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낙비 내리는 동안 / 김만년
들판 끝에서 메뚜기 떼 같은 것들이 새까맣게 몰려온다. 아까부터 서쪽 먹장구름이 심상치 않더니 기어이 한바탕 쏟아 붙는다. 소낙비다. 직립의 화살촉들이 사방팔방으로 마구 꽂힌다. 나는 호미를 내팽개치고 농막으로 냅다 뛴다. 소낙비는 마치 적의 진지를 포격하듯이 토란과 깨꽃들을 무차별적으로 난사한다. 팔월염천에 축 늘어졌던 깨꽃들이 임을 만난 듯 비를 반긴다. 생글생글 깨춤을 춘다. 춤이 과한 몇 잎은 통꽃으로 떨어진다.
나는 비에 갇힌 채 오도카니 앉아 비바라기를 하고 있다. 소낙비는 쇠로 만든 무기인가. 저 순연한 빗방울이 만물의 젖줄이 되기도 하지만 때론 세상을 쓸어가기도 하고 종내는 내 심장까지 직격하니 말이다. 불가근불가원, 가까이 할 수도 멀리 할 수도 없는 존재지만 나는 비에 대한 애착이 크다. 그것도 도발적으로 내리꽂는 소낙비가 그렇다. 비를 탄다고 해야 할까. 비가 오면 눅눅한 상념들이 달라붙게 마련인데 나는 외려 마음이 설렌다. 이런 날은 열일을 팽개치고 뭔가 근사한 궁리를 찾아야 될 것만 같다. 그야말로 만경평야 우장 없이 달려가 세월에 곰삭은 주모와 마주앉아 ‘나이야가라’며 동동주잔을 부딪쳐본들 또 어떠리. 이런 뜬금없는 생각들이 비를 타고 주룩주룩 나를 공략해오고 있다. 아주 나를 흠뻑 적셔놓는다.
들판을 지나가는 소낙비를 보노라면 달고 풋풋한 기억들이 떠오른다. 토란잎을 덮어쓰고 달리는 아이들 뜀박질 소리, 뒤란의 분꽃 냄새, 비설거지마당을 동동거리던 엄마 냄새, 큰물에 떠내려가던 원두막을 바라보며 연신 장죽을 말아 올리시던 아버지의 담배 냄새도 소낙비에 실려 온다. 한 편의 무성영화처럼 소낙비는 먼데 있던 기억의 저장고를 통째로 싣고 와서 내 앞에 쏴아 부려놓고 달아난다.
코끝을 자극하는 비의 질감에 살구 냄새가 난다. 희끗희끗 달아나는 세월 뒤로 자꾸만 뒤돌아보이던 그 아리고 촉촉했던 기억이 작은 파문을 일으킨다. 나는 어느새 나이도 세월도 잊은 열댓 살 소년이 된다. 그게 사랑이었을까? 비 그친 비탈에서 도라지꽃처럼 살포시 웃던 소녀가 떠오르는 것이다. 비 햇살을 머금은 살구가 주홍빛 실금으로 톡톡 갈라지고 그 집 파란대문이 열릴 때마다 내 마음도 덩달아 갈라지던, 그해 여름의 흑백사진 한 장도 비를 타고 배달된다. 내가 소낙비에 달뜨는 이유인가도 싶다. 일상이 건조해지거나 생각이 마를 때면 어릴 적 뒷방에 감추어 둔 곶감을 빼먹듯이 나는 아내 몰래 살구나무집 소녀를 혼자 야금야금 꺼내먹는다. 새콤달콤한 기억의 맛으로 마른 감성을 적셔보는 것이다.
지나가는 날비려니 했는데 활강의 속도가 일정한 것을 보니 금세 그칠 비는 아닌 것 같다. 장마 끝 달구비에 농부는 물러터진 고추처럼 수심이 깊을 테고 나그네는 건들장마처럼 건들거리며 막걸리생각이나 하련가. ‘비비’ 하고 입술을 달싹거리니 입에서 ‘비비’ 하는 새소리가 난다. 맨 처음 비의 이름은 누가 지었을까. 비의 어감은 참 곱기도 하다. 는개, 안개비는 여리고 촉촉해서 둘이서 흠뻑 맞아도 좋을 비다. 연인들의 뒷모습처럼 서로에게 기댈 수 있는 적당한 습도와 촉감이 있어서 좋다. 색시비는 누이의 버선발처럼 사부작이 지나가는 비다. 수줍은 듯 귓전을 사륵이다가 아침엔 흔적 없이 사라진다. 도둑비는 발아를 기다리는 농부의 새벽잠 속으로 온다. 밤새 도둑 발을 들고 살금살금 다녀가는 고마운 밤손님이다. 보슬비는 먼데서 임이 오는 기별 같은 비다. 색동저고리를 입고 봄 냄새를 물씬 풍기며 온종일 보슬보슬 걸어서 온다. 여우비는 맑은 날 잠깐 다녀가는 실비다. 호랑이를 볼까 무지개를 볼까. 여우비가 내리면 아이들은 비 햇살을 맞으며 논둑길을 달린다. 비 그친 보리누름사이로 숨는 여우가 연상되기도 한다. 해지는 쪽에 앉아서 사막의 여우를 생각하던 어린왕자의 안부가 궁금해지기도 한다. 가랑비는 쓸쓸한 가을의 정취가 느껴지는 비다. 귀로, 이별 같은 단어들이 무작정 떠오른다. 모든 물상들이 머잖아 나목裸木으로 돌아가리란 예감 같은 비여서 고적감마저 든다. 이렇듯 비에는 이름만큼이나 다양한 삶의 무늬들이 채색되어 있다. 그러나 나를 달뜨게 하는 비는 역시 소낙비만 한 것이 없다.
프로메테우스의 심술인가. 하늘의 절창絶唱인가. 서쪽하늘에 파란 불꽃이 인다. 불과 물의 싸움에서 일진일퇴 물러설 기미가 없다. 우레 소리에 깨꽃은 몇 번인가 까무러지고 나는 상심한 듯 비를 바라본다. 소낙비는 도발적으로 오지만 지나간 흔적은 깨끗하다. 사람과의 관계도 그랬으면 좋겠다. 생각이 많아 말의 지류를 맴돌지 않고 바로 가슴으로 직진하는 사람, 생각보다 마음이 먼저 오는 사람. 그런 사람을 만나면 뒷맛이 개운하다. 글도 소낙비처럼 썼으면 좋겠다. 일필휘지 세를 불려 단숨에 바다로 직진하는 소낙비처럼, 마침내 소용돌이를 죽이고 고요한 평심에 드는 바다처럼, 줄창 쏟아지다가도 쨍하게 반전을 도모하는 햇살처럼, 그렇게 시원하게 쫙쫙 한번 쏟아봤으면 좋겠다. 사랑도 소낙비처럼 왔으면 좋겠다. 추적거리는 장죽비처럼 오지 않고 문득 와서 나를 흔들고 가는 사랑, 처음부터 궁리가 없어 단순명료하게 가는 직선의 사랑, 그런 사랑은 위험하고 상처를 주기마련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여운으로 남는다. 내게도 그런 사랑이 있었던가. 기억은 아름다움으로만 채록되는 것인지, 모퉁이 돌아 온 길엔 가끔 꽃들이 보인다.
소낙비증후군일까. 오늘도 나는 길을 잃었다. 글 단장에 치중하다가 문맥을 놓치고 엇길로 빠졌다. 돌아갈까 그냥 갈까 망설이는 사이 뚝, 비가 그쳤다. 주막을 찾을까. 부침개를 구울까. 궁싯거리던 신파도 한풀 꺾였다. 내 생각도 이쯤에서 머츰해진다. 그저 물끄러미 물안개 피는 들판을 바라본다. ‘물끄러미’란 단어가 참 잘 어울리는 시간이다. 말이 끊기고 생각마저 끊긴 곳을 물끄러미는 방관자처럼 지나간다. 소용돌이치던 들판도 고요하다. 맹렬하게 고요하게, 그리고 천 갈래 지류로 뒤척이다가 하늘로 돌아가는 소낙비처럼 어쩌면 우리네 인생도 그런 것인지. 일생 직립의 욕망을 머리에 이고 총총거리며 삶의 격랑에 휩쓸리다가 종국에는 몇 그램의 재로 돌아가는 것인지.
사는 동안 비 오는 날이 많았다. 상처를 상처로 키우며 모로 누운 날도 많았다. 저 먹장구름 뒤엔 여전히 햇살이 내리고 있는데, 울고 웃던 날도 한바탕 소낙비처럼 지나가는 것인데, 비가 오고 꽃이 피는 들판, 그 우주의 끄트머리 어디쯤에서 나는 지금 티끌 같은 인생 한 구절을 받아들고 있는 것인데, 가라앉히라. 고요해져라. 그래야 바다에 닿을 수 있단다. 소낙비는 나에게 그런 생각을 들게 한다. 곤두선 일상들을 일순 해제시키고 순연한 본성을 일깨운다.
비 그친 하늘이 새뜻하다. 자전거를 탄 노인이 은빛햇살을 굴리며 농막 뒤로 사라진다. 정지된 물상들이 수런수런 비를 털고 일어선다. 나도 젖은 문장들을 털어 말린다. 어느 볕 좋은 날, 막힌 글 이랑에 물꼬를 터주고 엇나간 행간들을 수리해야겠다. 소낙비 속에는 꼬리 긴 여우가 살고 젊은 엄마가 살고 살구나무집 소녀가 산다. 나는 그 먼데를 다녀온 것 같다. 소낙비 내리는 동안,
<수필오디세이 2022년 가을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