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천득 선생님 하면 학교에서부터 그분의 글이 실린 책으로 배웠기 때문에, 수필 하면 선생님을 떠올립니다. 어떤 분들은 한국 수필의 모든 것은 다 피천득 선생님으로 통한다고 알고 있는 걸 봅니다. 나는 거기에 대해서 조금 다른 이론을 제기합니다. 절대 비판이나 비난이 아닙니다. 그러나 비판은 필요합니다. 우리나라의 수필이 발전되지 않은 이유는 비판이 없었고 참된 비평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피천득 선생님의 글은 아름답고 좋습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서정 수필의 정수(精髓)라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저는 지난번의 어느 행사에서 피선생님을 가리켜 한국 서정 수필의 아버지라고 얘기했습니다. 인정은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우리나라 수필이 절름발이 장르가 되어 버립니다.
어느 유명한 작가가 이런 얘기를 하는 것을 들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노벨문학상을 타기 위해서 김동리 씨, 서정주 선생님이 많은 운동을 했지만 안 되었습니다. 특히 미당(未堂) 선생님을 두고는 모든 한국 사람, 특히 문학을 하는 사람이라면 '그분과 같으면 노벨문학상을 타고도 남을 것이다'고 생각하는데, 외국에서는 안 된다고들 합니다." 우리 한국 정서에는 맞지만 서양 사람들의 정서에는 맞지 않는다는 얘기지요. 이건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입니다. 이제 안방에서 우리끼리만 이야기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지금은 모든 것이 개방되었습니다. 일전에 저는 나훈아의 콘서트를 텔레비전에서 언뜻 보았습니다. 옛날의 소리꾼으로 뽕짝으로는 최고의 가수인데, 전에 나훈아가 불렀을 때는 젊은 대학생들이 싫어했고 듣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똑같은 노래를 부르는데도 "야, 그것 참 우리한테도 맞는다"는 듯 맞장구를 치는 걸 보았습니다. 그 이유는 그 사람의 의상이 달라졌고 노래하는 모습이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옛날에는 혼자 몸만 움직이면서 노래했지만, 지금은 무대를 완전히 휘젓고 혼자 노래할 뿐만 아니라, 옆에서는 무희들이 춤을 춥니다. 또 유명한 연예인이 나와서 같이 노래를 합니다. 달라졌습니다. 여기서 달라진다고 하는 것은 변화를 말합니다.
수필은 다양성을 자양으로 하여 자란다
수필의 생명은 다양성입니다. 여러분들이 고등학교 수필을 배우실 때 형식이 없는 문학, 그러면서 나름대로 형식이 있다는 말을 들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형식이 없는 애매한 문학이 어디 있습니까. 애매하다는 말을 했기 때문에 바로 수필은 제자리를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조금 전에 말씀드렸던, 서정주 선생님이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하는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수필가 가운데서 피천득 선생님의 예를 또 하나 들어보겠습니다. 지금으로부터 25년 전 펜클럽 본부에서 외국 작가 한 분을 초대했습니다. 그분이 에세이 문학을 주제로 얘기하다가 한국의 에세이문학에서 가장 대표적인 분이 누구냐고 물었는데 모든 분이 피천득 선생님이었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그분의 작품을 한번 봤으면 좋겠다"고 해서 작품을 번역해서 드렸더니, 그 외국 작가가 하는 말이 "이것은 어린아이들이 읽는 글이다"고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만큼 서정적이고, 우리 국민의 정서에는 맞는데 서양 사람들한테는 통하지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당 선생님께는 죄송한 말씀이지만 그분은 도저히 노벨문학상은 못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우리의 국민 정서로는 능히 받을 수 있는데 서양 사람들한테는 그것이 안 통한다는 뜻입니다. 지금 세계는 비자 없이 왔다 갔다 할 수도 있을 정도로 문이 개방되었습니다.
물론 일본이나 미국은 아직도 우리나라 사람에 대해서 비자를 까다롭게 하지만 앞으로 5년 후면 미국비자도 없어질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시대가 바뀌고 있습니다. 그래서 피천득 선생님의 이론과는 전혀 반대적인 것을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선생님과 친한 사이입니다. 얼마 전 {월간문학}8월호에도 피천득 선생님과 대화한 것을 기고했습니다. 저는 그 글에서 선생님을 극찬했습니다. 그러면서도 그분의 이론에 대한 것은, 그것만으로는 안되고 전부가 아니다고 봅니다. 좋은 것이 많이 있는데, 좋은 것 가운데 하나지, 전부가 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전부가 되었기 때문에 지금 젊은 사람들은 수필을 읽지 않습니다. 나이 먹은 사람들의 잔소리 같은 이야기라고 생각합니다. 심지어는 이런 말까지 있습니다. "수필 독자보다도 수필가가 더 많더라." 이 얼마나 한심한 노릇입니까.
저는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은 과거보다도 현재를 더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봅니다. 저는 과거를 완전히 부정한다든지 그것을 파괴하는 것보다는 접목시켜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입니다. 과거는 과거대로 소중하다는 얘기입니다. 무조건 과거를 지금과는 다르니까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아무리 부모님이 우리한테 섭섭하고 잘못한다고 하더라도 부모는 부모 아닙니까. 소중한 부모를 우리가 부정할 수 없듯이 학문이라는 것은 과거, 현재, 미래가 어떻게 잘 조화가 되는가에 따라서 더 많은 변화와 발전을 기할수가 있는 것입니다. 저는 나훈아의 콘서트를 보면서 '야, 세상이 이렇게 달라졌구나.' 하고 깜짝 놀랐습니다. 같은 노래를 가지고도 저런 변화를 일으키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그 노래를 좋아하고 따르고, 젊은 사람들이나 대학생들까지도 나훈아의 노래가 좋더라고 합니다. 젊은 대학생들은 뽕짝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많이 움직이고 나이가 든 사람들은 좋아하지 않는 그런 노래를 좋아하고 있습니다. 화가를 예로 들면 자기가 그리는 그림 세계가 있습니다. 감을 그리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떤 여자 분은 보리만 그립니다. 또 어떤 분은 화투만 그리고 성냥개비나 호랑이만 그리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니 화가들도 이런데 수필가는 왜 자기의 목소리를 못 냅니까.
자기 목소리를 낼 때 글은 비로소 생명을
나는 내 이론을 얘기하면서도 같이 공부하는 사람들한테 이런 얘기를 합니다. 다른 분들의 얘기를 많이 듣고 책을 보면서 참고하라. 그리고 자기 목소리를 내라. 자기 목소리가 없으면 그것은 죽은 글이 되어 버린다. 남의 글을 가지고 남의 목소리나 남의 형식을 따를 것 같으면 아무리 잘한다고 하더라도 아류(亞流)에 지나지 않는다.
서양 사람들이 얘기하는 '에세이(essay)'라는 말의 원래 뜻은 도전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중에 책을 보신 분들은 에세이를 뭐라고 해석하는가 하면 시험이나 시도한다고 합니다. 도전해야만 새로운 것을 얻을 수가 있고 거기에서 변화된 모습을 찾을 수가 있는 겁니다. 수필 장르가 보수적이어서 나이가 든 수필을 쓰시는 분들은 자기가 이야기하는 것이 제일이라고 합니다. 나는 내 자신이 수필의 길을 40년이나 걸어오면서 나름대로 공부를 했고 아직도 공부하고 있습니다. 저는 수필가들한테 이런 말을 합니다. 좋은 글이 나오기 위해서는 공부를 하라고 합니다. 수필이라는 것은 사실을 기록하고 경험한 것이나 체험한 것을 사실대로만 적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천만의 말씀입니다. 그것은 옛날 얘기이고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수필은 도전이고 어떻게 형상화시키느냐에 따라서 문학성이 있는 글이 됩니다. 그렇지 않고 있는 사실을 그대로 붓 가는 대로 쓰는 것이 아니라 수필은 도전입니다. 그래서 저는 혁명을 일으키라는 얘기를 합니다. 너무 심한 표현인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달라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수필은 죽는다는 말까지 하고 있습니다.
21세기에 우리가 필요한 수필은 퓨전(fusion) 수필이고 메타 수필입니다. 이 메타(meta)라는 말은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 쓴 말입니다. 시를 쓸 때 메타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저는 수필에서도 메타라는 말을 씁니다. 메타수필은 필요합니다. 우리가 안주해서는 안 되며, 뭔가 벗어나야 되고 뛰어넘어야 합니다. 요즘 음식점을 가도 퓨전 음식이 있듯이 수필도 시 같은 수필을 쓰고, 소설 같은 수필, 희곡 같은 수필을 쓰라고 합니다.
이번 {세계문학} 가을호에서 김 민이라는 서른 너댓 되는 신진시인의 작품을 읽었습니다. 그는 저 유명한 김수영 시인의 조카 되는 사람인데, 그 사람의 등단 작품이 일행시입니다. 한 줄 시를 써가지고 등단이 되었습니다. 다섯 편을 실었는데 모두 다 한 줄 시입니다. 제일 긴 시가 20자이고 짧은 시가 8자입니다. 이렇게 시는 달라지고 있습니다. 김 민이라는 시인한테 질문을 했습니다. 이것을 남이 볼 때는 쉽게 쓴 것 같지 않은가, 했더니 자기는 이 시를 쓰기 위해서 몇 년 동안 자기의 모든 것을 여기에 쏟았다고 합니다. 바로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한 줄의 시라고 해서 나도 쓸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 시 속에는 뭐가 포함되어 있는가 하면 그 사람의 모든 심혼(心魂)이 들어가 있다는 얘기입니다. 2년 전 일본에서는 어느 소설가가 원고지 다섯 장 짜리 소설을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엽편소설이 아닌가 하는 사람이 있을지는 모르지만, 다른 또 하나의 성격의 소설을 써서 독자한테 그것을 읽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원고지 한 장 짜리 수필도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 대신 한 장 짜리 수필도 어떻게 썼느냐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것이 그 안에 들어가 있는가, 물론 피천득 선생님의 {인연}이라는 수필집을 보게 되면 다섯, 여섯 장 짜리 수필들이 많습니다. 구애를 받지 말고 여러분들 나름대로의 글을 써달라는 얘기입니다. 여러분들의 목소리를 내십시오. 여러분들의 목소리를 내지 않고 여러분들의 형식이 그 글 속에 들어가 있지 않을 때에는 죽은 글이 되어 버립니다.
퓨전 수필이 무엇인가 하면, 시적이고 소설적인 요소가 가미된 수필입니다. 수필은 허구가 아니라는 말이 있습니다만 저는 필요할 때는 뭐든지 다 수용하라고 강조합니다. 처음부터 수필을 쓸 때 허구를 생각하고 쓰면 안 됩니다. 그러나 필요할 때에는 쓰라는 겁니다. 가정을 가지고 계신 분들 가운데 맨 처음 결혼할 때에 우리 평생을 머리가 파뿌리가 될 때까지 거짓말하지 말고 열심히 살자고 남편과 약속했지만, 살다 보면 거짓말도 하게 됩니다. 수필가에게 중요한 것은 두 가지 특성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모든 것을 포용할 줄 아는 관대함과 부정적으로 보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으로 보면 글이 망가집니다. 부정일지라도 일단은 긍정을 한 다음 부정적인 글을 쓸 때 좋은 글이 되지만, 처음부터 부정이라는 것을 머리에 기억해서 글을 쓰다 보면 남한테 상처를 입히는 경우가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결혼해서 어느 경우에는, 부인한테 이 말을 그대로 하면 쫓겨날 텐데, 하고 생각될 때는 거짓말을 조금 해도 괜찮다는 얘기입니다.
모든 문학은 인간을 그리는 겁니다. 왜 옛날에 그랬다고 해서 끝까지 그것을 지키려고 고수할 필요는 없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자랄 때 부모님이 야단을 치시면 잘못한 것이 없는데도 꾸중을 듣습니다. 하지만 요즘의 아이들은 자기가 잘못을 하고도 부모가 꾸짖으면 덤벼듭니다. 우리는 잘못을 안하고 꾸중을 들으면서도 가만히 있었는데, 요즘 아이들은 잘못하고도 부모가 얘기하면 오히려 반발하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습니다. '독약도 약이다' 는 말이 있습니다. 병원에 극약이라는 것이 왜 있습니까. 필요할 때 병을 낫게 하기 위해서 그 극약을 비치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런 얘기를 하는 시대가 아닙니다. 그만큼 달라졌습니다. 문학평론가 이어령 씨도 한 달 전 어느 모임에서 "21세기는 수필의시대"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어떤 분은 한국에서 노벨문학상을 탄다고 하면 바로 에세이에서 나올 것이아닌가 하고 이야기하는 분도 있습니다. 어쨌든 21세기가 수필의 시대라고 얘기하는 것은 노시인들이나 소설가나 다른 장르의 사람들이 나이가 들어서 쓰는 것이 수필입니다. 그러니까 수필이 가장 어렵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에 쓰는 장르가 수필인데 그것도 벗어나자는 얘기를 하고 싶습니다. 10대에도 쓰라는 얘기입니다. 시인들이나 소설가들의 유명한 작품들은 전부가 10대에 나왔습니다. 그래서 수필가도 젊은 피를 수혈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수필을 같이 공부하는 분들한테 이런 얘기를 합니다. 가능하면 접속사나 부사는 쓰지 말고 필요없는 형용사도 쓰지 말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수식을 너무 많이 하지 말라는 얘기입니다. 어떤 분은 열두 장 정도밖에 되지 않는 작품 속에다 '그러나, 그래서, 그런데'를 너무 많이 씁니다. 시 같은 수필은 무엇인가 하면 가능하면 줄이고 설명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젊은 사람도 잔소리는 좋아하지 않습니다. 수필은 40대 문학, 어른의 문학, 4차원의 문학이라고 하는 말도 쓰지 말고 모든 사람들이 다 쓸 수 있는 문학으로 생각하자는 얘기입니다. 수필문학의 미분화를 언뜻 생각하면, 미사여구인데 아름답게만 꾸미려 드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닙니다. 아름답지만 그 아름다움이 거기에 어떤 진실함이 들어가야 합니다.
저는 수필을 쓸 때 맨 처음 말을 간단하게 쓰라고 얘기합니다. 독자한테 뭔가를 집중시켜라. 그 짤막한말 속에는 의미가 포함되어야 합니다. 시 같은 수필과 시가 있는 수필과는 또 다릅니다. 그러면 시가 있는 수필이란 무엇인가 하면, 내가 글을 쓰다가 어느 시인의 가을이라는 시가 너무 좋아서 가을이란 것을 다 설명하지 못하니까 그 시인의 시를 조금 인용을 했습니다. 내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그 시가 이 글을 뒷받침을 해줘서 더 아름답게 읽을 수가 있는 것입니다.
불란서 사람들은 식사를 할 때 꼭 와인을 마십니다. 그 사람들은 저녁 식사를 보통 두 시간 정도 합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식사 시간이 짧기 때문에 모든 것이 빨리빨리입니다. 그것은 어릴 때부터 식사문화에서 나온 것입니다. 대학에서 학교 학생들과 대화가 안 됩니다. 대화가 왜 안 되는가 하면, 저는 그 원인이 식사문화에서 왔다고 봅니다. 어릴 때부터 부모님이 같이 식사를 하면서 이야기를 많이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이 없습니다. 어른들과 밥을 먹을 때에는 말하면 안 되고 빨리 먹고 나가라고 합니다. 특히 손님 앞에서는 말을 하면 안된다고 합니다. 그런데 서양 사람들은 어린아이 할 것 없이 다 모여 두시간 동안 식사를 하면서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얘기하는 등 대화 훈련이 잘되어 있습니다. 우리 나라에서는 가르치는 사람이 일방적으로 가르치는데 서양에서는 특강도 대화를 합니다.
저는 우리 나라에서도 그런 특강이 이루어져야 한다고 봅니다. 왜 와인을 마시는가 하면 음식맛이 더 좋아집니다. 음식 맛이 좋으면 몸에 좋고 건강한 것입니다. 시가 있는 수필을 쓰자는 말은 내가 가지고 있는 상식으로는 잘 안 되니까 이 글 속에 어느 시인의 글을 조금만 인용을 하면 글이 좋아질 것이라는 생각으로 저는 글을 쓴다는 얘기입니다. 시 같은 수필과 시가 있는 수필과는 다릅니다. 시가 있는 수필이라는 것은 자기가 시를 쓸 수 있으면 자기의 시도 쓰고 그렇지 않을 때는 남의 시를 인용하는 것도 무방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요즘 보수적인 나이를 먹은 분들, 수필의 대가처럼 말씀하시는 분들을 보면 절대 용납을 하지 않습니다. 이미 세상은 많이 변했는데 꼭 한 길만 가면 되겠습니까. 여러 길이 있고 수필의 목소리가 다양하니까 그것을 수용하자는 것입니다. 따온다는 것은 인용하는 것입니다. 인용하는 것은 자기가 쓰는 것으로는 부족하기 때문에 보완하기 위해서 인용하는 것입니다. 인용의 생명은 바로 거기에 있는 것입니다.
옛날에는 논문 하면 딱딱하다는 선입견 속에 그 방면에 있는 사람들만 읽었습니다. 요즘의 논문은 수필 같은 논문을 씁니다. 이 말은 아주 쉬운 논문을 쓴다는 얘기입니다. 옛날에는 논문을 일부러 어렵게 썼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습니다. 시대가 바뀌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읽을 수 있는 논문이 되어야 한다는 얘기입니다. 문학은 언어를 수단으로 한다는 말은 언어가 없이는 일체의 문학 행위가 불가능하다는 말과 같습니다. 진정한 미문(美文)으로 채워진 글에서는 작가의 주관에 선명하게 작품 안에 나타나 있기에 나름의 길을 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대신 저는 접속사나 부사를 피하면서 점을 많이 찍습니다. 이 쉼표는 앞문장과 뒷문장을 확 바꿔 놓습니다. 이걸 찍고 안 찍고에 따라서 그 내용이 달라져 버립니다. 그래서 이 구두점 활용이라는 것이 참 중요한 것입니다. 여러분들이 만일 수필을 쓰신다고 할 때 가능하면 부사나 접속사는 피하시고 필요없는 수식은 하지 마십시오.
시는 상상력에 의해서 쓰는 것이니까 수필도 상상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시만 메타포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수필에서도 메타포가 있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은유가 있어야 하고, 설명을 다할 필요가없다는 얘기입니다. 내가 쓴 글을 보면 조금은 딱딱한 느낌을 주는 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니까 부드러운 글이 있으면 딱딱한 글도 있어야 된다는 얘기입니다. 우리나라 수필은 전부 나가 있는 수필입니다. 우리가 있는 수필도 쓰자는 말입니다.
다시 말하면 나라는 것은 서정적인 것, 우리라는 것은 사회적인 것이 아닙니까. 그러다 보니까 그것이 지성적인 수필을 얘기하는 것입니다. 시에 있어서 주관시가 아닌 객관시, 시에 있어서 주정시가 아닌 주지시를 얘기하는 겁니다.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글을 쓰다 보니까 철학적인 글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에 외국에서 세미나가 있을 때 문인협회를 따라 한 번 가봤습니다. '92년 소련이 무너지고 소련의 소속되어 있던 나라들이 열 다섯 나라인데 카자흐스탄의 알마아타에서 세미나가 있었습니다. 그때 알마타에 있는 작가도 왔었고 거기에 고려족 작가도 있어서 함께 했습니다. 우리 나라 여류 수필가들을 소개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에세이스트 하면 철학하는 사람들로 생각을 하더군요. 우리는 자기 집의 남편 자랑이나 아들 자랑하는 걸 쓰면 안 됩니다. 옛날에는 통했지만 지금은 그런 식으로 쓰면 안 됩니다. 모든 사람들이 다 그럴 수 있다고 하는 자랑은 괜찮지만, 자기를 나타내기 위해서는 가급적이면 안 쓰는 것이 좋습니다. 일반적이고 사회적인 글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자는 것입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에세이스트라고 했지만 요즘은 칼럼니스트라고 합니다. 우리 나라 신문에 나오는 오피니언, 시평, 칼럼 등이 수필에 속하는 것입니다. 어느 분은 수필이 아니라고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일전에 피천득 선생님을 만났는데 그 분의 수필 속에는 '수필은 구성이 필요치 않다' 는 대목이 나옵니다. 그래서 선생님께 물었습니다. "선생님, 지금도 그 생각에는 변함이 없으십니까?" 했더니, "옛날에는 아니었는데 지금은 수필에 구성이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그분이 요즘은 수필을 안 쓰시고 시를 쓰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시와 수필은 같다." 이 말은 이제는 수필도 생략할 것은 생략하고 필요없는 군더더기를 빼고 설명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과거의 문장과 현재의 문장은 다릅니다. 과거의 문장을 보면 영탄사를 많이 썼습니다. 제가 중학교 때 여학생에게 편지를 쓰면 직접 보내지 못하고 조카나 동생을 시켰습니다. 그러면 그 편지를 받는 순간 에바로 펼쳐보지도 못하고 뒷간에 가서 봤습니다. 지금 편지를 써서 자기의 마음을 나타내는 사람이 몇 사람이나 되겠습니까. 그때 편지를 보면 '오, 내 태양' 하면 받은 순간에 얼굴이 빨개져서 가슴이 두근두근 어찌할 바를 몰라 했습니다. 그 시절 사람들은 글 속에 느낌표나 물음표를 많이 찍었습니다. 지금도, 찍었다는 것이 틀렸다는 얘기는 아닙니다만 저는 절대 찍지 않습니다.
그러나 시대에 맞는 글을 쓰자는 말입니다. 그래서 내가 얘기하는 이론도 맞지 않으면 어쩔 수가 없다. 사람마다 이론이 다 달라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의 얼굴 표정도 다 다릅니다. 여러분들이 입고 오신 그 의상도 다 다릅니다. 똑같다는 것을 한데 묶어서 우리가 글을 써야 된다고 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사람은 끼가 있어야 됩니다. 내가 얘기하는 끼라는 것은 무엇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사랑에도 거기에 몰두를 하면 그 사랑하는 사람들의 역사를 만드는 것입니다.
예를 들면 로미오와 줄리엣이나 우리가 잘 아는 사르트르나 보봐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 사람들의 사랑이 이 문학사에 한 페이지를 장식하지 않았습니까. 재미있는 것은 사르트르는 키가 단구로 160도 안되고 사팔뜨기라고 했습니다. 볼품은 없어도 보봐르와 맨 처음 계약결혼을 한 다음 결국은 평생을 같이 살았지만 두 사람은 각기 다른 길을 걸었습니다. 사르트르는 외간 여자를 만났고 바람도 피웠습니다.
보봐르는 미국에 있는 청년과 편지를 주고 받았습니다. 어쨌든 두 사람의 사랑은 세계적인 사랑이라고 얘기를 했습니다. 역사를 바꾸어 놓은 것입니다. 문학만 그런 것이 아니라 얼마 전 텔레비전 뉴스를 보니까 일본의 어묵을 만드는 사람이 9대째라고 합니다. 1885년에 창업을 했는데 그 어묵으로써 세계를 제패한 것입니다. 그 자손들이 다 대학을 나온 사람들입니다. 그것이 오늘의 일본을 세계에서 가장 강한 나라를 만들었습니다. 우리 나라와 일본을 비교해 보면 우리 나라의 어느 마을에서 서울대학에 합격했다고 하면 온 동네가 떠들썩합니다. 그 소식을 듣고, 저 애의 아버지는 옛날에 뭘 하셨고, 할아버지는 친일파였었다고 수군거리면, 우리 나라의 영재들이 학교를 마친 다음 고향에 가지를 않고 다른 곳으로 갑니다. 반면에 일본은 그런 일이 있으면, 오히려 동네에서 장학금을 조금씩 주는 걸 받고 공부한 사람들이 마을에서 협조를 받았으니까 학교를 마친 다음 내 고향에 머리를 써야겠다고 봉사를 합니다. 우리는 떠나는데 그들은 들어갑니다. 가업전승이 잘 되어 있는 나라는 부한 나라입니다. 그러니까 일본은 가업전승이 철저하게 지켜지고 있는 나라입니다. 심지어는 콩나물, 두부도 현대화시켜서 만듭니다. 그래서 제일입니다.
분명한 비판 정신과 설득력을 기반으로
미문은 아름다운 글입니다. 미사여구로 채워진 글이 아니라고 했습니다. 이를 명확히 구분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춰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했습니다. 미사여구의 남발은 오히려 글을 천박하게 할 뿐 작가의 의도를 전달하는데 장애요인을 만드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미사여구도 적당히 하면 아름답지만 조금만 지나치면 미문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지나치면 좋은 것이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문학은 현실을 위해 식사를 할 때 포도주 한 잔을 마시면 음식 맛이 배가 되고 정신 건강에도 좋듯, 글도 마찬가지입니다.
또 하나 수필이 추구해야 할 것 중의 하나는 자연성의 구현입니다. 동물이 가장 아름다울 때는 자연 속에 있을 때입니다. 동물을 우리 속에 집어 넣고 키우면 동물의 가치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인간도 자연스러울 때 가장 편안하고 아름다운 것입니다. 모든 것은 제자리에 있을 때 가장 아름답다는 것은 질서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말입니다. 이로 해서 작가가 준비해야 할 것은 보다 객관적인 입장에서 사리를 밝혀가는 지혜로운 안목이다. 더 이상 감성에 의존해 글을 쓰려는 생각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맥빠진 신파조의 글에 감동하는 독자를 대상으로 하는 문학의 시대는 이미 사라졌습니다. 어느 의미에서 보면 문학은 이상주의의 문학을 낳을 수밖에 없다. 수필은 의도적으로 사회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에 설 필요가 있고,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보다 냉철한 비판을 스스로 가할 수 있어야 한다. 그 길만이 신의 문학으로 작가적 이상을 실현할 수 있다. 이는 보다 지성적인 작가로 태어나고 무장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성숙한 세계를 지닌 작품을 창작하기 위해서는 문학의 가능성이 보이는 소재를 골라 숙성 과정, 이것은 바로 여과를 시키는 것을 말합니다. 문학적인 표현으로는 형상화시키는 것입니다. 우리가 한강물을 여과를 시켰기 때문에 마실 수가 있는 것입니다. 술을 담글 때에도 숙성 과정을 거칩니다. 글을 여과시킨다는 것은 퇴고를 많이 하는 것을 말합니다. 톨스토이는 퇴고를 가장 많이 한 작가로 알려져 있습니다. 책을 만들 때 인쇄소에서 기계가 돌아가는 순간까지도 스톱을 시켜놓고 글을 고쳤다고 합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불란서의 유명한 비평가인 아나톨 프랑스는 자기가 쓴 글을 여덟 번을 고친 다음 발표를 했다고 합니다.
안톤 체홉도 자기가 쓴 글을 잡지사 기다가 원고를 받으러 오면 "빨리 가지고 가라. 더 있으면 그나마 글이 다 없어진다" 고 할 만큼 많이 고쳤다고 합니다. 고치는데 오히려 더 집어넣는 것보다도 빼는 것이 더 좋다는 말이 될 수 있는 겁니다. 그런데 어느 부분에서는 집어넣는 것이 더 많을 때도 있습니다. 내가 얘기하는 것은 특수한 것이 아니고 보편성 있는 얘기입니다. 감정 토로에 수준을 벗어날 수 없고 지속적으로 감동을 유발할 수 없는 글은 처음부터 지향되어야 한다. 보다 항구적이고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 글을 목표로 창작에 임해야 한다. 자기 기분에 휘말려들지 않고 항구적인 가치를 유지할 수 있도록 감정의 여과와 표현의 효과적 기술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자기 자신의 우월이나 답답함을 채로 거르듯정제하지 않고 그대로 나타내는 것은 무책임한 횡포라고 했습니다. 이러한 점이 고려된 글만이 진정한 수필의 미문이 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게 우리가 여과시키고 숙성 과정을 거쳐서 형상화시켜야만 그게 진짜 미문입니다. 그런데 미문을 미사여구(美辭麗句)와 혼돈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미사여구는 좋은 것이 아닙니다.
문: 수필을 간단하게 독자를 고려하면서 쓰신다고 하셨는데 저는 글을 쓸 때 줄이다 보면 한자를 많이 써야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선생님께서는 글을 쓰실 때 나름대로의 기준을 말씀해 주십시오.
답: 기준은 없습니다. {수필 이야기} 라는 책이 작년에 나왔습니다. 옛날에는 전부 한자로 썼는데 대학생이 수필을 못 읽는 겁니다. 그래서 한글로 썼습니다. 고등학교를 나온 우체국의 여자 직원들 몇 사람이 등기를 부칠 때 봉투의 글자를 몰라서 당황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앞으로 한자는 가급적이면 쓰지 않는 게 좋고, 만일 쓴다고 한다면 괄호를 여닫고 쓰는 것이 좋습니다. 내가 짧은 수필을 강조했다고 했는데 그건 아닙니다. 장편 에세이도 쓰시고 또 사전에 보면 수필의 해석을 열 다섯이나 열 여섯 장 안팎의 글이 수필이다고 이희승 씨의 국어 세상에도 나옵니다. 그런데 그런 제한을 두지 않고 자기가 쓰고 싶은 만큼 쓰면 된다는 얘기입니다.
일부러 페이지를 늘리다 보면 문장이 잘못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를 들면 어느 부분에서 끝나면 참 좋았는데 말을 자꾸 하다 보면 좋은 말도 거기에 묻혀서 나쁘게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에 저는 장수에 제한을 두지 말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1백 장 정도의 수필도 좋고, 완전히 소설처럼 한 권의 책이 될 수 있는 수필을 써도 좋다는 말입니다. 외국에서는 장편 에세이가 많이 나오고 있는데 우리도 그런 시대가 왔다고 봅니다.
문: 톨스토이와 같은 작가들이 왜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했는지 궁금합니다. 혹은 노벨문학상이 잘못 되었다는 것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답: 심사 기준에 의해서 달라질 수가 있습니다. 심사가 잘못 되었다고도 할 수 있고, 한림원에서 심사를할 때는 모여서 심사를 하는 한림원 위원들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들의 취향에 따라서 예를 들면, 시인들이 많았다고 한다면 시쪽으로, 소설가가 많았다고 하면 소설쪽으로 갈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때도 로비가 있었지 않았나 하고 생각합니다. 사르트르가 까뮈보다 선배인데 사르트르가 탈 줄 알았는데 까뮈가 먼저 타버렸습니다. 그 다음 사르트르한테 노벨문학상을 주었는데 받지를 않았습니다. 상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문제가 많습니다. 문제는 상 못지 않게, 문학이 지닌 깊이와 자기만이 빚어낼 수 있는언어의 아름다움이 소중하다고 봅니다. 우리 모두 남들이 흉내낼 수 없는 자기만의 세계를 찾아내어 가꾸시기 바라며, 제 말을 마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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