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동구리무 / 유병숙
친정집 문을 열면 먼지 냄새가 났다. 때로는 그 냄새마저 엄마의 온기처럼 느껴졌다. 엄마가 요양원으로 가신 후 여름과 가을, 겨울이 지나고 또 봄이 왔다. 그간 자매들은 버릇처럼 묵묵히 빈집에 모이곤 했다.
아버지 기일이 돌아오자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거실을 치우기 시작했다. 해묵은 달력과 빛바랜 사진들을 정리했다. 엄마의 손때가 남아있는 머리빚, 손거울, 동전 지갑 등의 소품들을 치우다 마음이 울컥해지기도 했다. 탁자 밑에 쌓여있는 잡동사니 속에 먼지 묻은 통이 보였다. 몇 년 전 어버이날 큰맘 먹고 백화점에서 사다 드린 영양크림이었다. “이게 아직도 있네?” 놀라 열어보니 크림이 물처럼 녹아있었다. “왜 안 바르시고….” 속이 상했다. “쓰기 아깝다며 작은 샘플 통에 조금씩 덜어 놓고 바르시더니 그예 남았네….” 동생들도 혀를 찼다.
화장품만 사다 드렸지 정작 엄마가 잘 바르고 계셨는지 살피지 못했다. 병증으로 늘 창백한 엄마의 얼굴에 크림이라도 듬뿍 발라 드렸더라면 좀 생기가 돌지 않았을까? 남아있는 화장품이 때늦은 후회를 불러왔다. 뽀얗게 먼지를 뒤집어쓰고 있는 화장품이 골동품처럼 느껴졌다. 뜬금없이 어린 시절의 ‘동동 구리무’가 떠올랐다. 엄마가 남기고 간 화장품이 까마득한 기억을 소환하고 있었다.
유년 시절, 친구들과 동네를 쏘다니다 집에 오니 손님이 와 계셨다. 엄마는 미국에서 다니러 온 이모께 절을 올리라고 했다. 그분은 “그래, 네가 병숙이냐? 엄마 많이 닮았네.” 하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아버지 닮았다는 말은 수없이 들었지만, 눈이 크고 예쁜 엄마를 닮았다는 말은 그때 처음 들었다. 이렇게 고운 분이 친척이라니. 나도 모르게 자꾸 훔쳐보았다. 이모는 엄마의 이종사촌 언니였다. 분홍빛 스카프를 두른 그분 몸에서 꽃향기가 났다. 칙칙했던 집 안이 화사해졌다. 엄마의 얼굴에 모처럼 웃음기가 번지고 있었다.
담소를 나누던 이모가 문지방을 나서며 가방에서 작고 하얀 통을 꺼내 엄마 손에 쥐여 주었다. “어머나, 이게 뭐예요?” 그분은 “동동 구리무야.” 하며 웃으셨다. 엄마의 눈이 둥그레졌다. “이 비싼 걸 왜 사 오셨어요.” 하면서도 얼굴이 환해졌다. “열심히 발라봐. 매일 빠뜨리지 말고. 이뻐질 테니!” 하시는데 나는 고놈의 이뻐진다는 말에 귀가 솔깃했다.
이모의 당부에도 엄마는 동동 구리무를 자주 바르지 않았다. 그런데도 나는 항상 찡그리고 있는 엄마 얼굴이 달라지나, 자주 바라보았다. 구리무는 윗목 서랍장 위에 놓여있었다. 베개를 딛고 올라가 구리무 곽을 열어보았다. 백색의 크림이 가득 들어있었다. 처음 발라보는 미끌미끌한 감촉이 신비롭게 느껴졌다. 놀러 나갈 때마다 잔뜩 찍어 발랐다. 봄이 가고 여름이 되었다. 하루는 집에 오니 엄마가 구리무통을 들고 계셨다. 가슴이 철렁했다.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셨다. “얼굴이 왜 점점 까매지나 했더니 하이구, 네가 다 찍어 발랐구나. 이 기름진 걸 바르고 햇볕에 나가 노니 이렇게 새까맣게 탔지. 왜 발랐어?” 눈물이 찔끔 나왔다. “이걸 바르면 이모가 예뻐진다고 했잖아?” 엄마의 무서운 얼굴이 한순간에 풀렸다. “허참, 너도 여자라고!” 웃으며 내 볼을 흔드셨다. 그 후 친척들은 나를 볼 때마다 얼마나 이뻐졌는지 보자며 놀려댔다.
학창 시절, 달에 한 번 우리 집에 들르곤 했던 아모레 화장품 아줌마도 구리무를 들고 왔다. 얼굴에 기미가 낀 엄마와 달리 그분의 피부는 티 없이 고왔다. 할부로 준다며 화장품을 떠맡기곤 했다. 엄마는 아버지가 알세라 구리무를 감추었지만, 곧 들키고 말았다. 아버지와 말다툼까지 하며 사들인 화장품을 엄마는 아끼느라 잘 바르지 않았다. 나와 동생들은 엄마 몰래 화장품을 찍어 바르곤 했다.
우등생 아들을 둔 화장품 아줌마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그분의 구수한 입담을 들으려고 우리 집은 때때로 동네 아낙들의 모임 장소가 되었다. 권투선수 홍수환의 전설적인 4전 5기 시합이 있던 날, 화장품 아줌마의 남편이 응원하다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신문에 실린 기사를 보고 아버지가 허망한 눈길로 엄마를 바라보셨다. 몇 달 지나 아줌마가 오셨다. 얼굴에 기미가 새까맣게 앉아 있었다. 화장품 가방도 들고 있지 않았다. 엄마는 아무 말 없이 아줌마와 손을 맞잡았다. 그 후 아줌마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엄마가 남기고 간 화장품 통의 먼지를 털어냈다. 먼지와 함께 엄마의 화장품 역사도 흩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지난 면회 때 “엄마, 화장품 필요 없어요?” 여쭈었었다. “젊어서도 화장품 없이 살았는데 이제 와 뭐 필요하겠니?” 괜찮다며 마다하셨다. 엄마의 얼굴을 새삼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자꾸 집에 가고 싶다고 하면서도 엄마의 표정은 마냥 편안했다. 분을 발라 놓은 듯 살성이 뽀얬다. 자글자글하던 주름 자국마저 희미했다. “엄마, 예쁘네!” 칭찬하자 엄마의 입이 꽃처럼 벙글어졌다. 지난한 세월을 건너온 엄마는 이제 아무것도 바르지 않아도 예쁜 할머니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