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 백석
눈이 많이 와서
산엣새가 벌로 나려 멕이고
눈구덩이에 토끼가 더러 빠지기도 하면
마을에는 그 무슨 반가운 것이 오는가보다
한가한 애동들은 어둡도록 꿩사냥을 하고
가난한 엄매는 밤중에 김치가재미로 가고
마을을 구수한 즐거움에 사서 은근하니 흥성흥성 들뜨게 하며
이것은 오는 것이다.
이것은 어느 양지귀 혹은 능달쪽 외따른 산 옆 은댕이 예데가리 밭에서
하룻밤 뽀오얀 흰김 속에 접시귀 소기름불이 뿌우현 부엌에
산멍에 같은 분틀을 타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녀름 속을 지나서 들쿠레한 구시월 갈바람 속을 지나서
대대로 나며 죽으며 죽으며 나며 하는 이 마을 사람들의 의젓한 마음을 지나서 텁텀한 꿈을 지나서
지붕에 마당에 우물 둔덩에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 어느 하룻밤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아베 앞에는 왕사발에 아들 앞에는
새끼사발에 그득히 사리워오는 것이다.
이것은 그 곰의 잔등에 업혀서 길여났다는 먼 옛적 큰 마니가
또 그 집등색이에 서서 재채기를 하면 산넘엣 마을까지 들렸다는
먼 옛적 큰아바지기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아, 이 반가운 것은 무엇인가
이 히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은 무엇인가
겨울밤 찡하니 익은 동치미국을 좋아하고 얼얼한 댕추가루를 좋아하고 싱싱한 산꿩의 고기를 좋아하고
그리고 담배 내음새 탄수 내음새 또 수육을 삶는 육수국 내음새
자욱한 더북한 삿방 쩔쩔 끊는 아르궅을 좋아하는 이것은 무엇인가
이 조용한 마을과 이 마을의 으젓한 사람들과 살틀하니 친한 것은 무엇인가
이 그지없이 고담(枯淡)하고 소박한 것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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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 및 시구 풀이>
* 멕이고 : 활발히 움직이고
* 그 무슨 반가운 것 : 국수
* 애동들은 : 어린아이들은
* 김치가재미 : 북쪽 지역의 김칫독 묻어두는 곳(김치 창고).
* 양지귀 : 양지바른 곳 모퉁이
* 능달 : 응달
* 은댕이 : 언저리. 가장자리
* 예대가리밭 : 산의 맨 꼭대기에 있는 오래된 비탈밭
* 산멍에 : 전설상의 커다란 뱀. '이무기'의 평안도 방언
* 분틀 : 국수 뽑아내는 틀
* 들쿠레한 : 달콤한
* 갈바람 : 가을 바람
* 텁텁한 : 흐릿한
* 둔덩 : 둔덕
* 사리워 : 국수 따위를 동그랗게 말아
* 큰마니 : '할머니'의 평안도 방언
* 집등색이 : 짚등석. 짚이나 칡덩쿨로 짜서 만든 자리
* 자채기 : 재채기
* 산넘엣 : 산넘어
* 이것은 그 곰의 ~ 오는 것같이 오는 것이다. : 설화적 분위기로 그려냄. 국수를 만들어 먹는 '오랜 전통'을 강조하고자 함.
* 희수무레하고 부드럽고 수수하고 슴슴한 것 : 국수의 맛 = 우리 민족성의 맛
* 희수무레하고 : 희끄무레하고
* 슴슴한 : 자극을 크게 느기지 않을 정도로 싱거운
* 댕추가루 : 고춧가루
* 탄수 : 식초
* 삿방 : 삿(갈대를 엮어서 만든 자리)을 깐 방
* 아르궅 : 아랫목
* 고담하고 : (글, 그림, 인품 따위가) 속되지 않고 아취가 있는(화려하지 않으나 고급스러운)
<해설>
구수한 향토적 정감이 물씬 풍겨 나오는 시이다. 눈이 많이 내린 겨울밤에 국수 만드는 일로 들떠 있는 마을 사람들의 정겨움과 서로 돕고 서로 어울리는 공동체적 삶이 따스하게 느껴진다. 특히 국수를 만드는 재료인 메밀이 익어가는 과정을 계절별로 드러낸 부분(실 같은 봄비 속을 타는 듯한 ~ 함박눈이 푹푹 쌓이는)도 독특하지만, 국수가 우리의 정서에 맞는 전통 음식임을 드러낸 부분(이것은 아득한 녯날 한가하고 즐겁든 세월로부터, 아베 앞에 그 어린 아들 앞에 ~ 사리워 오는 것이다)도 인상적이다. 이 시에서는 국수를 해 먹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가난하지만 소박하게 살아가는 우리 민중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백석의 시는 공동체적 삶에의 회귀, 향수와 같은 과거 지향이 주를 이룬다. 그가 평안도 사투리를 질박하게 쓰고, 말투 또한 생활어를 그대로 차용한 것도 이런 과거 지향 의식으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낡고 오래된 것들에의 그리움은 자연히 애련한 정서를 불러오고, 온전한 사람에의 복구를 염원하는 사회적 성격도 개입하게 된다.
백석의 시에는 백여 가지 음식물 이름이 등장하며, 그는 특히 음식물이라는 소재에 집착을 보인 시인이라고 할 수 있다. 백석의 시에서 음식물은 단순히 허기를 때우는 기능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특수한 시적 기능을 가지고 있다. 즉 그의 시에서 음식물은 민족과 민족성 그 자체를 의미한다. 백석이 전 국토를 유랑하면서 음식물에 그토록 집착한 이유는 바로 이런 데 있다. 국수를 먹으면서 어린 시절 국수와 얽힌 추억들을 통해 우리의 본래적인 삶을 상기하고 그것을 좋아하는 습성이 바로 우리의 민족성이라는 것을 발견하는 시이다. 음식이란 단순히 식욕을 채우는 기능만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민족마다 문화의 독특한 영역을 차지하면서 그 음식물을 먹는 사람들의 체질이나 성격을 결정짓기도 한다.
이 시에서 화자가 국수를 통해 어릴적 토끼 사냥, 꿩 사냥하는 추억, 겨울밤 쩡쩡 얼은 동치미 국물 마시던 추억을 되살려낼 수 있는 것은 음식물이 한 개인 내지 집안, 나아가서는 민족의 동질성을 결정짓기도 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이런 점에서 음식물은 경우에 따라 성스러운 것이 될 수도 있다. 이 시에서 화자가 국수를 먹으면서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반복하고 정의를 부여하지 못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화자는 이 시에서 객지를 유랑하다가 국수를 통해 자기 몸속에 흐르는 핏줄을 확인하고 현재의 삶과 상실된 과거의 민족적 삶을 대비시켜 역설적으로 식민지 삶을 환기시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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