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마도서관에 두고 온 것들 / 심선경

 

이사하면서 갈마도서관에 몇 가지 물건을 두고 왔다. 두고 온 것이라 해봐야 매일 들고 다니기 힘들어 구석진 곳에 놓고 다닌 책 몇 권과, 나무의자의 딱딱함을 조금은 잊게 해 준 작은 방석 하나, 운동화를 벗고 갈아 신었던 슬리퍼 두 짝이 고작이다. 하지만 어쩌다 KTX를 타고 대전 쪽을 지나게 되면 한사코 그것들이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다.

 

십오여 년 전, 사무관 임용고시를 앞두고 석 달 남짓 매일같이 그 도서관을 드나들었다. 평일에도 사람들이 많아 일찍 가지 않으면 자리 잡기가 힘들었다. 모두 나처럼 어떤 목표를 갖고 그것을 이룰 때까지 한 자리를 고수하며 열람실에 죽치고 앉아 있었다. 아예 공부할 책 전부를 커다란 비닐백에 넣어 열람실 한 곳에 비치해두고 몸만 왔다 갔다 하는 사람도 있었다. 짊어진 삶의 무게만큼 짓눌린 그가 읽어내야 할 두꺼운 책은 스무 권이 훨씬 넘는 듯했다.

 

본래 부산이었던 직장이 대전으로 옮겨가면서 주말부부 생활을 꽤 오래 하게 되었다. 그즈음 아들이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3년 터울인 딸아이가 중학교에 입학했다. 식품유통사업을 하던 남편은 서른 개가 넘는 거래처로 날마다 새벽 배달을 해야 했기에 누구보다 먼저 일어나 집을 나섰다. 아들은 아침 자율학습을 하느라 일찍 등교하는 바람에 아침잠 많은 딸아이를 깨워줄 가족이 없어 항상 마음에 걸렸다.

 

오전 아홉 시를 넘기면 내가 대전에서 근무하는 줄도 모르고, 담임선생님은 딸아이가 아직 등교하지 않았으니 빨리 깨워 보내 달라는 전화를 수시로 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일주일에 서너 번씩 그런 전화를 받다 보면 서늘해진 가슴 한쪽이 조금씩 허물어지는 것 같았다. 아무리 직장이 중요하다지만 이게 대체 뭣 하는 짓인가 싶었다. 대전에 살면서 부산에 있는 딸아이의 등교를 아침마다 챙겨야 하는 일은 만만치 않았다.

 

아이를 낳으면 어떻게 키우겠다는 확고한 계획과 포부도 컸었지만, 같은 공간에 함께 있지 못하는 일상이 자꾸만 딸아이와의 관계를 멀어지게 했다. 자기주장이 강했던 딸은 사춘기에 접어들자 말수가 부쩍 줄어들었고, 무엇에 심사가 뒤틀렸는지 화난 얼굴로 제 방에 들어가면 몇 시간 동안이나 문을 걸어 잠그곤 했다. 맞벌이하느라 아이를 혼자 두는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게 화근이었을까.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와 적개심을 품은 눈초리로 나를 쏘아볼 때는 차마 딸아이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었다. 별 것 아닌 말에도 공격적인 표현들을 서슴지 않고 내뱉을 때마다 저 아이가 내 뱃속에서 열 달을 품어 낳은 내 자식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폭풍이 몰아치듯 감정이 소용돌이치며 돌발행동이 빈번했던 시기에 너무 답답한 나머지 강압적으로 대하다 보면 더 큰 문제들을 일으켰다. 위로와 공감을 하고 서로 도와가며 살아도 시원찮을 판에 매번 살얼음판을 걷듯 조마조마하고 시한폭탄을 옆에 두고 사는 듯한 날들이 계속되었다. 엄마가 가는 곳이면 어디든 치맛자락을 붙들고 졸졸 따라다녔던 어린 시절을 내 아이는 기억조차 하지 못하는 것일까.

 

참다못해 남편과 마주 앉아 딸아이 문제를 의논했다. 결석과 지각을 밥 먹듯 하다 보니 이대로 가다간 학교 수업일수를 채울 수가 없어 유급될 상황이었다. 내가 직장을 그만둘까도 여러 번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러기엔 이미 벌여놓은 일들을 수습하기 어려웠고 갚아야 할 빚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 당시 상황으로는 자녀를 돌봐야 할 부모가 제 역할을 할 수 없으니 극단의 대책이라도 써야만 했다. 하나밖에 없는 집을 처분해 아이 둘을 외국에 유학 보내자고 했다. 처음엔 안된다며 손사래를 치던 남편도 내 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그전부터 잘 아는 교회 집사님이 중국의 서안(시안)과 한국을 오가며 유학생을 모집한다는 말을 들어왔다. 집사님의 자녀들도 중국에서 함께 공부하고 있었기에 적잖이 안심되었다. 우리 아이들만 좋다고 하면 더는 미룰 것이 없었다. 아직 세상 물정 모르는 철부지였던 딸은 그렇게 쫓겨가듯 제 오빠와 타국으로 떠나게 되었다.

 

갈마도서관에서 공부하는 동안에 내 맘은 늘 딸아이에게 가 있었다. 감기몸살로 콧물 기침을 달고 지냈고, 뼛속 깊이 파고드는 목과 허리통증은 수시로 내 몸을 갉아먹는 듯했다. 약을 먹으면 잠이 와 공부할 시간을 놓칠까 봐 감기약도 한번 지어먹지 않았었다. 갈마도서관은 아침 7시에 문을 열고 밤 11시에 불을 껐다. 도서관에서 돌아오면 인터넷 강의를 들으며 새벽 3시까지 못다 한 공부를 했고 아침 6시에 일어나 도서관으로 다시 발길을 옮겼다. 그때는 오로지 임용고시에 단번에 합격하여 타국에 있는 아이들을 하루빨리 한국에 데려오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우여곡절을 겪고 그해에 바로 임용고시에 합격했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내가 원하던 부산 쪽에는 자리가 없어 대전보다 더 먼 곳으로 발령이 나 버렸기 때문이다. 동료 몇 명의 도움으로 강원도까지 짐을 옮기면서 마치 내가 귀양살이가는 대역죄인이라도 된듯싶었다. 달리는 차 창으로 보이는 삭막한 겨울 풍경 속, 벌거벗은 나뭇가지들이 자꾸만 파도처럼 일렁여서 안경을 고쳐 쓰는 척하며 눈물을 훔쳤지만, 내 삶은 온전히 내 것이 아니라는 배신감이 자꾸만 들었다.

 

어느 주말에 딸아이가 머무는 기숙사 카운터에 전화를 하니 중국말을 하는 젊은 여자가 전화를 받았다. “니하오!”, 내가 할 수 있는 중국말은 그것이 다였다. 노트에 깨알같이 적어놓은 방 번호를 띄엄띄엄 읽어주며 서툰 영어로 딸아이를 바꿔 달라고 했다. 내 전화를 받으려고 5층에서 숨이 차도록 계단을 뛰어 내려왔는지 그 어린것이 수화기 속에서 갑자기 튀어나와 “엄마”라고 외칠 때, 사뭇 떨렸던 그 음성이 내 가슴을 사정없이 뒤흔들었다. 힘든 일은 없느냐고 물었다. 재미있게 공부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며 나를 안심시켜주었다. 문득 딸아이가 네 살 정도 되었을 때의 기억들이 머릿속을 재빨리 스쳐 지나갔다.

 

아이들이 어렸을 땐 분양받은 아파트 중도금을 붓느라고 도심에 있던 번듯한 전셋집에서 계속 변두리 쪽의 월셋집으로 옮겨 다녔다. 잔금 치를 날이 다가오자 급기야는 슬레이트 지붕 아래 월셋집으로 들어갔다. 한여름에는 실내 공기가 뜨거워 숨이 턱턱 막혔고, 한겨울엔 웃풍이 심해 방안에서 솜이불을 덮고 있는데도 한기가 들었다. 늦은 퇴근 후 어린이집에서 눈칫밥을 먹고 있던 딸아이를 데려왔다. 언제나 어린이집에 가장 먼저 등원하여 가장 늦은 시간까지 머물러 있는 아이가 우리 딸아이였다. 그날도 외부 기온은 몹시 차가웠다. 하루의 피곤을 풀어 볼 여유도 없이 붉은 고무대야에 미지근한 물을 붓고, 좁은 부엌에서 네 살배기 아이를 씻겨 방으로 먼저 들어가게 했다. 아이가 벗어놓은 옷을 주물러 빠는 동안 시간이 제법 지체되었다. 옷을 널고 방안에 들어가 보니 딸아이가 오들오들 떨고 있었다. 한쪽에 차곡차곡 개켜놓은 수건들 중에 제 맘에 드는 색깔을 고르느라 그랬는지 수건들이 온통 방바닥에 흩어져 있었다. 가뜩이나 피곤한데 또 일거리를 만들었구나 싶어 딸아이의 엉덩이를 몇 대 때렸다. 아이는 서럽게 울었다. 엄마가 힘들까 봐 저 스스로 수건을 찾아 닦으려고 했는데 쌓아놓은 수건이 와르르 쏟아졌다는 것이다. 그 추운 겨울에 아이가 얼마나 추웠을지, 젖은 몸을 닦아주고 새 옷을 입혀준 다음에 다른 일을 했어도 좋았을 것을...

 

그날 딸아이를 부둥켜안고 눈이 퉁퉁 붓도록 함께 울다가 잠이 들었었다.

타국에 있는 딸아이는 애써 밝은 웃음소리를 내었지만, 왠지 모르게 그 웃음은 가운데가 텅 비어 있었다. 자세히 귀 기울이니 흐느끼는 것 같기도 했다. 총알이 빗발치듯 날아드는 전쟁터, 어느 삭막한 벌판에 어린 딸아이를 버리고 나만 살겠다고 멀리 도망쳐 온 것 같았다.

 

갈마도서관에 두고 온 것은 두꺼운 책 몇 권, 얇은 방석 하나, 가벼운 슬리퍼 두 짝만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치열하게 살았던 과거의 시간들, 단 한 순간도 놓을 수 없었던 삶의 열정과 쓰라린 상처조차 그곳에 고스란히 놓고 왔다. 누구나 할 것 없이 인생에서 부여받은 역할에 충실하다 보면 어느새 ‘나’의 형상은 흐릿해지고 만다. 갈마도서관이 어떻게 변했는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는 그곳에 가서 내가 놓고 온 것들을 가져와야겠다고 마음을 먹는 일은 관계에 휩쓸려 잃어버렸던 나를 찾는 시간, 삶의 길 어딘가에 두고 온 어느 날의 나에게 보내는 위로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너무 오래 방문하지 않아, 놓고 온 물건들을 도서관 측에서 모두 폐기해버렸을 수도 있다. 꼭 한번은 갈 것이라는 마음만 먹고 있을 뿐, 아직까지도 찾아오지 못한 것들이 그곳에 온전히 그대로 있으리라는 내 생각은 허황된 믿음일까.

 

꿈을 꾸면 먼 곳으로 기차를 타고 가서 어딘가를 서성이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눈발 날리는 신작로를 헤매고, 쓰레기 늘린 시장 바닥을 기웃대는 내 눈은 붉게 충혈되어 있다. 과거에 놓고 온 것을 거기서 찾으려고...

이 세상에 오기 전, 나는 저 세상 끝에다 어떤 것들을 놓고 왔는지도 모른다. 어쩌면 저 세상에 가서도 이 세상에 버리고 간 것들을 찾겠다고 다시 저잣거리를 헤매고 다닐는지도 모를 일이다.

 

profil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