넓은 마당을 그리다 / 윤민섭

 

안과수술을 받았다. 오른쪽 눈의 망막 안쪽에 주름이 잡혀 우그러든단다. 그냥 두면 계속 진행되어 실명할 수 있다는 의사 엄포(?)에 겁을 먹고 덜컥 수술을 받았다. 다른 병원이라도 한 번 더 진료를 받아볼걸 하는 후회가 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수술받은 오른쪽 눈이 안개가 낀 듯 뿌옇다. 사물이 선명하게 보이지 않는다. 처음 겪는 일이라 왼쪽 눈으로만 책이나 TV를 보는 것이 많이 불편하다. 이래저래 심기가 거슬린다. 무료하고 따분하다.

뭘 하지? 그래, 늘상 내 머릿속에 그리고 있던 마당 넓은 집으로 이사나 가보자. 집은 작고 허술해도 괜찮다. 마당만 넓으면 된다. 물론 울타리는 없어야겠고. 우선 할 일은 마당에 꽃과 나무를 심는 일이다.

우리 외갓집은 동네 사람들이 정자집이라고도 하고 약국집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할아버지가 사랑채에서 한약방을 하고 계셨기 때문이다. 동네 맨 위쪽에 야트막한 동산이 외갓집을 포근히 감싸고 있었다.

봄이면 동산은 온통 분홍색 진달래꽃으로 잔치를 벌였다. 앞에는 아랫동네 개구쟁이들이 몰려와서 헤엄칠 수 있는 연못이 인기였다. 연못 안에는 크고 작은 바위 몇 개가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아이들이 물에 빠지지 않게 바위 건너뛰기 놀이를 즐겼다. 연못 가장자리에는 창포꽃이 노랗게 피었다.

집 주변이 모두 정원이다 보니 할아버지는 약방에 손님이 없을 때면 전지가위와 꽃삽을 들고 늘 정원 가꾸기에 전념하셨다. 꽃장수들이 드나들며 꽃나무를 파가기도 하고 이름 모를 꽃나무를 심어주기도 했다. 할아버지의 부지런한 손길로 만들어진 정원은 초등학교 저학년들이 소풍을 오는 명소가 되었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할머니만 홀로 남았다.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가까이 살던 우리가 외갓집으로 이사를 갔다. 열네 살부터 열여덟 살까지 그 아름다운 정자집에서 살던 때가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시절이었다. 정원수에서는 언제나 새들이 노래하고 온갖 꽃과 나무들이 너울너울 춤을 추는 곳. 소녀의 감성은 솜사탕처럼 부풀어 있고 열두 가지도 넘는 꿈으로 가슴이 늘 벅차올랐다. 지금도 그 정원 그 소녀 시절을 꿈에서 자주 만난다.

나는 지금 까치집처럼 높은 아파트 7층에 앉아 있다. 정자집은 감히 생각할 수도 없고 대신 마당이라도 넓은 집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다. 마당에는 무슨 꽃을 심을까. 마루에서 정면으로 볼 수 있도록 마당 가운데 모란을 다섯 그루쯤 심어야겠다.

모란은 다년생 꽃나무다. 새로 자란 가지 끝에서 한 송이씩 꽃이 핀다. 품종개량으로 꽃 모양과 색깔이 다채롭지만 내가 선호하는 모란꽃은 홑겹의 붉은 자주색 꽃이다.

두 손바닥을 모아 펼친 것만큼 커다란 꽃송이가 다섯 그루에서 하나 가득 피면 황홀함은 절정에 이른다. 넓은 마당은 아름다운 궁전이 되리라. 모란은 꽃이 질 때도 초라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꽃잎이 시들지 않은 채로 툭툭 떨어져버린다. 떨어진 꽃잎을 주워 보면 꽃물이 묻어날 듯 생생하다. 그처럼 속절없이 모란이 떠난 뒤 나는 김영랑처럼 다음 해 모란이 다시 피기를 기다릴 것이다.

몇 걸음 떨어진 곳에 하얀 백합꽃밭을 만들 테다. 알뿌리로 심는 다년생 꽃이다. 외줄기가 꼿꼿이 자라면 가지 끝에 보통 세 송이의 새하얀 꽃이 핀다. 세 송이가 서로 등을 대고 피었으니 어느 방향에서 보든 백합꽃은 고결한 자태를 드러낸다. 청초하고 순결한 흰 백합꽃과 마주하고 있으면 묵은 허물이라도 벗어내야 할 것처럼 숙연해진다.

백합밭 가득히 꽃이 피면 진한 향기에 숨이 멎을 것 같다. 취할 만큼 짙은 백합 향을 넓은 마당 건너 동네 골목까지 흩뿌려 놓으리라. 그리고 마당 구석구석에는 봉숭아꽃이며 과꽃, 백일홍, 한련화, 살살이꽃, 국화 들로 채우려 한다.

유실수도 몇 그루 있으면 좋겠다. 마당 귀퉁이에 대추나무를 심어보자. 가을이 되면 초록잎 사이로 붉은 대추가 보석처럼 반짝일 거다. 붉은 대추는 대추색이라는 고유한 이름도 있다. 한복을 많이 입던 시절 여인네들이 대추색 치마저고리를 즐겨 입기도 했다.

잘 익은 대추를 한입 깨물면 단맛이 뿜어 나온다. 손으로 따 먹을 수 있도록 키 작은 대추나무를 심어야겠다. 오가는 사람들이 몇 개 씩 따가는 손끝은 모른 척 눈길을 돌릴 테다.

대추나무 맞은편에 심을 것은 감나무다. 초겨울에 넓은 마당을 풍요롭게 장식해주는 것이 감나무다. 감잎이 다 떨어지고 난 뒤 앙상한 가지에 주렁주렁 달린 홍시를 보는 것은 얼마나 감동일까.

찬바람이 불고 먹이를 구하기 어려울 때면 새들이 찾아와 농익은 홍시로 허기를 때운다. 참새, 직박구리, 까치, 비둘기에게 마당의 감나무는 겨울 양식 창고다.

마지막으로 여름 내내 꽃을 피우는 배롱나무와 단풍나무 소나무를 심으면 다 된다. 그러면 내 머릿속에 그리던 마당 넓은 집이 완성이다. 네 계절이 마당 안에 가득 담긴다.

잘 꾸며진 넓은 마당에 어릴 적 고향 친구들을 초대해야지. 명자, 재희, 행자 또 몇 명의 이름을 떠올리는데 휴대폰 전화벨 소리가 요란하게 울린다. 퍼뜩 정신을 차리니 넓은 마당은 요술램프의 지니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나는 여전히 아파트 7층 소파에 덩그러니 앉아 있는 중이다.

<에세이문학 2022년 여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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