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심한 책방 / 배혜숙
바다 저 너머에 있다는 이상향인 아틀란티스. 플라톤의 대화록에 나오는 전설상의 고대 국가다. 땅은 기름지고 문명이 고도로 발달한 낙원으로 현대를 사는 우리에게도 풍부한 상상력을 불러일으킨다. 그 전설의 왕국이 서점으로 태어난 곳이 있다. 바로 에게해의 석양을 바라보는 곳, 산토리니 섬의 북쪽 끝에 있는 '아틀란티스 북스'다.
여러 해 전이다. 크리스마스 선물로 책 한 권을 받았다. 내 꿈이 우리 동네 대양서점의 주인이었다는 것을 아는 어릴 적 친구가 보내 주었다. 저널리스트 시미즈 레이나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이었다. 근사한 사진과 함께 세계 각지의 아름다운 서점 스무 곳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그 책에 첫 번째로 소개된 곳이 아틀란티스 북스였다.
아쉽게도 우리나라 서점은 없었다. 언젠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 한국 편》을 써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그래서 두터운 이 책을 끼고 도시의 골목 서점을 찾아 다녔다. 산속에 섬처럼 홀로 있는 책방에 조심스럽게 발을 들여놓기도 했다. 10년을 함께 독서 모임을 해 온 간서치(책만 읽는 바보) 친구들과 헤일리 마을도 가고 서울의 공씨책방이며 삼례의 책 박물관과 호산방도 방문을 했다.
그렇게 서점을 찾아다니는 동안, 아틀란티스 북스를 향한 열망은 더 뜨거워졌다. 드디어 태양이 눈부신 4월, 그리스를 향했다. 그리고 산토리니 섬의 '아틀란티스 북스'에 발을 들여놓았다. 오랜 항해 끝에 보물섬을 발견한 기분이었다. 좁은 계단을 내려가 만난 동굴 서점은 실내는 북적이는 바깥세상과는 달리 고요하고 묵직했다. 비릿한 책의 냄새에 취해 한동안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곳은 기념품 가게와 노천카페가 즐비하고 세계 여러 나라에서 온 관광객이 넘쳐나는 산토리니를 단단히 받쳐주고 있는 중심이었다.
발뒤꿈치를 들고 목을 쑥 빼 올리자 둥근 천장에 소용돌이치듯 적혀있는 수많은 이름이 보였다. 서점 한쪽에 놓여 있는 간이침대를 잠자리 삼아 이 '기적의 서점'을 지켜낸 주인공들이다. 그들은 책을 읽고 집필을 하며 눈이 시리게 푸른 바다를 향유하면서 아틀란티스 북스를 지켜내고 있다. 즉 작가지망생들의 학교인 셈이다.
구석에 비스듬히 놓여있는 침대에 잠시 앉아 보았다. 이십 대라면 나 또한 서너 달 머물면서 서점의 주인인 양 살고 싶었다. 퀴퀴한 책 냄새를 맡으며 잠이 들고 쪽빛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옥상에 올라가 책을 읽는 일상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그랬다면 서점 주인이 되는 꿈은 완성편이 되었을 것이다.
어둠에 익숙해지자 '철학의 탑'이라고 쓰인 가늘고 높다란 책장이 눈에 들어왔다. 철학서적을 모아 놓았다. 그리고 예술서적이며 아동 서적코너도 손 글씨로 분류되어 있었다. 어쩌면 플라톤이 말한 아틀란티스는 그렇게 철학과 문학, 예술과 여행서적, 그리고 뛰어난 고전으로 집을 짓고 길을 내어 신에게 바치고 싶은 이상적인 도시를 만드는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스를 다녀온 후, 그 철학의 탑이 그리워지면서 바다 건너 종달리의 '소심한 책방'을 기웃댄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으면 어쩌나, 전시한 책을 외면하면 어떻게 하지? 이런 소심한 마음으로 만든 책방이다. 플라톤은 글로 이상향을 그려냈다면 소심한 책방 주인 미라 씨는 그것을 실천해서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종달리는 이름그대로 제주의 동쪽 끝에 있는 마을이다. 올레 1코스가 지나는 곳이고 마지막 21코스가 끝나는 지점이기도 하다. 제주의 동부 전체를 둘러봐도 찾기 힘든 서점이 생각지도 않게 손바닥만 한 동네에 자리하고 있다. 민박집의 커다란 창으로 성산 일출봉이 뿌옇게 비구름에 가리면 책방의 삐걱대는 문을 소심하게 밀고 들어간다. 그런 날은 올레꾼들도 없고 게스트하우스 손님들도 꿈쩍 않는지 서점은 고요하다. 한쪽에 놓인 소파를 차지하고 차도 마시고 책도 읽는다. 대부분 독립출판사가 발행한 책들이고 일반 서점에서는 좀체 볼 수 없는 귀한 책이다.
내가 제주에 머무는 동안은 고사리 장마철이었다. 비가 쏟아지는 날은 걷기가 힘들었다. 오일장을 찾아가는 일이며 맛집 탐방도 멈추고 그렇게 소심한 책방에 한나절을 박혀 있곤 했다. 여행을 좋아하는 두 여자가 운영하는 '소심한 책방'은 내가 꼭 만들고 싶어 하던 그런 서점이었다. 옆의 지붕 낮은 집을 얻어 '덜 소심한 바느질방'이라도 열어 이웃하며 무시로 드나들고 싶었다. 그곳은 바다에 가라앉은 이상향이 아니라 내 몸을 기꺼이 담을 수 있는 현실의 공간이었으니까.
옛날, 우리 동네 입구에 자리한 대양서점은 이름 그대로 큰 바다였다. 책이 귀하던 그 시절, 내가 알고 싶은 것, 가고 싶은 곳, 그리고 쓰고 싶은 이야기가 서점 안에 파도처럼 출렁이고 있었다. 나는 책의 바다에 빠지고 싶어 안달을 했다. 대양서점의 주인의 되지 못한 탓에 세상의 모든 서점이 아틀란티스가 되었다. 오늘도 제주의 동쪽을 향해 돛을 올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