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웨이브(The Wave), 그곳에 내가 왔다

 

 

한 영

더 웨이브(The Wave), 그곳에 내가 왔다.

흰색과 주황색의 아름다운 물결무늬가 따로, 때로는 나란히 함께 어우러져 눈앞에 펼쳐진다. 크고 작은 물결이 발밑에서 하늘까지 이어진다. 바위 위에 환상적 색들이 부드럽게 줄무늬를 이룬 모습은 보고 있어도 믿기 어려울 정도로 신비롭기만 하다.

 

친구가 들뜬 목소리로 그곳에 같이 가자고 할 때까지 나는 더 웨이브가 어떤 곳인지 어디에 있는지도 잘 몰랐다. 웨이브는 유타 주의 카납에서 약 40마일 떨어져 있다. 주라기 시대에 나바호 사암(砂巖 Sandstone)에 물이 소용돌이치고 내려가 U자 모양으로 침식된 것이 서로 교차하여 만들어진 것이다. 그 후 계속 사막의 모래바람이 불어와 깎아내기도 하고, 머물기도 하면서 아름다운 물결 모양을 만들었다.

국토 관리소에서는 자연 그대로 보호하기 위하여 하루에 스무 명 만의 방문을 허용한다고 한다. 출입 허가 4개월 전에 인터넷 신청을 받아 뽑은 열 명과 하루 전날 카납 사무실에서 로터리 추첨을 하여 다시 열 명을 뽑는다. 출입 허가증을 받느라 수고한 친구 덕에 나는 무임승차하는 행운을 얻었다. 여자 셋이 길을 떠났다. 한국에서 온 중년의 여인과 미국에 사는 동갑의 두 여자, 사십 년도 넘은 오랜 친구 사이다. 강한 호기심과 모험심을 실천하며 즐기는 친구들과 함께하는 여행길은 설레면서도 마음 든든하다.

 

자이언 국립공원 안 숙소에서 하루를 묵고 떠나는 아침, 그늘도 없는 곳에서 왕복 6마일을 걸을 생각을 하니 슬그머니 겁이 났다. 웨이브 안내 지도를 얻으려 안내소 사무실에 들렀는데 다음날 웨이브에 갈 사람들의 추첨이 막 끝난 참이었다. 열 명을 뽑는데 어떤 때는 이백 명이 오기도 한다고 한다. 오늘은 아무래도 겨울이라 그렇게 많은 사람이 오지는 않았다.

 

단지 사진과 안내 글만 있는, 생명줄 같은 보물 지도를 받아서 코요테 봉우리 웨이브(The Wave of Coyote Buttes)를 향했다. 겨울인데도 날씨가 좋아서 비포장도로 8마일을 큰 어려움 없이 운전해 들어갈 수 있었다. 유타 주에 있는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애리조나 주에 있는 웨이브를 향해 허가증 붙인 가방을 메고 걷기 시작하였다. 정해진 트레일도, 간판이나 방향을 알려주는 표시판 하나 없이 오직 지도위의 사진과 실제 지형을 대조해 가면서 길을 찾아야 한다. 해낼 수 있을까. 예전에도 이런 자리에 서 있었던 것 같다. 가는 길을 알지 못하고 내디딘 미국에서의 첫걸음, 짐작할 수 없는 미래를 향하여 불안하게 발을 떼어 놓던 날들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이 길은 어쩌면 내 이민 여정을 닮았으리라는 예감이 든다.

처음에는 그나마 먼저 간 사람들의 발자국을 따라갔는데 바위를 지나고 점점 더 나아가니 길 찾기가 어려워졌다. 설명서를 보면 쌍둥이 봉우리를 오른쪽으로 돌아가라고 했는데 둘러보니 여기도 저기도 쌍둥이 봉우리가 한둘이 아니었다. 이곳까지 왔다가 목적지를 찾지 못하고 헤매다가 그냥 돌아간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완전히 길을 잃어 구조대의 도움 끝에 빠져나온 사람도 있다고 했다. 셋이서 머리를 맞대고 의논한 끝에 먼 산의 가운데에 난 계곡을 방향타로 삼기로 하였다. 바위 언덕을 지나면 발이 빠지는 모래밭, 또다시 언덕 아래로 모래뿐인 마른 강바닥, 그렇게 영 끝날 것 같지 않은 유난히 멀고도 먼 3마일을 걸었다. 끝에 다다른 가파른 모래 언덕을 힘겹게 오르고 나니 갑자기 눈앞에 모래바위 물결이 일렁인다.

마치 싸리 빗자루로 쓸어 놓은 것 같은 물결무늬가 가파른 언덕을 내려갔다가 다시 반대쪽 언덕을 오른다. 동서의 골이 남북의 골을 만나서 기묘한 모습을 만든다. 단지 물과 바람과 모래의 힘이라기에는 너무나 오묘하고도 정교하다. 해가 조금씩 자리를 바꾸어 앉을 때마다 물결은 다른 색의 옷으로 바꿔 입고 새로운 모습을 보인다. 무늬도 다양하다. 빗살무늬뿐 아니라 꽃무늬도 선명하다. 아프지만 아름답게 삭힌 세월의 흔적이 쌓여있다.

거대한 물살 같은 풍파가 깊은 골을 만들고 굽이치며 지나갔어도, 모래바람이 세차게 불었어도 그뿐, 나는 아직도 얼룩지고 뭉뚝한 단단한 바위로 깎일 줄 모르고 서 있다. 바람에게 나 자신을 내놓아 준다면, 더 깎이고 다듬어진다면, 나에게도 아름다운 무늬가 새겨질까. 이곳에선 차마 나를 넣은 사진을 찍지 못하겠다.

 

의당 돌아오는 길은 쉬우리라 짐작했으나, 가면서 보던 모습과 되돌아오면서 보는 모습은 너무나 다르다. 보는 각도가 조금만 변해도 전혀 다른 풍경이 된다. 앞만 보고 허둥지둥 걷지 말고 가끔 뒤돌아볼 걸 그랬다. 어느새 비경은 모래 언덕 뒤로 그 모습을 숨기고 사라졌다.

 

 

꿈같던 모래바위 물결이 아직도 내 안에서 흔들리는가? 문득 작은 모래알이 되어 바람을 타고 물결을 타며 그곳에 머물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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