퓨전수필을 말하다
아방가르드적 글쓰기 / 윤재천
* 고정관념, 수사적 기법으로
수필은 시의 서정적인 면모에 소설의 서사성, 희곡의 연출기법까지 동원해 자유롭고 유연하게 구사할 수 있는 - 융통성이 요구되는 문학이다.
문학작품은 사실의 전모를 세세히 밝혀 규명하는 일은 중요하지 않다. 한 개인으로서는 그것이 의미 있는 일일지 몰라도 작품상으로는 제재(題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고정된 사실만 언급하는 작가는 독자를 물리게 하여 본연의 위치에서 밀려나게 된다.
다양한 제재를 발굴해 그들에게 골고루 날개를 달아주어 하늘 높이 날게 하려면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느낀 것과 생각한 것에 머물지 말고 어느 정도의 가공과정을 거쳐 새로운 것으로 태어나는 것이 순서가 될 때, 수필은 무엇이든 담을 수 있는 포용의 용기(容器)가 될 수 있다.
한 편이 사람들의 고정된 관념과 인식을 바꾸어놓는 것처럼 (‘방자전’을 보면 춘향이와 이도령 사이의 방자를 넣는 기법, 고전도 뒤엎을 수 있다는 점)지금은 수필이 그 역할을 해야 한다. 그것이 수필이 가야 할 진로이고 현대인을 본래의 위치로 귀환케 하는 길이며, 수필이 살아남을 수 있는 선택의 길이다.
* 골방수필
머물러 있는 것은 발전할 수 없다.
의식 속에 있는 교과서적 수필만으로는 독자의 공감을 얻어낼 수 없다. 화려한 감성을 받쳐주는 냉철한 지성이 있어야 하며, 명확한 주관을 뒷받침하려면 공정하고 객관적 공감이 배면에 깔렸어야 한다.
예전, 한옥 방은 크지 않았다. 한 평 남짓한 골방이고 누추하고 비좁았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양반가의 종택도 제사를 모시기 위한 공간이나 손님접대를 위한 살상을 제외하고는 한결같이 비좁은 골방이다.
수필은 마음의 움직임을 언어로 바꾸어야 한다.
수필은, ‘술이부작(述而不作)’ - 적기만 하고 짓지는 않는 사실적 기록이 아니다. 본 일을 그래도 옮겨 적는 르포기사가 아니라 같은 것을 봐도 자신만의 심안(心眼)으로 보고 마음의 움직임을 진솔하게 따라가는 글이다.
누마루에 걸터앉아 그 집의 생성연대를 가늠하기보다 그곳에서 살았던 사람들의 숨결을 귀담아들어야 한다.
독자를 의식하지 않고 쓰는 글은 사념으로 흐를 위험이 있다. 프로는 글의 반향을 의식하고 있어야 책임감 있는 주장을 펼칠 수 있다. 내 의견을 확실하게 내놓고 비판을 두려워하지 않는 올곧음이 있어야 한다.
마당에 기화요초(琪花瑤草)를 심는 뜻은 혼자 두고 즐기는 것이 아니라, 그 마당으로 들어오는 사람들과 기쁨을 함께하자는 배려다.
문을 활짝 열어젖힐 때 골방은 온 세상을 품어 안는 베이스캠프가 된다.
* 다(多)문화시대의 장르수필
현대인은 누구나 정신적 공허감에 시달린다. 그 공허감을 치유하기 위해 향유하고 있는 것이 종교와 예술이다. 종교와 예술마저 상업적 논리를 높이게 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받게 된다. 다문화시대에 다문학의 포용성을 확립해 나갈 수 있는 선도적 역할을 할 때, 장르 문학은 활짝 꽃을 피울 수가 있다.
* 마당수필
다루지 못할 소재가 없고 건드리지 못할 주제가 없다. 자기 목소리를 확실하게 낼 수 있을 때까지 몰두하며 시도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는 아방가르드(혁신적) 정신만이 가장 진솔한 내면을 보여줄 수 있다. 작가에겐 시대를 앞서가는 혜안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작은 것에서도 감동을 얻고 공감대를 확장시킬 수 있다면, 그 글은 성공한 작품이다. 오랜 숙성과정을 거쳐 우려내고 걸러낸 맛이야말로,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깊은 향미를 풍기게 한다.
마당놀이(廣場劇)는 연출자와 출연자, 관객의 구분 없이 흥겹게 하나가 되는 화합의 마당이다. 우리 수필도 안방에서 뛰쳐나와 한마당 ‘얼쑤~하고 어깨를 겯고 신명나게 춤사위 판을 벌여야 한다. 수필도 열린 마당이 있어야 너나없이 어깨춤이 절로 나올 수 있다.
* 뮤지컬수필
예술가는 금기를 깨고 어떤 시도든 할 수 있어야 한다.
옛날 명화(名畵)를 요즘 다시 보게 되면 그때의 감동이 반감되는 것처럼, 글도 시대에 따라 패턴이 다르다. 모두가 뛰는 시대에 혼자서만 외로이 꼿꼿한 자세를 고집하는 것은 시대착오적 발상이다.
작가는 시대를 선도할 책무가 있고 예지 지력을 갖춰야 한다.
수필도 발전하려면 풀어야 한다. 홀대받지 않으려면 과감하게 내가 먼저 풀고 열린 마음으로 껴안을 줄 알아야 한다.
한복도 변화과정을 거쳐 개량되고 양복이나 넥타이도 유행이 달라지고 패턴이 바뀐다. 치마길이도 시대에 따라 짧아지고 길어지는 것처럼. 세상 모든 것은 긴밀한 유관관계를 지니고 있다.
수필문장도 고루한 옛 문장만을 고집할 것이 아니라, 새로운 세대와 감각에 맞는 문장과 문체를 계발하고 실험정신으로 도전해야 한다.
접붙인 감이 더 달고, 퓨전 음식이 더 구미를 당긴다. 풍부한 내용과 풍성한 상상력의 분출이 교묘하고 조직적인 글 솜씨로 녹아날 때 감칠맛 나는 한 편의 수필이 탄생한다.
* 상상력으로 진실을 말하는 힘
수필을 자신의 경험을 고백하는 글로 알고 있다. 이런 인식이 수필의 참모습이라면 수필은 생활문에 불과할 뿐, 문학의 범주 속에 포함되지 못한다.
처음은 어떤 경우이든 중요하다. 방향이 제대로 잡히면, 그 이후부터는 진로가 흐트러지지 않게 조정만 잘하면 가속도가 붙어 소기의 목적을 무난히 달성할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 새롭게 시도되는 아방가르드
‘아방가르드’는 프랑스어로 ‘첨병(尖兵)’-선발대 정치권에서도 사용되고 있다. ‘전위’라는 말로 해석되며 시대보다 앞서가는 문화예술을 뜻하기도 한다.
* 수필에 금기란 없다
수필은 정서적 체험의 결과로 획득된 것이어야 한다. 비록 일상적인 제재를 글감으로 했어도 작가의 신선한 안목과 예리한 통찰력, 독자의 마음을 끄는 흡인력이 전제되지 않았다면 수필이 아닌 ‘잡문’으로 보아야 한다.
표현이 파격적이고 과감할 필요가 있다.
강렬하며, 진솔하고 당당해야 함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수필은 그 특성상 지적인 냉철함을 전제로 한 사고와 관찰의 문학으로 발전할 수 있는 소양을 갖춰야 한다. 이를 유머와 위트로 윤색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그러려고 소설적 면도 과감히 수용하고 형식에서도 변화를 시도해야만 한다.
냉철한 지성에 곁들인 정감 어린 인간적 향기-유머와 위트는 삶의 피곤함을 잊게 하고, 더욱 진취적인 의욕을 솟구치게 하는 데 절대적 힘을 발휘한다.
보수와 진보가 균형을 유지해야만 발전을 이룰 수 있다.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지향적인 주제의 모색, 과감한 장애요소의 타파, 분명한 자기 목소리를 내면서 개인적 편견에 머물지 않는 정신이 반영된 작품만이 생명력 있는 수필로 존재적 가치를 인정받을 수 있다.
나(感性)와 남(知性)과의 만남. 확고한 자기 영역을 구축하고 자기 분야에서 최고가 된다는 열정과 몰입하는 ‘끼’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 수필의 문제점
수필은 언어예술이다. 수필의 제재는 다양하고 광범위하다.
정서적 체험의 결과로 획득한 것이어야 한다. 작가의 신선한 안목과 예리한 통찰력, 우리의 이야기로 승화시킬 수 있다.
수필은 개성적 성격이 강한 문학 장르다.
수필은 이제 환골탈태의 과감한 변신이 필요하고, 정서적이고 강렬해야 하며 진솔하고 당당해야 한다.
수필은 마음의 움직임을 스케치하는 거울이다.
이미지로서의 수필이 발전할 수 있는 토대는 중요하다.
수필발전을 모색하려면 나름의 빛깔과 향기, 고유의 체온을 만들어야 한다.
직설적인 서술보다는 유머와 위트, 의표를 찌르는 촌철살인의 정제된 언어감각이 중요하다.
어느 예술이든지 시대의 흐름을 외면할 수는 없다.
독자가 없는 문학은 외로운 퍼포먼스에 지나지 않는다. 시대를 향한 도전의식이 있을 때 스파크 현상을 일으켜 독자의 의식세계를 세척시킬 수 있다.
접목수필, 퓨전수필, 메타수필, 마당수필 -수필의 다원성 ‘더불어 함께하는 수필’이 되어야 한다.
논리를 배제한 수필은 감정 덩어리의 토로에 불과하다.
수필가는 시야와 지경을 넓혀 세상의 흐름을 읽을 줄 알아야 한다.
젊은 독자를 외면할 수 없다.
하루가 다르게 변모하는 현실에 대처하려고, 자기만의 개성과 감성, 지성을 훈련해야 한다.
농익은 연륜으로 인간의 향취와 풍부한 위트가 넘치는 글은 시대를 앞서가는 선지자의 면모를 갖추어야 한다.
수필에 금기란 있을 수 없다.
* 수필의 문학성
새로운 기법으로 미적 감동이 충만한 글, 새로운 ‘나’를 발견하여 삶에 대한 기존의 인식을 변화시킬 수 있는 글로 사람들의 고정된 사고를 변화시킬 수 있다면, 그 글은 종교 이상의 효과와 혁명 이상의 파급력으로 독자를 아름다운 존재로 만들어 놓을 수 있다.
* 수필의 수사적 디자인
디자인은 또 하나의 창조다.
‘유행’은 무시할 수 없는 정서 중의 하나다. 일종의 흐름이라고 할 수 있다.
웬만한 것은 벗어던지고 당당한 모습으로 남 앞에 선다.
기교나 엄격한 형식의 추종은 더는 독자를 감동시킬 수 없다.
작자는 단순히 있었던 일을 기록해 후세에 전하는 사관이 아니기에 시대의 정신과 정서, 유행까지 선도하는 역량과 확고한 소신을 갖추어야 한다.
먼저 디자인해야 할 대상은 자기 자신이다. 자르고 오려내고 필요없는 부위를 잘라내며 조화롭게 다듬는 노력이 없으면 새로운 창조는 불가는 하기 때문이다.
* 수필적 다다이즘
문학은 결핍에서 나온다. 허기긴 마음을 채우려는 욕구가 창조 에너지를 만들어낸다.
하루에 한 페이지씩이라도 꾸준히 원고지를 메우는 훈련을 해야 한다.
꾸미지 않은 듯한 자연스러움은 부단하게 꾸미는 연습 후에 나오는 것이다.
글도 습작기를 지나면 자신만의 향취를 자연스레 낼 수 있다.
등단의 과정을 거치고 개인집을 한두 권 내고 나면, 자신의 글에 대해 철학이 생긴다.
자기만의 세계를 분명하게 정해놓지 않은 글쓰기는 목적지도 모르고 달리기만 하는 자동차와 같다.
나아갈 방향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는 글에는 넘보지 못할 진솔한 힘이 있다.
비슷비슷한 소재와 주제, 그만그만한 글의 모음은 규격대로 심어진 가로수처럼 개성이 없다.
글도 자신만의 독특한 개성이 깃든 브랜드를 개발해야 한다.
현대는 디자인의 시대다.
음식도 맛보기 전에 모양이 좋아야 구미가 당기듯, 문장도 시각효과를 무시할 수 없다.
그들이 주장한 ‘다다’는 아무것도 없다는 뜻으로 기존의 모든 것을 부정하고 파괴하는 것.
수필에서도 이제는 혁신적인 ‘다다’의 정신이 필요할 때다. ‘수필적 다다이즘’은 전통을 수용하면서 상상의 기폭을 증강하는 것이다.
전통가옥이 휴가철 한가한 며칠 동안은 유유자적으로 멋스러워 보인다. 전통가옥의 좋은 점을 살리고 현대인의 의식구조에 맞게 적절한 접목을 시도
전문가는 내 것을 소중하게 여기며 다른 것과도 소통할 수 있는 여유를 지녀야 한다.
* 실험수필
수필가는 먼저 경험한 바를 그대로 기록하는 글이라는 통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회상문 정도에 그치고 만다.
* 의식의 변화
카페문화의 구축과 성장의 토대를 마련하는 일
마주앉아 차 한 잔으로 목을 축이며 정담을 나누면서 자신의 견해를 피력해 동의를 구하는 모습은 아름답다. ‘노천(露天)문화’ 또는 ‘마당문화’ 무겁고 거친 주제보다는 삶을 테마로 한 대화가 이어지고, 비난보다는 찬사가 울려 퍼지며, 박수소리가 꽃처럼 피어나는 문화적 분위기 조성-그 얼마나 살맛 나는 세상의 모습인가.
‘수필마당의 현장’ ‘수필거리 풍경’
지금은 수필의 시대다. 수필의 시대가 되어야만 한다.
선동이 아닌 공감이 뼈대를 이루는 현실의 구축만이 갈등을 치유할 수 있다.
* 정답이 없는 시대
작가에게 중요한 것은 관점이다.
더욱 높이 날려고 사람들은 자기 눈으로 사방을 두리번거려야 하기 때문이다.
* 정체(停滯)에서 접맥(接脈)으로
새롭기[日新又日新]위해선 자기 연마를 게을리하지 말아야 한다. 그 대안이 접맥의 길로 접어들어 맥을 연결하여 조화를 이루어내지 않으면, 어떤 결실도 이루어낼 수가 없다.
* 좋은 수필
수필은 인간학이다.
인간 내면의 심적 나상을 자신만의 감성으로 그려내는 한 폭의 수채화다. 한 편의 수필에는 자신의 철학과 사유, 현재와 과거의 행적, 미래를 예시하기 위해 독자와의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
수필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다듬는 글이다.
함축과 묘사를 통해 자신의 생각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적절한 예시를 들어 독자와의 거리를 좁히는 것이다. 수필은 홀로서기가 아니라, 함께 나누는 것이다.
작가적 소명감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나’를 통한 ‘우리’의 고찰이고, 과거를 비춘 미래의 통로이다.
사회를 어둡게 하는 소식보다 숨겨진 미담이 많다는 것을 수용할 수 있는 따뜻한 시선이 작품 속에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한다.
작가는 넓고 고르게 알아야 한다. 많은 것을 알아야 적절하게 글을 조립할 수 있다. 자칫 잣대를 잘못 대어 위에서 내려다보는 글이 되면 자기과시로 흐르게 되고, 지나치게 겸손하면 자기비하로 여겨진다. 작가와 독자가 어깨를 맞대고 함께 어울려 춤을 추는 흥겨운 춤사위처럼, 수필은 같은 눈높이에서 내다보는 또 다른 세상 읽기라고 할 수 있다.
차별성 있는 소재로 글감을 다루고, 남과 다른 목소리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상상의 나래를 펼쳐 행복한 비전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작가의 상상력에 의해 생산되는 창의적 문학 장르이기 때문이다.
단락의 문학이다.
중요한 것은 문장이다. 작가는 거칠지 않고, 가볍지 않으며, 한쪽으로 치우치거나 튀지 않는 문장을 만들려고 끊임없이 훈련해야 한다.
간결하면서도 힘 있는 주장, 맛깔 나지만 난삽하지 않은 언어의 선택, 물 흐르듯 자연스런 문맥의 흐름을 통해 다 읽고 나서도 손에서 놓고 싶지 않은 여운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오래 두어도 변하지 않는 가치는 ‘진실’이라는 보석이다, 자기만의 빛깔과 향취를 품은 작품을 창작하기 위한 고뇌는 수필작가의 소명이고 시대를 밝히는 소임이다.
좋은 글은 평이하게 읽히는 글이다.
현학적인 수사와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관념들을 거르지 않은 채 쏟아놓는 글은, 밤에 쓴 연애편지처럼 조악하고 애상으로 흐르게 된다.
뜻이 애매하지 않아야 하며, 일관된 주장으로 촌철살인의 명쾌함을 담고 있어야 한다.
항상 가슴 속에 맑은 물줄기가 흐를 수 있도록 심신을 갈고 닦는 훈련을 해야 한다.
세계적 피아니스트 백건우도 하루 6시간 이상 피아노 앞에서 연습한다. 작가는 작은 책상과 노트를 마련해 하루에 한 장씩이라도 글을 쓰며 자신을 연마하지 않으면, 좋은 글은 머릿속에서만 맴돌 뿐 창작의 기쁨으로 소화되지 않는다.
수필은 비유와 유추의 문학이다.
함축의 묘미가 있어야 하기에, 줄일 수 있을 때까지 줄여내야 한다. 오랜 시간 고아낸 곰국이 진한 국물을 우려내듯, 함축은 자르기가 이라 전체를 졸여내는 과정이다.
화려한 수사는 오히려 글의 품격을 떨어뜨린다. 꼭 거기에 맞는 묘사를 해주어야 뜻이 정확하게 전달된다.
형용사와 부사가 넘치는 글은 자칫하면 꾸미는 것처럼 허세로 보일 수 있다.
수필의 길이가 짧아지고 있다.
급하게 돌아가는 세태의 자연스런 현상이다. 길이가 짧아진다는 것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내용의 함축을 포함한다.
짧은 글 안에는 더 많은 은유와 상징을 통한 진한 메시지가 담겨 있어야 한다.
모두가 짧게 입는다고 미니스커트를 입을 것인지, 자신의 실루엣을 가장 잘 표현해주는 긴 치마를 고집할 것인지는 개성의 문제다.
수필은 길이의 문제가 아니라 생각의 너비가 관건이 된다.
좋은 글을 쓰려면 좋은 글을 읽어야 한다.
고전은 공부하고 신간은 섭렵해야 한다. 고전을 통해 숨은 힘을 기르고 신간에서 새로운 힌트를 얻어내 자기 서으로 만들어야 한다.
육화되고 체화된 다양한 지식과 지혜는 작자의 심성을 이루는 근간이 된다. 두루 섭렵하는 동안 자연스럽게 격조 높은 글에 대한 안목이 생기고, 저속한 글이 구별된다.
양서는 권장 받는 것이 아니다.
많이 읽어서 스스로 좋은 글을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수필의 얼굴은 다양다기하다.
뾰족한 송곳으로 뭉퉁한 자물쇠를 열 수 없고 남의 방 열쇠로 내 방문을 열 수 없다. 모든 문에 통용되는 마스터키 같은 글의 왕도는 없다.
자기 주견이 있는 사람일수록 남의 주장을 인정할 줄 안다. 그것이 그 사람의 교양이고 인격이다.
변화하는 것은 발전이다.
* 편견에서 벗어나야
예술적 공정이 개입되지 않은 글은 수필로 보지 않아야 한다는 극단적인 의견제시이다. 단순한 회고담이나 자화자찬에 지나지 않는 수다와 넋두리는 신파조 서술에 불과해 식상할 수밖에 없다.
* 퓨전수필
21세기는 퓨전수필 시대다.
대응하지 않으면 작가로서는 문제점이 아닐 수 없다. 혼이 없는 작가에 불과하다.
수필도 다양성을 강조해야 한다.
수필이 문학으로 인정받지 못하는 것은 글을 쓰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감성적이고 서정적 글만 고집하다 보니 개인적인 기록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수필은 새로운 지평을 열어야 한다.
웰빙시대에 맞는 작품을 써야 한다. 퓨전은 넓게 ‘만남’을 의미한다. 다른 장르와의 만남을 의미한다.
수필 속에 시적 요소, 희곡적 요소, 소설적 요소를 접목해 새로운 생명력을 심어나가야 한다.
수필에는 금기와 정석이 없다.
자기 특성에 맞는 수필 -브랜드가 있는 글이 되어야 한다.
기존의 것과 새로운 것을 접목시킴으로써 창조적으로 구성하는 것이 수필가의 몫이다.
고차원 속에서도 자연스러움이 배어 나와야 하고, 엇박자까지도 조율하며 독자에게 무언가를 전할 수 있어야 하며,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차원 높은 메시지를 제공해야 한다.
* 한국수필, 어제와 오늘
글이 다만 기록되어 있는 그 ‘무엇’의 의미에만 그친다면, 그 무엇으로도 변화하는 힘을 보유하고 있지 않은, ‘주검’과 다르지 않다.
적나라한 감정표출의 경우에서 시인이나 소설가, 극작가는 창작품이라는 사실에서 용인받고 있는데, 수필가는 여지없이 실제 사실로 인지되어 돌팔매를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작가를 위축시켜 겉도는 글, ‘작가는 감추고 드러내는 허상’ 정도의 글밖에 출산하지 못하는 경우가 되고 만다. 이런 것이 수필의 한계이고, 수필을 쓰는 사람들의 어려움이다.
수필의 성향이 권위적이고 폐쇄적으로 변해 많은 독자를 잃게 된다. 첫 번째는 자기세계에 대한 지나친 집착이고, 또 하나는 새로운 세계로의 진입에 대한 두려움을 갖는 작가가 많았다.
수필은 모든 색의 환상적 조화를 이룬 결과물이어야 한다. 어느 한 면에만 지나치게 치중되거나, 어느 색깔 중에서 작가와 코드가 맞는 하나만 지속적으로 고집해 변화를 보이지 않으면 작품으로서의 가치가 그만큼 반감하게 된다.
자기만의 틀에 감금되어 변화를 무시하거나 적절히 대응하지 못하면 도태될 수밖에 없다.,
수필에도 이젠 세계화가 필요하다.
10원짜리 동전과 같은 작품의 주인이 되지 않으려면 남다른 노력이 뒤따라야 한다. 이제까지의 작품이 보여주었던 것 중 버려야 할 것은 과감히 빼내고 혁신적으로 조율하며 발전시켜나간다면 우리가 기대하고 소망하는 수필을 쓸 수 있다.
* 해체와 융합
문단뿐만 아니다.
요즘은 모든 것이 해체되어 가는 세상이다.
여백은 아무것도 없는 ‘무’의 상태가 아니다. 여백이 있음으로써 채워진 것보다 몇 배 더 아름다워야 그 진가를 살릴 수 있다.
여백은 채워진 부분보다 더 많은 메시지를 담고 있고, 그것을 전해줄 수 있어야 하며, 이것은 궁극적으로 수필이 갖추어야 할 본령이 되어야만 한다.
무조건 돌진하는 것만이 지휘 전체가 아니고, 때론 물러서서 고정된 사고에 머물러 있지 않아야 참다운 전략과 전술을 구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 황희의 미소
작품비평에서도 ‘비평’임을 내세워 상대의 의욕을 위축시키는 것도 문제가 있고, 이에 대립각을 세우고 대항하는 것도 자신의 자존심을 지키는 것은 아니다. 우리 삶에서는 진정한 배려가 동반되지 않으면 상처를 남길 수밖에 없다.
글은 언어라는 모래를 모아 탑을 쌓는 일과 다르지 않다. 따라서 지나가는 말처럼 던진 한마디에도 탑은 무녀 내릴 수 있다. 회초리를 들고 질책을 가하는 것만이 교육 전부는 아니기 때문이다.
* 구름까페
나에겐 오랜 꿈이 있다.
여행 중에 어느 서방의 골목길에서 본 적이 있거나, 추억어린 영화나 책 속에서 언뜻 스치고 지나간 것 같은 카페를 하나 갖는 일이다.
그곳에는 구름을 좇는 몽상가들이 모여들어도 좋고, 구름을 따라 떠도는 역마살 낀 사람들이 잠시 머물다 떠나도 좋다. 구름 낀 가슴으로 찾아들어 차 한 잔으로 마음을 씻고, 먹구름뿐인 현실에서 잠시 비켜 앉아 머리를 식혀도 좋다.
‘구름카페’는 상상 속에서 늘 나에게 따뜻한 풍경으로 다가오곤 한다.
나는 인간의 짙은 향기에 취하고 싶다.
해만 뜨면 서둘러 달려와 책장을 뒤적이고, 사람을 만나는 조그만 연구실이 있는 곳은 서초동 꽃마을이다.
지금은 문화와 진리의 요람, 예술과 학문의 메카다. ‘예술의 전당’과 ‘국악연구원’ ,‘국립중앙도서관’과 ‘학술원’,‘예술원’이 이곳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꽃과 문화는 생존이 해결되고 난 후에 생활의 질적 향상을 위한 요소이고 보면 서초동과 문화적 여건은 필연인 것도 같다.
만약 내가 한 묶음의 장미꽃을 상품으로 수여하는 상을 만들 수 있다면 시상식은 ‘구름카페’가 제격일 것이다.
그 장소가 마련되면 한 시대를 함께 지냈다는 사실만으로 영원히 떠나보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을 초대하여 향기 짙은 차를 마시며 비 내리는 날엔 비를, 눈 내리는 날엔 눈에 마음을 씻으며 함께 보내고 싶다.
나는 꿈으로 산다. 그리움으로 산다. 가능성으로 산다. 오늘도 나는 ‘구름카페’를 그리는 것 같은 미숙한 습성으로, 문학의 길과 생활 속의 레일을 걸어가고 있다.
* 바람의 정체
삶은 어느 일면만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집착하게 되면 내려놓지 못하는 무게로 말미암아 허를 가져올 수도 있다.
생의 희로애락이 집착의 다른 표현인 만큼 수용의 주체인 ‘나’를 무시하게 되면 ‘달관’의 경지를 터득하여 스스로 묶어놓은 구속에서 어느 정도 자유스러워질 수 있다.
나는 이제 그 경지에 이르고 싶다.
그 누구의 구속도 없이 묵묵히 삶을 꾸려나가는 바람이 되고 싶다.
약속되지 않은 친구가 찾아오더라도, 톱밥을 훌훌 털며 함께 산기를 걷는 생활을 꿈꾸고 싶다.
어쩌다가 비방하는 말을 듣고도 화를 내거나 가슴앓이를 하지 않는 그 누구와도 어울려 화합할 수 있는 훈풍이 되고 싶다.
* 어느 로맨티시스트의 고백
지금은 한없이 가볍다. 50여 년 동안 5,6백 편 수필에 온갖 사유와 비판, 갈채와 질시, 미움과 사랑까지도 모두 실어 보낸 이제, 그 가벼움은 나를 참으로 자유롭게 한다.
각인각색의 명제 속에서, 문학적 충일과 고백이라는 배설을 거듭하며, 예측할 수 없는 고통과 환희의 도정을 지나, 지금 이 자리에 서 있다.
문학은 한낱 과정일 뿐, 그 지향점이란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환상의 신기루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 청바지와 나
나는 청바지를 좋아한다.
다크 블루, 모노톤 블루, 아이스 불루…. 20여 년 동안 색의 농도에 따라, 바지의 모양에 따라 많이도 모았다.
특별한 모임에도 눈에 거슬리지만 않는다면 나는 청바지를 입는 것이 더 편하고 자신 있다.
요즘 들어 살아온 연륜이 낯설게 느껴진다. 때론 내 몸을 휘감은 나이테가 6,70을 헤아리게 되었다는 사실 앞에서 묘한 감정에 빠져들곤 한다.
나는 젊음의 한 끝을 놓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심부름하는 아이가 없는 썰렁한 방이지만 출퇴근 시간을 정해 놓고 방을 지키는 것은, 자신을 위해 마련한 규칙 중의 하나다.
청바지를 즐겨 입는 것도 그런 의도의 일환이다. 청바지를 내 고유의 멋으로부터 시작한 지도 20년이 넘는다.
요즘은 시간의 빠름을 절감한다.
강의 시간에 늦지 않으려고 마음을 졸이고, 잘 못하는 술이지만 분위기가 좋아 퇴근을 한 다음엔 하루 동안 쌓인 피로를 씻으려고 동료와 어울려 목로주점에서 잔을 기울이는 사이에 나의 ‘시간 열차’는 나를 여기까지 데려다 놓았다.
젊음이 투쟁에 의해 얻어진 노획물이 아니듯, 지금의 나이도 잘못의 대가로 받은 형량이 아니기 때문이다.
젊은 날의 내 모습은 무수한 끈으로 포박당한 채 살아온 시간이다.
청바지와 캐주얼을 즐겨 입게 된 것은 내 젊은 날에 대한 일종의 반란이거나, 보상심리에 기인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눈치 보는 일에서 벗어나 마음을 비우고 살고 싶다. 아무 데나 주저앉아 하늘의 별을 헤아리고, 흐르는 물줄기를 바라보며 힘껏 이름이라도 불러보려면 청바지가 제격이다.
넥타이를 매고 후줄근한 양복을 걸친 채 한강변을 거니는 초라한 형상보다 청바지에 남방을 받쳐입고 시선을 멀리 던지며 사색에 젖어 있는 모습이 더 여유롭다.
지나치게 신경 쓰는 것은 그것은 언제나 벗어 던지고 나면 인연이 끊기고 마는 것이다,
오늘도 나는 청바지차림으로 집을 나선다.
누구 앞에서도 어색하거나 부끄럽지 않다. 상대에게 결례를 범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늘도 ‘청바지가 잘 어울리는 남자’는(를 꿈꾸며) 내 길을 걸어가고 있다.
(젊은 노년으로)청바지처럼 질긴 - 구김을 두려워하지 않으며 살고 (싶)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