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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에 앉은 두 여인이 아까부터 말씨름이다. 얼굴이 빼쏜 거로 봐 모녀인 듯싶은데, 엄마가 사정해도 딸은 들은 체 만 체하더니 마지못해 움직인다. 노인네는 혼잣말처럼, 아들은 고분고분한데 저년은 성깔이 못돼 먹어 까칠하다는 거다. 왜 쟤는 쌀쌀맞은지 모르겠다며 혼자 주절댄다. 딸이 어디선가 종이컵을 들고 나타난다. 목이 마르니 물 좀 달라한 모양이다. 저쪽 정수기에서 담아왔다며, 물도 먹지 말라 했는데 어쩌자고 그러느냐, 목이 타니 입만 헹구겠다, 여기 어디에다가 뱉느냐, 그냥 휴지에 받아내겠다 하며 실랑이는 계속 이어진다.
상급 대학병원 응급실 밤 풍경이다. 고갤 떨구고 말없이 눈물만 흘리는, 식은땀에 젖어 있는, 발목이 골절돼 처치를 기다리는, 휠체어에 앉은 채 숨을 고르고 있는, 배를 움켜잡고 연신 화장실을 들락거리는, 몸 가누기조차 힘겨워하는, 순서가 안 돼 기다리기만 해야 하는 안타까운 상황들이다. 응급 치료는 먼저 도착한 사람이 우선권이 있는 게 아니라 중증도에 따라 진료가 이뤄진다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
문이 열리고 한 쌍의 늙숙한 남녀가 들어선다. 부부인 듯싶다. 여인의 얼굴은 창백하다 못해 일그러져 있고, 고통을 참느라 어금니를 악물고 있어 얼굴이 강파르다. 여인은 바닥에 그냥 주저앉고 만다. 남자는 예진 의사에게 무슨 말인가를 빠르게 하더니, 이젠 한계가 온 게 아니냐며 한숨을 내쉰다. 간호사가 다가오더니 여인의 팔에 주사기를 꽂는다. 진통제인 듯싶다. 남자도 주저앉더니 여인의 어깨를 안아 고갤 기대게 하고 등을 쓸어내리며 눈가를 훔친다.
비바람을 피할 누옥이 있고, 삼시 세끼 먹을 양식이 있으며, 큰 병고 없이 제 발로 걸을 수 있다면 그게 평화라는 걸 알겠다. 가족 중 환자가 발생해 뜬 눈으로 응급실에서 어둔 밤을 지새운 후, 응급실 밖으로 나서니 밝은 평화다. 사는 일은 힘겨움 여덟 숟가락에 기쁨 두 스푼이라 했던가. 어둠과 밝음, 고통과 평화가 함께 굴러가는 게 생의 수레바퀴이려니 하고 생각한 긴 밤이었다.
정태헌(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