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메테우스와 바텐더 / 문윤정

 

 

야경은 아름다웠다. 검은 바다 위에 점점이 박혀 있는 불빛들. 물결을 따라 불빛들이 춤을 추는 듯했다. 점점이 박힌 불빛은 내 마음에도 하나씩 점을 찍는 것 같았다. 한국의 ‘나폴리’라는 통영의 야경은 사람의 마음을 홀릴 정도였다. 시간을 잊은 채 밤바람의 싸늘함도 잊은 채 야경을 감상하고 있었다.

그러자 일행 중 누군가가 이렇게 좋은 날 술이 없어서야 되겠나 하면서 술집으로 이끈다. 술집에 들어서자 시끄러운 음악소리가 귀청을 때린다. 노랑머리의 외국인들이 많아서인지 정말 나폴리에 온 것 같다. 바텐더 앞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조금 있으니 현란한 사이키 조명이 공간을 흔들더니, 곧 매직쇼가 시작되었다.

바텐더는 앞으로 뒤로 몸을 돌리면서 긴 컵 두 개를 공중으로 높이 던졌다가 받곤 했다. 그의 재바른 몸짓에 관객들은 환호를 내지른다. 매직쇼는 이십 여분 계속되었다. 마지막엔 목이 긴 호리병에 불을 붙이더니 그 불을 가지고 논다. 팔뚝에 불을 붙이는가 하면 온 몸으로 그 불을 통과하기도 한다. 불을 능숙하게 다루는 남자는 프로메테우스의 후예임에 틀림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간에게 불을 가져다 준 프로메테우스! 인간의 삶에 혁명을 가져 온 프로메테우스!

나에겐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가 있는가 하면 아이스킬로스의 프로메테우스가 있고, 까뮈의 프로메테우스가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미리 생각하는 자’라는 지혜자를 뜻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주신(主神) 제우스가 감추어 둔 불을 훔쳐 인간에게 내줌으로써 인간에게 맨 처음 문명을 가르쳤다. 프로메테우스가 준 선물인 불로 인해 인간은 다른 동물보다 월등한 존재가 되었다. 불을 도둑맞은 제우스는 복수를 결심하였다. 프로메테우스를 코카서스의 바위에 쇠사슬로 묶어놓고 날마다 낮에는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고, 밤이 되면 간은 다시 회복되어 영원한 고통을 겪게 되는 형벌을 내렸다.

그리스의 시인 아이스킬로스가 쓴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에서 프로메테우스는 이렇게 말한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는 인간을 보고 그들에게 생각하는 능력을 주었지. 나를 통해서 그들은 이해력을 얻은 거요. 벽돌이나 잘 자란 나무를 가지고 태양을 가릴 만한 집 한 채도 지을 줄 몰랐어. 인간들은 동굴 속에서 살고 있었지. 사계절을 가늠하는 별들이 떴다 졌다 하는 것을 찾아내는 것도 나한테 배웠고, 무엇보다도 으뜸가는 기술인 셈하기와 문자의 사용법 같은 것도 가르쳐 주었어. 모든 예술의 어머니인 상상력도 주었지. 짐승을 붙잡아 멍에를 걸고 인간 대신 땅을 갈게 해 힘든 일을 시키도록 한 것도 바로 나였어. 고삐 달린 말을 마차에 매달아 부자들의 사치심을 충족시킨 것도 나야. 뱃사람들이 타고 있는 저 날개 돋친 배를 발명해 낸 것도 바로 나였지. 인간들에게 이러한 모든 것을 가르쳐 주었지.”

쇠사슬로 결박당한 채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인간에게 가르쳐 준 것들을 열거하고 있다. 카뮈는 “프로메테우스는 인간들에게 불과 동시에 자유를, 기술과 동시에 예술을 줄만큼 충분히 그들을 사랑했던 바로 그 영웅이다.”고 했다. 카뮈는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을 사랑한 휴먼정신을 말하고 있다.

프로메테우스는 “나는 인간을 도왔고, 그 때문에 고통에 빠지고 말았어. 그러나 설마 이처럼 외딴 바위 위에 외로이 매달려 고문을 당하리라곤 미처 몰랐네.”라고 절규한다.

불을 던지고 만지고 내뿜는 바텐더의 매직쇼는 점점 더 강렬해진다. 내가 보기엔 너무 고통스럽게 보였다. ‘아! 저 불이 뜨겁지도 않은지, 먹고 산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저 남자는 뜨거운 불을 견디기 위해서 얼마나 자신을 단련했을까?’ 그런 생각들이 오고갔다. 시끄러운 음악에 묻혀 바텐더의 절규가 들리지 않는 것이리라.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의 절규와 바텐더의 절규는 같은 것일 수는 없지만, 고통 앞에 선 이는 누구나 다 프로메테우스의 절규가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현재의 이 고통을 슬퍼하노라. 앞으로 다가올 슬픔을 애통해하노라. 얼마나 가야 내 이 고통을 풀어주려는지 그것이 궁금하여 신음하노라. 그 어떤 고통도 내가 예기치 않았던 것은 없어. 참고 견디는 수밖에. 운명이 내게 보내 준 그것을 되도록 가볍게 견뎌 보아야지.”

프로메테우스는 운명은 피할 수 없는 것이라 여겨 고통을 그냥 견디어내겠다고 한다. 과연 우리에게 운명이란 그런 것일까?

태양은 빛나고 무시무시한 독수리가 다가와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의 간을 쪼고 있다. 헤르메스가 “불을 도둑질한 녀석, 신을 배반하고 인간에게 명예를 돌려 준 놈, 그 놈의 오만 때문에 이런 꼴이 되었다”고 조롱하자 프로메테우스는 “너 같은 노예 신세보다는 차라리 지금의 이 고통이 낫다”고 대꾸한다. 여기에서 또 한 번 프로메테우스의 결연한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제우스의 날개 돋친 독수리가 매일같이 내려와 프로메테우스의 몸을 갈기갈기 찢어 놓고 시커멓게 피로 물든 간 덩어리를 맛있다고 먹어댄다. 파괴당한 간은 밤이면 다시 돋아난다. 밤새 복원된 프로메테우스의 몸은 아침이면 새로운 육체로 탄생한다. 이런 고통이 끝날 줄 모르고 계속된다. 제우스의 통치가 끝나야만 그의 고통은 끝이 난다.

우리 인간을 대신해서 프로메테우스가 고통을 받고 있는 것이라 하지만 우리 개개인은 프로메테우스의 분신이다. 우리 인간들의 생활이란 것이 결박당한 프로메테우스처럼 반복의 연속이다. 어제는 세상으로부터 만신창이가 되어도 오늘은 새로 옷 갈아입고 어제의 고통을 잊고 또 다른 하루를 시작하는 것이 인간이다. 삶이 주는 고통을 거뜬히 이겨내는 인간은 프로메테우스의 또 다른 모습이다. 프로메테우스가 인간에게 생각하는 능력만을 준 것이 아니라 고통을 이겨내는 강한 의지력도 준 것이다.

바텐더의 매직쇼는 끝났다. 그의 얼굴은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그는 내일이면 또 다시 이 자리에서 불을 던지고 만지면서 존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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