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끽’에 관하여 / 이주옥

 

 

 

오늘도 주차장 모퉁이엔 삼삼오오 대오를 이룬 사람들이 빙 둘러서 있다. 등에 가방을 멘 채 홀로 열중하는 사람도 있고 대체적으로 남녀노소 구분이 없다. 얼핏 보기엔 제법 큰일을 도모하면서 연대하는 분위기다. 보슬비가 내리는 날에도 눈송이가 폴폴 날리는 날에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이른 아침, 아직 떨치지 못한 잠이 달린 몽롱함과 그 행위를 즐기는 듯 게슴츠레한 눈꺼풀이 합쳐져 다소 기이한 형상이다. 하지만 몰입도는 최고다. 본래 아는 사람들인지, 그 자리를 빌미로 안면을 텄는지 모르지만 같은 장소에서 같은 행위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들은 이미 결속했고 진한 동지애도 움텄으리라. 곁에서 연기만 마셔도 해롭다는 항간의 인식에 적당히 눈치 보다가 하나둘 모여 당위성을 이룬 곳. 모여드는 사람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그곳은 ‘그래도 된다’며 허용되고 공인됐을 테다.

깊숙이 빨아들였다가 몽글몽글한 연기를 뱉어낸다. 설사 제각각 다른 사연의 고통이나 슬픔을 빨아들였을지라도 이쯤에서 해소되고 트인다면 굳이 말릴 일도 아니지 싶다. 곱상한 얼굴에 미소년처럼 여릿한 직장 동료도 하루에 서너 차례 말없이 밖으로 나갔다 들어온다. 어느 날 출근길에 그곳에 서 있는 것을 목격하기도 한다. 그가 사무실로 돌아오는 순간은 얼핏 미소년을 벗은 남성이다. 일과 시작 전, 책상 위에 놓인 찻잔 속으로 그들이 내뿜는 연기가 길을 잃었는지 창틈으로 들어와 소리 없이 섞인다. 원치 않는 첨가물이지만 그들이 껴안고 누린 순간을 과감히 뭉갤 수 없어 조금 견뎌본다.

소문에 100억 이상을 투자했다는 그곳은 고급스럽고 웅장하다. 도심 외곽에 자리했고 휴일 늦은 오후인데도 위아래 층엔 사람들로 북적거린다. 테이블엔 각양각색의 취향이나 맛을 담은 컵이 놓여있다. 누군가는 손에 든 채 창밖을 바라보며 자못 고즈넉함에 빠졌다. 어느 어르신은 “나 죽으면 다 필요 없고 묘지 앞에 이것 한잔 놓아주면 족하다”고 하니 다분히 요물인가. 햇수로 3년째 지속되는 코로나19는 대부분의 자영업자들에게 절망을 안겼지만 이곳만은 점점 더 성황이다. 빵이나 샐러드 등을 곁들이면 한나절 내내 있기에도 부족치 않으니 돈과 시간만 있다면 더할 나위 없다. 1일 1 카페를 추구하는 마니아가 모바일을 통해 내 보이는 광경은 더없이 화려하고 유혹적이다.

혁신적으로 발전하며 다양하게 출시되는 모바일 게임. 부모와 아이들 간 살벌한 싸움판이 되고 단절이 되고 때때로 스스로 목숨을 떨어뜨리는 극단의 도구가 되기도 한다. 시간을 훔쳐가고 금전적 손실을 주며 정신적 피폐도 불러온다. 난무하는 불법 사이트를 통해 성적 호기심을 충족시키고 불온한 열망을 키우기도 한다. 빠져든다는 것은 때론 이렇게 처절한 후유증을 남기는 것일까.

몸에 좋지 않다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가 다시 내뱉는 일, 켜켜이 쟁여두지 않고 날려 보내는 것은 어쩌면 초월일 터, 사는 중에 파고드는 아픔이나 고통도 시간이라는 통로를 통해 연기처럼 날아간다는 사실은 애초 끽연에서 얻은 진실일까. 간간히 가슴이 뛰기도 하고 불면의 후유증을 겪을지라도 요것의 쓴맛 정도는 알아야 사랑도, 인생도 존재감이 있다는 설득은 ‘끽’에 대한 쉬우면서도 진정성 있는 해석일지 모른다.

사는 중에 온전히 취하고 빠지는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살면서 어디에 건 빠지지 않으려고 애썼다. 특히 사람에게 빠지지 않는 것이 나를 지키는 계율이라고까지 여겼다. 하지만 어느 사이 사랑이라는 감정의 수렁 속으로 빠져들면 섣부른 다짐이나 외면은 무력하고 대책 없었다. 사랑의 허울을 쓴 맹렬함이 운집한 소굴은 연기가 자욱했고 뜨거웠다. 혼미함과 질척임이 뒤섞인 시간은 짧았을지라도 빠져나오는 길은 멀고 험했다. 하지만 오롯이 나를 만나는 일이었으니 마냥 춥거나 초라하지만은 않았던가. 그러나 빠져나오니 알겠더라. 사랑 또한 한낱 ‘끽’이었다는 것을.

끽喫. 열망과 몰입과 중독, 만족이라는 단어와 연결된다. 약간 날카로우면서도 아슬아슬하지만 명쾌하기도 하다. 주관적이면서 일방적이고 직진이다. 반면 유익함과 무익함 사이에서 말도 많고 탈도 많다. 수위와 정도에 따라 부작용을 부르지만 오롯이 마음이 가고 그저 좋다. 하지만 수시로 경계에서 유익과 해악의 한계를 시험하기도 한다. 무엇엔가 빠져 들지 않으면 결코 ‘알았다’ 거나 ‘했다’고 할 수 없는 구도적인 해석. 우리가 한번쯤 ‘끽’에 들어설 명분일까. 중국 당나라 선승 종심 선사는 '끽다거喫茶去'라는 유명한 화두를 남겼다. 그가 남긴 “차 한 잔 드시게나.”에 담긴 뜻은 어쩌면 끽이 품은 최상의 참선이고 덕목이리라.

백년 이상을 살아야 할지 모른다는 것은 삶의 유효성이 지닌 엄중한 경고다. 길어봤자 한 백년이라는 관용구는 이제 단순하고 가볍지 않다. 어쩌면 긴 수명은 도처에 도사리며 유혹하는 ‘끽’의 대상과 치열한 싸움일 터. 여기저기서 들리는 끽끽거리는 소음은 우리를 얼마나 힘들게 할 텐가.

‘끽’에 빠져 허우적대고 비틀거릴지라도 놓치지 말아야 할 경고장. <지나치게 깊이 빠지는 것은 나의 본질을 놓치고 잃을 수 있습니다. 적당함을 선택해주시기 바랍니다.>

<좋은수필 2022년 3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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