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구월이 간다 / 김서령
백로’가 오더니 ‘추분’도 지났다. 추석 지나면 ‘한로’ ‘상강’이 차례로 다가와 찬 이슬 내리고 무서리 내릴 것이다. 시간이 순차적으로 흐른다고 여기는 건 실체적 진실이 아니라 우리 뇌의 메커니즘일 뿐이라고도 한다. 그러나 철사 같던 여름볕이 숙지고 가을볕이 은실처럼 뿌리는 걸 보며 나는 새삼 세월이 강물 같다고 생각한다. 북극 얼음이 녹고 한반도가 아열대 기후로 진입하는 징후 속에서도 여전히 가을이 오는 것은 감격할 일이다. 은행나무 가로수 아래서 버스를 기다리는데 발 밑에 후드득 은행이 떨어진다. 매일 버스를 타면서도 여름내 거기 열매가 달린 줄도 몰랐었다. 그런데 항온동물인 내 팔뚝에 아침저녁으로 소금 같은 소름이 돋자 은행은 제 이파리 뒤에 숨겨 두고 익혔던 열매를 기다렸다는 듯 후드득 뿌려준다. 어디 은행뿐이랴! 사과도 대추도 감도 볼이 잔뜩 붉어졌다. 둘러보니 온통 향연이다. 과일의 단 내음이 거리에 가득하다.
식물은 누가 시키지 않아도 여름내 제 열매에 당분을 풍성히 담아 동물의 겨울을 대비하고 있었다. 동물인 우리가 거기 보답하는 길은 한 가지뿐이다. 과육일랑 맛있게 먹고 남은 씨앗을 발 없는 식물 대신 여기저기 옮겨다니며 퍼뜨려주기만 하면 된다. 몸 안에서 나온 천연거름을 적절히 섞어서! 그런데 문명인인 우리는 식물과의 그 약속을 철저히 배신했다. 이젠 아무도 식물의 씨앗을 땅 위에 배설하지 않는다. 하얀색 사기 변기 안으로 깨끗하고 ‘위생적’으로 흘려버릴 뿐!
새삼 재래식 변기를 집 안에 들이자는 주장은 아니다. 대자연의 해묵은 순환고리, 식물과 동물 간의 오래된 약속을 태연히 깨뜨리는 지점에 내가 서 있다는 것을 기억이라도 하자는 것이다. 우린 너무 빨리 달려왔다. 남보다 먼저 목표에 도달하려고 바로 내 곁에서 쓰러지는 사람조차 외면했다. 그런 마당이니 식물과의 약속쯤은 하등 중요치 않았다. 거름 대신 비료를 주고 저항력이 모자라면 농약을 치고 씨앗은 육종해서 만들면 그만이라고 여겼다.
백로 이후 활엽수의 이파리는 나날이 수분이 줄어든다. 수분의 양에 따라 이파리에 쓸리는 바람소리가 달라진다. 그 소리에 귀 기울일 때 우리는 사람의 마음이란 게 원래부터 혼자만 잘살도록 생겨먹지 않았던 것을 알게 된다. 이웃에 외롭거나 억울하거나 슬프거나 아픈 사람을 두고 혼자 희희낙락하는 건 정상이 아니라는 것도 깨닫게 된다. 가을볕과 바람 아래 앉으면 세상이 서로 성근 그물코로 가차없이 연결돼 있는 것이 문득 눈에 보이기 때문이다.
기온이 낮아지고 이파리에 물기가 걷힐 때쯤 인류는 겨울잠 자는 동물들과 함께 수만 년간 겨울차비를 해왔다. 피하지방을 축적하고 몸 움직임이 굼떠지고 이전보다 호흡도 훨씬 깊어진다. 나 역시 그런 동물의 감관으로 가을볕 아래서 세상과 내가 둘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동안 저질렀던 식물과의 약속 위반, 문명과 산업과 자본 속의 무감각한 질주를 반성한다. 나름대로 찾아낸 반성의 제의도 있다. 그건 바로 햇살 아래 가으내 수확한 열매와 잎과 뿌리를 내어 말리는 것이다. 가지와 호박과 무와 감과 대추와 사과와 감국과 토란대와 고추와 고춧잎과 고구마 줄기와 버섯과 산나물과 또 무엇과 무엇들! 그것들은 보고 있는 새 거짓말처럼 물기를 거두고 비들비들해진다.
볕 좋은 가을날은 어김없이 바람도 좋다. 우린 이런 볕과 바람을 실컷 쐬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다. 돈을 벌기 위해, 남들 앞에 자랑할 명예를 위해 태어나지 않았다. 그건 저기 물기 걷히는 호박과 가지와 무와 감에게도 마찬가지다. 우린 똑같이 존재의 희열에 빠져든다. 내가 저것들을 먹을 것이지만 그건 저들을 없애려는 게 아니라 오래 내 몸에 간직하고 기억하기 위해서다. 저 말라가는 식물들과 함께 나는 겨울을 날 것이고 내 몸 안에서 그들은 새롭게 존재의 차원을 바꿀 것이다. 나는 동물이고 또한 식물이다. 내 몸 안에서 그 고리는 서로 연결된다.
그걸 일러주기 위해 올가을도 저렇게 반짝이며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