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순이네 딸기밭 / 유미경

 

 

아주 옛날, 내가 꼬맹이 시절인 초등학교 1학년, 눈부신 어느 봄날의 이야기이다. 하굣길에 책보를 허리에 동여매고 하복이와 나는 복순이를 따라나섰다. 딸기가 빨갛게 익었으니 양껏 따도 좋다는 복순이의 말에 앞뒤 생각 없이 신바람이 나서 신작로 길을 걸었다.

밝은 햇살이 하늘에서 쏟아져 내렸고, 맑은 공기를 뚫고 새소리가 메아리처럼 울려 퍼졌다. 들판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온화했고, 모든 자연이 생기를 얻어 풍요로운 봄날, 딸기를 욕심껏 딸 수 있을 거라는 기쁨에 들떠 우리는 복순이를 따라 발걸음도 가볍게 사붓사붓 걸었다.

얼마 후 우리는 복순이네 집 앞에 다다랐다. 야산으로 둘러싸인 솔숲, 완만하게 경사진 분지 끝에 외딴집 한 채가 우뚝 서 있었다. 소나무와 떡갈나무 그리고 공동묘지로 둘러싸인 복순이네 집 풍경은 몹시 으스스할 정도로 음산해 보였다. 집은 크고 번듯했지만 묘지로 둘러싸인 외딴집에 인적마저 없으니 적막하고 황량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눈을 돌리면 사방이 온통 공동묘지라 한낮인데도 금방이라도 무덤에서 귀신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등골이 오싹했다.

어렸을 때는 복순이가 살고 있는 까막재가 무서웠다. 공동묘지가 주는 위압감 때문에 공연히 공포를 느끼며 주눅이 들었던 것 같다. 대다수의 아이들이 그렇듯 나도 귀신을 무서워했다.

소나무 숲 사이로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바람이 불 때마다 어디선가 풋풋하면서도 달콤한 향기가 아스라이 코끝으로 스며들었다. 향기의 근원지는 다름 아닌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싸인 딸기밭이었다. 드넓은 밭에 딸기가 빨갛게 익어가고 있었다. 야산 아래 넓게 펼쳐진 평지가 다 복순이네 밭이라고 했다.

우리는 곧바로 탱자나무 울타리로 둘러쳐진 딸기밭에 총총걸음으로 걸어갔다. 기분이 너무 좋아 날아오를 것만 같았다. 밭에 가까워질수록 딸기 향기가 은은하게 퍼졌다. 딸기밭으로 들어서자 향긋한 딸기 냄새가 코끝을 간질였다. 탐스럽게 열린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초록의 줄기 밑으로 빨갛게 익은 딸기를 발견했을 때의 희열은 강렬했다. 초록 이파리 사이로 그리고 붉은 딸기 아래로 쏟아져 내리는 금빛 태양. 그 햇살 조각에 반짝이는 초록색의 이파리와 붉디붉은 딸기의 붉은색은 묘하게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햇살 조각에 농익은 딸기는 어떠한가. 바라만 봐도 희열과 감탄이 절로 나왔다. 세상이 온통 풍요롭고 축복에 가득 차 있었다.

우리가 딸기밭 안으로 깊숙이 들어섰을 때, 벌들은 딸기 주위에서 맴돌며 윙윙거렸다. 달콤한 꿀을 찾아 나비 한 마리도 날아와 꽃잎에 입을 맞추었다. 벌, 나비처럼 우리도 입안에 달달한 봄을 피워볼까 하는데, 어디선가 갑자기 고함 소리가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딸기밭 아래쪽에서 부리나케 달려온 할머니는 잔뜩 화가 나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복순이 할머니라는 걸 단박에 알아차렸다.

복순이 할머니는 작고 뚱뚱했으며, 얼굴은 호빵처럼 똥그랗고, 뒤로 쪽 찌어 올린 머리카락은 눈처럼 희었다. 쭈글쭈글한 얼굴에 쭉 찢어진 눈매가 몹시 사나워 보였다. 인자하고 온화한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다급하게 달려오느라 숨이 몹시 찼던지 헉헉거리면서도 핏대에 날을 세우고 불같이 화를 냈다. 우리는 딸기밭에서 쫓겨날 위기였다.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있을 거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나는 복순이에게 간절하게 눈빛을 보냈다. 호언장담으로 허세를 부렸던 복순이는 순식간에 풀이 죽어 시선을 밑으로 내리깔았다. 복순이가 할머니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역부족으로 보였다. 딸기밭은 누구도 범접할 수 없는 할머니의 영역, 어린 손녀가 어떤 달콤한 말로 마술을 부린대도 안 될 것 같았다.

내가 상상의 날개를 너무 화려하게 펼쳤나. 머릿속에서 화려하게 펼쳤던 파노라마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다. 코끝으로 훅훅 스며드는 단내로 입안에 침이 고였다. 그러나 갑자기 금단의 열매가 되어버린 농익은 딸기를 눈앞에 두고 나는 처음으로 허기진 고통을 느꼈다. 가득 차오르는 풍요로운 축복과 평화가 그 작은 딸기 안에 있는데…. 헛헛해진 마음에 현기증이 났다.

단내가 폴폴 나는 딸기밭에서 쫓겨난 우리는 복순이네 집으로 향했다. 마당으로 들어서자 개가 사납게 짖었다. 수탉은 개가 짖는 소리에 화가 났는지 꼬꼬마인 우리를 얕잡아 보고 목털을 곤두세우고 전투태세로 노려보았다. 금방이라도 덤벼들 기세에 위협을 느낀 하복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마루 위로 뛰어올랐다. 수탉도 멍멍개도 복순이 할머니를 닮았는지 성질이 불같이 뜨거웠다. 서늘해진 간담을 진정시키려 깊은 숨을 내리쉬었다.

마루에 앉아 마당을 둘러본 다음 집 안을 둘러보았다. 집 안팎으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낌새를 알아챈 복순이가 어두컴컴한 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바가지에 딸기를 담아왔다. 흡족하진 않지만 다행히 딸기를 맛볼 수 있었다. 농익은 딸기를 한입 깨어 물었을 때 터져 나오는 상큼함, 달착지근하면서 풋내가 나는 딸기의 맛은 기가 막히게 맛있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입안에서 달콤한 향기가 진동하는데 아쉬운 맛이었다. 달콤함과 향긋함이 작은 딸기 안에 다 들어있는데 분명 어딘가 허전했다. 왜일까? 그것은 빨갛게 익은 딸기를 눈으로 보는 재미, 딸기를 직접 따서 먹는 재미, 딸기를 따서 바구니에 수북수북 담는 재미가 빠져 있어서였다. 눈으로 보고 느끼는 기분과 손맛의 재미를 느끼지 못한 허전함에서 비롯된 아쉬운 맛이었다.

성격이 괄괄하던 복순이는 그날 이후 매우 얌전해졌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전학을 갔다. 외가에 머물렀던 복순이는 까막재를 떠나 엄마가 있는 흥덕으로 거처를 옮겼다.

그로부터 9년이 흘렀다. 초등학교,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서 나는 복순이를 다시 만났다. 한눈에 얼굴을 알아보지 못했지만 명찰에 적힌 이름을 보고 복순이라 짐작했다. 사각 얼굴형이 둥근 얼굴형으로 바뀌었을 뿐, 어릴 적 모습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복순이도 명찰에 적힌 내 이름을 보고 나를 알아보는 듯했다. 그러나 그뿐, 우리는 우물쭈물 망설이다 타이밍을 놓쳤다. 그 후로도 복도에서, 운동장에서, 노천강당에서 여러 번 마주쳤지만 우리는 먼저 다가갈 용기가 없었다. 낯가림을 하듯 머뭇거리다가 적절한 때에 타이밍을 놓쳐버린 우리는 3년 내내 모르는 사람처럼 지냈다. 정서적으로 덜 여문 시기였다.

학교 행사에 참석한 엄마는 운동장에서 복순이 엄마를 만나 반가웠다고 했다. 한두 마디라도 반갑게 마음을 나누는 어른들의 정서적 교감은 덜 여문 우리들에 비해 깊고도 넓었다.

4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 사람은 지나온 시간만큼 성숙해진다. 나이가 들면 타인에 대한 생각이나 감정을 세심하게 배려하고, 속마음까지 헤아릴 줄 아는 통찰력이 젊을 때보다 깊어진다. 다시 복순이를 만나면 딱딱하게 굳었던 마음의 근육을 풀어내고 말랑말랑한 마음으로 다가가리라. 시간을 과거로 되돌릴 수는 없지만 3년 내내 표현하지 못했던 마음을 주고받으며 옛이야기를 나누어야겠다. 아주 옛날, 딸기밭에서 보낸 시간이 동화처럼 느껴지는 시간. 우리들의 특별했던 그 봄날의 이야기보따리를 풀어야겠다.

<에세이문학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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