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중불 / 조여선
추진 나무로 불을 지펴본 사람은 안다. 한겨울에 간신히 살려놓은 불길이 방고래로 빨려 들어가지 못하고 되나올 때의 속상함을.
내가 십 대까지 살아온 마을은 시골이었다. 차라리 산골이었으면 땔감이라도 흔했을 텐데, 군불이 필요한 겨울에는 땔감이 턱없이 부족했다. 마을에서 가까운 곳에는 산도 없었다.
가을일을 끝낸 남자 어른들은 지게 꼭대기에 도시락을 매달고 십 리도 넘는다는 산을 향해 줄지어 나갔다. 보온물통도 없을 때니 밥이 되살아 언 밥을 먹는다고 들었다 어둑어둑해져서야 양식만큼 소중한 나무를 한 동씩 지고 집을 찾아오는 발걸음은 어린 눈으로 보아도 소처럼 느렸다. 나는 무사히 돌아오길 기다리며 마당 끝에 나가 걱정으로 서성이던 가족들의 따뜻한 마중을 잊을 수가 없다.
몇 년 전, 부모님은 나무와 약초를 가꾸면서 노후를 보내시겠다고 삽시도로 이사를 하셨다. 기름보일러 방이 두 개나 있는데도 당산을 찾아오는 손님들을 재우겠다고 본채에 잇대어 황토 방을 만드셨다.
집 근처에 있는 산에 얼려있는 솔방울과 마들가리들이 아까워서이기도 하지만, 군불을 땐 뜨끈뜨끈한 아랫목이 그리웠다고 하셨다. 나도 그렇지만 나이가 많아지면 왜 돌아보기도 싫었던 가난한 옛일들을 자주 떠올리게 되는 걸까.
부모님의 섬 집에 다니러 갔을 때도 가마솥이 걸려있는 부엌을 보고 얼마나 반가웠었나. 유년의 매운 추억이 한꺼번에 몰려오면서 얼른 성냥과 부지깽이를 챙겨 아궁이 앞에 앉았다. 몇 십 년 잊고 있었던 일인데도 낯설지가 않았다.
방을 만들어놓고 오는 사람도 없고 해서 겨우내 비워두었다더니 아궁이 속이 축축했다. 해무와 소금기 있는 바람이라 육지와는 다르다고 하셨다. 고무래로 묵은 재를 그러내고 앞산으로 갔더니 믿기지 않을 만큼 마들거리와 솔방울이 지천이었다. 금방 한 자루 담아 가지고 와서 불을 붙여보려 했지만 조금 타오르다가 꺼져버리기를 반복했다. 굴뚝으로 연기가 나가지 못하는 게 방고래까지 습기가 차서 불기운이 개자리(불기를 짤아들이고, 연기를 머무르게 하기 위하여 방구들 윗목 속에 깊게 판 고랑)를 넘어서지 못하는 듯했다.
입김으로 불다 안 돼서 부채질을 했으나 도저히 살릴 재간이 없었다. 성냥만 축내고 있는데, 그 광경을 본 남동생이 안 되겠는지 불쏘시개와 화력이 좋을만한 나무를 조금 안고 밖으로 나가기에 따라가 봤다. 동생은 엉뚱하게도 굴뚝 아랫부분에 나무를 쌓아 놓더니 성냥을 그어댔다. 불장난을 할 나이도 아니고 처음 보는 광경이라 의아했다. 동생은 굴뚝의 온도를 높여주면 그 운기로 아궁이에 있는 불길을 빨아들인다고 설명했지만 나는 믿어지지 않았다.
마당에서는 불이 잘 살아났다. 얼마가 지났을까 굴뚝이 뜨거워졌을 때 부엌으로 가보았더니 아궁이 안에서는 내가 의심했던 일이 반대로 벌어지고 있었다. 꺼져가던 불씨들이 살아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서는 검증되지 않은 체험들이 살아가는 데 도움을 주는 경우도 있기는 하나, 그렇게 애를 먹이던 불이 꼬다케 살아나 고래를 향해 솔솔 기어들고 있었다. 적은 양으로 시작한 불쏘시개의 열기가 바깥 굴뚝의 온도를 높였고 그 온기가 마중불이 되어 추진 아궁이의 불길을 불러내고 있었던 것이다.
펌프로 물을 긷기 전에 사용하는 마중물과 같은 이치다. 나는 시골에 살 때, 마중물의 절실함을 경험했다. 펌프 물 관리는 겨울이 까다롭다. 동파를 방지하기 위해 하루 일과가 끝나면 펌프 안에 있는 물을 빼놓아야 한다. 다음날 한 바가지의 마중물을 조금씩 부으면서 한 손으로는 계속 펌프질을 하면 그 압력으로 인하여 마중물은 지하수를 끌어올린다.
맞이하는 물의 양은 한 바가지면 족하다. 펌프가 묻힌 곳에 아무리 풍부한 수량이 고여 있다 하여도 이 물을 붓지 않으면 한 방울의 물도 끌어올릴 수가 없다. 이처럼 방구들을 덥히는 일도 적은 양의 불쏘시개가 마중불 역할을 하는 셈이다.
마중은 반겨줌이고 어려울 때 손잡아 주는 온기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소리가 크게 들려오고 있는 요즘, 한 줌의 불쏘시개와 한 바가지의 물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가 모든 걸 도와줄 수는 없다지만, 아기가 걸음마를 배울 무렵 어른들이 아이를 세워놓고 ‘따로, 따로’ 또는 ‘섬마, 섬마’해주듯이 혼자 서도록 용기를 주면 된다.
장작불도 잘 타오르게 하려면 나무들이 숨을 쉴 만큼 적당히 떨어지게 놓되 서로 온기가 느껴질 만큼 가까이 두라고 한다. 사람과의 사이나 장작불과의 사이나 온기만큼 중요한 게 없다는 뜻 아니겠는가. 오죽하면 ‘명주고름만 달아도 사촌까지 따뜻하다’는 말이 내려오고 있을까.
손잡아주면, 물도 수십 길 아래서 올라오고 죽어가던 불도 타오르는데, 사람이 사람에게 마중불이 되고 마중불이 되어준다면 추워지는 계절에 그보다 아름다운 정경은 없다고 본다. 정이 물이나 불보다 뜨겁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