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채의 말 / 김정미

 

 

사물의 한 가운데로 들어서는 일이 곧, 사유의 시작이다. ‘보다’라는 말 속에는 단순히 ‘보다’만을 의미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를 테면 보는 ‘보는 지점’을 넘어 사물이나 현상을 판단하는 방향이나 지시를 품고 있다. 보이는 것 그 너머의 세계까지 통찰하는 힘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일까. 우연한 마주침에서 뜻밖의 나를 만나고 세상을 만날 때가 있다.

무더위가 들끓는 8월이었다. 전철을 기다리는 시간만큼 후덥지근한 공기도 점점 늘어났다. 도착지는 제각기 다르지만 더위를 마주하는 사람들의 표정은 서로 닮아가고 있었다. 찌푸린 얼굴 가득 더운 지하 공기가 끈적이게 달라붙었다. 무더위 때문에 전철이 실고 올 냉기가 점점 간절해지기 까지 했다. 더위와 기다림에 지친 사람들이 쉼터인 나무 의자에 하나 둘 앉기 시작했다.

잠시 후 내 옆 빈자리에 노부부가 다가와 앉았다. 의자에 앉자마자 노인이 일어서더니 가방에서 부채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 노인은 아내를 향해 부채를 부치기 시작했다. 부채 바람에 순한 얼굴로 그림처럼 앉아있는 아내의 무심한 표정은 남편의 다정한 모습과 사뭇 달랐다. 얼굴과 이마에 흥건한 땀에도 불구하고 아내를 향해 부지런히 움직이는 부채를 든 주름 가득한 손. 그 옆자리에 앉은 나에게 까지 부채의 바람이 불어왔다. 내 머리카락이 그 바람에 흔들렸다. 내 쪽으로 불어오는 부채의 바람을 그대로 맞고 있어야 하는지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지 순간 고민이 되었다. 왠지 미안한 마음에 엉거주춤 엉덩이를 빼 옆으로 자리를 옮겨 앉으며 말을 건냈다.

“할머니께서는 참 좋으시겠어요.”

할아버지는 조용히 미소를 지은 채 할머니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셨다. 할머니는 그저 무심히 허공을 바라볼 뿐이다.

“많이 아파요. 이 사람이, 참 건강한 사람이었는데….”

부부의 자세한 속사정은 알 수 없지만 고생하게 해서 미안하고 지금 같은 모습이라도 함께 해주어서 다행이라는 걸 짐작할 수 있었다. 부채의 바람을 타고 할아버지의 마음이 아픈 할머니께 고스란히 전달되기를 그 순간 바랬다.

삶이란 바다를 항해 할 때 어디 순풍만 있을까. 거센 폭풍 앞에서 함께 잘 견뎌준 시간만큼 부부는 때론 뿌리 깊은 나무로 더 단단해진다. 자신의 아픔보다 먼저 함께 해준 아내를 생각하는 따뜻함이 느껴졌다. 그때는 알 수 없었던 것들이 그때를 훌쩍 지나서야 알게 되는 것들이 있다. 경험하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지혜가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내가 모른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던 수많은 시간들. 좀 더 지혜롭지 못했던 순간들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존재는 좌절 속에 드러나기도 한다. 좌절을 통해 성장하기 때문이다. 초월할 수 없는 비극은 없다는 의미도 포함하고 있을 것이다. 성공과 실패를 거듭하며 수없이 허물고 짓기를 반복했던 남편의 사업으로 힘겨움에 몰락하지 않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그것은 참 다행스런 일이다. 이젠 저녁 밥상을 물리고 나면 고된 하루를 견디지 못한 채 코를 고는 남편의 지친 모습. 어느 새 흰머리가 늘어나고 굵어진 이마의 주름에서 가장의 무게가 읽혀졌다.

서로의 부채가 되어주는 일. 더울 땐 서풍을 불러오고 삶이란 불씨가 가뭇하게 사그라들 때 그 불씨를 다시 붉게 타오르게 하는 힘. 그것이 부채의 아름다움이 아닐는지. 우연히 만난 노부부의 모습에서 나는 또 다른 시간과 마주할 수 있었다. 서로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어주는 일. 그것은 서로에게 시원한 나무 그늘이 되어주거나 햇살이 되는 일이다. 전철역에서 내가 마주한 노부부와의 짧은 만남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내게 남은 시간을 지연 시킬 수 있는 일은 내 능력 밖의 일이다. 그러나 그 시간 속에서 피어날 내 삶의 이야기는 온전히 내 몫일 것이다.

또 다시 한 계절이 가고 한 계절이 오고 있다. 외눈박이 눈으로 누군가의 등불이 되어주는 골목의 외등처럼 우리 부부 또한 서로를 비쳐 주는 등불이거나 부채가 되어줄 것이다. 삶이란 언덕을 함께 오르는 힘. 그것은 기대란 한쪽 눈을 지그시 감아주는 일이다. 완전하지 않은 모습을 조금씩 완성해 가면서 등을 두드려주며 지켜봐 주는 눈. 그 눈빛이 길을 밝혀주는 등불이 아닐까.

비껴가는 계절 앞에서 꽃들이 피고 지듯 어떤 것이든 인연으로 생겨나지 않는 것은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떠한 존재도 공(空)하지 않은 것은 없다. 나는 천천히 전철역을 빠져 나왔다. 세상은 여전히 희망의 편이고 곧, 초록 세상이 올 것이라고 내게 귀띔하는 부채의 말. 그 말을 따라 나는 휘적휘적 삶의 숲을 향해 걷기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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