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황의순 문학상 대표작]
자작나무 숲에서 / 강천
눈 덮인 자작나무숲에 고요가 내려앉았다. 그 흔하디 흔한 산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그 해찰궂은 겨울바람은 다 어디로 흩어졌을까. 해거름 자작나무 숲은 고즈넉이 숨을 죽이고 있다.
온통 희멀건 세상이다. 우중충한 하늘도, 발을 디디고 선 땅도, 빽빽이 늘어선 나무줄기도 모두 희끄무레하다. 원근이 사라진 유령의 나라인 듯, 농담 옅은 수묵화 속인 듯 아득하다. 소리도, 흔들림도 없는 자작나무 숲에는 어스름한 적막만이 스멀스멀 떠돌아다니고 있다. 태초의 세상처럼 하늘과 땅이 한 덩어리로 엉긴 혼돈 속에 나는 홀로 서 있다. 이 원초적 영역에 새겨질 내 흔적이 혹여 오점으로나 남지 않을까 숨결조차 조심스러워진다.
나무가 부르기라도 하는 것처럼 숲 깊숙이 이끌려 든다. 멀리서는 그저 희부옇기만 하더니 줄기는 제 몸통에 그어진 거뭇거뭇한 생채기들을 하나둘 드러내어 보여준다. 주눅 잡힌 나의 마음을 알기라도 한다는 듯, 힘들게 살아온 속내를 슬며시 풀어놓는다. 손을 들어 거칠 대로 거칠어진 상처를 어루만져 본다. 까끌까끌, 이들의 굴곡진 삶이 손끝으로 전해져 온다. 발걸음조차 망설여지던 마음이 조금은 누그러진다. 흠결 있는 맨몸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야말로 허물없음의 증표가 아니겠는가.
산다는 것은 어디에서나 별반 다르지 않은가 보다. 세속과는 동떨어진 산중에 무슨 곡절이 있었기에 이리도 험한 흉터를 가지게 되었을까. 필연적이랄 수밖에 없는 생명 유지의 방편이었으리라. 평화롭기 그지없어 보이는 이 숲도 서로 경쟁하며 살아가는 생태계의 일부분이다. 한줄기 햇빛을 붙들기 위해서는 언제나 이웃과 다투어야 한다. 삶을 보장받으려면 오로지 먼저 위로 치솟는 길밖에 없다. 처음에는 생명 줄이나 다름없었던 아래 가지들이 오히려 거추장스러운 존재로 전락해 갔다. 그래서 내쳐버렸다. 이 상흔들은 살아남기 위해 제 생살을 도려내야 했던 자해의 흔적들이다. 가냘팠던 줄기는 아름으로 굵어졌지만 제 손으로 자식을 버린 어미의 가슴에 비수로 들어앉아 무뎌질 줄을 모른다.
흉터의 모양도 가지가지다. 눈을 부릅뜨고 세상을 원망스럽게 노려보는가 하면, 입술을 꾹 다문 고집스러운 모습도 있다. 옆으로 깊숙이 파인 생채기는 바람 소리조차 듣기 싫은 듯 귀를 닫았다. 또 아래로 이어진 자국은 코웃음이라도 치는 양 삐딱하게 내리그어졌다. 눈을 감은 채 외면하는가 하면, 비뚤어지게 베어 문 냉소는 차갑기 그지없다. 천태만상, 바라보는 이의 심상에 따라 달라지는 것일까. 사람마다 지워지지 않는 혼자만의 사연이 있는 것처럼, 옹이 역시 제각각 버려진 나름의 이유를 곱씹고 있는 모양이다. 줄기는 또 그 쓰라린 아픔들을 다 보듬어 안고 묵묵히 서 있을 뿐 말이 없다. 육신에 점점이 아로새겨진 부끄러운 흠결조차도 자신의 한 부분일지니.
흉터란 겉으로 드러나는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내면의 상처가 더 큰 회한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허다하다. 약을 바를 수도, 외과적 치료를 할 수도 없는 마음의 상처는 온전히 떠안은 자의 몫이다. 혼자 몸부림치며, 스스로 삭여낼 수밖에 없는 고독한 애상이다.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이 그러하고, 자신에 당당할 수 없을 때가 그러하다. 가까운 사람으로부터 받은 상심이라면 영원히 지워지지 않을 수도 있다. 나 역시 시도 때도 없이 울컥울컥 솟아오르는 마음의 상처가 있다. 믿음으로 함께 일했던 사람이 떠나갔을 때 생긴 잔해물이다. 그 쓰라린 실망은 평온하고자 하는 마음을 언제든지 뒤흔들 수 있는 풍파의 핵으로 여전히 가라앉아있다.
원망하는 마음을 가지고, 세상에서 가장 미운 사람을 떠올려 보라고 누가 그랬다. 울분과 분노가 해일처럼 덮쳐와 온몸을 잠식할 것이라고. 또 싫은 사람을 마음에 담고 억지로 입꼬리를 말아 올려 보라고도 했다. 끓어오르던 증오와 슬픔이 심연처럼 잔잔해질 것이라고. 마음의 치유란 심리학자나 정신과 의사의 처방전보다도, 억지일지언정 ‘스스로 짓는 웃음’이 가장 효과적이라고 덧붙여 주었다.
여기 늘어선 이 나무인들 어찌 겉으로 드러난 흉터뿐이랴. 외상이 뚜렷한 만큼 내상 또한 깊고 클 것이야 짐작하고도 남을 일 아닌가. 그러기에 한겨울 나목이 되어서도 한 꺼풀 한 꺼풀씩 자학의 허물을 벗겨내고 있는 것이다. 눈이 멎고 새잎이 돋는 날, 질곡을 건너온 옹이는 오히려 곧음을 지탱하는 얼거리가 되리라. 후회 없는 삶이 어디 있겠는가. 나무는 상흔 하나하나에 스민 아픔을 묵상으로 되새김질하며 자신을 바로 세운다.
가슴 아린 흔적일지라도, 이 옹이가 있기에 자작나무가 자작나무인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