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불 / 임하경

 

 

사람들의 발길이 그리 많아 보이지 않는 절, 운주사에 와 있다.

대학시절 친구들과 왔을 땐 거의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탓에 그저 허름한 절이라고만 느꼈었는데, 10여 년이 지난 지금에 들어서니 절간이라기보단 세속을 등진 한 사람이 마음을 수양하며 살고 있을 법한, 석불과 석탑이 아니라면 그저 평범한 시골집 같다.

입구에 들어서니 합장하는 석불 가족이 있다. 길가 바위산에 꼭 붙어 있는 돌부처의 모습은 이목구비가 다 지워져 뭉툭하다. 언뜻 봐선 부처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다. 그저 평범한 안위를 비는 모습으로 가식없고 진실한 불심으로 소박하게 서있는 가족의 모습이 세속의 욕심으로 찌든 나의 마음에 잔잔한 감동을 준다. 군데군데 많은 돌부처와 석탑이 투박하기 이를 데 없어 초보 석공이 부처의 형상을 그냥 시늉삼아 만들어 본 것만 같다. 그 생김새가 너무나 못났다.

도선국사가 우리 나라 땅의 모양새를 보니 배가 움직이는 형국을 닮아서 국운이 일본으로 빠져나갈 것으로 믿었다. 이를 막기 위해 배를 젓는 노의 위치에 해당하는 이곳에 돌탑 천 개와 돌부처 천 개를 만들어 돛대와 사공을 삼으려 했단다. 이때 도선국사는 머슴 하나를 데리고 이곳에 터를 잡은 뒤, 도력으로 천상의 석공들을 불러 그 날 동이 트기 전까지 흙과 돌을 뭉쳐 천불 천탑을 만든 다음 닭이 울면 하늘나라로 돌아가도록 부탁했다.

깊은 밤까지 부지런히 일을 한 석공들은 마지막 손질을 위해 바삐 손을 놀리고 있었는데, 석공 옆에서 돌을 나르던 머슴녀석이 짜증이 나고 지친 나머지 그만 '꼬끼오' 하고 닭울음소리를 내고 말았다. 닭울음소리가 나자 석공들은 와불을 세우려던 일손을 멈추고 하늘로 올라가 버렸다.

닭울음소리 때문에 세워지지 못한 이 석불은 부부 불이라 한다. 남편이 12m, 부인은 9m에 이르니 집채만 하다. 부부로 만나 행복한 삶을 살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약속이나 한 듯 저 세상으로 떠난 뒤 마지막 육신의 모습으로 부처가 되어 누워 있는 듯 하다. 나라의 안녕을 빌었던 도선국사의 그 전설이 아니라면, 너무나 사랑했던 어떤 부부의 소원을 이 와불로 담지 않았을까 싶다.

이 와불에 대한 기억을 두고 두고 떨쳐 버릴 수 없었던 나는 또 다시 그 곳을 찾았다. 그 와불에 대한 충격 때문이다. 아직 가정을 이루지 못한 내 소원이 거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두 눈을 지그시 감고 간절한 염원을 담은 채 수백 년 동안 누워 있었을 이 와불은 얼마나 간절히 일어서길 원했을까? 등이 몹시 아프다고 말하고 있는 것만 같다.

난 소리없이 그 와불 주위를 몇 번이고 돌았다. 일으켜 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고 안마라도 해 주고 싶었다. 우리가 세상을 살다보면 싫어도 어쩔 수 없이 가야하는 길이 있지 않은가. 질곡이 많은 거친 삶들을 묵묵히 인내하며 헤쳐 나가라는 지혜가 거기에 있었다. 그 동안 이기적인 삶에 길들여져 오만함과 방자함을 알지 못했다. 다른 이의 마음을 배려하거나 헤아려 보지 않았고 오랫동안 마음의 빗장을 잠근 채 자신의 그늘에 빠져 살았다.

얼마나 의미없는 삶인가. 외골수로 변해있는 내 자신이 그렇게 부끄러울 수 없다. 거친 말투로 본의 아니게 다른 이의 가슴에 못질을 가했고 오해를 낳게 했으며, 알량한 자존심은 소중한 인연을 끊어지게도 했다. 어긋나는 삶의 원인이기도 했다. 혹여 나의 어투, 이기심에 상처를 받은 그들이 아직까지 이를 갈고 있지나 않은지 두렵다. 미안함에 마음을 조아려 본다.

서울로 돌아오는 차창 밖으로 비가 추적추적 오고 있다. 유리창엔 빗방울이 사선을 잇고 상념에 젖은 나는 하염없이 말이 없다.

문득 몇 년 전에 감동 깊게 보았던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 화면이 스쳐 지나간다. 운주사를 배경으로 찍어서인지 낯익은 화면이 정겨웠었다. 영화 초기화면에 운주사의 석불 가족이 나온다. 늘 뇌리에 남아있던 그 곳의 흔적이 지나쳐서인지 난 유난히도 그 영화로부터 많은 공감과 감동을 받았다. 여승들의 출가와 방황, 고뇌, 깨달음의 과정을 그려낸 영화다.

스님인 아버지와 세속에 찌든 고리대금업자 어머니를 둔 여고생 순녀는 짝사랑하던 홀아비 선생과의 여행 동반으로 학교 생활에 파국을 맞고 여승이 되고자 절에 찾아들게 된다. 혹독한 행자생활을 마치고 비구니 생활을 막 시작하려는데, 그녀를 결코 놓지 않는 한 남자를 만나게 되고 파계하게 되는데, 행복도 잠시, 그는 탄광 막장이 막혀 죽는다. 그리고 또 한 남자를 만나지만 또 끝없는 인간 아픔을 겪는다.

어느 부둣가 병원에서 간호원 생활을 하던 순녀는 그 곳에서 일하던 또 한 남자를 만나게 되지만 그 역시 심장마비로 죽고 만다. 지겹게 연이은 불행으로 초죽음이 되는 그녀, 파란만장한 인생을 경험하고 진리, 자유, 그 어떠한 가치도 인간의 아픔에 뿌리를 내리지 않고서는 현실적 가치가 없음을 깨닫고 세속의 길로 직접 뛰어들어 나름대로 중생을 구해보겠다는 여승의 이야기다.

왜 그 영화는 그 곳을 초기화면에 비쳤을까? 세상살이의 고단함을 보듬어주는 따스함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내 느낌이 그랬다. 심신이 지쳐 찾은 그 곳은 어머니의 품속처럼 포근했다. 결코 웅장하거나 화려하지 않은 소박함 때문에 이웃집 마당 넓은 뜰에 군데군데 석불과 석탑이 장식돼 있는 느낌 그대로를 즐기며 마음을 가다듬을 수 있었다.

만약 그 머슴 녀석의 실수가 아니었으면 그 와불을 볼 수 없었을 것이 아닌가. 아마도 그 머슴은 나처럼 인내심이 약하고 무척이나 덜렁댔던 모양이다. 어찌되었건 감사할 일이다. 만약 와불이 일어선다면 이상의 세계, 미륵의 세계가 올 것인가. 결코 그리 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영원히 누워버린 건 아닌지 모르겠다. 미완성의 인간이 미완성의 세계에 산다는 것이 얼마나 매력적인가. 싸움이 없으면 화해하는 기쁨도 모를 것이고, 슬픔이 없으면 기쁨도 느끼지 못할 테니까. 어쩌면 마음먹기에 따라 이 세상이 미륵의 세상인지도 모른다.

비가 오려나 보다. 먹구름이 하늘을 가리고 있다. 그래도 마음은 솜털처럼 가볍다. 와불 주위에 무거운 마음을 묻어 버리고 주위 푸른 들판의 싱그러움을 안고 왔다. 어느날 또다시 세속의 때로 마음이 무거울 때면 이 와불 곁에 어두움을 묻고 가리라. 수백 년간 소리없이 인내하며 순종적이기 만한 와불의 겸손함을 배우고 가리라 다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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