폐타이어가 보기 좋게 버려졌다. 아니 그의 재탄생인가. 그 말의 뉘앙스를 수긍할 수 없는지 타이어는 반기를 든다. '버려진 듯 집 지키는 노구로 전락했거늘, 무엇이 재탄생이냐,'고 빈정거린다. 하지만 난 '제 눈에 안경 아니냐.'고 얼버무리며 말꼬리를 흐린다. 홀로 집을 지키는 칠순이 넘은 친정아버지 얼굴이 떠올라서다.
아무튼 난 폐타이어가 연출된 한 상점 앞에서 시선이 고정되었다. 상점과 보도를 가르는 경계지점, 그의 원형을 그대로 살려 얼기설기 엮어 놓은 울타리다. 담으로서 제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적어도 속도를 잊은 채 구석에 버려진 폐타이어의 모습은 아니었다.
타이어는 예전 그대로의 모습은 아니다. 소중한 생명인 속도를 잃어버렸다. 어디 그뿐인가. 팔과 다리 격인 돌기도 닳고 닳아 없어지고 굵게 패인 빗살무늬도 흔적 없이 지워졌다. 구르고 구르다 남은 건 밋밋해져 번들거리는 몸통, 검은 원형일 뿐이다. 폐타이어의 심중에 묻어 두었던 말이 터져 나온다. '난 거침없이 내동댕이쳐졌어. 하지만 그대, 기억하는가? 영악한 인간의 삶과 역사를 함께했던 사실을 부인할 순 없을 걸. 내게도 화려한 시절은 있었지. 손수레의 바퀴로, 혼신을 다해 온몸을 바쳤던 자동차의 바퀴로. 그리고 모두 내 곁을 미련 없이 떠나버렸어…….' - 나의 주인은 생명의 영속성과 질주란 이름 아래 매번 새롭고 싱싱한 것들을 찾아 나섰다.
인간이나 타이어나 별반 무엇이 다르랴. 무생물인 타이어가 어디 처음부터 무생물로 태어났으랴. 태초를 따진다면 생물이 아닌 게 어디 있을까. 인간의 편리를 위해 수없이 환골탈태의 과정을 거듭하였음을 모를 리 없다.
나도 타이어의 상처로부터 시작되었다. 내가 모체의 자궁을 빌려 열 달 동안 호의호식하다 태어날 즈음, 내 어머니에게 찢어지는 고통을 안겨주지 않았던가. 유아기를 지나 청년이 되어 자립하기까지 또 얼마나 부모 속으 태우며 성장하였던가. 타이어도 마찬가지였다. 모체인 파라고무나무는 따가운 볕에서 수년을 키워진다. 그리곤 어느 쯤에서 예고 없이 난도질을 당한다. 진집을 낸 그 자리에서 젖 같은 수액이 흐른다. 바로 탄성고무의 유액이다. 이것이 끝이 아니다. 그의 몸을 더욱 강하게 하기 위해 여러 약품을 넣어 침전시킨다. 굳어지면 유황을 섞어 탄성이 좋은 고무를 만든다. 바로 그의 탄생이다.
모체의 곁을 떠나자 날개를 단 듯 둘 다 앞만 보고 달렸다. 타이어가 도로를 질주하듯, 나 또한 성공을 위한 길 위에서 멈출 수가 없었다. 질주가 목표이며 꿈인 양, 거침없이 내달렸다. 젊은 혈기로 온 세상을 다 얻은 듯 자신만만한 시절이었다. 그러나 불혹을 넘긴 지금 내게 남는 게 무엇인가. 또 다른 나의 분신, 엄연히 개인 '나'는 아니다. 인간은 어차피 홀로 서서 고독하게 걸어가야 한다는 걸 익히 알잖는가. 현재의 직분과 명성, 그것도 시간이 흐르면 없어질 칭호가 아닌가. 힘의 원리로 상징되는 돈, 이 또한 있는 자나 없는 자나 빈손으로 떠나가잖은가.
앞만 보고 억척스레 지내온 삶의 결과로, 여기 저기 부스럼처럼 일어나는 육체의 적신호. 내 몸을 돌보라는 신호이다. 돌아보면 아무것도 이룬 것이 없다. 물 불 가리지 않는 질주의 삶은 역시 부질없는 짓이다. 평범한 진리를 곁에 두고 그걸 깨우치는데 내게는 적잖은 세월이 필요했다.
아마도 폐타이어가 초장에 반기를 든 이유일 게다. 내 삶처럼 제 육신이 마모되는 줄 모르고 도로를 활보하였다. 까칠한 주이의 성정에 맞추느라 얼마나 애를 태웠을 것인가. 결국 목숨 줄인 '속도'를 잃어 버려진 자신의 모습, 바라던 종말은 아니었으리. 거기 울타리로 버티며 화려한 거리를 바라보다 '한 때는 나도 잘 나가던 시절이 있었다.'고 스스로를 위로하겠지. 내가 추억을 회상하듯 폐타이어도 종종 거칠게 속도를 내던 그 시절이 그리울 것이다.
만약 타이어가 궤도를 이탈한다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주인의 목숨은 경각에 달리겠지. 아니다. 그런 시도조차 하지 않았으리라. 주인의 생명이 제 목숨인 양 숙명처럼 여겼으니까. 그런데 난 내가 주인인데, 지금 무엇이 두려워 주춤거리고 있는 것인가. 시행착오를 반복해도 별 지장이 없잖은가. 설령 낯선 길로 들어선다 해도 이내 제자리를 찾아 돌아올 수 있기 때문이다.
가정과 직장을 위해 헌신하는 길만이 나를 위한 길인 줄 알았다. 정도의 길이라 믿으며 맹목적으로 달려갔다. 질주할수록 가슴은 늘 헛헛하게 느껴질 뿐, 내 삶에도 변화가 필요했다. 그러다 '질주'만이 삶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깨우쳐 준 것이 문학이었다. 한유한 궤도이탈, 전업 외에 한눈팔기가 시작된 것이다. 문학의 길로 깊어질수록 그 묘미란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아마도 나의 미래는 마냥 외롭지는 않으리라.
폐타이어로 엮은 울담, 아무리 둘러봐도 썩 괜찮은 울타리다. 검은 원형의 모습으로 스치는 사람들의 관심을 유도하고 있다. 일부에선 폐타이어는 환경의 적이라고 말하지만, 생각을 달리하니 멋진 담으로 활용되고 있지 않은가. 어느 찻집에선 탁자로도 사용되고 있다. 모든 만물은 흙에서 나고 자라고 흙으로 되돌아간다는 걸 타이어는 암시하는 성싶다. 매일 이용하는 운동장의 바닥 또한 그대의 무릎 보호를 위해 기꺼이 가루가 되어 희생하고 있지 않은가.
'거기'나에게 심취해 서성이는 여자여, 아낌없이 주는 타이어를 들어본 적 있긴 한가?' 말풍선 터지는 소리에 화들짝 상념에서 깨어났다. 타이어는 변신의 귀재였다. 하지만 난 불혹을 넘긴 후 기운 잃은 듯, 주춤주춤 되짚어가는 양 모든 일이 망설여졌다. 나도 화려한 변신을 꿈꾸고 있잖은가. 주춤거릴 순 없다. 다시 세상 속으로 거침없이 하이킥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