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들이 후미에서 와글거렸다. 달려가 보니 말라죽은 나무 앞이다. 뭉툭하게 잘린 표면에 두 개의 구멍이 뚫려 있다. 한 아이가 다가가 손가락으로 왼쪽 구멍을 후벼댄다. 마치 자신의 콧구멍을 후비는 양 얼굴을 찌푸린다. 지켜보던 애들이 까르르거린다. 나무에 돌기가 돼지코를 쏙 빼닮았다. 사진기를 들여대는 내게도 콧김을 내뿜을 태세다. 나무는 아이들의 호기심을 일으키며 자지러질 수밖에 없는 동물의 형상이었다.
방금 내가 아무 의식 없이 그 옆을 스쳐간 고사목이다. 평생 난쟁이로 키운 몸피가 한 아름이나 될까. 그 흔한 푸른 바늘잎 한 잎도 없다. 몸채가 미끈하게 뻗은 나무도 아니다. 꽤 오랜 세월이 흐른 듯 허옇게 메말라 길목을 지키고 있을 뿐이다. 나무가 뿌리내린 곳이 사람들이 드나드는 길목이니 거치적거렸을 것이다. 그래서 가지를 어느 정도 잘라낸 모양이다. 뭉뚝하게 드러난 표면이 돼지의 들창코와 흡사해 아이들의 시선을 잡았던가 보다.
무주 설천봉 주위에는 말라죽은 주목이 군데군데 서 있다. 생명이 없다고 해서 밑동이 뚝 꺾어져 누워있는 나무는 아니다. 살아서 천 년, 죽어서 천 년을 산다고 하였던가. 몸통은 여러 갈래로 터져 갈라졌지만, 잔가지들은 살아있는 것처럼 힘이 있어 보인다. 봄바람이 불면 금방이라도 가지를 살랑이며 산바람을 실어 날 것 같다. 나무에 여기저기 박인 옹이가 대변하듯 지나온 역사를 기억하여 내 앞에 토해낼 것만 같다.
한참을 그 앞에서 서성였다. 죽어서 천 년을 사는 나무와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삶이란 이런 거다' 이렇게 살아내면 된다.'라고 나무에서 나는 어떤 해답이라도 얻고 싶었다. 천 년을 살고, 또 천 년을 산다고 하니, '삶'에 관해선 도통하고도 남을 것이 아닌가. 나이가 들수록 사리를 분별하는 일이 어려워지니, 그가 이끄는 대로 살아간다면 탄탄대로겠지. 나무에서 삶의 지혜를 얻고 싶다. 그러나 그런 내 상념에 헛웃음 터진다. 일전에 본 거목, 전나무가 밑동이 문드러져 땅바닥에 벌렁 드러누운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얼마 전, 오대산 전나무 숲길을 걷는 좋은 기회가 생겼다. 사진 속에서 본 그 길이었다. 올곧게 쭉쭉 뻗은 나무들을 보면서 흥분을 억누를 수 없었다. 늘 상상 속에서만 걸어본 길이었다. '나무들이 어쩜 이리 유려할 수 있을까?'라며 감탄을 거듭하였다. 숲길이 끝나는 약수터까지 어찌 그 길을 걸어갔는지 모를 정도로 몰입하였다.
하지만, 그 기분도 잠시였다. 방아다리 약수터에서 약수로 입가심하고 위쪽으로 올라갔을 때였다. 산으로 더는 올라가지 못하도록 나무로 방책이 세워져 있었다. 그런데 웬일인지 그 아래에는 크나큰 전나무가 맥없이 누런 속살을 내놓고 쓰러져 있었다. 살펴보아도 누군가 나무를 가해한 흔적은 없었다.
나에게 쓰러진 나무는 적잖은 충격이었다. 그곳을 벗어나서 많은 시간이 흘렀지만, 머릿속에서 그 장면이 내내 떠나질 않았다. 내 모습을 꼭 보는 것만 같아 불안했다. 주위에 사, 오십대 돌연사가 유행병처럼 돌고 있기 때문이다. 젊은 나이에 악바리처럼 고생하여 가정도 안정되었고, 여유가 생겨 햇빛을 볼 즈음인데…. 가뭇없이 쓰러져 사회활동을 못하거나 세상을 등지는 이들이 종종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질주하는 것만이 능사는 아닌가 보다. 어느 쯤에선 멈춰 서서 자신이 달려온 길을 돌아볼 일이다. 그리고 내게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재충전할 기회를 만들며, 생을 재정비할 시간이 필요하다. 누군가 말했지. '늦었다고 느낄 때가 가장 빠른 때'라고, 지금이 바로 그때다.
사람의 외양과 속내가 다르듯 나무들도 마찬가지인 성싶다. 내가 보았던 고사목도 쓰러진 전나무와 비슷한 환경인 고산지대에서 자란다. 물론 자라다가 비바람에 쓰러지는 나무도 있을 것이다. 사람의 얼굴을 보고 그의 내력을 읽어내듯, 나무의 몸피를 둘러보며 생의 내력을 가늠할 수 있을 것 같다. 주목은 모든 것을 안으로 품어 감내하는 부류처럼, 볼썽사납게 툭툭 불거져 나온 옹이들과 어른 허벅지만큼 굵은 곁가지를 달고 있다. 그리고 죽어서도 숨김없이 속내를 그대로 드러내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반면에 전나무는 빨리 자라는 나무 중 하나이다. 내가 본 나무는 사람으로 치면 부유층, 자싯물에 손 한 번 담그지 않고 곱게만 자라온 생처럼 보인다. 줄기에 군더더기가 없듯 곁가지는 작거나 많지 않고, 굵기도 얇디얇다. 상처 한번 입지 않은 사람으로 키운 듯 움푹 박힌 옹이 또한 보이지 않는다. 고요하고 그윽한 풍경을 자아내는 사찰 등지에서 풍치수로 흔히 심는다니 과히 그럴 만하다. 남들의 부러움과 시샘을 받으며 웃자란 나무라서 그런지, 생을 다할 때도 가뭇없이 쓰러지고 마는가.
향적봉을 내려와 다시 그 자리에서 서성인다. 내가 던졌던 질문의 답은 얻을 수가 없다. 아마도 고사목은 묵언 수행 중인가 보다. 나무는 아무리 봐도 들창코다. 이내 손가락이 근질거린다. 아이들의 장난이 떠올라 얼굴에 미소가 번진다.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듯 온몸으로 자신의 생을 보여주는 고목이다. 나무의 몸은 바람의 집인 양 구멍이 뚫린 곳으로 바람이 무시로 통하고, 작은 동물들이 더부살이해도 말이 없다. 그 품성은 꼭 몸으로 시詩를 쓰는 나무를 닮았다.
주위에 나무처럼 치열하게 몸시詩를 쓰며 사는 이들이 많다. 그 시를 세상에 발표하지 않아 알아보지 못할 뿐이다. 난 그들에게서 알게 모르게 자극을 받는다. 밥 먹는 일에만 쫓겨 종종대며 살았다고 남기고 싶진 않다. 얼마 전 고인이 되신 박경리 선생께서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라고 남길 수 있으면 좋으리라. 내 남은 생애엔 외양이 화려하거나 미끈한 시詩보단 울퉁불퉁하지만, 잎품이 넉넉한 나무를 닮은 몸시詩를 쓰며 흘러간다면 더없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