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을 찍다 보면 피사체의 배경이 문제가 될 때가 있다. 꽃이 요란하게 피어 있는 정원에 나가서 모델로 서는 여자는 대개의 경우 바보스러운 여자다. 자신의 미모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 해도 자연의 미에는 감당하기 어려운 점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슬기로운 사진사는 배경을 슬쩍 밀어놓고 인물을 드러나게 배려해 준다. 그것도 모르고 아름다운 꽃도 살리고 인물도 드러내려는 욕구를 가지고 촬영을 하니 이내 싫증을 느끼고 사진을 휴지통에 버리게 된다. 제 아무리 잘난 자라 해도 배경과의 호응이 없이는 자신의 미를 극대화할 수 없다.

지금 우리는 공민이를 위로하기 위해 나들이를 가는 중이다. 오랜만에 친구들이 한 차에 몸을 실고 바닷가 펜션을 찾아간다. 학창시절 잘 나가던 그녀가 지금 어려움에서 헤어나질 못하고 있다는 얘기를 처음 들었을 때, 쉽게 와 닿지 않았다. 언제나 우리보다 훨씬 앞에서 질주해 갈 것이라고 생각했던 그녀였다.

한창 때는 미인대회에서 상을 거머쥘 정도로 잘 나가던 그녀. 어느 곳에서든 자신의 뜻대로 일을 도모하던 그녀였기에 나에게는 조금은 부담으로 왔던 친구다. 솔직히 말하면 주위 배경을 유념하지 않아도 사진발이 잘 받던 친구다. 대개의 경우 배경에 신경을 쓰고 그로 인한 조화를 도모하게 마련인데 공민이는 그게 아니었다. 그녀의 출현에는 언제나 주위 배경이 맞춰 주는 형상이었다. 그래서 나와는 일정한 거리가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절친한 친구의 묶음에 같이 넣기에는 부담이 가는 애매한 부피의 친구였다.

어둠이 내려 희뿌연 하늘빛이 비라도 뿌릴 기세다. 이미 지불된 펜션 사용료를 생각하며, 속히 도착하는 길을 골랐다. 고갯길이긴 하지만 산을 가로질러 가기에 지름길이 되는 셈이었다. 그러나 산허리를 돌아 고갯길로 들어서자 짙은 안개가 길을 막는다. 안개는 습윤한 지면이나 수면에 접하고 있는 공기가 기온이 다른 그 상층의 공기와 혼합되면 위를 이동할 때 냉기류가 침체되어 시야를 흐리게 하는 일종의 연막 현상이다. 그 연막은 마치 사진의 배경처럼 우리를 고민하게 한다.

굽이굽이 고갯길을 따라 넘어가는데 안개는 줄기차게 달라붙었다. 찐득거리며 놓아주지 않던 한여름 밤의 갯가 냄새처럼 안개는 우리가 탄 차를 놓아 주지 않았다. 그 속에 있는 우리는 완전 불확실한 존재였다. 실체는 있다 해도 신뢰의 확신성이 없는 그런 모호한 것이었다. 안개가 걷히면 세상의 물상들은 엄청난 변혁으로 우리를 닦아세울지도 모른다는 불길함이 엄습해 왔다. 우리는 불확실의 웅덩이로 추락하여 끝없는 낙하만을 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어야 했다. 안개의 늪 속에서 우리는 허우적대고 있었다. 내부에서는 아무것도 제어할 수 없기에 안개등을 켜고 서행하면서 오로지 동물적 감각으로 차를 몰았다. 안개 속은 한때 내가 살았던 세계고, 누구나 만날 수 있는 세계였다.

이와 같은 안개를 어떻게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였다. 맑은 날만을 만난다면야 무슨 문제가 되랴마는 세상살이가 그런 것만은 아니지 않는가. 그래도 우리는 이 길을 헤쳐가야 하고 그곳에서 최선을 다해야 했다. 차 안에서는 무슨 방도를 모색하든 차창 밖의 세상은 바라볼 수가 없었다. 문제의 핵심에서 이탈하여야 겨우 세상의 이치를 조금씩 읽어낼 수 있듯이 우리는 적극적으로 벗어나려 했으나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안개의 한가운데에서는 아무 것도 볼 수가 없었다. 거의 속력을 내지 못하고 앞 차량을 따라 조심스레 나아간다. 평소 같았으면 앞의 차량도 추월했을 것이 뻔하다.

문득 공민이의 살아온 배경에 생각이 머문다. 그동안 그녀가 걸어온 세월이 너무 맑은 날만의 연속이 아니었을까. 오늘 그녀의 아픔 속에는 회한의 눈물이 있을 것이다. 그 아름다운 배경을 너무 가볍게 즐기고 촬영에 도취된 것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고개를 든다. 오늘과 같이 안개 짙은 길도 운행해야 하는 이치를 깨닫지 못한 데서 온 좌절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지워지질 않는다. 이 순간 우리에게 짙은 안개를 내려준 까닭은 무엇일까.

삶을 포기하려고까지 했던 공민이에게 이 안개 길은 어떤 배경으로 작용할까. 짙은 안개는 결코 끝이 날 것 같지 않다. 점점 더 심하게 달려들며 차창을 막아선다. “니 이 안개를 배경으로 사진 찍지 않을래?”

빙긋이 웃으며 그녀가 차에서 내린다. 그녀의 어설픈 미소 위로 짙은 안개가 머리를 풀어헤치고 지나간다. 안개 속에 서 있는 그녀의 얼굴에는 어둡고 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고, 깡마른 쇄골은 더욱 앙상하게 보였다. 나는 심술이나 부리듯 그녀의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내일 아침에 차분한 마음이 되었을 때, 넌지시 넘겨주려는 속셈이었다. 안개는 여전히 우리를 놓아 주지 않는다.

삶이 불가사이하고 진실은 저 너머에 있음을 안개 속에 갇힘으로 알게 된다. 끝이 없을 것 같은 길도 어느새 목적지까지 도착했다. 한사코 혼자 있기를 원해 펜션에 내려놓고 온 후, 나는 그녀가 다른 생각을 할까 봐 밤새 불안에 시달렸다.

다음날 아침 일찍 카메라를 메고 공민이에게 가기 위해 손전화를 집어 들자 그녀의 긴 문자가 숨을 몰아쉬며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가야겠어. 안개 속을 두 시간이나 걸어서 터미널에 도착했어. 이젠 할 일을 찾아봐야지. 지금 버스 탔어. 고마웠어.

유리창에는 안개가 와서 아직도 버티고 있다. 그 안개는 더 짙은 의미를 가지고 내 가슴으로 파고든다. 저 짙은 안개 속에서 공민이가 질주해 가고 있다. 마당 저편에서 장미꽃이 희미하게 모습을 드러낸다. 나의 허전한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공민이의 얼굴이 노르스름하게 내 의식의 저편에서 다가온다.

<출처- 네이버블로그 '나의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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