로도 약이 되는 것입니다. 물론 40년 묵은 차가 되기 이전의 20년 묵은 차도 있겠지만, 맛이나 향이나 효능이 현저히 떨어지는 것을 직접 느낄 수 있답니다. 인간의 세월을 풀잎 앞에서 자랑할 수 없게 되었지요.
보이차 맛을 가슴에 담고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저는 다시 그 분 댁에서 놀랍게도 80년 묵은 보이차를 맛보게 되었습니다.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전 세계에 몇 편 안 되는 것 중의 하나라고 했습니다. 생사람도 80년을 묵으면 향기롭기 어렵고 아름답기 어려워 가까이하기 꺼리는데, 아니, 어떻게 풀 잎사귀 찐 것이 80년을 발효하며, 80년을 산단 말인가. 강철 같은 쇠붙이라도 녹이 슬고 말 세월인데. 저는 우선 감격 때문에 차마 맛을 볼 엄두가 나지 않았습니다.
어떻게 하면 80년 묵은 보이차가 될 수 있을까. 그것은 오직 '잊어버려야' 한답니다. 한 번 쪄서 죽순 잎으로 싸 두고는 마냥 세월이 가고 가도록 열어보면 안 됩니다. 잘 되어 가나 까보고, 뒤집어 보고, 헤쳐 보고, 다시 모양을 잘 만들고 하면 전혀 묵어갈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러니까 잊혀진 세월이 20년이면 20년 차, 40년이면 40년 차, 80년이면 80년 차가 되는 것입니다. 제가 '魂불'을 써 온 세월이 아직 20년도 채 못 되니, 이제 넉넉히 잊혀진 채 견디어야 할 세월은 창창히 남아 있는 셈입니다. 40년 된 차도 이미 상당히 비싼 값이었으나, 50년 묵고, 60년 묵고, 묵묵히 70년 잊혀진 채 묵으며, 미리 널리 팔려 나가는 차 동무들 곁에서 무색했을지도 모르는 이 80년 차.
풀 잎사귀 하나가 버려진 듯 견디는 세월을 사람인 제가 왜 못 견디겠는가. 아무러면 내가 풀 잎사귀 하나만 못할 리 있으랴. 80년이면 사람의 한 평생인데. 어둡고 고독한 것이 얼마나 한지 모르겠으나, 못 견딜 리 없으며, 견디어 못 이룰 리 없을 것 같았습니다. 사실, 지난번 신동아 연재소설을 마칠 때 소감을 한 마디 써 달라 하기에, 속으로 말했습니다. "나를 잊으신 이여, 감사합니다. 나를 버리신 이여, 더욱 감사합니다." 나를 잊으신 그대 때문에 나는 더욱 무르익을 수 있을 것이고, 나를 버리신 그대 때문에 나는 80년 묵은 보이차가 될 수 있을 테니까.
나 자신의 생애와 작업, 그리고 내 조국의 역사와 운명도 진정한 완성을 위한 발효의 고통과 어둠을 필연으로 겪으며, 반드시 열릴 새 날의 시간을 익히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에게 있어서는 여러분 한 분 한 분이 '나의 조국'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은 여러분의 가슴에 조국을 안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여러분이 떠나와 계신 여기까지가 우리나라의 국경선입니다. 저는 지금 국경선에 서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지요.
전에 제가 '魂불'을 쓰려고 중국에 64일간 취재를 간 일이 있었습니다. 소설의 주인공인 강모(康模)가 젊은 날 헤매어 방황하며 떠돌던 발자취를 따라서 1930년대와 40년대를 만나러 갔던 것입니다.
그때 저는, 연길의 한 대학교수가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수도 알마아타 시에 가서 강연했던 이야기를 충격적으로 들었습니다. 남루한 국민학교 교실 하나를 빌려 한 강연이었는데, 그 곳에 사는 조선족과 그 자녀들이 빼곡히 모여 너무나 엄숙하고 굳은 표정으로, 숨소리조차 들리지 않게, 침도 삼키지 않고 듣더라 합니다. 행여 한 마디라도 놓칠세라 눈동자 하나 비뚤어지지 않고, 물론 꼼짝도 하지 않고요. 그때 교수는 속으로 '이 머나먼 남의 땅에서 어떻게 이 사람들, 특히 어린아이들이 우리말을 이렇게 잘 알아들을까' 탄복하며, 서로의 교감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딱 강연을 마쳤습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억눌린 한숨이 터졌습니다. 교수도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그리고 물었습니다. "너희들, 내 말을 알아듣겠느냐?" 그러자 아이들은 모두 검은 눈망울을 껌벅이며, 모른다고, 고개를 저었습니다. "그럼 너희들은 무엇을 들었느냐? 그렇게도 열심히?" 이에 한 아이가 울먹이면서 "우리 조국의 말소리가 저렇게 생겼구나……. 내 나라의 음성을 들었습니다. 소리를……음악을 듣듯이……뜻을 모르지만 알 것만 같아서"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교수는 북받치는 울음을 참지 못하고 그만 통곡을 터뜨리고 말았습니다. 서러운 내 아이들. 아이들도 울고, 어른들도 엉엉 울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저도 울었습니다.
그다음 날, 연길의 어떤 학술대회에 참석했습니다. 한 무용인의 발표가 저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그는 손짓을 해 보이며 한국인의 기본 정서는 '맺고' '푸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동작이 다소 느리거나 빠른 차이는 있지만, 남쪽과 북쪽의 춤사위에 공통적으로 이 정서와 사상은 용해되어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는 "사실 우리 조선족 동포들은 가난 때문에 저 살던 땅을 떠나 쪽박 하나 차고 두만강 압록강을 넘어왔습니다. 그래서 이 쪽박에다가 조선을 다 담아오지는 못했습니다. 그러나 쪽박에 담긴 조선도 조선입니다. 우리는 이 쪽박에 담긴 조선을 어떻게 흘리지 않고 훼손시키지 않고, 온전히 우리의 후손에게 넘겨줄 수 있을까. 그것이 정말 우리들의 숙제이고 과제입니다"라고 말하며, 목이 메었습니다. 저는 그 '쪽박에 담긴 조선' 때문에 하염없이 울었습니다. 그리고 깊은 죄책감을 느꼈습니다. 그분들의 그리움의 복판에서 매일 자고 깨며, 그분들이 그토록이나 그리워하는 모국어를 다루고 있는 소설가로서 과연 내가 무엇을 어떻게 하고 있는지, 진정으로 가슴 미어지게 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열악한 조건 속에서 조선을 조금이라도 지키기 위해 눈물겨운 노력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예는 알마아타 시에도 있었습니다. 그 곳에서 국립 조선민족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분의 이야기인데, 제 나라도 아닌 남의 땅에서, 배우들이 무대장치를 등짐으로 지어 나르며, 돈도 되지 않는 조선 연극을 하다가, 도저히 더 이상 극장을 운영할 수 없어 문을 닫으려 할 때, 그 소문을 듣고 알마아타에 살고 있는 조선족들은 물론이고 먼 곳에 사는 동포들까지, 초라하고 궁색하기 짝이 없는 살림살이 중에서 제일 값나가는 것들을 하나씩 들고 찾아와, "부디 연극을 해달라"고 애원했다 합니다. "우리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 자식들을 위해서. 우리 아이들에게 조선말로 하는 조선 연극을 보여 주고 싶다. 우리는 어쩔 수 없이 조국을 떠나 왔지만, 우리 자식들만큼은 조선말을 잊게 하고 싶지 않다." 이에 배우들과 동포들은 얼싸안고 울음을 터뜨렸다 합니다.
이 관계자 가운데 한 분이 연길에 왔다가 다시 알마아타로 돌아가는 길에, 저도 마침 '목단강'이라 하는 도시까지 동행하게 되어 버스를 타고 그쪽 방향으로 가는 기차가 있는 '도문'까지 가는 도중이었습니다. 갑자기 70이 넘어 머리가 하이얀 분이 황급히 차를 세웠습니다. 우리 일행은 의아하여, 그분이 버스가 지나쳐 온 길을 되짚어 허겁지겁 뛰어가는 모습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분은 냇물이 흐르는 길가에 엄숙한 자세로 반듯이 서서 물 건너 들 건너 나즈막한 산기슭에 조용히 엎드린 초가 마을을 향하여 심호흡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천천히 허리를 깊이 꺾어 정중하고 공손하게 절을 했습니다. 한동안 그러고 있던 그는 이윽고 몸을 세워 그 마을을 바라보더니, 다시 숨이 차게 달려왔습니다. 그 짧은 동작은 너무나 경건하고도 절대적이어서 저는 알 수 없는 위압감을 느꼈습니다. 그는 왜 흰 머리카락을 바람에 날리며 비장하게 그러고 있었던 것일까요? 그는 말했습니다. "저 마을에서 우리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돌아가셨고, 어머니와 아버지가 사셨다. 그리고 나도 18살까지 살았었다. 그 마을을 향해서 나 혼자, 지금은 아무도 계시지 않지만 , 절을 하고 떠나는 것이다. 나는 이제 나이가 많으니, 다시는 저 마을을 볼 수가 없을는지도 모른다."
저는 아마 그 분의 모습을 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한 도시 한국인 교회 칠판에 적혀 있던 한글 말 '유관순', '우리나라 만세', '삼일절', 그 비뚤비뚤한 글씨가 가슴을 치던 감격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칠판이 걸려 있는 공간은 이미 남의 나라 남의 땅이 아니었습니다. 실로 이 칠판까지가 내 조국의 국경선이라고 저는 사무치게 느꼈던 것입니다. 우리가 멀리 가면 갈수록 그만큼 조국의 국경은 넓어질 것입니다.
국경수비대. 저는 '무엇으로 나를 지킬까' 생각해 봅니다. 제가 오늘 서 있는 이 자리를 존재의 도근점(圖根點)으로 삼아 삶의 영토를 삼각측량하면서, 흘러가는 시대의 물살에 오로지 진정을 다해 발효된 모국어 한 마디를 징검다리 돌 한 개로 박아 세우고자 합니다. '언어는 정신의 지문'이며, '모국어는 모국혼(魂)'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제가 이 일을 충실히 잘하고 있는지, 여러분께서는 부디 저를 지켜보아 주시기 바랍니다. 그 눈빛이 우리 서로를 점화시켜 오래오래 따뜻하고 환한 울타리로 타오를 것을 저는 믿습니다.
대하소설 '혼불' 의 작가 최명희씨가 11일 오후 5시 서울대병원에서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51세.
꼬박 17년을 끌어안고 쓴 원고지 1만2천여장, 전5부 10권으로 '혼불' 을 완간한 지 꼭 2년만이다.
30년대 전북 남원지방 매안李씨 가문의 며느리 3대를 줄기로 양반과 상민의 삶을 고루 그려낸 '혼불' 은 세시풍속. 관혼상제. 전통음식. 촌락구조 등을 방대한 고증을 통해 형상화, 호남지방 풍속사의 문학적 박물관같은 작품이었다.
근대사회의 격랑 속에서도 기품과 아름다움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삶의 생명력을 묘사한 작가의 문체 역시 그윽하고도 강렬한 맛이 우리말의 아름다움을 극한적으로 보여준 것으로 평가돼 왔다.
보성여고 교사로 재직중이던 작가는 80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 그해 4월부터 '혼불' 집필을 시작했다.
7년여의 월간지 연재와 두달간의 중국취재, 여러 해의 퇴고를 거쳐 세상에 나온 예술혼은 뜨거운 반응을 불러일으켰다.
96년 12월 출간 직후 첫 한달만에 10만부가 팔려나갔는가 하면 97년 7월 결성된 '작가 최명희와 혼불을 사랑하는 사람들' 모임과 호암상.단재상.세종문화상 수상소식이 차례로 격려에 나섰다.
그러나 이때 이미 작가는 '혼불' 집필 말미에 발견된 암과 세차례 수술을 거치는 힘든 싸움을 벌이고 있던 상태였다.
사전에는 안나와 있는 '혼불' 의 뜻이 작가의 말대로 '정신의 불' '목숨의 불' 임을 짐작하기란 그리 어렵지 않다.
"최명희는 '혼불' 을 쓰기 위해 태어난 것" 이란 어느 지인의 말대로, 작가는 '혼불' 10권에 스스로의 혼불을 고스란히 불살라넣고 다른 세상으로 갔다.
장례는 15일 작가의 고향인 전주 덕진공원 내 최명희 문학공원. 유족으로는 동생 용범. 선희. 대범. 은영. 민영씨가 있다.
이후남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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