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앗, 다시 꿈꾸다 / 허정진

 

 

산안개 머물다간 숲속에 푸르름이 선연하다. 온갖 숨탄것들 살찌우는 아침 햇살이 드리우자 이름 모를 산 꽃들 정채롭게 피어나고, 울울창창한 나무들 사이로 산새들 허공을 날아든다. 나무들도 가지각색이다. 곧거나 굽었거나, 그늘지거나 양지쪽이거나 각자 좋아하는 자리를 찾아 스스로 삶의 터를 일구었다. 푸른 숨결과 꽃향기로 가득한 숲은 언제나 살아 꿈틀대는 생명의 몸짓으로 출렁인다.

저 웅대한 숲이 처음부터 저 모습이었거나, 인간의 주도면밀한 계획하에 조성된 인공림이 아니다. 자연은 아무런 간섭도, 지시도 하지 않는다. 누가 심지 않아도 나무는 자라고, 바라보는 이 없어도 꽃은 피어난다. 우람하게 하늘까지 치솟은 거수명목도 시작은 작은 배아(胚芽)에서, 어느 씨앗 하나가 바람에 홀로 날아들어 숲이 되고 작은 우주가 되었다.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유적 중 하나인 따 프롬에는 거대한 나무뿌리들이 고대의 사원을 휘감고 있다. 사원을 무너뜨릴 듯이 웅장하고 기괴한 ‘스펑(Spong)’이라는 이 나무는 은색의 뿌리 갈래 하나가 기둥처럼 굵고, 길이도 사원의 지붕에서 바닥까지 닿을 만큼 길다. 이 엄청난 크기의 나무도 시작은 바람에 날려온 씨앗 하나였다. 앙코르 왕국이 몰락한 후 방치되어 온 수백 년 동안 돌 틈에 뿌리를 내린 씨앗이 이런 형상을 만들어 낸 것이다.

씨앗을 본다. 나팔꽃, 채송화, 고추, 참외, 앵두, 잣나무 씨 등 어느 것 하나 큰 것이 없다. 특히 야생화 씨앗은 눈에 보일 듯 말 듯 그 실체가 구별도 되지 않는다. 그렇지만 그 작은 몸집에서 푸른 싹을 틔우고, 자기 몸보다 상상할 수 없는 크기로 성장하여 꽃을 피운다. 그래서 씨앗을 보면 꿈이나 미래, 희망이나 가능성을 상징하게 되는 것 같다.

먼지만큼 작고 가벼운 씨앗이지만 그 속에 한 생명의 미래와 자기 삶의 풍경이 담겨 있다. 앞으로 펼쳐질 그의 생애와 우주가 열두 폭 화첩처럼 고스란히 접혀있다. 세상 앞에 살아갈 불같은 열정도, 도전도 때로는 아픔도, 좌절도 무한의 유전자 지도로 저장되어 있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지 본능적인 몸짓이 기호화되어 있다.

그들은 소리도 없이 움직이고 때가 되면 싹을 틔운다. 기억의 뇌도, 메모한 달력도 없지만 살아내기 위한 열정이 바코드처럼 새겨져 있다. 내가 살아갈 정해진 장소는 없다. 그 주위에 떨어져 군락을 이루기도 하고 언덕 아래 굴러가 옆 동네가 될 수도 있다. 민들레 씨앗처럼 바람에 날려 가거나, 도깨비바늘처럼 동물의 몸에 붙어 더 먼 곳으로 이동할 수도 있다. 차가운 땅이 녹아 온몸에 뜨거운 혈액이 돌기 시작하면 껍질을 깨뜨리고 대지의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나올 뿐이다.

씨앗은 꽃의 결과물이다. 뿌리의 시간을 증명하는 일이고,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생명이다.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이고, 닫힘이 아니라 다시 열림이다. 지구에 빛을 실어 온 별이고 우주로 가는 문을 여는 열쇠다. 아름드리나무 한 그루를 그 작은 공간에 응축해두었으니 가히 손톱만 한 반도체 칩의 확장성과 맞먹는다. 나무의 잎과 열매가 그의 이름이고 얼굴이라면 씨앗은 그의 호적등본이다. 생명의 시원이며 존재의 모태이다.

씨앗이 어찌 꽃뿐이겠는가. 새나 물고기들에게는 알이고 동물들에는 포란이다. 생명을 잉태하는 것은 다 씨앗이다. 오도독, 호박씨를 까먹는다. 생선 알탕을 먹고 유정란을 삶아 꿀떡꿀떡 잘도 먹는다. 들판에 푸른 넝쿨이 사라지고, 바다로 나가지 못하고 병아리가 되지 못한 씨앗들이 내 몸에다 포만의 씨를 뿌린다. 몸 안에 생과 사를 동시에 지닌 영혼처럼, 죽어서도 사는 저 씨앗을 먹고 나는 산다. 설마 내일을 꿈꾸는 사람들의 의지와 용기마저도 망가뜨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동심에 빠져 움찔한다.

누구나 한 톨의 씨앗으로 태어난다. 꽃이 성의도 없이 아무렇게나 만든 씨앗은 없다. 인간이든 식물이든 내 삶에서 꽃피워낼 씨앗 하나가 내가 세상에 지니고 나온 자산의 전부다. 그 씨앗이 가진 조건과 역량을 알 수 없지만, 그렇기에 그 또한 무한한 잠재력과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사실을 함부로 간과할 수 없다.

꽃이 씨앗을 만들면 그다음부터는 씨앗 스스로 할 일이다. 운 좋게 양지바르고 부드러운 토양에 뿌리를 내릴 수도 있고, 아쉽게도 바람 불고 흙도 부족한 비탈에 정착할 수도 있다. 그 씨앗이 어느 토양에서 자라느냐에 따라 흙수저니 금수저니 따지는 세상이지만 인생에 고통과 슬픔은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법이다. 거센 폭풍이 휘몰아쳤을 때 쉽게 쓰러지지 않는 나무는 현재 위치한 토양과 환경이 아니라 스스로 키워온 삶의 무게중심이 어떠하냐에 달려있다.

산다는 것은 흥(興)과 쇠(衰)의 연속이었다. 파도가 있어야 바다가 썩지 않는다는 말처럼 항상 부침이 따르는 것이 인생이다. 공부도, 사랑도, 우정도, 사업도, 건강도 돌이켜보면 매사에 어렵고 힘들지 않은 일은 없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한 번도 멈추거나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노력을 옆에 두고 천운만 탓한 적은 결코 없었다.

씨앗은 무엇을, 어떻게 기다려야 하는지 안다. 씨앗이 성장할 수 있는 온도와 수분, 빛의 적절한 조합과 다른 많은 조건이 맞아떨어졌다는 신호를 기다리는 것이다. 1년이든 100년이든 씨앗은 내일을 꿈꾸며 기다린다. 기다리는 동안에도 씨앗은 살아서 숨 쉬며 끊임없이 그날을 위해 준비한다. 그 가능성을 믿고 기다리지 못하면 움을 트지 못하고 죽을 수도 있는 것이다.

백무산의 시 <정지의 힘>에 “씨앗처럼 정지하라/꽃은 멈춤의 힘으로 피어난다”라는 구절이 있다. 꽃씨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땅속에 가만히 있는 것 같지만 각자의 자리에서 양분을 만들고 힘을 기르고 있었기에 다시 환한 꽃으로 피어난다. 삶이란 어쩌면 내일을 위해 오늘을 참고 견뎌내는 일이 아닌가도 싶다.

<수필미학 2022 가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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