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부작신 / 곽흥렬

 

 

낯익은 주소지로부터 택배 상자 하나가 부쳐져 왔다. 늦서리 내리는 시절이 되면 어김없이 도착하는 선 물이다. 해마다 받다 보니, 가을이 무르익어 갈 무렵이면 염치없게도 이제 은근히 기다려지기까지 한다.

테이프로 단단히 묶여 있는 상자를 열었다. 언제나처럼 장모님의 사위 사랑이 듬뿍 묻어나는 흠다리 사과가 하나 가득 담겼다. 여든을 훌쩍 넘긴 고령이어서 당신 한 몸 건사하기도 힘에 부치실 판이니, 인물 좋은 사과야 언감생심 아니랴. 비록 흠다리에 불과할망정 그 신경 써 주심이 여간 고맙지 않다. 그래서 반갑게 받기는 하지만, 가만히 앉아서 그러고만 있으려니 마음은 영 편치가 못하다.

사과 상자가 도착하면 서둘러 손을 쓰지 않으면 아니 되는 일이 있다. 흠집 나서 썩은 부위를 도려내는 작업이다. ‘설마 며칠쯤은 괜찮겠지’, 이런 안일한 마음으로 게으름을 피우며 늑장을 부리다가는 어느새 한 군데도 성한 곳이 없을 만큼 폭삭 물러버리고 만다. 물건값이야 전부 다 쳐 본들 고작 몇 푼이나 될까마는, 그래도 망백을 바라보는 노구를 이끌고 하나씩 하나씩 따 모아서 포장하고 부쳐주신 수고로움을 생각하면 얼마나 면목 없는 노릇이겠는가.

이따금 오래된 마을을 지나다 보면 고장의 지킴이로 귀한 대접을 받는 보호수를 만나곤 한다. 표지판에 적힌 기록으로는 대다수가 수령이 삼사백 년 이상씩은 너끈히 된 고목이다. 이 나무들은 먼발치에서 바라다보면 우람한 자태를 뽐내지만, 가까이 다가가서 살피면 하나같이 노환으로 육신의 고통을 겪고 있는 흔적이 역력하다. 사람만 나이 들었을 때 몸에 병이 생기는 게 아니고 나무도 연륜이 깊어지면 신체에 병이 찾아오는 것은 정한 이치일 터이다.

썩어가는 줄기에다 외과수술을 한 뒤 시멘트나 석고 같은 접합제를 덕지덕지 발라 놓았다. 미관상으로는 조금 볼썽사나워 보여도,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성한 부위를 살려내지 못한다. 그러니 어쩔 수 없이 궁여지책으로 쓴 방편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경기도 광릉수목원에 가면 광릉시험림이라 불리는 참 아름다운 숲을 만날 수 있다. 조선 세조의 능림陵林으로 설정된 뒤 오백여 년이라는 기나긴 세월 동안 잘 보존되어 온 빼어난 천연생림이다. 이 숲 코앞에까지 재선충이 번져 그 주변의 아름드리 잣나무 수천 그루를 베어내야 한다는 우울한 소식이 들린다. 애써 심고 공들여 가꾼 나무들을 한꺼번에 잃게 되었다니, ‘그 아까운 것을……’ 싶은 생각에 마음이 허전하다. 거기까지 오는 데 얼마나 많은 세월이 필요했고 또 얼마나 숨은 노력이 들었을까.

하지만 무엇이든 아끼는 것이 미덕이라는 논리는 여기서만은 통하지 않는다. ‘대충대충’이라는 말도 이 경우에는 매우 위험천만한 발상이다. 인정사정 봐주는 선심은, 얼핏 매몰찬 것 같지만 눈 질끈 감고 깨끗이 버려야 한다. 풀을 베듯이 싹둑 잘라내는 것 말고는 별 뾰족한 방책이 없다. 이것을, 조금 있어 보이는 말로 삼제芟除한다는 표현을 쓴다. 이때는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심경으로, 눈물을 머금고 결행하는 과단성이 오히려 미덕이 된다.

이런 장면은 비단 나무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다. 한번 조류독감이 휩쓸기 시작하면 반경 수 킬로미터 내에 흩어져 있는 모든 닭이며 오리 같은 가금류는 예비 살처분이라는 명목으로 애꿎게 집단 매장되는 슬픈 운명을 맞는다. 대大를 위해서 소小를 희생시켜야 하는 그 참혹한 떼죽음의 현장을 지켜보노라면 기분이 착잡해진다. 저들에게 대체 무슨 죄가 있기에……. 연유도 모른 채 생목숨을 바쳐야 하는 그들의 최후를 떠올리노라니 애처로운 심사로 가슴이 아리어 온다. 설사 그렇다고 해도 어설픈 감상感傷따위를 앞세우는 건 절대 금물이다. 인간적인 정리에 이끌리다 보면 대세를 그르쳐 엄청난 재앙으로 이어지기가 십상인 까닭이다.

암 환자의 경우 조기 발견 여부가 생사를 가르는 갈림길이 된다. 몹쓸 병인 줄 모르고 태무심하게 지내다 빠르게 암 덩어리가 커지고, 급기야 다른 부위로 전이되는 날이면 마침내 손을 쓸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다. 용케 초기 상태로 발견이 되었을 때는 그 즉시 아직 암세포가 뻗치지 않은 부위일지라도 과감히 잘라내어야 한다. 이만하면 되었겠지, 하며 마음을 놓았다가는 자칫 생명마저 담보하지 못하는 상황으로까지 치달을 수 있다.

지난날 고향마을에 한쪽 다리가 없는 상이용사가 살았다. 6․25전쟁 때 입은 총상 후유증으로 그의 다리는 탄환 파편이 박혔던 종아리 부위가 썩어들어갔다. 다리를 조금이라도 더 살리고 싶은 마음에 그때마다 임시방편으로 썩은 부위만을 잘라냈다. 그러다 보니 그 위쪽 부위가 다시 썩었고, 잘라내고 나면 또 그 위쪽 부위가 썩어들어갔다. 그로 인해 마침내 다리 전체를 잃는 불행한 운명을 맞게 된 것이다.

환부患部는 환부작신換腐作新의마음으로, 아끼지 말고 과감히 제거해 버리는 것이 상책이다. 그럴 때 새살이 돋는다. 어설프게 인정을 베푼다거나 아랫돌 빼서 윗돌 괴기식 처방으로 시간을 허비하다가는 환부가 깊어져서 끝내는 돌이킬 수 없는 결과를 불러오고 만다.

우리 몸의 환부는 어쩌면 사과의 썩은 부분 같은 것이 아닐까. 썩은 부분을 도려내어야 성한 부분을 살릴 수 있듯, 병든 부위를 제거해야 남은 부위를 지켜낼 수 있는 법이다.

어찌타 육신뿐이랴. 탐욕은 마음의 환부다. 썩어가는 마음의 환부를 도려내지 아니하면 영혼이 시나브로 망가져 버린다. 탐욕의 근원을 싹둑 잘라서 수장시킨 다음에야 비로소 흐린 마음은 맑아지고, 그리하여 환하게 열린 세상이 눈에 들어올 것이리라.

알기는 손바닥을 뒤집는 일처럼 쉽지만, 행동으로 옮기기는 태산을 드는 일보다 어려운 것이 사람살이인가 보다. 이러한 세상사의 이치를 머리로는 번연히 깨치고 있으면서도, 부질없는 탐착심에 꺼둘리어 여태껏 마음의 환부를 조금치도 도려내지 못하고 어영부영 세월만 축내어 왔으니……. 대체 앞으로 얼마나 더 황금 같은 시간을 허송한 뒤에라야 이 뒤룩뒤룩한 욕망의 비곗덩어리를 눈곱만큼씩이나마 깎아 나갈 수 있으려나. 지금 발 앞에 놓인 사과 상자가 그 답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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