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죽꽃처럼 / 김잠복

때죽꽃처럼 / 김잠복

 

태백산 줄기를 돌고 돌아 당도한 산골 마을에는 산 그림자가 길게 몸을 늘이고 있었다. 꼬박 다섯 시간을 고른 숨을 쉬며 불평 없이 우리 부부를 싣고 달린 승용차는 기계라기 보다 충직한 애마였다.

숙소를 정하고 봇짐을 풀었다. 우애 좋은 자매처럼 산이 산을 감싸 안고 있는 산중에서 모처럼 푸근한 달과 별을 청한 잠자리는 피로를 말끔히 씻어 주었다.

아직은 안개가 눈을 비비는 첫새벽이다. 창을 밀고 들어오는 풋풋한 오월의 산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켰다. 동네를 걸어 나와 작은 공굴 다리를 건너자 '김삿갓 생가'를 가리키는 안내 간판이 잠에서 덜 깬 얼굴로 우리를 맞이한다. 신새벽 숲은 물속처럼 고요하다. 푸른 기운을 머금은 풀숲 아래로 아침 산책 중이던 날다람쥐가 내 눈과 마주치자 머루알 같은 눈망울을 굴리며 급하게 몸을 숨긴다. 언뜻 스친 눈빛이 맑고 선한 빛이 겁이 많은 친구일 것이 틀림없었다.

남편의 팔짱을 꼭 껴안았다. 말수가 적은 남편은 오래간만의 내 제의가 싫지 않은지 팔을 빼지 않는다. 이렇게 팔짱을 끼고 호젓하게 걸어본 지가 얼마 만이던가. 오랜만에 맛보는 감미로운 시간이다.

오래전 방랑 시인 김삿갓은 어떤 기분으로 이 길을 걸어갔을까 이 주막 저 주막에서 얻어 마신 공술에 취했거나, 낮에 만난 주모를 생각하며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시 한 수를 읊었을까 풍진세상이 하 서러워 사모곡을 흘리며 새똥 같은 눈물을 손등으로 스윽 훔치고 목이 메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김삿갓(병연)의 조부는 홍경래의 난으로 탄핵을 당했다. 그런 사실을 몰랐던 김삿갓은 백일장에서 조부를 비난하는 글을 써 장원급제를 했으니 이를 어쩌랴. 나중에 이를 알게 된 병연은 자신을 용서할 수 없다면서 스스로 부와 명예, 직위와 신분 따위는 미련 없이 백지로 접어버렸다. 하늘 보기가 부끄럽다 하여 삿갓을 쓴 채 구름 따라 바람 따라 몸을 맡기고 방랑 길을 자청했단다.

내게도 삶의 끈을 놓을 만치 힘든 방랑의 시간이 있었다. 어쩌면 그 증세는 아직 진행형인지도 모른다. 다 큰 딸아이를 가슴에 묻은 어미가 맨정신으로 버티기란 가혹한 고문이었다. 스무 여덟 해를 행복의 꽃 이파리만 줍게 해 주었던 아이가 일순간에 하늘의 별이 되었는데 내 존재가 무슨 의미였으랴. 곡기를 거부하고 몸이 시들어져가는 것만이 유일한 구원이었다. 삶의 끈을 놓겠다는 일념으로 존재의 허망함에 포악을 떨었던 시간, 지구 끝까지 달려가 절대자의 멱살을 잡고 이유를 따지겠노라고 치를 떨다가 끝내 제풀에 지쳐갔었다. 가슴에 피가 흥건하도록 손톱으로 할퀴며 아이가 간 곳을 찾아 나서던 나는 치맛자락에 불이 붙은 무녀가 되어갔다. 허걱허걱 미친듯이 달려간 끝에는 '서울 공원 묘원'이란 침묵의 장소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어떤 사랑의 말도, 소원도 다 침묵으로만 통했다.

세상과 빗장을 걸고 어둡고 습한 무인도만을 원했다. 산사의 작은 암자를 찾아가는 날은 출가를 마음먹었다. 한갓진 해변에서는 바닷물 깊숙한 밑바닥까지 침잠해 부레가 터진 물고기가 되어 삭아 없어지기를 빌고 또 빌었다. 다시 어느 길모퉁이에 멈추어 서면 맥없이 뒹구는 마른 낙엽으로 돌아가 사람들의 발에 바스락 밟혀없어지기를 바랐다. 건조한 영혼은 그대로를 자동차 뒷바퀴의 뿌연 먼지가 되어 영원히 허공으로 사라지기를 빌었다. 하지만, 신은 내게 그럴 자유조차 허락하지 않았다. 목숨이란 모진 거였다.

여명은 말간 빛을 길섶부터 깔았다. 새들은 이 가지 저 가지를 흔들어 숲을 깨우기에 분주하다. 골짜기를 타고 내리는 개울물 소리가 바지런히 하루를 여는데, 어디선가 인간의 소리가 나지막이 들려왔다.

저만치 산 위쪽에서 가족으로 보이는 부부와 다 큰 처녀 아이가 다정하게 걸어 내려온다. 이른 시간에 산책을 다녀오는 모양이다. 서로 어깨를 맞추며 다정하게 걸어오는 그들에게 자꾸만 눈이 꽂힌다. 몸집이 있고 감색 상의가 잘 어울리는 중년 남자와 남색 체크무늬 셔츠가 예쁜 풀잎 같은 여자아이는 긴 생머리를 플플 날리며 연방 함박웃음을 짓는다. 마치 훔쳐보는 내 눈을 의식이라도 하는 것처럼.

나는 꼼짝없이 그들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처녀는 부부 사이에서 행복을 건네는 징검다리이자 보석이었다. 행여나 그들이 눈치를 챌까 봐 나는 몸을 나무 뒤로 숨겨가며 엿보기로 한순간도 화면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정말 부러웠다.

웃을 때마다 드러나는 하얀 치아와 통통하게 살이 오른 볼이 내 딸아이와 흡사했다. 발그래한 입술에다 선연한 흰자위와 선명하고도 까만 저 눈동자까지도. 긴 목덜미는 우윳빛이어서 기름기 자르르한 처녀의 자태까지 절대 낯설지 않다. 새처럼 맑은 목소리 롤 조잘대는 것이며 아담한 체구에 통통한 몸매....

가족은 내 쪽을 향해 눈인사로 스쳐 지나가 저만치 멀어져 갔다. 한 번씩 발걸음을 멈추는가 싶다가 이내 가던 길로 갔다. 산모퉁이를 돌아 화면 밖으로 사라질 때까지 그곳만을 지켰다.

내게도 저런 딸이 있었지. 하지만, 어쩌다 불행하게도 남의 처녀를 훔쳐보며 부러움의 침을 흘려야 하는 신세가 되었던가.

"때죽꽃이다."

난데없이 남편이 목청을 높였다. 내 속내를 헤아리어 딴청을 부리는 걸까. 그래서 정신을 다른 데로 돌리려 하는 고의였을까. 잠시 고개를 흔들어 앞을 지켰다. 길가가 온통 하얀 때죽꽃 천지다. 초여름에 난데없이 서설을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고개를 뒤로 젖히자 별 모양의 때죽꽃이 수도 없이 내려다보고 있다. 금방이라도 가는 바람에 '톡톡' '별똥별로 한꺼번에 쏟아내릴지도 몰랐다. 눈앞에 살아있는 별꽃, 하늘에 뜬 별만 별이 아니었다.

초여름 날 때죽나무에 내려앉은 앙증맞은 꽃별이다. 행여나 길 위로 내려앉은 별이 다칠까 봐 까치발을 했다. 하얀 별 무리를 두 손으로 모으는데 손등 위로 꽃잎 하나가 떨어졌다. '때쭉꽃, 넌 어찌 이리도 가볍게 몸을 떨구는가.' 지켜보는 가슴이 아렸다. 눈물이 콧등을 타고 흘려내렸다. 그래, 갑작스레 떨어지는 것이 어찌 때죽꽃 뿐이랴....

삶은 한바탕 도깨비놀음이다. 지난하게 수공예 작업으로 한 땀 두 땀 수를 놓다가도 신의 실수로 먹물 한 방울 흘리는 찰나에 퍼즐은 허사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니던가. 한창 무지개 비눗방울로 곱게 부풀어 오른 물 풍선이 바람결에 흔적 없이 사라지는 한 장난이 될 수가 있듯이 말이다.

어쭙잖은 바람, 외가지를 스치는 가는 바람에도 그대로 몸을 통째로 내려놓는 때죽꽃처럼 우리네 죽고 사는 일이 그러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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